지리산은 맑았다

2005/06/04 23:54

### 2000년 11월3~5일

 

11월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지리산은 따뜻했고, 햇살은 늘 내 머리 위를 따라다녔다.

목요일(2일) 저녁 밤차를 타고 진주로 내려갔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내가 예전 전노협에서 일을 시작하던 94년 가을에 혼자서 올라본 뒤로 처음이다. 여전히 길은 가팔랐고, 짊어진 65리터 짜리 배낭은 계속해서 내 뒤통수를 산 아래로만 끌어내린다.

게다가 3년전에 산 등산화마저 밑창이 떨어져나가 버렸다. 철퍼덕거리는 신발을 끈으로 조여 묶고 올라가는 천왕봉이라니... 남들보다 한두 시간은 더 걸려 올라섰다.

지리산 천왕봉!

360도로 뱅뱅 돌며 산자락과 구름낀 하늘이 보인다는 것은 그 어떤 비유도 모자라는 장관이다. 해가 그 중 한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더니만, 장터목에 도착하자 이미 사라졌다. 그래, 하늘에는 원래 저렇게 많은 별이 있는 거지. 별이 참 많고도 밝다.

랜턴을 켜고 세석산장까지 몰아가니 벌써 밤 8시. 새로 지은 뒤 처음 와보는 세석산장은 예전 만한 운치도 정도 없지만 내려다보이는 산들과 코앞에 닥쳐있는 구름들은 여전하다.

남들이 다 떠난 뒤, 떨어진 등산화를 고쳐보겠다며 본드를 바르고 수선을 떨다 아침 9시반이 넘어서야 벽소령을 향해 출발했다. 벽소령까지만 가면 지리산에 오기로 한 팀이 새 등산화를 갖다주기로 돼 있다. 그러나 웬걸, 선비샘도 채 가기 전에 신발은 다시 두동강이 났고,

난 그 신발을 신고 꾸역꾸역 지리산 자락을 밟았다. 벽소령에 도착했지만, 오기로 한 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기다릴 수만은 없어 다시 출발했는데, 형제봉에서 드디어 내 등산화를 들고 온 팀을 만난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세석에서 자기 전에 다 마셔버린 터라 목말랐던 소주도 한잔 얻어먹고, 새 등산화 끈을 조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젠 날아갈 수 있을까? 세석에서 뱀사골까지 20키로 거리인데, 능선에서 내려다보는 저 세상은... ‘바다’다. ‘구름바다’였다가, 또는 ‘산바다’였다가. 꿈을 꾸는 듯 하늘을 나는 듯 산을 타니 아무 생각이 없다.

연하천에 도착하니 날은 또 저물고,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또다시 랜턴을 꺼내 뱀사골산장까지 내달린다. 날이 저문 뒤 저 멀리 보이는 산장 불빛은 얼마나 반가운지. 뱀사골산장은 꽤 쌀쌀하다. 반갑게도 그곳은 술을 판다. 소주를 마신다. 몸을 덥혀 침낭 속으로 미끄러진다.

다음날 아침 반선으로 내려왔다. 뱀사골산장에서 반선으로 내려오는 길은 95년도에 반야봉에 가느라 올랐던 길이다. 8키로가 가까운 기나긴 길인데, 끼고 내려오는 계곡물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매표소를 2키로 정도 남긴 곳에서 막걸리를 판다. 굶주렸던 담배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니 볼은 붉어지고, 뒤돌아서 올려다본 지리산도 붉다. 단풍이다.

중산리에서 반선까지 40키로 남짓을 걸은 셈이다. 다음엔 뱀사골에서 반야봉을 오른 뒤 성삼재를 거쳐 덕유산으로 넘어가야지. 같이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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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4 23:54 2005/06/04 23:54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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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15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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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길... 언젠가는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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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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