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제가 관련된 두 개의 판결이 났습니다. 하나는 열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쁜 것입니다.
1. 열받는 첫번째 판결은 2008년 촛불집회 때 밤에 경찰에 밀려 도로로 나간 후 체포됐던 건인데, 야간 집회를 금지한 것이 헌법 불합치 결정 ( http://ko.wikipedia.org/wiki/야간_집회_금지_사건 )이 난 지 한참 지난 후였기에 걱정도 하지 않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터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심리가 재개되었고, 일반교통방해 및 자정 이후 시위로 벌금 30만원을 내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체포된 시각이 12시 반인가 그럴텐데, 실제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근처에 있다가 경찰한테 둘러싸여 집에도 못가고 한참이나 갇혀 있다가 체포된 것이지만, 갇힌 후의 채증 사진만 있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나오고 말았네요. 30분 일찍 잡히지 않은 죄(?)입니다. 아니면 당시 경찰이 미래를 내다보고 시간을 끌다 12시 넘은 것 확인하고 체포하기 시작했나봐요. 일반교통방해죄가 원래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들었지만 집회 참가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구요. 다행히 그때부터 무료로 변호를 맡아주고 있는 곳에서 항소까지 계속 도와주기로 해서 계속 싸워보렵니다.
2. 기쁜 두번째 판결은 제가 관리하고 있는 IT산업노조의 "일터Q&A" 게시판에 대한 모 업체의 가처분 신청이 기각된 것입니다.
이 게시판은 주로 IT개발자들이 면접 보기 전 업체에 대한 "진짜 정보"를 알고 싶을 때 질문을 올려 경험자의 답변을 듣는 곳입니다. 원래 OKJSP( http://okjsp.pe.kr )라는 개발자 커뮤니티에 있던 것인데, 다른 곳은 정보인지 광고인지 구분이 안가는 좋은 이야기만 있는 반면 이곳은 실제 경험자의 얘기가 있으므로 업체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곳이죠. 그래서 늘상 업체들로부터 글을 지우라는 요청과 협박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게 계속되다 보니 OKJSP에서 더 이상 운영하기 힘들어했고, IT노조에서 2007년에 부담을 나누기 위해 게시판을 넘겨 받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2014년 올해까지 8년째 제가 게시판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2007년 쯤이면.. 제가 표현의 자유, 감시와 검열 문제 등에 관심이 많을 때이고, 정보통신 관련 법령들이 한참 나빠지고 있을 때로 기억합니다(인터넷 실명제(2007), 정보통신망 감시,감청 가능성을 연 통신비밀보호법 개정(2008), 사이버 모욕죄(2008) 등). 명예훼손이 형사처벌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런 법령들이 나빠지는 것과 맞물려 여론 통제의 위험성을 크게 높였지요. 실제로 지금 명예훼손죄로 걸리는 것이 두려워 표현을 안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 금방 검색해도 나오는 "전략적 봉쇄"를 위한 소송 남발 사례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241343261&code=910100 )
일터Q&A게시판에서 민낯이 드러난 업체들도 저 "명예훼손죄"를 입에 달고 글을 빨리 지우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2007,8년까지만해도 글을 지워달라는 것을 "부탁"하고 "읍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글을 알아서 안지우고 관리자는 뭐함?" 이라고 질타(!)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떤 "상식의 기준"이란 것이 변해가고, 제가 점점 몰상식한 사람이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눈에 안띄는 곳에서 정보들은 이렇게 계속 필터링되고 있고, 인터넷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어느새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시대가 되어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싫어요" 한마디면 업체의 삭제 요청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제가 왜 지울 수 없는지를 길게 얘기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옛날 생각을 하니 서론이 길어지네요. 어쨌든 진보넷 활동가에게 여러 차례 가르침까지 받아가며 이 공익적 게시판 상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악덕 업체로 인한 피해자가 한 사람이라도 덜 나올 수 있게 지켜오고 있습니다( http://blog.jinbo.net/h2dj/786 에서 얘기한 적 있습니다). 글을 지우라는 업체는 처음엔 짧게 "지워주세요" 하다가 우리가 안 지워주면 나름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근거를 보내며 지워달라고 약간 자세를 낮춥니다. 그래도 우리가 수사기관이 아니니 당신들이 보내준 자료를 직접 확인할 수 없고, 사법기관이 아니니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며 법원의 판단을 받아와서 글을 지워야 한다면 몰라도 그냥은 절대 못 지운다고 선을 그어왔습니다. 이 정도만 얘기해도 많은 업체들은 그냥 잠잠해지곤 하는데, 간혹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비를 거는 곳이 있고, 결국 게시판의 자신들에 대한 글과 덧글을 삭제해달라는 가처분 신청까지 들어오기도 합니다. 올해에도 9월에 모 업체에서 자신들과 관련한 글과 덧글을 삭제하거나 영구 비공개조치하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가처분 신청은 처음이 아닌데, 법정에 가서 판사들이 말하는 분위기를 보고는 대부분 그냥 취소를 합니다. 그래서 이 게시판의 글들은 공익적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신념은 있었지만 법원의 판단을 직접 받은 적은 없어서 확신은 못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취소하지 마라, 판결 좀 받아보자"는 심정이었습니다. 2번을 출석하고 며칠 전에 판결문을 받았는데,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면서 이런 글은 명예훼손이라 볼 수 없다는, 8년간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 들어있었습니다 ^^
판결문 내용을 요약해보면
* 글을 삭제 혹은 영구 비공개조치하게 되면 채권자(그 업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바로 갖게 된다. 반면 채무자(IT노조)는 다투어볼 기회조차 없어지는 것이므로(익명의 게시자도 글 자체가 드러나 있어야 더 말을 할 수 있겠죠) 통상의 경우보다 높은 정도의 소명이 필요하다.
* 게시글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경험자에게 묻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허위사실을 포함한 것이 아니다.
* 명예훼손의 목적이 아니다(글은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고, 덧글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려는 공익적 목적이니까요) / 반복적으로 게시되고 있지 않다 / 기타 정황을 종합했을때 채권자의 명예권을 침해한다 보기 어렵다.
* 덧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지 않아 집행할 수 없다
* 설사 전체 덧글을 삭제하라는 요구라도, 게시글 자체가 삭제할 이유가 없으니 그것에 대해 단순히 의견을 표명하거나 (심지어) 채권자를 옹호하는 댓글이 혼재되어 있을 수 있는 만큼 모든 덧글을 다 지울만큼의 권리가 채권자에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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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이나 업체들과 안 좋은 말로 부대끼다보니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있었고, 1년전 새로 비영리단체를 만든 이래 평균 4~6시간만 자며 주말에도 일하는 "평범한 IT개발자"처럼 일하며 힘들어하던 차에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동안 게시판 관리 뿐 아니라 업체들에게 협박을 받고 시달리던 IT개발자들에게 부족하나마 상담을 해주며 맞서 싸우게 하는 일도 비공식적으로 해왔지만 마음 한켠에는 부담이 늘 있었는데 이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터Q&A 게시판도 지금까지는 약간은 수세적으로 게시판을 지키는데에만 주력했다면, 이제는 어떤 "게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널리 알리며 더 많은 IT노동자들이 이 곳을 통해 진짜 정보를 알고 또 다른 피해자가 되지 않게끔 홍보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집중된 정보통신 관련 법령들의 개악으로 2014년의 SNS 감청 사태까지 이어져왔는데, 인터넷 실명제는 비록 폐지되었지만 공직선거법 등에는 잔재가 남아 있고, 통신비밀보호법과 사이버 모욕죄 및 여러 여론 통제 목적으로 악용될 소지 높은 법들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게시판 이용 활성화에서 좀 더 나아가보면, 저는 "발빠른 사람의 망명"도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정면으로 대처하는 흐름이 되길 바랍니다. 관련 법과 제도 등을 폐지 혹은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언제나 있는데, 이들 단체와 활동가들, 캠페인에 대한 지지를 모아서 나쁜 법은 없애고 바꿔나가는 결과를 만들어내면 좋겠습니다.
* https://www.facebook.com/antigamsi 사이버사찰긴급행동 : 사이버사찰을 금지하는 법을 요구하는 1만인 선언에 참여해주세요
* 오랜만에 개인적인 얘기를 쓰려고 시작한 포스팅인데 뭔가 또 주제가 뒤에 가서 바뀐 느낌. 이게 지각생 스타일이라고 말하렵니다. 어쨌든 축하는 좀 받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