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하철 두줄 서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작년(2015년)으로 끝난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한 줄 서기 캠페인이 2년만에 정착한 것에 비하면 8년간 했던 캠페인이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줄 서기 캠페인이 시작된지 얼마 후, 에스컬레이터를 정비하는 친구가 있어 얘기를 들었는데 과장이 섞였을 수 있지만 고장이 세 배로 늘었다고 했다. 일할 사람을 늘리지 않는데 일이 갑자기 많아지니 사람들이 힘들어 그만두고, 그래서 남아 있는 사람의 부담은 더 커졌다. 결국 그 친구도 직장을 옮기게 됐는데 그 후로 나는 한 줄이 비워진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기 보다는 (지금보다 기력도 넘쳤으니) 계단을 이용하는 편을 택했다.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시작된 초기를 기억한다. 한 줄 서기를 하자고 한 것이 잘못 되서 되돌린다는 인정과 사과는 없이 어느날 갑자기 "잘못된 이용문화 때문에 사고와 고장이 많이 나서 다른 사람이 피해봄"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수년간 지하철 두 줄 서기를 실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왼쪽에 서서 오곤 했다.
본래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타입의 사람은 아닌지라 당연히 무언의 압박을 늘 느끼고 갈등했다. 대놓고 비난하는 것은 이제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노인분들의 중얼거림을 듣곤 한다. 물론 젊은 사람이라고 전혀 안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 불평과 비난은 결국 나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민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비난을 받는 걸 못 견뎌서(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진행중임을 알았어도 오른쪽에 서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합정역 6호선 내리는 곳처럼 짧은 에스컬레이터라 모든 사람이 두 줄로 가면 금방 다 올라갈 거리를, 모두 오른쪽에 서기 위해 바글바글 하며 결국 0~2명만 빨리 오르고 모든 사람이 1/2의 속도로 다 같이 늦게 올라가는 광경을 수시로 보게 된다.
내 생각에 합리적인 방안은 출퇴근 시간대나 배차 간격이 길어서 차를 놓쳤을 때 타격이 상대적으로 큰 공항철도와 중앙선 환승하는 곳 등에 한 줄 서기를 시행하고, 그 밖의 시간과 장소에는 두 줄서기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한 줄 서기가 고장과 안전사고 증가와 인과관계가 입증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아마 그 반대의 증거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사회가 무엇을 더 중시하고 있는지의 문제인데, 두 줄 서기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 줄 서기가 정말 전체적으로 편익을 증가시키고 안전과 고장과 무관해서가 아니라 빠른 것이 선이고 당당하며 느린 것이 악이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하는 한국의 문화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 줄 서기 문화가 기계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것이고 "배려"라고 말한다. 그런데 궁금하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날 요인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노약자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 사람이 아닌 기계를 중시하는 것인가? 두 줄 서기를 더 선호할 만한 노약자가 자신이 폐가 될까봐 움츠려 들어 한쪽으로 비켜 서 상대적으로 건장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연 '배려'일까? 그것보다는 느리게 걸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안심하고 천천히 건널목을 건널 수 있도록 자동차 운전자가 기다려 주는 장면이 정말 '배려'란 표현에 어울린다. 전자는 한국 사회의 성장 신화가 약자에게 주입한 '죄의식'에 가깝다.
2. 자전거와 보행자
요즘은 거의 자전거도로와 보행도로가 구분되서 지어지는 것 같지만 오랫 동안 구분 없이 같이 이용을 해왔다. 나 외의 우리 가족 모두는 다 그런 도로에서 크고 작은 사고의 경험이 있다. 어머니는 고등학생이 자전거로 질주하는 것에 부딪혀 입원할 정도였으니. 그런 길을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다 보면 지금도 자주 보는 광경이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자전거가 빵빵 울려대고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하며 지나치는 것이다.
자전거와 걷는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전거와 자전거 간에도 느린 것이 어디 나와서 짜증나게 하느냐는 말풍선이 어울리는 표정과 태도로 추월해 가는 경우는 제법 있다. 그럼 한창 자전거를 타며 더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던 나는 10대의 마음으로 다시 그 사람을 추월해주면서 '지나가겠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해주는 것으로 되갚아 주기도 한다.
자동차 운전은 안하지만 자동차 도로에도 비슷한 상황은 자주 겪는 것 같다. 천천히 운전하는 자동차 옆을 지나가며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차별적으로 욕하는 장면은 TV에도 종종 나온다. 길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분노와 짜증은 역시나 비슷한 맥락이다. 느린 것은 사회적으로 손실을 입히는 죄이며, 빠른 것에게 언제나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의 권리, 천천히 자전거를 탈 자유, 안전 수칙을 지키며 운전하는 마음가짐은 지금 더 빨리 갈 수 있는 (그가 꼭 "빨리 가야 하는"것인지는 검증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제일 원칙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자전거가 뒤에서 빵빵 거리면 앞에 걷던 사람들은 대개 놀라서 얼른 몸을 피한다. 이것은 사고의 위험을 감지해서 그러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심리적 요인이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내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구나 살피지 못한 내 잘못이다."
3. 민주적 토론과 조직 운영
회의에 관해서는 몇차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 회의와 토론을 하다 보면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그룹으로 나눠진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다른 사람의 주장도 금방 캐치해서 바로 이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해되지 않거나 곱씹고 싶은 게 많아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기회는 적극적으로 잡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회의에서 말을 많이 안 한 사람이 충분히 생각을 한 다음 다음 회의에서는 많은 의견 개진을 하고, 서로 돌아가며 이런 분위기가 반복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회의가 반복되다보면 역시나 "늘 적극적인 사람"과 "늘 뭔가 생각만 하는 사람"으로 나눠지는 경우가 많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좋은 얘기 같아 깊이 함께 하고픈데, 내가 배경 지식이나 사전 고민이 부족해서 이해가 충분치 않고 뭔가 놓치는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쉬었다 하자고 하거나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얘길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쉬기 보다 빨리 하고 끝내자", 이해가 안 되서 궁금해하면 "나중에 잘 설명해줄게, 나랑 얘기합시다" 이런 상황이 더 많을 것이다.(그래 놓고 나중에 따로 얘기 안해준다)
다른 글에서 썼듯이 "반대하지 않으면 동의"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얘기를 정리해서 회의를 효율적으로 빨리 하려는 문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런 문화에서 다른 사람들이 막힘 없이 서로 얘기하고 있으면 "내가 잘 몰라서" "평소에 고민을 안해서"라고 자책하며 중간에 질문이나 쉬자는 얘기를 하는 것을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는 곳도 조금만 방심하면 그런 양상으로 흐르는 일은 잦다.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별도의 진행자를 둬서 적절한 휴식과 주제 환기로 흐름을 조절하거나, 말을 많이 안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생각하세요?" 식으로 발언을 권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흐름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이해와 생각, 표현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은 항상 "내가 말을 해도 되나?"라는 고민을 안게 되기 쉬운데, 진행자가 발언을 요청하는 것은 그런 고민이 없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기회로 "사실 나는 아까.." 하면서 뒤늦게 한 얘기가 함께 나누던 이야기의 본질을 건드리거나 이면을 생각하게 하며 중요한 가치를 상기시키는 경우도 상당하다.
죄책감 없이 당당하기 위해
한국 사회가 짧은 기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면서 빨리빨리 문화가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한국인이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속도만을 중시해 여러 가지 부실을 낳은 것도 문제이지만, 힘이 없어 충분히 빠를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죄책감을 계속 느끼게 하는 것이 더 큰 폐해이다.
빠른 것은 성실, 성공, 재미, 생존 등을 떠올리게 하고 느린 것은 나태, 실패, 지루, 도태 등을 떠올리게 한다. 느리게 사는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빠른 사람은 당당하게 "비켜 있어"라고 말하게 한다. 느리게 살자고 감히 얘기하는 사람은 배때지가 부른 사람 취급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취급을 한다. 노약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건장한 사람에게 비켜주는 것을 배려라고 말하고, 다수가 1/2의 속도로 가며 언제 있을 지 모르는 소수의 사람이 2배의 속도로 가는 것이 사회의 편익을 증진시킨다고 말한다.
제도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실제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아무리 협동조합 등 좋은 사회적경제조직의 모델이 나와도 "충분히 느린 속도"로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면 실제적인 변화는 다시금 뒤로 미뤄질 수 있다. 특정한 나쁜 문화를 만든 것은 제도와 소수의 기득권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좋은 문화로 바꾸는 것은 공익 캠페인을 하던 안하던 일상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진정한 배려는 느린 사람이 비켜서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사람이 공존을 위해 멈추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