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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7/31
    이제 거의 100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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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07/24
    MBC백분토론 신행정수도 이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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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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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날도 있어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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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07/21
    놀라운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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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7/20
    Wonderful Mozilla FireFo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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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07/19
    신촌의 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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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07/18
    내가 사는 곳.(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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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07/18
    그냥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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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07/17
    Fahrenheit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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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으로 알아듣기

요즘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자꾸 들으면 알아 듣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변에 온갖 영어를 하는 사람들과 뒤섞여 살다보니 각자 쓰는 영어를 알아듣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가장 쉬운 영어는 미국 백인 서부 사람이 하는 영어 혹은 영어를 아주 잘하는 북유럽사람의 영어.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딱딱 끊어서 하는 영어.

그 외에는 전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먹기 도통 힘들었는데...이제 조금씩 들린다. 모든게 연음화되는 그리스 사람의 영어나, 독특한 억양과 발음의 남부 중국사람들의 영어, 비음이 많은 프랑스어 영향권 사람의 영어들이.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된장발음을 상대편도 이제 훨씬 쉽게 알아듣는 듯 하다.

그렇다 자꾸 들으면 익숙해져서 알아 듣게 된다. 자꾸 말하면 상대방도 알아듣게 된다. 원래 그게 언어니까.(사족으로 인도사람들은 언제나 -th-를 [t]로 발음한다. 그래도 모두 알아듣는다. 아!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다음 중 발음이 틀린 것은?'이란 문제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

그런데 아직 미국에 사는 흑인이 하는 영어는 못알아 듣겠다. 마치 다른 언어 같다. 하지만, 여기서 만난 한 선배의 이야기...'한 교포가 nail shop을 하는데 거의 전부 흑인이 단골이야.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흑인 말은 너무 잘 알아 듣겠다는거야. 미국 백인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데...'  역시, 내가 흑인 말을 못알아 듣는 건, 흑인들이 말하는 걸 일주일에 한번씩 마켓에서만 집중해서 듣기 때문일꺼다.

역시, 자꾸 듣고 보면 언어는 알게 된다. 점점 생각하면 생각할 수 록 내가 공립학교에서 배웠던 영어교육이 가장 최악이란 걸 점점 더 느끼게 된다. 별로 먼 과거도 아닌데, 그 수많은 교육자들은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생각했던 것을 그 때 못했을까...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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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100일.

가장 오래 한국을 떠나 있었던게 100일 정도였는데, 이제 곧, 한국을 다시 떠난지 100일이 다가온다. 지금은 예전에 떠나 있던 것과 조금 다른 거라서 얼마나 있을까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족히 200일은 넘길거라는 건 확실하다. 물론 300일을 넘기기 전에 다시 한국에 잠깐 들어갈 것이란 것도 확실하니, 결국은 300일 이상 '외'국에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 나의 생각은, so so.

예전에 한국을 떠나 있을때 만난 후배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후배가 '어때요 괜찮나요?'라고 물어서 대답했었나 내가 그냥 이야기를 했었나? 가만 생각하니 가물가물하다. 여하튼 그때 이야기한게 그리고 지금도 그런 것이, ...어디를 가도 점점 더 밍숭맹숭해져서 슬프다, 고향이란 것이 있지만 거길 가도 그저 그렇다. 어딜 가도 몇 일 짐 풀고 자고 나면 편하다. 그래서 그게 더 슬프다. 뿌리가 없는 것 같고, 그냥 어디를 가도 살 것 같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한국에 없다면 이 세상 어디라도 무슨 상관이겠나?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다 짧은 생각과 적은 경험에서 나온 자만인 것 같다. 우후...그 말을 주워담고 싶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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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백분토론 신행정수도 이전

MBC백분토론 신행정수도 이전I을 인터넷으로 보려다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냥 백분토론 홈페이지에서 녹취만 읽기로 했다. 그게 조끔 빠르니까. 근데 주욱 읽다보니

 

>부두완/ 서울시의회 의원:

>충청도는 그러면 받을 생각만 하지 마시고 예를 들어서 핵폐기물 같은 거라도 말이죠.

>동시에 받으시죠.

 

그러니까 여기서 "받을 생각"이란 건 수도 이전인데...허허허...잠깐 이게 진짜 방송녹취 맞을까라는 의심이...

그러다가,

 

>최막중/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서울에 살고 수도권에 살고 계시는 분들도 무슨 말씀을 하시냐하면 수도권이 너무 과밀하다

>그러니까 수도가 이전했으면 좋겠다 생각하시는 분들도 상당부분 있는 걸로 저는 알아요.

>그러면 그 분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과밀해서 고생스러우시면 왜 먼저

>나가시지 왜 먼저 빠져 안 나가시고 이렇게 혹시 나는 남아 있을테니까 남은 좀 나가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것이 아니냐....

 

한 3/4정도 읽은 것은 같은데 그만 읽기로 했다.

 

근데 부두완이란 정치인은 저런 몰상식한 말을 해도, 자기 동네에서 쓰레기 소각장 반대니 혹은 납골공원 반대니 하면서 지역의 표를 끍어모아 스스로에게 이득이 된다고 치고, 최막중이란 교수는...학자 맞어? 술먹고 토론회 나왔나? 설마 스스로 이유를 몰라서 되묻나? 결국은 그는 학자로서 무척이나 불성실하거나 혹은 간판을 이용해서 정치를 해보려거나 혹은 무식하지만 충성스러워서 교수가 되었거나 혹은 예전에는 '명민'하고 '똑똑'하고 '진보'적이었다고 누가 그랬는데 그냥 나이가 들었거나  혹은 원래 그런 놈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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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학초년때, 그리고 한국 떠나오기 전에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들었던 영화음악방송. 그 방송의 DJ 정은임씨가 사고를 당했다. 으흠...빠른 회복을 기원합니다.(예전에 병수발때문에 종합병원 신경외과병동에 두달정도 왔다갔다 한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래는 한겨레 신문기사--------------------------------------------------------------

 

MBC 정은임 아나운서 교통사고로 중태

 

MBC 정은임(36·사진) 아나운서가 22일 오후 2시 40분께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다.

정씨는 이날 한강대교 남단 중앙대학교로 진입하는 흑석동 삼거리에서 급제동하다가 자신의 차량이 전복되는 큰 사고를 냈다. 사고 직후 오후 3시께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로 실려왔으나 머리를 크게 다치는 등 심각한 상태다.

정씨는 오후 6시께부터 4시간여에 걸쳐 신경외과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병원 관계자는 “머리를 크게 다쳐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다. 수술을 했지만 큰 기대는 하기 어려우며, 회복하더라도 정상생활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92년 MBC에 입사, ’뉴스데스크’ ’행복한 책읽기’ 등 TV 프로그램과 FM라디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등을 통해 차분한 진행으로 사랑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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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도 있어야.


오랬만에 즐거운 소식. 누구 말처럼 이런 날도 있어야. 가뭄에 단비같은, 복더위에 소나기같은 즐거운 일이다. 물론, 여긴 복더위란게 없지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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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블로그!

진보넷 블로그 공감능력 떨어지는 아이에 트랙백한 글입니다.

 

그런데 트랙백을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게 맞나? 아직 마구 헷갈리네.

 

블로그란 걸 들러본지 이제 겨우 2주 정도 된 듯 한데, 정말 다양한 성격과 방대한 내용이 놀랍다. 알고 있는 사람 몇몇도 블로그를 하고 있는 것도 들어서 알게 되었고. 이렇게 저렇게 참으로 놀라운 웹페이지를 보게 된듯. 이 글이 트랙백하고 있는 글에게 알게된 블로그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새로운 노래란 뜻인데-에 있는 많은 노래들...참,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밤이다. 유신말기 TBC 젊은이 가요제 장려상 수상곡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이연실의 노래를 꼭 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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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ful Mozilla FireFox!!!

새로 나온 Mozilla FireFox 를 윈도우에 설치했다. 흠! 꽤 괜찮은 걸. 한가지 문제는 아직 active X 가 문제를 일으켜서 은행 웹페이지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 외에는 거의 explorer가 필요없을 듯 하다. RSS는 FireFox가 훨씬 좋은 것 같고, open source의 특성상, 여러사람들이 개발한 스킨을 바꾸는 재미도 있는 듯. 또 한가지 특징은, tab window가 가능해서 쉽게 쉽게 옮겨 다닐 수 도 있고. 아래는 Ohmynew의 XML을 RSS reader package SAGE로 읽은것인데, 아주 만족스럽다. 내일 RedHat9에 설치해봐야겠군.(근데, 진보넷 블로그의 포스팅 화면이 조금 깨지는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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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의 섬

언젠가 인혜에게서 신촌의 섬 주인 아주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아마 간이 무척이나 나빠져서 회복가능성이 없다고 했었던 것 같다) 오늘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음... 가끔씩 찾아가던 뜨내기 손님이었지만, 맥주꺼내 먹고 팝콘 퍼먹으며 음악듣던 그 기억이 계속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굉장히 강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던 곳.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그게 언제 였더라? 93년이던가? 한 선배를 저녁에 만나서 처음으로 술마시면서 느낀 그 강한 느낌의 술집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같이갔던 선배의 이름은 이미 잊어버렸어도. 술 다마셨어요. 하면 훠어이 훠어이 앉은 자리 털고 일어나 와서는 천천히 병을 세시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분들과 술마시고 있을때도 안주 좀 않될까요? 하면 턱턱 일어나 두부 구워주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아마도 누구나 그곳을 잠시잠시 지나던 사람들은 잠깐 하던 일 그만두고 생각에 잠기지 않을까? 결국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섬을 찾은 강장관, 그리고 아름다운 섬 사람들

 

떠난 사람은 남은 이의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 생채기를 남기기 마련이다. ‘운동권 사랑방’으로 불리는 서울 신촌의 까페 ‘섬’을 지키던 고 유향숙씨 역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마음에 추억 이상의 무언가를 아로새긴 듯했다.

게릴라성 장대비가 퍼붓던 지난 16일. 강 장관은 오랜만에 카페 섬을 찾았다. 이미 가고 없는 친구, 유씨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날 강 장관과 아름다운 재단은 신촌에 새로 옮겨 문을 연 섬에서 20여명의 관계자들만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유향숙의 섬 기금’ 기부약정식을 가졌다. 강 장관이 자신의 기부나 이번 행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섬 기금’은 강 장관이 지난해 11월30일 세상을 떠난 친구 유씨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재단에 기금 설립을 요청해 만들어졌다.

강 장관은 이날 약정식에서 고인을 추억하며 “영혼이 맑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저와는 10년 지기 친구였습니다. 변호사 시절 만나 마음으로 가까운 친구어요. 저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그는 또 그대로 힘들어서 몇년 전부터는 자주 만나지도 못했어요. 그래도 매년 12월31일마다 꼬박꼬박 섬을 찾았고 향숙이도 그날만은 저를 기다리곤 했습닌다. 자주 먹을 것을 싸주면서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는데….”

강 장관은 유씨와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슬픔에 복받쳤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흐느꼈다. 보좌진에게 건네받은 휴지로 눈가를 찍어내던 그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음식 솜씨 좋았던 그가 나이 들어서는 한적한 곳에 밥집을 내고 싶어해 나중에 나도 신세를 좀 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유씨를 일러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나 이외에도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 나눠주었을 것”이라고 했다.‘섬 기금’에 대해서도 유씨가 빌려갔다가 그의 동생들로부터 사후 돌려받은 돈의 일부라고 밝혔다. “남에게 신세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탓에 유씨는 죽음을 앞두고 동생들에게 오래전 강장관에게 빌린 돈을 이자까지 쳐서 갚으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이날 강 장관은 내내 우울한 기색이었다. 약정식에 참석한 페미니스트 그룹 ‘언니네’ 회원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응하기도 했지만 매우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조용히 앉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차병직 변호사, 문학가 김정환씨 등 오랜만에 지인들과 함께 잔을 부딪치면서 가끔 고인에 대해 추억할 뿐이었다.

 

 

‘섬’은 강 장관과 인연이 깊다. 이곳은 80년대 초반 강장관의 전 남편인 출판인 김태경(이론과실천 대표)씨가 처음 문을 연 것을 85년경 유씨가 인수한 뒤 운동권들의 사랑방으로 자리잡으며 이름을 알렸다. 군부 독재라는 시대의 망령이 떠돌던 80년대부터 지식인들의 고담준론이 넘쳐흘렀던 ‘저항의 섬’이었고, 90년대를 지나면서는 과거의 아픔과 거리가 먼듯 흥청거리는 신촌 문화 속의 ‘섬’이었다. 그곳에 가면 말 수 적은 주인 유씨는 김민기, 한대수, 김광석의 엘피판을 올려 놓고 조용히 손님을 맞았고, 손님은 제 손으로 냉장고에 든 맥주와 잔을 가져다 술을 마시면 됐다. 돈이 없을 땐 외상을 그어도 좋았고, 안주 값이 없으면 커다란 바구니에 담긴 공짜 안주, 강냉이며 새우깡을 무한정 가져다 먹을 수 있었다. ‘섬’은 돈의 논리를 거부하는 자본주의의 ‘외딴 섬’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섬’을 사랑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 기형도, 문학평론가 이성욱이 한때 이곳을 거쳐갔고 공지영, 김인숙, 김정환, 성석제, 현기영 등 문인들과 운동권 사람들이 즐겨 찾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때론 통기타 반주에 맞춰 ‘운동권 가요’를 불러제꼈으며, 때로는 장탄식을 늘어놓으며 술을 마셨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도 그들 가운데 한명이었다. 특히 강장관과 유씨는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을 만큼 우정이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생전에 유씨의 습작시를 읽곤 했던 강장관은 채 피지 못한 문학도의 꿈을 헤아려 “이 기금이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지원에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장관의 기금 출연에 이어 ‘섬’은 점점 나눔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해나가고 있다. 유씨의 사후 자칫 없어질 뻔한 이곳을 살린 것도 주변의 나눔 덕분이었다. 가게 건물의 철거와 이전에 따른 임대료 부족 등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평소 이곳을 사랑하던 지인 30여명이 쌈짓돈을 보태 자릴 옮겨 지난 13일 새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카페의 수익금 역시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진다. 손님으로 시작해 유씨의 뒤를 이어 세 번 째 운영을 맡은 박종만씨는 “수익금을 이 지역 독거노인 11분의 생계비 지원에 쓰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름다운 재단 역시 강 장관의 기금출연에 그치지 않고 섬 카페를 자주 찾았던 문인들을 중심으로 기금위원회를 구성해 기금 규모를 늘이고 지원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인 유씨는 갔지만 그가 ‘섬’에 남기고 간 사람의 향기는 강 장관를 비롯한 ‘섬 사람들’의 기억에 시간이 갈수록 짙은 내음을 풍겨주고 있다. ?汰缺?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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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

내가 사는 곳은 음...지난 번에 다른과학자연대신문사 웹페이지에 썼던 글을 옮긴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글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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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번에 글을 쓰고 이제 거의 1달 반이 지나서 다시 연락드리게되었습니다.  어제 처음으로 노트북도 하나 사서, 이제 한글도 아주 편하고 자유롭게 쓰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자주 연락드릴 수 있겠지요. 사실, 처음 여기 와서 뭐하려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될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냥 조용히 공부만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약간 하루하루 생활은 지겹구요. 그래서 '운동(exercise)'를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살고 있는 집의 부엌쪽 사진을 낮에 찍은 거랍니다. 그냥 약간 환하게 보이라고 노출을 키운거랍니다. 

 

 

이 곳은 거의 일년에 두세달(12월 중순-2월 중순)정도만 비가 찔금찔금 오고 나머지 날들은 전부 화창한 가을 날씨랍니다. 저녁에는 약간 쌀쌀하고요. 그래서 어디든 집을 구해도 별 상관없다고 처음에 생각했으나...이거 웬걸...서울에서 반지하와 옥탑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집을 구하려고 20 여군데를 돌아다녀보고는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깨달음이란 어리석은 것인데, 이곳은 돈이 바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곳인데 잠시 좋은 날씨와 깨끗하고 좋은 집들을 보면서 착각에 빠졌던 거죠. 인구밀도가 낮아서 약간의 상대적 착시를 일으킨 것 뿐이었다는 거죠. 여기도 싼가격의 집을 가면 그 집의 가장 않 좋은 곳-대로와 마주보고 있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거나 혹은 바닥에 딱 붙어 있거나 햇볕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거나 혹은 환경이 않좋은 곳이 랍니다. 환경이 좋지 않다라는 말은 그냥 거리를 둘러보면 깨끗하고 잘 정리되고 안전해 보이는 집과 그렇지 않는 곳이 너무너무 잘 구분되어서, 한 번 쓱 둘러보고 아! 이곳은 싸겠군..하면 십중팔구 가격이 싸답니다. 하지만, 위험한 곳이라는 소리를 소문으로라도 들었다면 그런곳에서 집을 구하는 건 그냥 포기하게 되는 거죠. 그렇지만 집값이 워낙 비싼 곳이라서 무척이나 망설이다 여자친구가 그냥 한 번 좋은데서 살아봐~~~라는 한 마디에..에이..그래 내가 언제 한 번 이런데서 살아보려구...하면서 큰 맘먹고 이층에 위치한 침대방이 하나 따로 있는 집을 6개월간 계약했습니다. 월세는 한달에 1000달러. 이곳의 평균가격이랍니다. 여기서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원룸은 대략 850달러 정도. 처음에 제가 보러 다닌 집들은 600에서 800달러 사이의 스튜디오들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대학에 다닐려고 서울로 올라온 이래 가장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렇지만 '그냥 한 번 좋은데서 살아보자'라는 마음이었기때문에 6개월만 지나 계약이 끝나면 다시 작은 원룸을 구해볼 생각입니다. ^_^.

 

 

안녕하세요 연락이 늦었네요

 

연락이 늦었네요. 그래도 사람들이 가끔씩 여기 들르겠죠? 벌써 여기 도착한지 2달이 지났습니다. 이것저것 하다보니 시간이 정말 휙 지나가버렸네요. 지난 2달동안 이것저것 서류처리에 밀린 연구에 집구하고 하다 보니 전부 지나가버렸네요. 연락을 너무 늦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로 옆에 붙어 있어요. 한국에서 서울 옆에 있는 부천 정도라고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도시가 미국 기준에서 보면 굉장히, 아마 가장 진보적인 곳일 거라고 사람들이 그러더라구요. 물론, 전 다른 곳을 본적이 없으니 알 수 가 없지만요. 예를 들면 소상인 보호 정책때문에 버클리 시 조례로 학교 근처에는 맥도날드, 버거킹같은 대형 체인점이 들어설 수 없답니다. 복사집 체인도 없어요. 그리고 주민투표로 월마트의 입점을 부결시키고..... 여하튼 이런저런 걸 보면 이곳은 그래도 미국에서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살아있는 곳인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예기를 들어보면 흑인/백인을 섞어서 초등교육을 시키는 정책은 백인들이 대거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려서 실패도 했다구 하고...이곳은 살기가 무척 좋아서 집값이 무척이나 높답니다.(미국에서 세번째정도) 그래서 흑인들이 인근의 또 다른 큰 대도시 오클랜드 라는 곳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곳은 미국에서도 유명한 총기사망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클랜드는 부천을 버클리라고 하면 성남정도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러니 아주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다르다는 거이죠. 하지만 이 정도는 미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빈/부(흑/백)차이(차별)의 완화된 버전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심한 곳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집을 구하려고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면 금방 알 수 있답니다. 이곳에서 xxx street 너머는 위험하다 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그곳을 가보면 정말 거짓말처럼 xxx street 너머는 동네의 분위기가 다르고 한눈에 보기에 집들이 싸보이고 정말 싸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곳에서 집값을 아끼며 살기에는 총기사망율 통계 때문에 섵불리 들어가기가 꺼려지기도 하구요.

여하튼 침대방이 따로 달린 아주 좋은 집을 구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다니려고 서울로 올라온 이래 가장 호화로운 집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 올리는 곳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곳은 날씨가 무척 좋습니다. 일년에 3달 정도만 비가 찔끔찔끔 옵니다.(12월 -2월). 그리고 일년 내도록 한국의 가을 날씨가 거짓말 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 됩니다. 여기 온지 두달동안 단 하루도 하루종일 흐린날을 본적이 없어요. 그리고 덥지도 않고....결국은 기후는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죠. 아침에 굉장히 짙은 안개가 끼어서 산에 있는 나무들이 비가 오지 않는 가뭄때문에 죽는 일도 없어요. 그렇지만 조금 지겹답니다.

모두 가족 중심의 생활이고 학생들이 있어도 중심의 번화가를 빼고는 저녁 8시 쯤되면 쥐죽은 듯 고요해진답니다. 신림동에서 살다가 바로 이곳에 오면 뭔가 엄청나게 변했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죠^_^ 매일매일이 똑같은 날씨와 똑같은 생활때문에 조금 지겨운 경우도 많습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갈등도 많았었는데..(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지금은 그냥 잊어버리고 묵언수행하듯 (별 할말도 말할사람도 없기에)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출퇴근하고 있는 물리학과 건물 사진도 한장 올릴께요. 사진에 보이는 건물 5층에 제가 있답니다.

 



이제 한국은 장마철이겠지요. 반지하에 살때만 빼고는 장마철의 빗소리의 시원함을 즐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몸건강히 잘지네고 연락하며 삽시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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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번!

오늘 동기 승균이의 도움으로 한 5분여간 자동차를 몰아봤다. 생애 처음으로. 흠...자동차 오락을 조금 많이 해볼 걸...펌프카도 놀이공원에서 좀 타보고 했으면 좀 더 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무럭무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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