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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 등록일
    2006/05/08 14:10
  • 수정일
    2006/05/08 14:10

MIC님의 [동지가 보내온 선물] 에 관련된 글.

1년 만에 다시 치자꽃이 피었다.

향기가 참 좋구나-

 


 

 


 

 




치자꽃 / 송기원



보길도 윤선도 유적지 옆에는 작은 초등학교가 있는데요
남해안 땅끝에서도 더 아래로 내려온 섬학교 답게
아열대성 상록수들만 무성한 화단이 있는데요
화단에 가득가득히 치자꽃들이 한창이어서
교정 전체가 치자꽃 향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벗어나 들샘머리에 이르러
두 손으로 샘물을 길어 올렸더니
넘쳐나는 치자꽃 향기가 손바닥에도 고였습니다.
들샘머리 콩밭에서 김을 매던 할머니가
잠깐 일손을 놓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데요.
"쩌그 뾰쪽산에 가먼 섬들이 가랑잎처럼 둥둥 떠있고
이쁜 디가 많은디 육지사람덜은 몰르고 가뿌러라우."
일흔 가까운 주름살 투성이로 수줍게 웃어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에서도 치자꽃 향기가 풍겨왔습니다.
그대여, 얼마나 오래 숨어 살면서 그대에게 가는 길을 찾아야
그대는 치자꽃 향기처럼 나에게 풍겨올는지요.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랑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던 잿빛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을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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