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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섹스중독자"

  • 등록일
    2007/02/03 23:53
  • 수정일
    2007/02/03 23:53
영화볼거 없나 하다가 순전히
주연을 겸한 감독이
한때 보봐르와 사르트르의 자유연애를 신봉했는데 어쩌구에 끌려서 본 듯 하다.

영화는 재미있다. 계속 킬킬거리면서 봤다.
남성의 성적 판타지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
그 때문에 사실 불쾌한 장면도 살짝 있기도 하고.
정말 수많은 성판매 여성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성판매 여성과의 오럴섹스에 집착했으므로)
그런데 배경이 한국이라면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봤을텐데
서구가 배경이어서인지 왠지 다른 느낌을 받았다는 것 정도가 좀 특이했고.

또 하나.
종종 '너무 정직해도 탈'이란 얘기를 하는데.
감독은 자신의 집착증을 나름 극복(?)해 보기 위해 자신의 애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honesty전략을 써 보기도 한다.

그걸 보면서
정직한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죄책감을 더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위선을 부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흠...

여하튼 좀 웃기는 짬뽕 같은 영화.
사유재산제와 일부일처제를 동일시하면서 자유연애를 실천하던 20대 청년이
영화 맨 마지막에 자기는 섹스중독증을 고쳤고 세 번째 결혼을 한다고 자랑하는 건 참 아이러니다.



발칙하고 도발적인 유머 <나는 섹스중독자>
2007.01.17
 

가장 발칙하고 유머러스한 중독기, 감독의 솔직함에 경배를

나이 들어 머리숱도 적고, 비쩍 말라 볼품없는 남자가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페티시즘과 강박증에 대해서 속사포처럼 중얼댄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신경증적인 뉴욕 지식 남성의 치부를 영화 가득 담아내었던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우리는 ‘섹스에 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영화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R등급의 우디 앨런이라는 별명이 붙은 카베 자헤디는 앨런이 철저하게 지켰던 그 영화적 거리를 파괴한다. 우리는 우디 앨런의 실생활에서의 여성 편력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영화가 감독의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거나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카베 자헤디는 자신의 삶과 영화를 혼합한다. 우디 앨런은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차용할 때, 그것이 의도된 페이크다큐멘터리임을 감추지 않으며 그런 기법은 현실에 대한 풍자의 강도를 높이거나 아이러닉한 상황에 유머를 더욱더 가미하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나 카베 자헤디는 실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영화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 존재했던 인물과 자신의 과거를 기록한 필름들을 활용한다.

카베 자헤디의 <나는 섹스중독자>는 세 번째 결혼을 앞두고 대기실에 있는 감독이 ‘나는 한때 섹스 중독자였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거를 재구성한 재연 화면, 사귀거나 결혼했던 여성들을 담은 실제 영상, 자신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 화면이 자헤디 감독의 친절한 설명을 배경으로 이어진다. 감독은 자신과 함께했던 여인들과의 관계를 반추하면서 자신의 내밀한 욕망들을 거침없이, 매우 솔직하게 늘어놓는다. 그는 영혼의 동반자라고 생각했던 첫사랑 애나와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관계처럼 개방된 연애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비자가 만료되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애인 캐롤린을 옆에 두기 위해 결혼하면서 자유연애는 종지부를 찍는다. 결혼이란 ‘베트남전을 일으킨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것을 일부일처제적 사랑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일종의 행위 예술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영화 때문에 파리로 건너간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내 캐롤린을 닮은 창녀를 만난 이후 창녀와 오럴섹스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자신의 내밀한 성적 욕망과 결혼 혹은 연애 관계를 지키려는 자헤디의 눈물 나는 투쟁기가 시작된다.

사랑에 관한 통속적인 정의 가운데,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와 ‘사랑은 평생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있다. 전자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상과 지향의 일치를, 후자는 둘간의 독점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유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자헤디는 이 두개의 정의들이 함축하는 사랑의 모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할 뿐 좀체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금지된 욕망을 금지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인정받음으로써 그것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운 것이다. 그의 아내 혹은 애인들은 처음에는 그가 수줍게 털어놓은 비밀을 충격적으로 듣는다. 나의 남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 그것도 창녀를 욕망하다니. 서럽게 울거나 구역질내던 그녀들은 이내 그의 솔직함을 인정하고 그의 판타지를 용인하고 공유해주기로 마음먹는다. 자헤디와 그의 연인들은 오래도록 서로 마주보기 위해서 같은 곳을 바라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사랑에서도 ‘솔직함이 최선의 정책’이 될 수 있을까? 예일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자헤디 감독은 온갖 지적 담론들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랑을 둘러싼 두 가지 본능에 대해 실험한다. 하나는 성욕을 일대일의 독점적인 관계 속에 묶어두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 욕망에 대해 좀더 솔직하고 대범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 것과 매우 모순적인 것인데, 주체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특히 성적인 면에서 독점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헤디는 자신이 창녀들에게 가지고 있는 욕망을 애인과 공유하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는 다스릴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다. 감독은 관계의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를 목격하며 욕망의 딜레마에 빠진다. 지식인 남자가 가진 욕망의 천박함 혹은 편협함을 인정하는 이런 솔직함이 이 영화가 가진 강점이며, 이 영화가 남성 본위의 성적 판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데빈과의 관계를 통해 카베는 자신을 비추어본다. 알코올중독자인 그녀를 참아낼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여자들을 괴롭혀온 자신의 욕망도 일종의 중독 증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고 자신을 ‘섹스중독자’라고 규정한다. 결혼과 사랑 그리고 성욕에 대해 대담하고 솔직했던 서두와 본론에 비해 그를 섹스중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결론은 다소 상투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섹스중독자>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쉽게 보기 힘든, 발칙하고 도발적인 유머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확실하다.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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