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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지도위원, “비정규직과의 연대 없이 우리 운동 전진 없다”

김진숙 지도위원, “비정규직과의 연대 없이 우리 운동 전진 없다”
글쓴이: 들푸리 번호 : 51조회수 : 402007.07.20 10:22

 

* 어제 7월 19일(목) 김진숙 선배의 "노동자의 삶, 그리고 우리 시대의 논리"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100여명의 지역 동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 20분의 강연과 30분의 질의 응답이 있었어요. 우리 삼성SDI 동지들도 함께 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른 일정이 있으셨다고 하니,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죠. ^^; 아래 글은 울산노동뉴스에 올라온 어제의 강연내용입니다.  동지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김진숙 지도위원, "비정규직과의 연대 없이 우리 운동 전진없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기념 강연회 열려

(출처 울산노동뉴스)

 


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 기념 대중강연회가 19일 목요일 근로자복지회관 1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책 [소금꽃나무]의 저자이자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기도 한 김진숙 씨를 모시고 “노동자의 삶, 그리고 우리 시대의 논리”라는 주제로 열렸다. 100여 명의 청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을 훔치며 2시간여 동안 강연장을 지켰다.

▲87년 20주년 기념 대중강연회

1987, 투쟁이 재미 있던 시절

오후 7시, 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의 천창수 학술위원장은 “김진숙 동지를 안 것이 20년 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김 동지의 얘기는 듣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며 “노동자가 있는 곳에 늘 함께 있어 온 김 동지의 오늘 강연이 혼이 담긴, 마음을 움직이는 강연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시작한 김 지도위원의 이야기는 78년 남자 와이셔츠 만드는 공장에서 ‘곱배기 철야’를 하던 시절부터 한진중공업에서의 해고와 1987년 노동자대투쟁까지 이어졌다. 김 지도위원은 1981년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조선일보에 “조선소 첫 여성 용접사”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그녀는 한진중공업 시절 다니던 야학에서 권해준 [전태일평전]을 읽고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노조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86년 해고됐다. 대공분실로의 연행 세 번, 부서이동 두 번, 해고, 출근 투쟁, 수배 5년, 두 번의 수감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됐다. 김 지도위원은 해고 이후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감격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내가 파업을 겪은 것이 노동자대투쟁 때 한진중공업에서였다. 7월 25일 비가 퍼붓는데도 3천명이나 모였었다. ‘늙은 노동자의 노래’가 그 당시에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고 노랫말을 생각지도 않고 막 불렀던 노래가 ‘멸공의 횃불’, ‘인천 성냥공장 아가씨’ 같은 노래였지만 그때는 투쟁이 재미있었다. 투쟁의 주체가 대중이었기 때문이다.”


▲ 김진숙 지도위원의 강연을 들으며 환하게 웃는 청중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즐겁게 하는 투쟁, 조합원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투쟁을 볼 수 없다고 했다. 플래카드도 똑같고 구호도 똑같고 집회 역시 재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때는 누가 구속되면 십리 백리라도 달려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누구 하나 구속됐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1987년 이전의 지옥 같은 공장에 대한 회고가 이어졌다. “당시 노동자들은 용접 불똥이 튀어 난 구멍을 테잎으로 기워 입었다. 그래서 1987년에 ‘작업복 한 벌 더 달라’, ‘우리 돈으로 사서 쓰는 장갑을 회사에서 지급해 달라’ 등의 요구가 터져나왔다. 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최대 투쟁성과는 노동조합을 민주화 했다는 것에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은 노조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노조 깃발이 아니면, 투쟁의 장이 아니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승리했고 노조도 민주화로 이어졌다”


2007,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 강연을 하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그녀는 87년으로부터 2007년 현재로 이야기를 옮겨갔다.

“1987년 대투쟁으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과연 우리가 서있는 지점이 어딘가? 그때 우리가 서 있던 자리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것 같다.” “대공장 노동자들은 잔업과 성과금에 영혼을 팔며 산다. 월급이 늘었어도 더 많은 월급을 위해 산다.”

김 지도위원은 울산의 노동자 문화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청소년성매매 비율이 제일 높은 곳이 울산이다. 고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그 돈으로 퇴폐 문화에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1987년, 연봉이 작았어도 누구랄 것 없이 똑같이 받았을 때는 노동자들끼리 끈끈함이 있었다.”

강연의 화제는 2007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 시대 비정규직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해가는 것이 바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정신을 오늘에 계승해가는 것이라 힘주어 말하며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들을 전했다.

“경희의료원노조 식당 아주머니들이 투쟁할 때의 얘기다. 한 아주머니가 98년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상경투쟁을 와 서울에서 선동하던 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얘기하더라. 바로 그때 목이 터져라 회기역에서 시민들을 향해 호소하던 그 ‘빨간 조끼’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유인물을 받아들지 않은 경희의료원 노동자들에게 똑같이 구조조정이 닥쳤다. 왜 그때 경희의료원 노동자들이 그 ‘빨간 조끼’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해고, 구조조정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남의 일은 없다.”

“비정규직은 정규직들의 미래다. 그런데도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눈은 자본하고 똑같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생각으로 싸웠으면 지금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성이 없는 운동이 누구를 움직일 수 있겠냐. 비정규직을 ‘위해서’ 운동하자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과 함께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 운동은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김 지도위원은 구조조정 당시 한진중공업을 예로 들며 ‘구조조정은 회사가 어려울 때가 아니라 단결되지 않을 때 온다’고 힘주어 말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단결, 그것이 안 될 때 정규직들도 망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진중공업에서 LNG선을 점거하고 선상파업을 벌였다. 조합원 3,000명중 강제명예퇴직 명단에 오른 1,200여 명이 배를 점거했다. 배를 인도하지 않으면 선주에게 지불해야 할 돈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느니 임금인상 할 거라고 조합원들은 믿었다. 하지만 자본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2,000여 명의 비정규직들이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공장은 잘 굴러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 파업의 패배부터 한진중공업은 어떤 투쟁도 되지 않았다. 이후 정규직들에게 명예퇴직 협박이 들어오고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성과금 1,500만 원 받는 노동자들이 연봉 1,500도 안 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 운동의 미래는 없다.”

한진중공업 얘기는 2003년 김주익, 곽재규 열사로 이어졌다. 김 지도위원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청중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한진중공업에서 어렵게 사측과 합의했을 때 사장이 맺은 합의를 회장이 번복했다. 김주익 지회장이 85호 크레인 위에 올랐다. 태풍 매미가 불어닥쳤다. 거대한 크레인이 휘고 85호 크레인도 휘휘 돌아갔다. 하지만 김주익 지회장은 내려오지 않았다. 김 지회장이 하루는 전화를 했다. 냉면이 먹고 싶다 했다. 밥을 크레인까지 올리던 밧줄로는 국물이 있는 냉면을 올려 보낼 방도가 없었다. 결국 냉면을 크레인에 올리지 못했다. 김주익 지회장은 끼니를 올려주던 밧줄로 목을 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곽재규 열사도 죽은 채 발견됐다. 곽재규 열사는 자기가 투쟁하지 않아서 김주익 지회장이 죽었다며 죄송하다고 절을 했다.” “내게 1987년과 2007년의 차이는 그런 거다. 1987년에는 다 있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모두 있었다.”

김 지도위원은 노동운동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을 이어가며 강연을 마쳤다.

“노조 간부들은 이런 저런 현안들에 대해서는 20년의 노하우가 있어서 어느 정도 협상이 될 거라고 판단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피한다. 싸워야 하는 거니까.” “KTX 승무 노동자들, 400명이 짤렸고 투쟁을 시작했지만 이제 70명 남았다. 70명이 70년을 싸워도 안 끝날 거다. 400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짤렸는데 기차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 원칙을 놓쳐버리니 막을 방법이 없어진 거다. 모두가 블랙홀에 빠진 거다. 20년 전을 기억한다면 이랜드, 홈에버에 연대해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가야 한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희망, 원칙을 지키는 싸움

청중석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한진중공업 오대일 씨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현장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김 지도위원은 “비정규직 실태조차 파악 안 되는 현장이 많고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 안 된다. 현장의 활동가들이 비정규직에게 단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비정규직을 묶어내는 조직 사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한 학생은 “친구들은 ‘노동자’라는 것을 자각하기 힘들다. 소통하기 위한 생각을 얘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지도위원은 “자신이 노동자가 되리라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고 되물으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려면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하고 사회 문제에 관해 많이 얘기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고 생각을 밝혔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배문석 문화국장은 “울산 노동운동 20년을 정리하는 글을 쓰다 보니 거의 모든 투쟁이 졌다, 쓰러졌다, 패배했다 이런 결말을 보였다. 결국 그렇게 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20년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노조운동의 희망은 어디에 있나?”라고 질문했고 이에 대해 김 지도위원은 홈에버에서 공권력 투입 협박에 맞서며 농성중인 노동자들의 예를 들었다. “한 아주머니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김경욱 홈에버 일반노조위원장은 제 아들뻘 됩니다. 우리 다 같이 엄마의 마음으로 한 번씩 안아줍시다’ 그리고서 4~50대 아줌마 노동자들이 돌아가며 김경옥 위원장을 안았다. 농성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그러면서 서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아줌마들의 싸움은 원칙적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는 그런 분들에게 있지 않나.”

뒤이어 전교조 박현옥 조합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가르치던 아이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최근에 이 아이가 SK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서 ‘너무 힘들어요’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김 지도위원 이야기를 들으며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아이들 생각이 났다. 강연 도중 문자를 보내고 소식을 물었다.” 박현옥 조합원은 눈물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 생각을 하고 또 김 지도위원의 강연을 들으면서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학교 현장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한다.”

강연을 듣고 나오는 청중들은 입구에 마련된 판매대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책 [소금꽃나무]에도 관심을 보였고 금방 동이 나기도 했다. 한편 강연장 주변 근로복지공단 1층 로비에는 1987년부터 2007년까지 울산 노동자투쟁사가 전시되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전시물에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부터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 골리앗 투쟁, 현대자동차 고용안정 투쟁, 2001년 울산 총력투쟁, 2007년 현재진행형인 투쟁에 이르기까지 울산지역 노동운동 역사가 총망라되어 생생한 화보와 함께 담겨 있다. 또 이랜드 불매운동 선전물과 매주 금요일 저녁 7시에 홈에버 촛불문화제가 북구 홈에버 앞에서 열린다는 선전물도 사람들의 발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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