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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엄마 이소선이 부탁한다. 제대로 싸워라”

“전태일 엄마 이소선이 부탁한다. 제대로 싸워라”

민주노총 기자회견,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씨 참석해 쓴소리

 

이소선, “우리 태일이 죽을 때 보다 더 참혹한 세상”

 

이 날 기자회견에는 37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던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인 이소선 씨가 참담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참석했다.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씨/참세상 자료사진

이소선 씨는 “죽지 말고 싸우라고 그렇게 강조했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우리 태일이 죽을 때 노동자도 사람이고 기본권이 있고, 인권이 있다고 했는데 70년대 보다 더 참혹한 세상이 왔어. 박정희 정권 때랑 바뀐 것은 시체 뺐어가지 않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아. 아니 뺐을 수 있으면 지금도 빼앗아 갔을 거야”

 

이소선 씨는 한숨을 쉬었다.

 

“전기는 누가 만들고, 집은 누가 만들고, 차는 누가 만들었어. 차가 굴러다니는 아스팔트는 누가 만들었는가 말이야. 옷은 누가 만들고 신발은 누가 만들고...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서 나라를 움직이고 이 만큼 발전된 거는 무시하고, 세금 바쳐서 정치하라고 했더니 국정감사도 안하고 싸움이나 하고 있는 이 나라가 한심스러워”

 

 



“노동자가 단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상황이 온 거야”

 

이소선 씨는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 번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아침에 오면서 또 노동자가 분신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단결하기 힘든 줄 알지만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은 노동자가 단결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용자들이 얼마든지 해봐라 배고프면 그만두겠지, 너희가 해봐라 몇 명이나 모이는가라고 무시하는 거 아니야. 우리 노동자들이 언제까지 죽어야 하는 거야. 전태일 엄마 이소선이 소원한다. 한번만 제대로 싸워라. 힘들고 어렵지만 전체가 단결에서 한번 하면 안 될 것이 없어”

 

이어 이소선 씨는 노동자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도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이 없는 것을 한탄스러워 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에게 이소선 씨는 “카메라 들고 다니기 부끄럽지도 않아?”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이명박 나오는 건 하루에 스무 번 서른 번씩 내보내면서 여기서 억울하고 분노하는 노동자들 얘기 어디 한 번 제대로 내보내 봤어? 카메라 들고 다니기 부끄럽지도 않아? 춤추러 다니는 거야, 구경하러 다니는 거야! 죽은 사람들 억울하고 애통한 마음 낱낱이 기록해 줄 놈 하나라도 있는가. 언론이 제대로 서야 정치가 제대로 가고 국민이 제대로 살 수 있는데 언론이 미쳤으니까 다 미치는 거 아냐”

 

이소선 씨는 마지막으로 “더 이상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더 이상 죽지 말고 살아서 싸워. 그래야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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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 코스콤 비정규직 투쟁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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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이용석 그리고 정해진

[기자의눈] 노조 인정해 달라며 몸에 불을 붙여야 하는 나라

‘일하기 좋은 사회’에서 사는 바보 같은 노동자

 

4년 전 이용석 열사가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던 10월 26일, 4년 후 10월 27일 故정해진 조합원은 “파업 투쟁 정당하다”를 외치며 다시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인 지 37년, 세상이 좋아졌다는 지금 여전히 노동자들은 몸에 불을 붙이고 있다.

 

바보처럼 일만 했던 노동자. 하루의 반을 넘긴 13시간, 14시간을 노동하면서도 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 했던 노동자. 그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일주일에 44시간 만 일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전태일 열사가 그렇게 외쳤던 근로기준법에 명시되어 있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로 살기 위해, 힘없는 노동자의 유일한 힘인 노동조합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와 함께 싸웠던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심히도 지나가는 130일이라는 시간의 파업이었으며, 같은 노동자라 외치는 한국노총 조끼를 입은 사람들의 폭력이었다.

 

일주일에 40시간만 일하는 것, 일하기 위해 쉬는 것, 일한 만큼 받는 것, 수 만 볼트에 감전되어 죽어가는 동료를 보지 않는 것,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일하기 좋은 사회’가 만들어졌다는 2007년에도 몸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44시간 만 일하겠다는 것이 ‘무리한 요구와 횡포’?

 

故정해진 조합원이 몸에 불을 붙이고 40m를 뛰면서 끝까지 외쳤던 것은 “인천 전기원 파업 정당하다”와 “유해성을 구속하라”였다.

 

건설노조 인천지부 전기분과는 한국전력공사로부터 전기공사 설비, 보수 등을 수주 받아 공사하는 인천지역의 전기공사 업체들에 소속된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23개 업체를 대상으로, 그 대표권을 위임받은 유해성 대진건설 사장과 교섭을 해왔다.

 

그러나 유해성 사장은 노동자들과 성실하게 교섭에 임하기는커녕 업체 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내 “단체교섭을 완료하면 하나를 주고 또 하나, 또 하나를 반복해 결국 영업권을 내 놓아야 한다”라며 “노동조합이 원하는 대로 단체협약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해성 사장은 편지에서 6.10 민주화 운동을 운운했다. 유해성 사장은 “6.10 민주화 운동이 벌써 20년이 되었는데 노조의 요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쟁을 무시하고 집단의 힘을 빌려 일방적으로 무리한 요구와 횡포를 부리고 있다”라며 “노조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 못하도록 조합원을 설득하고, 노조집행부의 처사에 단호히 대처해 우리 회사는 우리가 지키자”라고 했다.

 

일주일에 44시간 만 일하게 해달라는 것이,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맺자고 하는 요구가 근로기준법에도 다 나와 있는 이 요구가 “무리한 요구와 횡포”가, “터무니없는 요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인천지역의 전기원 노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전기공사업체로 전적 당하기도 하고, 사용자들이 임금을 축소 신고하는 방식으로 탈세해 고용보험과 국민연금이 줄어들기도 했다. 또한 사용자들은 실제 근로하지 않은 일용 전기원 노동자를 일한 것으로 근로대장을 허위 작성, 세무서에 신고해 소득세를 줄여 탈세 행위를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태일, 이용석, 하중근 그리고 정해진

 

故정해진 조합원은 그렇게 오기 싫어하던 화상전문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2만 2천 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봇대에서 일하다 감전으로 쓰러진 동료들을 안고 가야 했던 그 병원에서, 동료들의 죽음을 보며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한숨을 쉬었을 그 병원에서 그렇게 죽어간 것이다.

 

故정해진 조합원이 숨을 거두던 날 밤, 병원 앞에는 “아직 하중근 열사의 한도 풀지 못했는데 또 한 명의 열사를 보내야 한다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는 건설노동자들의 한숨이 가득했다.

 

불법 다단계 하도급에 저항하다 경찰에 맞아 죽어도, 죽은 사람은 있는데 1년이 넘도록 죽인 사람을 찾을 수 없는 나라. "차별을 철폐하라"고 몸에 불을 붙여도 차별은 더욱 심각해 지는 나라.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몸에 불을 붙여도 관심 갖는 언론 하나 없는 나라. 수 백 미터 CCTV탑 위에서 노동자가 일주일이 넘게 “박성수 이랜드 회장은 나서서 문제 해결하라”를 외쳐도 그저 출장 때문에 미국에 나가버리면 그만인 나라.

 

전태일 열사가, 이용석 열사가, 하중근 열사가, 정해진 열사가 그렇게 잊혀지는... 이것이 2007년 한국의 진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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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대접 받으려 한 죄 밖에”

 

“사람대접 받으려 한 죄 밖에”


정해진 조합원 분신


27일 오후 2시경 인천 부평구 창천동 영진전업사 앞에서 집회 도중 분신한 정해진 건설노조 조합원이 7시간 여 만인 오후 9시경 끝내 숨졌다.

"파업투쟁 정당하다, 유해상을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인 정해진 조합원은 분신 직후 부천 순천향병원에서 1차 응급치료를 거쳐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돼 심폐소생술 등 치료를 받았으나 전신 40%정도에 3-4도의 화상으로 상태가 위독해 끝내 숨을 거두었다.




한강성심병원 앞에는 분신 소식을 들은 민주노총과 건설노조, 전기분과 등의 관계자들이 모여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다. 몇 몇 조합원들은 “참담하고 안타깝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분신한 정해진 조합원이 속해 있는 건설노조 인천지부 전기분과의 석원희 분과장의 얘기를 들어봤다.


“우리는 그동안 사람대접도 못 받고 살았다”


석원희 분과장은 정해진 조합원을 “훈훈하고 착한, 후배들과 동료들 모두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전했다. 정해진 조합원은 늦게 파업에 결합했던 것이 미안해 밤이면 영진전업 앞에 쳤던 천막을 지켰다고 한다. 지난 추석 때도 정해진 조합원은 천막을 지켰다.


정해진 조합원은 지금 사태를 불러 온 유해상 씨가 사장으로 있는 영진전업에서 일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해진 조합원은 영진전업에서 해고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귀국을 해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했다. 석원희 분과장은 “정해진 조합원이 유해상 사장의 비인간적 행태를 잘 알기 때문에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것 같다”라고 전했다.


이어 석원희 분과장은 “우리는 그동안 사람대접도 못 받고 하루에 12시간, 13시간 일해 왔다”라며 “그래서 사람대접 해달라고, 근로기준법 지키라고 사용자들에게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했던 것”이라고 그간 과정을 설명했다. 건설노조 인천지부 전기분과는 오늘로 파업 131일 째를 맞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사측이 동원한 직원들의 폭력이었다. 지난 19일 새벽 5시 40분 경 인천지부 전기분과 조합원들이 영진전업 앞에 쳐 놓은 천막으로 한국노총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건설노조에 따르면 한국노총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온갖 욕설을 퍼붓고 천막을 강제로 철거했다.


또한 3일 전에는 노조 측이 안전지적을 하기 위해 작업현장을 방문한 과정에서 또 다시 사측이 고용한 용역직원들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에 노조 측은 이 사건을 경찰에 고발한 상황이다. 오늘 열렸던 집회는 사측의 천막 강제철거와 폭력행사를 규탄하기 위해 열렸었다.

정해진 조합원이 죽음을 맞이한 한강성심병원은 화상전문병원으로 전기분과 조합원들이 가장 오기 싫어하는 곳이라고 한다. 2만 2900볼트 이상의 전기를 만지는 그들에게 화상은 매우 두려운 존재이며, 그 동안 많은 동료들이 화상으로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죽어가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해진 조합원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 이 병원에 들어온 것이다.


석원희 분과장은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27개 전기업체를 진두지휘 하고,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사장들까지 협박했던 유해상 영진전업 사장이 나서야 한다”라며 “유해상 사장이 노동자의 존엄성과 노조를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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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의류업체 GAP, 아동노동 착취

갭 인도 하청공장 노예노동 폭로돼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 2007년10월30일 15시04분

미국계 캐주얼 의류업체 갭(GAP)의 인도 하청 공장이 아동노동착취를 통해 저가 의류를 생산한 것이 폭로되었다.

 

영국 일요신문인 옵저버는 28일자를 통해 델리의 하청공장에서 어린이들이 노예처럼 협박과 구타를 당하고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저가의류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인도 델리에 위치한 하청공장에서 어린이들은 하루 16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에 일부는 아예 임금조차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어린이들이 만들고 있는 상품의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 또래의 아이들이 입을 갭 키즈(GAP Kids)로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될 예정이었다.

 

갭은 마돈나와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라 제시카 파커 등 유명 연예인들이 애용하면서 유명한 의류 브랜드가 되었다. 작년에는 아프리카 등에 대한 자선 신탁재단을 설립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으로서 이미지 구축을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 배설물 넘치는 변기에 고무파이프로 두들겨 맞기도

 

하청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미토시는 옵저버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여름 가족들에 의해 공장주에게 팔려와 하루에 16시간씩 손바느질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미토시는 “다른 40명의 아이들과 함께 여기로 보내졌다. 사장은 내게 아버지에게 지불한 돈만큼 일을 할 때까지 집에 갈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한 푼도 돈을 받지 않고 일한다”고 말했다.

 

아미토시와 다른 아이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곳은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고, 변기는 배설물로 넘치고 있었다고 옵저버는 전했다.

 

지바라고 밝힌 12세 가량의 어린이는 옵저버에 “우리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폭력을 쓴다”며“지난주에는 새벽부터 밤 1시까지 일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운다면 고무 파이프로 두들겨 맞는다. 남자 아이들 중 몇 명은 기름이 묻은 옷을 입에 무는 벌을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번 옵저버의 폭로로 갭은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갭은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며, 조속히 사태 해결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갭에서는 이번에 폭로된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며, 확인된 아동노동 착취로 만들어진 옷에 대해서는 납품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아울러 갭 납품 업체와 하청업체들은 아동노동을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덧붙이며, 사태의 책임을 인도 현지의 하청업체에게 넘겼다.

 

갭, 2004년에도 아동노동 착취 시인해

 

그러나 갭이 아동노동 착취로 비난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4년에 갭은 최저임금 이하로 아동노동을 고용하고, 물리적 폭력과 가혹행위가 일부 하청공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한 바 있다.

 

옵저버는 한 통계 조사에 따르면 인도 경제의 20퍼센트가 아동노동에 의지하고 있으며 14세 미만의 550만 명의 아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당시 갭은 사회적 비난에 직면해 136개 하청업체와 계약을 철회한 바 있다.

 

아동노동근절에 대한 활동을 해 온 인도의 쉬오타 싱 교수는 영국, 미국, 유럽 등 서구에서 저가 의류가 판매되는 한, 비도덕적 하청업체들이 아동노동을 활용하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아시아 저개발국은 서구사회에 비해 노동 규제가 취약하고, 값싼 노동력을 구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어, 많은 초국적 기업들이 아시아 지역에 하청업체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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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으로 '검은 목요일'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으로 '검은 목요일'

노조 측 22일 추가파업 논의 예정

 

예고되었던 프랑스 공공부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17일 8시부터 시작되었다. 현지 언론에서 '검은 목요일'이라고 부르며, 파업 시작 전부터 긴장을 감추지 않았다. 18일 목요일 오전 출근시간 대부분의 교통은 마비되었다.

 

이번 파업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5월 취임한 후 첫 총파업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프랑스 병"의 '약'으로 삼고 있는 대통령과, 이것을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노동계사이의 한판 힘겨루기 인 셈이다.

 



9월 말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공부문의 특별연금제도를 개혁하고, 공무원 수를 대대적으로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맞서 프랑스국영철도(SNCF), 파리철도공사(RATP)를 비롯한 전기, 가스 등 공공 부문의 노동자들이 17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파리철도공사(RATP)에서는 약 10퍼센트의 철도노선이 운행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 운행차량 수는 약간 우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속철도(TGV)를 이용하는 승객은 많이 줄어 역사는 한산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버스도 약 15퍼센트만 운행을 했다. 출근시간 대에도 대부분의 학교가 휴무에 들어가는 등 큰 혼란은 없었던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이번 파업에는 철도, 가스, 전기 부분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업에 참가한 철도 노동자들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연금제도뿐만 아니라,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스 철도산업은 현재 구조조정 중에 있으며, 300여개의 역이 폐쇄될 예정이다. 철도 노동자들은 300여개의 철도역사가 문을 닫을 경우 고용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계획을 철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맥 우라타 ITF노조 운송분과 간부는 “전 세계에 걸쳐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노동자들이 쟁취한 양질의 삶의 조건들을 빼앗기고 있다”며 사르코지 대통령의 개혁에 대해 비난하고, “정부와 관리자들은 반드시 노동조합과 앉아서 이 사안에 대한 사회적 대화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철도 관련 기업들과 정부는 아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별다를 답변을 하고 있지 않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정부의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다라며, 개혁을 강행할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애초 24시간으로 예정되었던 총파업은 하루를 넘겨 일부에서는 19일 오전에도 계속 파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22일 모임을 갖고 추가파업일정에 대해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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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국주의의 사악한 역사 -다함께 펌

미 제국주의의 사악한 역사
조성민
19세기 말 한줌의 유럽 열강은 자기들끼리 세계를 분할했다. 미국이 그 과정에 뒤늦게 참가했기 때문에 미국의 지배자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신속하게 행동했다. 미국이 첫 번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중남미였다. 미국의 주요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지가 됐듯이 남아메리카는 북아메리카의 것이 돼야 한다." 즉 그들의 결론은 그 곳이 자신들의 제3세계라는 것이었다.1)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889년 미국 지배자들은 가장 힘이 '약한' 유럽 식민 열강이었던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는 스페인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터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매킨리는 자신들의 개입이 스페인에 맞서는 쿠바의 민중 반란을 지지하기 위한 것인 양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스페인에 승리한 이후에도 쿠바에 자유는 오지 않았다. 미국은 195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쿠바에 계속해서 독재정권들을 세웠다. 미국은 거듭 해병대를 파병해 자국 설탕 회사들의 이윤이 위협당하는 일을 막았다.
쿠바 점령 이후 미국은 제국주의를 향한 길을 밟아 왔다. 마침내 미국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최고의 초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최근만 해도 미국은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을 주도했고, 이라크를 공습했으며, 수단에 미사일을 퍼부었다. 한반도 역시 미국에 의해 1990년대에만 두 차례의 전쟁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미국은 언제나 이런 공격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말로 치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이윤과 패권을 위해 전쟁을 일으켜왔을 뿐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군사 개입을 주도했던 미군 장교 스메들리 버틀러는 그가 실제로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 바 있다.
 
"나는 현역 해병대원으로서 34년을 보냈다. 그 시기 동안 나는 대기업과 월 스트리트와 은행가들을 위한 고급 깡패로 내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
"한마디로 나는 자본주의의 해결사였다."
"나는 1914년에 미국의 석유 기업을 위해 멕시코가 안전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나는 아이티와 쿠바를 씨티 은행이 수익을 긁어모으기 괜찮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나는 1909∼1912년에 브라운 브라더스 국제은행을 위해 니카라과에 평화를 확립하는 데 일조했다."
"나는 1916년에 미국 설탕 기업을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을 흔들었다. 나는 1903년에 미국 과일 회사들을 위해 온두라스를 '정상화'하는 데 일조했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개입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미국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이다. 한 국가에서라도 자신들의 이윤이 침해당할 처지에 놓이면 미국은 서슴지 않고 무력을 사용해 왔다.
둘째, 미국 자본이 거의 진출해있지 않은 후진 국가라 하더라도 그 국가에서 좌파 정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도미노 현상처럼 인근 국가로 파급될 위험이 있다. 바로 그럴 때 미국은 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라나다와 같이 인구가 10만 정도밖에 안되는, 지도상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조그만 나라에까지 미국은 침공했다.
셋째,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미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려 할 때 미국은 특정 나라를 희생양 삼아 군사 행동을 저질러 왔다. 지난해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북한에 대한 전쟁 위협도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나는 이 글에서 미 제국주의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홀로 제국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프랑스·독일·소련·중국·일본 등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있고 그들 역시 모두 악행을 저질러 왔다. 다만 미 제국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잔인한 행동을 일삼아 왔다는 점에서 나는 미국을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범죄를 폭로하는 대표 사례로 들추어 내고자 한다.
 
니카라과
 
중남미는 미국과 같은 대륙에 속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침략을 가장 많이 당했던 지역이다.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때문에 희생됐다.
니카라과에서 미군은 세 차례에 걸쳐 반미 정부를 전복했고 장기간의 가차없는 탄압 통치를 자행했다. 미국이 두 번째로 반미 정부를 정복한 이후 세워진 소모사 정권은 잔혹한 독재로 유명했다. 그는 야당 인사들을 암살하고 자유주의 언론조차 파괴했으며 게릴라 투쟁을 벌이던 산디니스타 전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1979년 소모사가 타도되기 직전 그는 산디니스타와 전쟁을 하면서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의 민간 거주지역을 폭격해 수만 명을 참살하는 대규모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2) 그의 일가족은 니카라과 산업 대부분의 실질적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즈벨트는 소모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새끼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개새끼(Our son of bitch)이다."
산디니스타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자 미국은 우익 군사집단인 콘트라 반군을 후원했다. "미국이 콘트라에게 지원한 만큼, 아니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비슷한 자원을 가졌던 게릴라 부대는 없었다. 그 정도의 자원이라면 미국에서라도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 반란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3)
1990년 2월 니카라과에서 자유 선거가 실시되자 우익인 비올레타 차모로는 "산디니스타가 계속 집권하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협박인지 선거 운동인지 모를 말을 해대고 다녔다. 그녀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고립된 니카라과에서 미국은 산디니스타 정부를 제거하고 친미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과테말라
 
미국의 군사 개입과 대기업 이윤 사이의 관련은 중미 국가인 과테말라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944년 과테말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민족주의적인 정부가 수립됐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는 200만 제곱 킬로미터가 넘는 과테말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가 토지의 85퍼센트를 놀리는 동안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주 적은 경작지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아예 경작지를 갖지 못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토지 국유화 강령을 내세웠다. 그것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의 이윤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1952년도 CIA의 비망록은 "외국의 경제 이해, 특히 유나이티드 프루투 사에 대한 박해"를 포함한 민주 자본주의 정부의 "과격한 민족주의적 정책"이 "거의 모든 과테말라 국민들로부터 지지나 묵인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4)
CIA는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954년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 이후 테러가 저질러졌고 과테말라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 됐다. 쿠데타 이후 2달만에 8천여 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살해당했다. 학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과테말라 정부는 1980년대 초반에도 수만 명의 과테말라 민중들을 도살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1992년 상반기에만 3백99명이 보안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1990년 9월 어린이 시체 3구가 발견됐는데 모두 귀가 잘리거나 눈알이 빠져있는 상태였다.5)
친미 독재정권의 쿠데타 이후 미국 자본은 과테말라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윤을 긁어모았다. 미국 의류회사인 필립스-반 호이센 사는 과테말라 노동자들을 선풍기도 없는 폐쇄된 창고에서 하루 16시간씩 일을 시키면서도 고작 2달러밖에 안 되는 임금을 지급했다.
 
파나마
 
1981년 파나마의 포퓰리즘 지배자였던 토리호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미국은 파나마에 손을 뻗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 이후 1983년에 친미 독재 정권인 노리에가가 권력을 잡았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약 밀매 범죄 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1972년부터 알고 있었다. 1983년 미국 상원의 한 위원회는 파나마가 마약 자금의 출처이자 마약 밀매의 본산지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노리에가는 미국에게 충실한 독재자였다.
노리에가가 미국에 충성하는 한 그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었다. 1986년 미국의 한 마약 단속 책임자는 노리에가가 "강력한 반(反)마약 밀매 정책"을 펴고 있다면서 그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법무 장관 에드윈 미스는 노리에가의 범죄 행위에 대한 법무성의 조사를 중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노리에가가 파나마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기 위해 미국의 지위를 침범할 듯한 모습을 보이자 미국의 태도는 돌변했다. 노리에가가 독자적이 된다는 것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축소된다는 것을 뜻했다. 미국은 갑자기 노리에가를 깡패이며 마약 장사꾼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미국이 폭로한 사실들은 그 동안 미국 자신이 쉬쉬 하면서 감추어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파나마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리에가에 대한 비난 선전을 퍼붓기 시작했다.
처음에 미국이 시도한 군사 쿠데타는 실패했다. 그러자 1989년에는 미군 자신이 직접 파나마로 침공했다. 2만 6천 명의 미군에 의해 약 1만여 명의 파나마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 운하 관리권 이양 시기에 맞춰 다시 부유한 백인 특권층에게로 권력을 이양해놓고 미군은 되돌아갔다.
 
칠레
 
미국은 칠레에서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켰던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칠레 기업 중 미국 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기업은 전체의 61%에 달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이다. 1970년에 총수출액 중 구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75.8%나 됐다. 미국의 양대 구리회사인 아나콘다와 케네코트가 칠레 구리 생산에서 주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아옌데가 구리 광산을 국유화시킨 것은 미국의 분노를 샀다.
또한 1960년대 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반미주의가 급속히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옌데의 당선은 미국에게 큰 위협이 됐다. 미국은 아옌데의 당선으로 잇따라 다른 국가에서도 좌파 정치 세력들이 지지를 얻을까봐 심각하게 걱정했다. 헨리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칠레에서 아옌데의 집권은 우리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동맹국들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선거 직후 미 국무부는 코리 미 대사에게 "아옌데가 집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권위"를 부여했다.
미국은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미국은 세계은행에 압력을 넣어 칠레에 대한 모든 차관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경제 원조와는 달리 미국은 칠레에 대한 군사 원조는 더 늘렸다. 이것은 정부를 취약하게 만들고 우파들이 더 참을 수 없도록 만들어 군사 쿠데타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CIA 국장이었던 콜비에 따르면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CIA는 칠레 좌파를 무너뜨리려는 비밀 활동에 무려 8백만 달러나 사용했다.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동안 미·칠레간에 우니타스 합동 기동 훈련이 실시됐으며, 미 해군함 4척이 칠레 앞바다에 있었다. 만약 군부가 분열돼 내전이 발생하면 바로 개입하는 것이 그 전함들에 부여된 임무였다. 미국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성공하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수만 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이 끔찍한 학살자를 계속해서 후원했다.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저질러온 범죄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국가중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이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들은 다른 모든 대륙에서도 일어났다.
 
아프리카 - 앙골라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파시스트 독재가 타도됐다. 포르투갈 지배자들이 약화된 틈을 타 앙골라에서는 1975년 대중 봉기가 일어났다. 포르투갈 식민 통치자들이 쫓겨났고 민족주의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앙골라의 우익, 특히 요나스 사빔비의 앙골라완전독립민족동맹(UNITA)은 앙골라인민해방군(MPLA) 정부의 전복을 기도했다.
미국은 앙골라에서 좌파가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할 태세가 돼 있었다. 앙골라 내전 초기부터 CIA는 UNITA에 무기를 제공했다. 1981년에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 정부는 UNITA 같은 조직들에게 공개적으로 무기를 보내는 것을 금지한 의회 결의안을 폐기했다. 그 결과 앙골라는 20년 동안 유혈 참사에 빠져들었다.
앙골라 내전으로 이미 7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3분의 2가 어린이였다. UNITA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주된 수단으로 삼았고 마을의 땅에 지뢰를 묻었다. 그 결과 6만 5천 명의 사람들이 다리가 잘렸다.
 
아시아 - 인도네시아와 이라크
 
미국이 자행했던 공작의 가장 끔찍한 사례는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 수카르노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수카르노는 좌파라고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토지개혁을 제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 성향은 미국에게 근심거리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50만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는 인도네시아 유일의 대중 정당이었고, 소련과 동유럽 등 스탈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 최대 규모의 비(非) 집권 공산당이었다. PKI는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카르노는 미국이 보기에 너무 유약하고 좌파들을 탄압하는 데 소심한 인물이었다.
미국은 수카르노를 제거하기 위해 1950년대 말에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미국은 군에 대한 지원, 인도네시아에 대한 경제 원조 삭감을 통해 군부의 불만과 자신감을 부추겼다.
1965년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수하르토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수하르토는 정권을 잡자마자 학살을 자행해 적어도 50만 명의 PKI 당원 및 민간인들을 죽였다. 미 CIA는 수하르토에게 자신들이 파악한 5천여 명의 PKI 당원 명부를 제공했다. 그들이 살해당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수하르토는 1975년 미국의 지원 하에 동티모르를 점령해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수하르토에 대한 서방의 지원이 바로 동티모르의 잔혹한 학살을 낳았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다른 서방 국가들이 안전하게 석유를 공급받으려면 미국의 힘에 의존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부시와 클린턴은 사담 후세인을 독재자라고 비난했지만 오랬동안 미국은 바로 그 독재자를 후원해 왔다. 이전에는, 미국은 이라크의 민족주의자인 카심을 제거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을 지원했다.
1979년에 이란의 팔레비 왕정이 타도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하자 미국은 힘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이란에 대한 장기간의 유혈 낭자한 전쟁을 벌이도록 사담 후세인을 부추겼다. 미국은 사담이 이란 군대와 쿠르드족 민간인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못 본 척 보아넘겼다.
그러나, 후세인은 미국의 지지에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지고 거만해져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것은 국제 원유 가격에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고 이는 서방 지배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부시는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미국은 과거와는 태도를 바꿔 후세인을 '제2의 히틀러'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의 공습으로 1991년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바그다드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크루즈 미사일로 숯덩어리가 됐다. 징집된 십대 이라크 병사들이 사막에서 수천 명씩 학살당했다. 쿠웨이트로부터 바스라 도로를 따라 피난하던 수천 명의 이라크 시민들이 폭격으로 사지가 산산조각났다.
1991년 1차 걸프전과 미국의 경제 제제 결과로 적어도 50만 명의 이라크 어린이가 죽었고 1백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추산된다. 그런데도 UN은 아무런 손도 못 쓰고 있다.
 
패배도 한다 - 베트남
 
미국은 188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민족해방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군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1954년에 결국 프랑스가 패배하고 물러나자 미국은 이번에는 베트남을 자신의 관할권 아래 두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물리친 베트남 인민들은 사기 충만해 있었고 투철한 반제국주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적으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미국의 베트남 지배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 확실했다.
1965년에 국무부 장관 딘 러스크는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동남아시아가 "엄청난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풍부한 천연 자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진정으로 두려웠던 것은 베트남에서 좌파 민족주의자가 집권함으로 인해 그 운동이 전염병처럼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정권이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에서 미국은 억지로 남베트남 정부를 살려놓은 후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 전쟁은 소위 '비둘기파'라고 인식되고 있는 민주당의 로버트 케네디에 의해 이루어졌다.
베트남 민중들은 소련이나 중국의 도움 없이 미국에 맞서는 인민 전쟁을 벌였다. ― 당시 소련은 스탈린이 죽고난 후 권력 이양 문제를 놓고 국내적 문제에 골몰해 있었고, 중국은 원래 국경문제로 베트남과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베트남 민중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를 이용해 베트남 인민들을 학살했다. 미국은 네이팜 탄을 민가나 도로에 퍼부어댔고 고엽제를 뿌려댔으며 점령한 마을의 주민들을 몰살시켰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동안 모든 나라가 사용했던 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퍼부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은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베트남 전에서 미국이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는, 베트남 민중들이 결연한 자세로 반제 투쟁을 벌였던데 반해 미군 병사들은 자신감이 없었고 부대의 사기와 기강이 무너진 데 있었다. 미국 내 징집 기피자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미국의 역사가 마릴린 영은 베트남 장군과의 대화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용병술을 다르게 구사했다면 결과는 달라졌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는 이미 당신들 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이었습니까?"
많은 이들이 미국의 행동들을 보면서 미국은 무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사악하고 강력한 제국의 행동을 도대체 저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쉽게도 촘스키는 미국의 실책과 패배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베트남 인민들의 영웅적인 항쟁은 미국을 물리쳤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는 전 세계 좌파 활동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국제적인 분쟁에 개입하는 데 주춤했으며 사기저하됐다.
미국은 1980년대 말에서야 비로소 베트남 증후군에서 회복해 파나마 침공이나 걸프전같은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다.
 
한국
 
미 제국주의 문제는 한국의 대중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고 남한에 이승만 정권을 세웠다. 1950년에는 소련과의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았다. 미국 폭격기들은 한반도 대부분을 파괴했다.
미국의 장군 오도넬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반도 거의 전체가 끔찍히도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고 말하겠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서 있다고 할 만한 건물이 없었다."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핵폭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무기인 네이팜 탄(소이탄)을 실험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한국의 모든 독재자들을 후원했으며 전두환의 공수부대가 광주의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묵인했다.
주한미군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사용료도 안 내는 기지를 남한 곳곳에 두고 있다. 되레 주한미군은 전국에 1백여 개의 기지를 두고 한국정부로부터 매년 30억 달러에 이르는 방위분담금을 받는다.
최근 노근리 양민학살, 매향리 사격장 폭탄 투하, 용산 미군기지에서 독극물을 방류한 것, 불평등한 SOFA 문제 등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돼 왔다. 그 때문에 현재 미군은 궁지에 몰려 있고 독극물 방류에 대해 형식적인 사과나마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에서의 대중적 반미 시위,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 섬의 강력한 사격장 폐쇄 시위 등 국제적 항의 운동에 부딪혀 있다. 강력한 대중 시위만이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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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UAW 협상, '타협'인가 '패배'인가

M-UAW 협상, '타협'인가 '패배'인가

노동조합이 구조조정 비용 떠안아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 2007년10월11일 17시13분

전미자동차노조(UAW)는 9월 26일 GM사측과 노사협상의 결과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고 발표했다.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GM 전국 73개 공장을 세우고 7만 3천 명이 이틀간 파업에 들어간 결과였다.

 



합의안에 따르면, GM사측은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한 해외진출 및 감원조치를 중단하거나 줄이게 된다. 대신 사측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퇴직자의료보험펀드(VEBA)를 조성, 그 운영의 책임을 노동조합이 지게 되며, 새로 고용되는 노동자들에게는 이중임금체계를 적용하게 된다. 복지와 임금전략대신 고용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GM노동자들은 10월 초부터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진행해왔으며, 10일(현지시간) 투표를 마감했다.

 

일부 GM현장 활동가들은 이번 합의안에 우려를 표하고, '부결 캠페인(Vote No)'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잠정합의안이 부결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블룸버그 통신은 현재 60여개 지부 가운데 적어도 29개 지부가 협약안을 승인했으며, 5개 지부가 거부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전미자동차노조와 GM의 협상결과는 미국 자동차산업 노동자뿐만 아니라, 2008년 협상을 앞두고 있는 캐나다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관련 기업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00년대 초부터 앞 다투어 감원계획은 비롯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해왔다.

 

이런 배경에서 전미자동차의 고용과 임금, 복지를 맞바꾸기 한 전략은 '타협'이 아니라 또 한 번의'패배'라는 평가들이 제기되고 있다.

 

샘 긴딘 캐나다 요크대학 교수는 이번 합의안에 대해 "한 쪽만의 계급 전쟁"이라는 표현으로 사측의 일방적인 공세에 대응을 조직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고용, 유지될 수 있나?

 

샘 긴딘 교수는 매번 "고용 안정"이라는 단어가 협상결과 나오기는 했으나 1970년대 이후 계속 고용이 감소해 왔다는 점을 들어 사측의 약속에 신빙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0년대 미국 전체에서 고용된 GM 노동자 수는 약 45만 이었다. 그러나 이 수는 80년대 35만 수준으로 줄었다가, 1994년 24만 6천으로 하락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7만 3천명이 고용되어 있다.

 

그러나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번에 합의된 이중임금체계이다.

 

전미자동차 노조는 신규로 채용되는 '비 핵심'일자리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차등적인 임금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대해 합의했다.

 

현재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의 평균임금 수준인 시급 27달러 수준이지만, 신규로 채용되는 '비 핵심' 일자리 노동자들은 절반 수준인 14달러에서 14.6달러의 임금을 적용받는다. 또, 기존 노동자들에 대해 보장되었던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

 

이등 노동자

 

'비 핵심' 일자리에는 기계하위부품 조립, 기계가공, 재료취급, 시설관리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직종의 노동자들은 전미자동차노동조합의 조합원에 속해잇다. 10월 4일자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는 비 핵심 직종으로 분류되는 일자리는 현재의 1/4에서 1/3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전미자동차노동조합은 이번 합의를 통해 현재 고용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들어오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크게 악화시켰다는 비난은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샘 긴딘 교수는 이번 합의로 노동조합이 더욱 약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이번 협상결과가 조립 공장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부품산업 노동자들에게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예전에는 GM이 저임금 부품 공장을 외주화하고, 이것을 조립 노동자들에 대한 위협으로 사용했다. 이제는 더 나아가 부품 산업에서 임금을 낮추지 않는다면 외주화를 철회할 것이라고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중임금체계에 대한 합의를 비판했다.

 

또, 기존 정규직의 GM노동자들은 이중임금체계 하에 고용된 저임금 노동자로 급격히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 GM노동자의 63.5%가 5년 안에 퇴직하기 때문이다.

 

의료보험, 힘들면 노조에 넘겨라?

 

이번 합의안에서 또 하나 주목받고 있는 것이 퇴직자의료보험펀드(VEBA)이다.

 

전미자동차노조와 GM은 독립적인 퇴직자의료보험펀드(VEBA)를 조성하고, 노조측에서 2010년부터 이 펀드를 운영하는 데 합의했다. 이를 위해 GM은 350억 달러의 주식 및 기타 자산을 노조가 관리하는 퇴직자의료보험펀드에 투입할 예정이다.

 

국가의료보험 시스템이 없는 미국에서 노동조합은 '민간 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한 때 이런 사적 복지 시스템은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에게 힘의 상징이 되기도 했지만, 이것이 위기에 처했다고 샘 긴딘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의료보험 비용의 상승이 자동차 업계의 경쟁에서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GM은 현재 직원 수 8만 명의 5배가 넘는 퇴직자 가족의 의료보험을 부담하고 있으며,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한 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포드도 건강보험 부담을 덜기 위해 내년 1월부터 5만 7천명에 달하는 퇴직자들에 대한 보험 혜택을 중단할 계획이며, 크라이슬러도 1만 4천명에 대한 유사한 조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퇴직자의료보험펀드를 만들어 노조가 운영하게 될 때 나올 문제점에 대해서도 제기되고 있다. 펀드가 기대수익에 미치지 못하거나, 의료비가 급격히 상승할 경우 모든 부담이 고스란히 전, 현직 노동자들에게로 전가된다는 것이다.

 

전미자동차 노조는 이미 엔진 제조사인 디트로이트 엔진과 중장비 업체인 카터필러 등과의 합의를 통해 퇴직자가족의료비펀드를 운영하고 있으나, 현재 자금이 고갈된 상태라고 부결 운동을 펼친 현장 노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GM의 퇴직자의료보험펀드도 이들의 전철을 따를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부결운동을 펼치고 있는 GM의 현장 노동자 그렉 쇼트웰은 "위험 부담을 은퇴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로 전가하는 것"이며 "GM은 노동자들에 대한 의료보험 책임에서 해방되었다"고 이번 합의를 비판했다.

 

미국 내에서 건강보험 혜택을 제공하는 기업의 비율은 2000년 69%에서 현재 60%로 하락했다. 미국의 기업들이 점점 더 노동자들에 대한 의료보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기업들은 이번 노사합의안으로 기업들의 부담으로 작용해오던 미국 건강보험 체계의 근간을 뒤흔들 일대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합의 직후 9월 29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번 합의로 대통령 선거에서도 건강보험체계 개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하며 합의의 의미를 주목하기도 했다.

 

아울러 월 스트리트 저널은 만약 포드와 크라이슬러가 유사한 합의에 도달한다면 "하나의 펀드로 운영될 경우, 미국에서 40위권의 연금펀드가 될 것"이라며 펀든 관련 업계에서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퇴직자의료비펀드를 보전하기 위해 현직 노동자들은 향후 4년간 생계비조정(COLA)에 따른 임금인상분도 포기했다.

 

대신 이들에게는 3천 달러의 '합의 보너스'가 주어진다.

 

이번 GM-전미자동차노조의 협상 과정에서 GM의 노동자들은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전국규모의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 파업이 협상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볼멘 목소리는 이번 합의가 과연 '고용'이나마 지켜낼 수 있는 방어막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도 자동차 산업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은 조직적 대응과 반발로 이어지지 못했다. 심지어 한 노동운동가는 전미자동차노조 22지부의 한 조합원이 자신에게 이번 파업이 무엇을 위한 파업이냐고 묻기까지 했다며, 미국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의 현실을 말하기도 했다.

 

전미자동차노조가 주장하듯 '고용안정'이 이번 합의로 지켜질 수 있을지, 아니면 저항할 힘을 잃은 미국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공세에 다시 한 번 패배한 것일 뿐인지는 앞으로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전미자동차노조는 GM에 이어 미국 내 업계 3위인 크라이슬러와의 노사협상에서 10일(현지시각) 잠정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올해에 이어 내년에는 전미자동차노조가 포괄하고 있는 캐나다의 자동차 업계와의 노사협의가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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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1% 미만 부자가 전세계 부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전세계 1% 미만 부자가 전세계 부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 보스턴컨설팅그룹 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전 세계 부는 100조달러로 1년 전보다 7.5% 증가, 5년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또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부자 가구는 14% 늘어난 960만가구로, 전세계 가구의 0.7%에 불과하지만 전체 부의 3분의 1인 33조2000억달러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자산을 500만달러 이상 보유한 부유층은 전세계 0.1%에 불과하지만 작년 전세계 부의 17.5%를 확보하고 있다. 부자들이 부를 더욱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저축 증대와 함께 주식, 채권 등 투자자산의 성장 덕분으로 분석됐다. 보스턴컨설팅은 “글로벌 주식 시장은 연간 20% 상승했으며 북미 부자들의 경우 주식 보유 비중이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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