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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 양극화 현상 갈수록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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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니다”

“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니다”
[인터뷰]36주기를 앞둔 어머니 이소선의 목소리
오도엽 기자 odol@jinbo.net
전태일열사가 불이 된지 서른여섯 해가 됐다. 고혈압과 당뇨, 며칠 전에는 방에서 넘어져 걸음마저도 절룩거리는 열사의 어머니께 11월 13일이 다가오니 마음이 어떠시냐고 물었다.

“요즘 잠을 잘 못자. 며칠 전에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책을 봤지. 돌베게에서 나온 책이야. 나온 지 오래된 책인데 나는 책이 나온 지도 몰랐어. 밤새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88년 책이 나왔지만 누구도 어머니께 책이 나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책을 보면 어머니가 아파할 것을 안 주위의 사람들은 어머니 눈에 책이 띄지 않게 하였다.

“만호(현재 전태일기념사업회 황만호 사무국장)한테 그 책을 달라고 했더니, 지도 모른데. 그래서 내가 돌베개에 가서 사오겠다고 하니 갖다 주는 거야. 종득(전태일기념사업회 민종득 상임이사)이한테 전화해 왜 책 나온 거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까, 어머니 알면 아파하실까봐 그랬다는 거야.”

어머니는 열사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든지 강연을 하고나면 사흘 밤은 꼬박 앓아누우신다고 한다. 책을 펴고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커다란 돋보기로 밤을 새워 그 책을 읽은 어머니는 아직도 아프다.

책을 보신 아픔이 사라지기도 전, 다시 어머니께 열사에 대한 질문을 했다. 아마 11월 한 달은 꼬박 아파하셔야 할 것이다.

가시지 않은 아픔 위에

인터뷰를 시작하자 대뜸하시는 말이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니야”다.

“쌍문동 이백팔번지에 살 때 풀밭에 천막을 치고 살았지. 보로꾸를 세면도 바르지 않고 쌓아두고 천막을 친 게 집이야. 세면을 바르면 철거반원이 와서 허물면 보로꾸가 깨지잖아. 태일이는 철거반원이 오면 미리 벽돌을 내려두거든. 철거반원한테 당신들이 허물고 가도 우리는 잠을 자려면 또 벽돌이 쌓아야 한다, 벽돌이 깨지면 돈을 주고 사야하니까 미리 벽돌을 치운다고 한 거야, 그 뒤론 태일이가 없어도 철거반원이 오면 조장이 그 집은 벽돌 깨지지 않게 조심히 내려놔 하는 거야. 그러면 태일이가 일을 마치고 와서 다시 쌓았지.”

열사가 일을 마치고 나면 집에 오면 밥도 먹지 않고 벽돌을 쌓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밥을 지어 밥 먹고 하라고 차려주고 물을 뜨러 나갔다 오면 밥은 먹지 않고 일을 하고 있더란다.

“밥 먹고 하라니까 하면 먹었다는 거야, 물 뜨러 간 사이에 밥을 다 먹을 수 없거든. 아랫집에 애들 둘이 사는데 벽돌을 쌓다보면 집들이 허물어져 아랫집이 훤히 보이는 거야. 아이들이 굶고 있거든, 그러니까 지 밥을 갖다 준 거야, 반이라도 먹고 주지 그러면, 저야 배고프면 어떻게라도 먹을 수 있지만 쟤들은 말도 못하고 굶어야 하잖아요 하는 거야. 태일이가 풀빵을 여공들에게 사줬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어머니는 아들이자 열사 전태일을 투사도 열사도 아닌 ‘사람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가 불이 되고, 청계천의 노동현실을 보고 일어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태일이가 그 날(11월 13일) 1시까지 청계천 육교로 오라는 거야. 머리도 깎고 작은아버지가 사준 신발을 신고, 바지도 다려 입고, 바바리도 입고 좋게 꾸몄지. 밥상에 앉아서는 여동생 둘한테는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엄마 말 잘 들으면 부끄럽지 않게 산다 하는 거야 뭐할라고 지금 그 말 하냐 물으니, 시간 있을 때 할라꼬 그런다는 거야, 나한테는 정말 하루만 그 시간만 내줘, 꼭 와 줬으면 좋겠다 그런 거야, 자꾸 나 돌아보며 가더라구.”

36년 전 11월 13일에

어머니는 가지 않으셨다. 그 날 쌍문동에서 방송을 들으셨다. “쌍문동 이백팔번지에 사는 전태일이 기름을 붓고 몸에 불을 부쳤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야, 기어이 기름을 부었구나….”

조금 뒤 열사의 친구가 용케 잡히지 않고 빠져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려고 택시를 타고 왔더란다. 타고온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버스를 타고 가신다고 했단다.

“19번 버스가 평화시장까지 가거든, 내가 택시 타고 빨리가서 태일이를 보면 기절하고 쓰러질게 분명해, 그래서 버스 타고 가자고 한 거지, 너(전태일)는 갔지만 나는 어찌 할까를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그걸 생각하려고 택시를 안 탔는데 태일이 친구는 그 걸 모르고….”

허연 가제로 칭칭 감겨 입하고 코만 보인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전태일열사는 빨리 죽기 위에 옷 속에 스폰지를 넣고 기름을 부었다.

“엄마 나는 죽을 거야. 옷에 스펀지까지 넣었거든. 빨리 죽으려고. 어머니께 이 추한 모습 안 보여 주려고. 나 살리려고 다른 약 구한다 주사 놔준다 애쓰지 말고 내 말 꼭 들어 줘. 내 말 안 들어주면 나중에 천국에서 엄마 만나도 안 볼거야. 내 말 들어준다고 꼭 대답 해줘.”

그 말은 내 죽음을 헛되지 않게 어머니가 싸워 달라는 부탁이다. “엄마 들어주겠다고 더 크게 말해줘.”

말을 할 때마다 열사의 명치 부근이 부글부글 끓더란다. 그것을 본 의사가 열사의 목청 부분을 따니까,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피가 울컥 울컥 쏟아졌단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내 몸이 가루가 되도 끝까지 할 거다 하니, 더 크게 대답하라고 하는 거야, 말을 할 때마다 피가 폭 쏟아지고 크게 대하라고, 피가 푹 쏟아지고, 그걸 보고 탁 쓰러졌지.”

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뒤로 투사가 되었다. “태일이가 말한 근로기준법 8가지 들어주지 않으면 장례식을 치루지 않는다고 했지, 시체를 동강동강 내서 내 치마 폭에 싸서 이 산에다 묻고, 저 산에 묻더라도.”

당시로 7천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는 유혹도 있었다. “그 착한 아들의 뼈를 팔고 피를 팔아 좋은 집에 사고 따뜻한 밥 먹느니 죽어야지.” 중앙정보부에서 군법회의, 안기부로 어머니의 발걸음은 이천년대로 이어지고 있다.

36주기 추모식보다 앞서는 걱정이 있다. 분열되는 모습이 안타깝다. 쉽게 자신의 밥자리를 찾아가는 옛 식구들 때문에 안타깝다. 남편을 여읜 다음 해에 아들을 잃자 시어머니가 방에 담배를 밀어 넣어주더란다. 넋을 놓을지 모르니 담배라도 피우며 정신을 놓지 말라고. 일흔여덟, 어머니의 정신은 날이 서있다.

"한 번 이 소리하고 나면 사흘 동안 이 속에 들었던 것 까뒤집어 놔았꼬 견딜 수가 없어."

[시] 아들이 내준 숙제 / 오 도 엽
아들이 내준 숙제


나보고 근로기준법 배우라 하는 거야 내가 공장에 다니냐 그걸 배우게 난 그 때 보따리 장사 옷 장사였거든 쌍문동 이백팔번지 풀밭에 천막치고 사니 모기는 물어쌓지 무슨 공부야

부당해고가 뭐야 그 땐 노동자라고는 못했지 근로자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해고시킨 거지 유니온 숍은 큰 회사의 근로자가 전부 조합에 가입하는 거지 저녁에 아들이 와서 물으면 책을 보지 않고 대답해야 했지 그게 숙제야

육 개월 하다 말했지 내가 어디다 써먹을라꼬 그걸 배우겠냐고 픽 돌아누워 잠을 잤지 어머니 곧잘 배우다가 갑자기 안 배울라고 하는지 몰라 내 말 안 듣고 잠만 자려고 하는지 그 날이 오면 어쩌려고 통탄하겠다

일천구백칠십 년 여름 어머니와 아들의 공부 태일이가 말한 그 날은 멀지 않아 찾아왔다 아들이 내 준 숙제 일흔여덟에도 서른여섯 해를 꼬박 늙지 않고 대답을 한다 어머니 이소선은 통탄할 시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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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양극화 현상 갈수록 심화

임금 양극화 현상 갈수록 심화
노동부 ‘2005년 임금구조 통계조사’…대·중소기업, 학력별 임금격차 더 벌어져
 
대기업-중소기업, 학력간 임금격차가 더 벌어지는 등 갈수록 임금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가 지난해 6월 기준 상용노동자 5인 이상 6,495개(약 49만명) 사업체를 표본으로 한 ‘2005년 임금구조 기본 통계조사’ 결과를 31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대기업일수록 높은 임금 수준이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9인 규모 사업체를 100으로 놓고 볼 때 500인 이상 사업체는 지난해 127.8(1.3배)로 2004년의 127.8에 비해 높아졌다. 반면 5~9인 사업체는 지난해 87.7로 2004년의 91.8로 낮아졌다. 이는 그만큼 대-중소기업간 임금격차가 더 벌어진 것을 의미한다.<표2 참조>


또한 고학력화가 진행 중인 가운데 고학력일수록 높은 임금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전체노동자 중 대졸이상 노동자는 2000년 24.0% 2001년 25.2%, 2002년 28.3%, 2003년 28.7%, 2004년 28.9%, 2005년 31.7%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졸 노동자 1인당 임금을 100으로 놓고 볼 때 대졸 노동자는 154.9(1.5배)로 2004년 152.3에 비해 다소 증가했다. 대졸자의 임금수준은 99년 151.7을 보인 이래 2002년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증가추세를 이루고 있는 것. 대졸이상 노동자의 월급여액을 고졸노동자와 비교할 때 2001년 152.3%를 제외하고는 99년 151.7%, 2000년 150.9%, 2002년 149.4%로 축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중졸이하의 경우도 지난해 85.5로 전년도보다 다소 올랐으나 99년 88.9를 보인 이해 해마다 하향곡선을 긋고 있는 등 학력차에 따라 임금격차가 더 벌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표1 참조>


노동자의 고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 평균연령은 37.7세로 99년 99년 35.9세, 2000년 36.2세, 2001년과 2002년 36.5세, 2003년 37.1세, 2004년 37.5세에서 매년 높아져가고 있다.

연령별 임금수준은 남성노동자가 45~49세, 여성노동자가 30~34세에 임금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노동부는 남녀 노동자가 임금 격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남성노동자 대비 여성노동자 월급여액(상여금 및 성과급 제외)은 2002년(64.8%)을 제외하고 99년 63.8%, 2000년 64.8%, 2001년 65.1%, 2003년 65.2%, 2004년 65.7%, 2005년 66.2%로 매년 높아지고 있으나 6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성별 임금격차는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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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 kbs방영

‘KBS독립영화관’ 11월 특집…‘파업전야’ 등 4편 첫 방송

1990년 4월 7일,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예술극장 '한마당', 영화가 상영중인 극장 안으로 한무리의 경찰이 진입합니다. 조명이 켜지고,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영사기가 이윽고 멈추더니 영사기와 플름에 대한 경찰의 압수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상영 시간을 채 다 못 채우고 멈춰선 영화의 제목은 '파업전야'.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받지 않은데다, 파업을 선동하는 불온한 내용이라는 것이 압수의 이유였습니다.

그로부터 16년. 영화 '파업전야'가 지상파 TV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납니다.

▶ [KBS독립영화관]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 예고편 미리보기

■ KBS독립영화관 11월 특집…독립영화 4편 첫 방송

KBS독립영화관(매주 금요일 밤 1시 10분, 1TV)이 오는 3일과 10일 2주에 걸쳐 '한국독립영화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특집방송을 마련합니다.

11월 특집으로 마련된 이번 방송에서는 특히 1970~90년대 한국 독립영화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난 작품들이 방영될 예정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첫주인 11월 3일에는 한국 독립영화 1세대로 분류되는 이익태 감독의 1970년 작 '아침과 저녁 사이', 한옥희 감독의 76년 작 '색동'과 함께, 1980년대 독립영화계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 이정국 감독의 단편 '백일몽'(84년 작)이 방영됩니다.

11월 10일에는 1990년대 한국 독립영화의 상징, '파업전야'가 처음으로 방송 전파를 탑니다.

1990년 세계 노동절 101주년 기념으로 영화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16mm 장편영화 '파업전야'는 바로 한 해 전 장산곶매가 5.18 광주를 소재로 만든 영화 '오! 꿈의 나라'와 함께 8,90년대 한국 독립영화의 지표가 됐던 작품입니다.

이번 특집을 기획한 KBS 송현주 PD는 "70~90년대 우리나라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 역사을 다시 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다"며 "독립영화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 압수·상영금지 속 전국 30만 관람

이번 특집에서는 특히 90년대 초반, 당국의 필름 압수와 상영금지 속에서 '비밀리'에 유통됐던 독립영화 '파업전야'가 처음으로 TV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은, 장윤현 등 4명의 감독이 공동 연출한 '파업전야'는 80년대 말 노동현장의 현실을 담아내며 독립영화계에서 본격적인 사실주의 영화의 등장을 알린 작품.

2천만 원의 제작비로 3개월간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 부평에 있는 한 금속공장에서 촬영했고, 등장하는 배우들 중 상당수가 현장 노동자들이었던만큼 당시 노동현장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990년 4월 7일, 한마당 극장에서의 상영 이틀째 경찰의 압수조치가 시작되면서 사실상 공식 상영 경로가 막힌 '파업전야'는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을 계속했는데요, 당시 영화가 상영되는 대학 구내에서는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 병력과 이를 저지하는 학생들간의 몸싸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국 11개 도시에서 30만 명 이상이 이 영화를 본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영사기와 필름이 압수되던 상황을 TV 방영이 가능하도록 만든 16년의 세월. 그 시간들은 '파업전야'를 공동 연출했던 주인공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4명의 연출자(이은, 이재구, 장동홍, 장윤현) 중 한 사람인 이은 씨는 제작자로 변신해 현재 MK픽처스 대표로 있고, 1997년 '접속'으로 공식 데뷔한 장윤현 감독은, 영화 '텔미 섬씽' 이후 영화 제작투자에 전력하다 현재 영화 '황진이' 연출에 한창입니다.

KBS독립영화관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은 오는 3일 밤 1시 10분 시청자들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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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비정규직 차별 되레 조장 - 비정규직 통계자료

김유선 노사연 소장, 통계청 경활조사 부가조사 분석
“국가가 비정규직 차별 되레 조장”
교육훈련 격차 무려 7.2배…비정규직 절반 이상 ‘비자발적’ 취업
 
원자료(raw-data) 분석방법 차이에 따라 해석이 다르기도 하지만 비정규직 규모 증감추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이제 구조화(또는 고착화) 양상을 띤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통계청의 올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를 보자.

31일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규모는 2003년 784명에서 2006년 845만명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은 2003년부터 매년 55.4%, 55.9%, 56.1%, 55.0%로 55~56% 안팎에서 구조화되고 있다.

임금도 그렇다. 정규직을 100으로 할 때 비정규직 월 평균임금은 2003년 51.0, 2006년 51.3이고, 시간당 임금 역시 각각 53.1, 52.4였다. 해가 바뀌어도 그 수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상위 10%와 하위 10% 간 임금격차를 나타내는 임금불평등도 마찬가지다. 시간당 임금을 기준으로 할 때 2003년 5.1배에서 2005년 5.4배로 증가한 뒤 2006년에도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임금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2005년 4.5배)보다 더 심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나마 올 8월 조사에서 눈에 띠는 대목은 정부부문인 공공행정에서 비정규직 규모가 늘었다는 점이다. 2003년 15만명(20.4%)에서 2006년 20만명(25.0%)으로 규모, 비율이 모두 늘었다.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비정규 대책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했던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올해로 7회째인 부가조사에서 처음 실시된 취업의 자발성 여부와 교육훈련 수혜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다.

교육훈련, 기업을 매개고리로 정규직에 편중

김유선 소장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교육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는 노동자는 정규직이 41.8%로 비정규직(16.7%)보다 2.5배 많다. 그리 새삼스런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비용부담 주체별로 보면 국가가 오히려 교육훈련에서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먼저 본인부담 교육훈련은 정규직(2.5%)과 비정규직(2.6%)으로 거의 같았고, 회사부담 교육훈련은 정규직(27.0%)이 비정규직(12.2%)의 2.2배였다.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격차는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기관이 부담하는 교육훈련 격차가 7.2배에 달했다는 점이다. 정규직이 12.2%인 반면 비정규직은 1.7%에 그쳤다.

이를 두고 김유선 소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교육훈련 격차는 상당부분 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실시(또는 지원)하는 교육훈련 프로그램이 노동자 개인의 수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기업을 매개고리로 해 정규직에 편중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소장은 특히 “국가기관부담 교육훈련에서 7배가 넘는 격차가 생긴 것은 국가기관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더 조장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비판했다.

‘목구멍이 포도청’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가사·육아와 노동을 병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파트타임 같은 비정규직을 택하는 여성노동자가 많은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엔 어쩔 수 없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조사에서 취업의 자발성 여부가 '수치'로 드러났다.

정규직은 현재 일자리에 자발적으로 취업한 경우가 93.0%였지만 비정규직은 48.1%에 그쳤다. 절반이 넘는 51.9%가 비자발적 취업자인 셈이다. 비자발적으로 취업한 사유는 ‘생활비 등 당장 수입이 필요해서’(34.0%),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서’(8.8%) 순이었다. ‘안정된 일자리’(44.3%)와 ‘근로조건 만족’(42.0%)을 이유로 정규직으로 취업했다는 경우와 대별된다.

고용형태별로는 호출근로(91.7%)에서 비자발적 취업자가 가장 많았고, 가내근로(65.3%), 장기임시근로(55.5%), 용역근로(53.3%), 시간제근로(53.0%), 특수고용(48.5%), 기간제근로(48.2%), 파견근로(41.5%) 등의 순이었다. 

<상자기사①> 비정규직 별도 통계조사 2000년8월부터
비정규직에 대한 별도 통계조사를 실시한 것은 지난 2000년 8월의 일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비정규직(임시직 + 일용직) 규모가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51.7%나 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이듬해부터 기존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더해 부가조사를 실시했다. 비정규직 규모와 정규직과 비교한 비정규직의 근로실태를 알아보자는 차원이었다.

<상자기사②> 조직화 나섰다지만 조직률 더 떨어져
조합원인 비정규직 1년 새 0.4% 줄어…23만7천명, 조직률 2.8%
기금 모금, 조직활동가 양성 등 비정규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양대 노총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비정규직 조직률은 지난해보다 더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이 31일 내놓은 올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조에 가입한 비정규직은 23만7천명으로 지난해(27만1천명)와 견줘볼 때 3만4천명이 줄었다. 전체 비정규직(845만명) 가운데 노조원인 비정규직 비율 역시 같은 기간 3.2%에서 2.8%로 0.4%포인트 떨어졌다.
전체 조합원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도 15.4%에서 13.7%로 떨어졌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11.5% → 13.9% → 15.4% 등으로 증가하던 추세와는 사뭇 다르다.



고용형태별 조직률은 5.4%로 가장 높은 파견근로에 이어 용역근로(4.8%), 기간제근로(4.2%) 등의 순이었고, 장기임시근로(1.5%), 특수고용형태(0.8%), 시간제근로(0.4%)의 조직률은 미미했다.


하지만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가 모집단 내의 일부만을 조사해 전체를 추정하는 표본조사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오차범위가 넓다는 지적도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수고용형태의 경우, 2004년 5만4천명에 달하던 조합원 수가 2년 만에 10% 수준인 5천명으로 줄었는데, 그 이유가 명쾌히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화물운송기사들로 조직된 화물연대 조합원 수(노조 자체집계, 2005년 12월말 현재)만도 9,704명이고, 레미콘운송기사와 덤프트럭기사들로 조직된 건설운송노조와 덤프연대 조합원이 각각 1,300명, 1만4,000명(노조 자체집계, 올 10월 현재)인 점에서 볼 때 조직률 통계를 곧이곧대로 이해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한편 분석결과, 올 8월 현재 전체 조합원 수는 173만명으로 지난해(176만명)보다 3만명 줄었고, 조직률 역시 11.8%에서 11.3%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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