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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뿔났다.

  • 등록일
    2009/05/18 18:30
  • 수정일
    2009/05/18 18:30

1. 가족주의

요즈음 오후에 KBS를 문득 틀어 보면, 일주일에 하루는 이 드라마를 재방송해준다.

 

김수현 작가는 가족주의의 화신이라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작가이다.

불륜작품에서는 뿜어져 나오는 독설들로 파괴의 미학을,

목욕탕 집 남자들 같은 가족주의 드라마에서는 위트있는 일상을 그려낼 줄 아는

말 그대로 '제대로 글빨! 있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작가이다.

 

김수현 글 빨의 가장 큰 힘은 그 일상의 '디테일'함이다.

그래서 무서운 여자이다.

그가 배포하는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구호가 아닌 디테일하게 잘 구성된 일상이기 때문이다.

 

참세상에 올라온 박병학씨의 '보기 싫게 늙어 버린 첫 사랑, 황석영' 글 중에

"문학이 마음을 건드리는 영역은 하루하루 일상을 겪어 나가며 몸을 부딪히는 것들과 많이 다르다. 내게는 그렇다. 그렇기에 친일 친독재 시인 서정주의 시를 읽으며 나는 얼마든지 그 감탄스러운 말의 리듬에 감동을 받을 수 있고 멀쩡한 정신으로 조선일보에 글을 실었던 김선우나 장석주 같은 시인의 시집을 끼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앙금은 남는다."

란 구절이 눈에 불현듯 띄었다. 정말 그렇다. 내가 김수현에게 느끼는 앙금에 끼워맞춰도 크게 손색없는 문장이다.

 

자신의 작품을 한 여주인공이 대상을 타지 못한다고 대놓고 타박하기 일쑤이고,

작가협회장에 비드라마부분 작가가 되었다는 이유로 작가협회를 파행을 몰아가는

꼴 보수인 김수현이지만,

그의 드라마를 단순히 가족주의라거나 보수주의라는 개념어나 이분법적인 정치논리로 물리치기에는 솔직히 역부족이다.

 

그래서 어떤 작가를 비난할때는 반드시 그의 작품 깊숙한 곳으로부터 비평해야 예의이다.

그런면에서 레디앙에 올라온 오창은씨의 '그는 우리 시대 일그러진 텍스트. 작품엔 경의를, 작가에겐 야유를'이란 기사는 재밌는 글이였다. 물론 별로 공감가지는 않는 글이지만 말이다.

나야 그런 비평할 만한 주변이 못되니, 예의 없는 방식(황석영에게도 오창은씨에게도)으로 비평을 하자면.

그냥 내가 보기엔 이번 황석영사태를 이해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MBC 무릎팍도사 '황석영편'을 보면 된다. 황석영이 작가로서 추앙받았던 가장 큰 힘은 바로 그의 '똘기'였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는 세상이 구획해놓은 이데올로기 관계들을 무시해도 충분할 만큼의 똘기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

 

좀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문학작가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통 대중이라 부르는 집합적인 어떤 행위나 사고에 대해서도 섣부르게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역시 예의가 아니다.

최근 사례로 들면,  설경구-송윤하 결혼 발표후 벌어졌던 온라인 상의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레디앙에 실린 '性엔 관용, 愛는 용서 못하는 사회 - 유교 파시즘?--- 82cook 충격도' 란 기사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껍데기만 요란한 심드렁한 글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혼 제도가 "노동집약적인 농업사회로 넘어 오면서, 자손들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히 해야 할 필요에 의해, 여성들의 성적인 자유를 박탈하고 한 남자에 영원히 복속되는 강박적인 정조를 요구하는 사회질서가 지배계급의 필요에 탄생했던 것"이고,

가부장제의 희생자인 여성들이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덫으로서의 결혼, 가족제도를 열렬히 옹호한다며 맑스의 "지배계급의 사고가 사회 전체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언명을 내뱉는  교과서적이고 계몽적인 문장들에게서는 이제 어떠한 감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요새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

그럼에도 막상 개개인들의 구체적인 문제로 내려오면 막상 쉽지 않다는 게,

그게 문제인데 말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2세를 낳고 지내온 몇십년간의 헌신과 감정 노동, 그리고 그 오밀조밀한 권력관계를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라는 한마디로 물리치기로 했다면 그건 정말 예의가 아닌 것이다.

 

2. 엄마의 2박3일 휴가

내가 아직도 '엄마'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풍기는 봉양과 효도라는 냄새때문이다.

난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제 곧 칠순이 되시는 분께 여전히 자식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며 엄마라 부른다.

 

그런 엄마가 지난 주말, 말이 좋아 휴가지, 사실상 가출을 감행하셨다.

엄마의 유년기를 포함해서 울엄마 인생 최초의 가출이다.

 

지난 금요일 손님이 와서, 배달온 자짱면이 불어터지는걸 불안해 하며, 빨랑 돌려보내고 더 늦기 전에 짜장면을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에 울 엄마 사진이 떳다.

그러더니 다짜고자 신도림 역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김치를 들고 가는데 힘들어 죽겠다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다.

 

순간 화가 좀 짜증이 났다. 올꺼면 미리 연락해야 시간을 맞출꺼 아냐 하면서.

짜증이 난 이유는 울엄마는 한번도 이렇게 무대뽀로 일을 벌인적이 없기 때문이다.

늘 내가 예측가능한 동선안에서만 움직이셨기 때문에.

"이 아줌마가 나이 먹더이 막무가내로 군다" 는 생각에 짜증이 난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못되쳐먹었다. 나란 놈이 ㅋㅋ 

 

그래서 신도림역까지 달려가면서, 반드시 뭐라 한 마디 하리라 했건만.

역시 눈치 백단 울 엄마가 선수쳤다.

"나 오늘 자고 갈꺼야~~~"

 

!!!!!!!!!!!!!!!!!!!!!!!!!!!!!!!!!!!!!!!!!!!!!!!

 

이 무슨 시츄에이션?

팽팽한 경기도중 투수와 3루수 사이의 교묘한 기습번트로 흔들! 결국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맞고 넉다운!

긴급히 마무리로 투수 교체! 지키기 모드로 돌입!

 

내가 방어적 모드로 돌아선걸 알아챈 울 엄마

갑자기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은근 슬쩍 3박까지 흘리신다. 허걱.. ^^ 간신히 2박에서 마무리 성공.

 

살갑게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짐작컨데 일차적인 원인은 아버지와의 부부싸움인 것 같은데,

훗, 그렇게 따지면 우리 아버지와 사신 40여년 인생동안 1000번은 넘게 가출하셨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지친게다.

40여년 넘게 지속되어온 일방적인 희생, 그리고 일방적인 감정노동을 감내했던 인생이 지치고 서러운 것이다.

그래서 40년넘게 반복되오던 억압이건만 새삼스럽게도

요즈음은 조그만 자극에도 40년의 무게가 덮어씌여지는 것이다.

 

가출을 했으면 돈을 싸들고 어디 여행을 갈 일이지.

바리바리 싸들고 혼자사는 노총각 아들 방으로 오는 건 또 뭔지.

오자마자 가만있질 못하고 냉장고부터 이잡듯하고

결혼생활에 지쳐 탈출한 주제에, 나한테는 장가안간다고 3일 내내 궁시렁 거리는

이 이율배반은 또 뭔지.

 

오! 빌어먹을.

이 순간에 지배이데올로기니, 엄마는 가족제도의 희생양이니 이런 이야기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다.

차라리 울엄마가 열렬히 시청하던 김수현의 '엄마가 뿔났다'가 그녀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줄 것이다.

 

우리집 드라마는 어떻게 끝날지 아직 그 결말을 알 수 없지만.

시련당했을 때 보다 더 깊고 묵직한, 39년 묵힌 공허함과 상실감.

어떤 말로도 무찔러지지 않는 그 슬픔으로 같이 보냈던 2박3일의 끝에서.

오늘 아침에 또 다시 울 엄마한테 전화왔다.

 

"얘~ 너 왜 비싼 돈 들여 사다준 홍삼 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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