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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일은..

힘든 일은 '원래' 한꺼번에 닥쳐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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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여성주의

이 글은 marishin님의 '좌파 남성과 좌파 여성주의자'를 트랙백한 글입니다.

 

나는 좌파가, 운동하는 사람이 여성주의자가 되기 쉽다고 생각했다.

한때 흔들렸지만, 그 생각은 아직 희망적이다.

 

여성주의는 누구에게나 어렵다.

심지어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정답은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분명 좌파 내에서는 반 여성적인 사고방식들이 잔존한다.

그러나 여성주의 안에도 자본주의적 시각이 그대로 투영되는 곳은 많다.

아차, 여기서 바로 그 싸움이 시작된다.

 

'자본주의'가 종식되어야 진정한 '여성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여성해방'이 되어야 '인간해방'이 된다는 두 논리의 팽팽한 긴장.

 

'좌파'와 '여성주의'는 정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일까?

나같은 '좌파이자 여성주의자인 여성'은 '좌파 남성'과 '여성주의자인 여성'과의 이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걸까?

 

나 역시 '편협한 여성주의'에 빠지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 주위의 현실은 자꾸 '여성주의만' 보게 한다.

아니, 그것과 상관 없이 나는 자꾸 가자미 시야가 된다.

 

그러나 결단코,

여성주의만을 위한 여성주의는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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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1000명 돌파!!

순간, 싸이인줄 알고 스킨 선물해주세요~ 라고 할 뻔 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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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진보네 블로그 말고 네이버같은데다가 이런 공격적인 블로그를 함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싶다.

 

진보네에 오면, 그래서 블로거들의 글을 보면 막 동질감이 느껴지고 끄덕여지는데,

네이버 블로거들의 글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게다가 답글들이란.....

(물론 안그런 블로거들도 많습니다~)

 

대중 활동가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함이 맞다면

블로그도 대중속에서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좀 논란도 일으켜보고, 답글도 좀 달아보고...

 

아..

그런데..

생각만해도 속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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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증식 블로거 ZINE

갱신된 자가증식 블로거진의 밑의 글은 내글이고,

위에는 아멜리에님 글인데,

그 옆에 사용된 사진이 나의 사진임이 판명되었다!(컴이 어두워서 아주 자세히 봐야해요--)

우하하하!

이로서 나의 블로그에서 하루에 두개의 포스트가 올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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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네 멋쨍이~

스킨 적용 한 번 누르는 것 쯤으로 만 하루간의 나의 고민을 한방에 날려보내주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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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홀릭

폭~ 빠져버렸다. 참지 못하고 이것저것 갖다놔서 꿀꿀이 잡탕이 되어가고 있어 걱정.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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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이 시를 가르쳐 주시며 문학 선생님은 이 시에 담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이야기는 내게 이 시를 담아 두게 했습니다.

유치환 시인은 시인 노천명을 짝사랑 했다고 합니다. 헌데 노천명 시인은 한번도

유치환 시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천명은 독신주의자였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노천명의 마음에 슬퍼하며

유치환이 쓴 시가 바로 저 '그리움' 이랍니다.

'어쩌란 말이냐' 이 말에 그마음이 너무 절절히 묻어 납니다.

누군가 사무치게 그리운 사랑...

생각해보면 난 한번도 저런 가슴 저린 사랑은 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늘 순간의 열병으로 끝날 뿐.

요즘은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쓴다는 녀석이 저런 한 하나 없어서 어쩌면 좋나...


그래도...

아프기는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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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지리산 곰 겨울잠 못자'

따뜻한 날씨 때문에 곰이 겨울잠을 못자고 방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학자들은 행여나 곰의 건강이 상할까봐 지켜보고 있었는데

곰은 아직도 남아 있는 도토리를 주워 먹으며 잘 지내고 있더랍니다.

굴에 들어가는 것도 시도하지만 잠들지 않고 자주 나오더랍니다.

이 곰에 대한 기사나 뉴스를 보고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니 어쩌니 하며

환경을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데 저는 이 기사를 보는 순간 정말 큰 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아 요 곰이 생각할수록 귀여운 겁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눈도 오고 했다, 곰은 익숙하게 동굴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잠에서 깹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곰은

몇번 더 잠을 청해보다 이내 포기하고 동굴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리 쬐는 따뜻한 빛. 하얀 털을 감싸는 그 고운 햇살.

땅에 지천에 깔린 도토리들.

이에 곰은 잘 필요성을 못느낍니다.

왜 내가 자야 하는가? 이렇게 햇살이 따뜻하고 맛난 도토리가 먹어 달라고 굴러 다니는데!

그래서 곰은 난생 처음으로 겨울을 느낍니다.

살면서 한번도 느끼지 못한 겨울 산, 겨울 빛, 겨울 나무...

그곳에 살을 부벼가며 곰은 행복합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학자란 이름을 걸고 와서 자기를 자꾸 감시하고

뭘 먹는지 봐대지만 상관 없습니다.

난생 처음 겨울을 느끼고 있는 곰은 행복하니까...


이런 곰을 상상하며 전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곰처럼 행복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겨울 날의 곰을 상상해 보셨나요?

자지 않고 숲을 누비는 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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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죄라고 보는 죄

동성애자를 죄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종교인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 행하는 동성애 억압은 무척 뿌리 깊고 심각한 수준이다.

동성애에 대해 기독교의 입장에서 써놓은 글들을 보면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어떻게 이렇게 폭력적일 수가 있을까?

나는 그들이 '신의 이름'을 업고 동성애자들을 억압하는 그것이 바로, 죄라고 말하겠다.

'동성애를 박해하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대부분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성서에서 동성애를 언급한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해석의 초점을 '구절 자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추고, 그 성서가 쓰여졌을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로 재조명해야 한다.

곽분이씨의 '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입장'이라는 논문에서는 현재 한국의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서의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동성애가 죄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는 '너는(남자)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레위기 18:22) 이어서 레위기 20:13에는 형벌에 대한 언급이 따른다.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아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으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 값으로 죽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레위기의 구절들은 히브리 민족의 문화적 배경에 의해 설명되어져야 한다.

창세기 38:1~11에 나타난 오난의 이야기는 당시 문화권의 죄에 대한 인식을 알려준다.
형이 죽은 후에 오난은 형수를 아내로 맞았는데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 정액을 땅에 버렸다고 한다.
이것을 창세기의 저자는 대단히 심각하게 바라보면서 이런 이유로 신이 오난에게 벌을 내려 오난을 죽게끔 하셨다고 말한다.

당시 사회에서는 오난의 경우처럼 성 관계를 생산의 목적으로만 보는 가치관이 지배했다.

남성의 정액을 생명의 상징으로 보았기에 정액을 아이를 낳는 데에 쓰지 않는 자위, 질외사정, 남성간의 성교를 모두 살인행위로 규정한 것이었다.

성서에 나온 동성애에 대한 다른 언급들도 당시에는 부정적으로 기록되었다 해도 그것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억압할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런 이유를 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성서에 나온 그대로 면제품도 입지 않고 새우도 먹지 않으며 한 번도 자위하지 않고 출산을 위한 성관계만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기본적으로 성서의 여성과 성에 대한 태도는 지금의 현실과 무척 다르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 여자가 불결한 기간에 눕는 자리를 앉는 자는 모두 부정하다."(레위기 08:09, 15:20~23)라고 성서에서는 전한다.

구약의 율법에서 여성은 월경하는 동안 부정하기 때문에 그 여성 가까이에 가는 것은 금기였다. 심지어 그 금기를 어긴 사람에게도 가까이 가는 걸 금했다.
요즘 시대에 월경하는 여성을 더럽게 본다거나,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한다면 아마 혼자 집에 틀어박혀 살아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 간음, 근친상간, 강간, 성매매 등에 관한 사회 규범은 여성에게 무척이나 억압적이었다.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노예와도 같은 종속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런 성서의 구체적인 구절들을 있는 그대로가져와서 자신의 행동의 근거로 삼는다면, 감옥에 들어가기 딱 좋을 것이다.

이제 낡은 교리를 들이대며 동성애자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멈추어야 한다.

감히 성서를 읽음에도, 하나님 말씀을 전함에도 자신의 온갖 편견을 투사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나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이 그토록 잔인할 리가 없다고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어머니이며 아버지이고, 동성애자이며 이성애자일 것이라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절대로 성적 소수자의 정체성을 부정하여 바꾸려고 하거나 그들을 교회 밖으로, 하나님의 품 밖으로 내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종교는 잘못되었다! 고 당당히 말한다.

지금 동성애자들에게 수많은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라고.

성적 소수자의 아픔을 껴안지 못하고, 그들이 차별 당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방치하는 종교와 종교 집단은 모두 그 무서운 죄악을 그만두어야 한다.

고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 22호
'그 이성애자 흉폭하다' 중. <최이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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