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행로

from 단상 2013/04/2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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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했다

지금도 자주 우울하다

 

그것은 어쩌면 아주 어린 시절에 찾아 왔을텐데

여태 알아보지 못했다

가끔 의심이 생겨도 아닐 거라고 믿었다

 

몸에 잘 맞지도 않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담배를 달고 살았던 이유도

아마

내 안에 가득 고인 우울을 차마 마주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학생총회를 열어 기말고사를 거부하기로 했지만

총회에 참석한 친구들보다 기말고사를 보러 강의실로 출석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던 날

고향에 내려갔다

 

집에 전화 한 통 걸지 못하고 낯익은 거리를 헤매다 초등학교 동창 녀석을 우연히 만났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밤이 너무 깊어 잠자리를 찾아야될 시간이 되었을 때

혼자 다시 길에 서서 묻고 또 물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아무한테도 말문을 열지 못하고 이러고 있지?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칠 때

광장에서도 거리에서도 늘 뒤통수를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게 뭔지 가끔 생각한 적도 있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뭘 어떻게 말해야 할 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 건지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길이 없어서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 혈연가족 혹은 친구나 애인에 관해서가 아니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만 말하고 분노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좌절하고 있었다

 

 

 


이게 우울이구나 싶었을 땐

멀리 떠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늦은 나이에 드럼도 배워보고

평생의 숙제라고 생각했던 영화도 만들어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터를 직접 열어보기도 했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밖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방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살려면,

이렇게 마음 둘 곳이 없는데도 굳이 살고 싶다면,

마음의 정체에 관해 알아야 했고

알고 싶었다

 

귀국하려다 급히 결정한 터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실무 중심의 짧은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다닌 학교는 다행히 큰 도움이 되었다

나와 닮은 사람들과 함께 배운 걸 써먹을 방법도 많았다

 

한국을 떠나기로 처음 결심했던 즈음부터

어젯밤까지도

세상 사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일은 많았는데

이렇게 큰 돈을 들여가며 이렇게까지 고단하게

살자, 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아직 모른다

다만, 살자, 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잘했다'고 격려할 뿐

 


 

 

어떤 이들이

왜 거기서 아직도 그러고 있냐, 고 물을 때

집에서 불이 났을 때

인종 차별과 혐오 범죄의 한가운데 서서 괴로울 때

어서 돌아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스무살 그 시절처럼

아니,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거라고 말하고 싶어도 도무지 아무에게도 닿지 않던 어린 시절처럼

무엇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힘들었다

 

가끔 동 트기 전에 눈을 뜨면

방안이 환해질 때까지 편지를 썼지만

누구한테 보내나 싶어 한번도 부치지 못했다

 

 

 

이제 여기서

그래,

여기서

'오늘'을 살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과거' 안에서만 살았다

현실에서 등을 돌린 채 과거만 들여다 봤다

 

너무 짧게 공부한 탓인지

더 깊이 더 오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다

어딘가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붙잡아

날마다 앞으로

오늘도 앞으로 앞으로

돌려세우는 중

 

쉽지 않다

내 마음은 여전히 뒤로 걸어가려고 하니까

그래도 계속할 생각

"아 이제 드디어 '오늘'을 살고 있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3/04/21 03:09 2013/04/21 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