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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연말, 당대비평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었다

영화제 관련 기사 몇 군데에서 제목을 언급한 것 외에는

<돌 속에 갇힌 말>에 관해 따로 기사화한 매체가 없었기에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나중에 문부식 선생이 직접 전화를 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는데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선명하지 않고 여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테잎은...그냥 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왜 나는 그것을 굳이 돌려받았을꼬...

나중에 우편으로 다시 보내드려야겠다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문부식,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중에서

<돌 속에 갇힌 말>에 관한 부분만 발췌 (226~230p)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환멸(幻滅)역에서

 

 

 

(전략)

   최근 <돌 속에 갇힌 말>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실체보다 말에 끌리는 것은 나쁜 버릇이지만, 나는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 사건’이라는 사건의 이름보다 제목에 관심이 더 갔었다. 멀고 가까운 과거의 사건들이 온통 다시 개화하고, 이야기되지 못한 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작금의 시대 분위기에서, 여전히 돌 속에 갇히고 실어증에 걸린 것 처럼 발설하지 못하거나 이야기되지 못한 말이란 대체 무엇인가. 내 기억이 맞다면, 이미 ‘민주화 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판정한 한 사건에 대해 아직 절실하게 이야기되어야 할 무엇이 남았다는 것일까. 혹시 이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승자들에 대한 보고서인가. 아니면 패배와 상처의 눈물겨움을 호소하는 탄원서인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TV 다큐멘터리 프로를 볼 때면, 나는 짖굳게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이 선언은 아직도 말할 수 없고 말해지기 어려운 사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자칫하면 마치 이 시대 이 체제가 모든 역사적 사건의 사회적 실체와 정치적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다 허용하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혐의를 갖곤 했다. 구로구청 사건도 지금까지 말해질 수 있는 수준에서 대략 알만큼은 알려진 사건 중 하나다.

 

   1987년 6월, 독재정권의 권력연장 음모에 항의하여 전국적인 항쟁이 전개되었고, 시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노태우의 이른바 6.29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노태우와 갈라진 양김의 대결. 군정종식에 대한 사회적 여망을 거역하기 위해 저질러진 조직적이고 노골적인 선거부정. 구로구청 사건은 선거 당일인 16일 서울의 변두리 한 구청에서 바로 이 선거 부정행위가 적발되면서 시작되었고, 18일 새벽 부정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하던 사람들은 무자비한 공권력이 해산하고 1000명 이상을 연행하고 208명을 구속시킴으로 강제종결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무엇을 더 알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제2의 광주였다!”는 어느 참가자의 증언에서 느낄 수 있는 벌거벗은 폭력에 대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사망자들에 대해? 20년이 지나도록 개봉된 적이 없는 그 날 그 부정투표함에 대해? 부정선거를 고발하기 위해 투표함을 피흘리며 지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거나 보상받지 못한 역사가 빚진 사람들에 대해? 동시대의 예의없음에 대해? 아니면 진압의 기운을 먼저 알아차리고는 대학 초년생들과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남겨두고 쥐들처럼 빠져나가서는 나중 자신들의 정치 이력서에 그 날의 사건들을 적어넣은 재야의 명망인사들에 대해?

 

   <돌 속에 갇힌 말>은 그런 사실들 너머로 더 나아간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떤 사건에서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나열하는 보고서들-그것이 문서이든 다큐멘터리이든-에는 별반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나의 빈약한 암기능력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리없이 통합되어있는 가식된 현재와 현재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즉 ‘위험하지 않은 과거’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인간의 고통과 기억은-그것이 설사 모순과 수치심으로 채워진 것이라고 할 지라도-역사의 시장에 나앉아 좌판에 나열된 채 자신들의 시선을 구걸토록 방치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인간의 불행한 운명과 고통의 기억을 전유하여 자기정당화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현세적 권력의 기도에 저항하기 위해 ‘기억하기의 고통’을 수행하지 않은 기록을 기억의 정본으로 삼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이 말했던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들이 <돌 속에 갇힌 말>에는 틈새 속에 박혀있다. 기억의 혁신은 거의 언제나 틈새 속에서 일어난다.

 

   기록하는 자의 주관이 불필요한 해석의 흔적을 남겨놓기도 하는, 매끄럽지 못한 화면속에서 증언자들을 감싸고 있는 감정의 분위기는 패배의식이다. 물론 그것은 한 현직 정치인이-앞서 이 글에서 언급한 재주많은 신주류 정치인과 동일인물이다-그 사건을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라 표현한 것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는 패배감이다. 증언자들이 오늘까지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날 그들이 사수하려했던 투표함의 행방만은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은 당시 대학1학년 여학생으로 구로구청에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 쟁취, 전국적인 선거감시운동-나는 그것이 6월 항쟁의 성과인줄로만 알았다”는 화면속의 캡션은 본인의 진술이다. 대통령 직선제는 지배권력의 선거기획의 변경이 던져준 ‘떡고물’ 이자, 권력에의 참여와 ‘집권의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적 민주화를 주도해온 야당 지도자들과의 타협의 소산이다. 증언자들이 말하듯이 ‘인터넷도 《한겨레신문》도 없는 상황’에서 더구나 양김으로 분열된 현실에서 1987년 대선은 노태우가 이기게 되어있는 선거였다. 아니 다르게 표현하면 이 선거는 양김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이 지기를 각오하고 분열된 선거였다. 그들이 권력참여의 기회를 자진포기하기에는 모처럼 복원된 직접 선거의 유혹은 너무 컸고, 보다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참여 자체가 자유주의라는 그들이 지닌 신념의 결과였을 것이다.

 

    선거무효와 정권타도를 주장하며 구로구청에 당원들을 투입했던 그들은 개표 결과와 동시에 신속히 퇴각해버린다. 시청에서부터 행진해올테니 구로구청을 사수하라던 재야지도그룹과 시위행렬은 시청 앞에서 자진해산해버렸다. 그것은 1980년대의 변혁적 상상력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직접선거의 쟁취라는 목표로 제한되고 스스로 함몰되어간 과정이 가져온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 모른다. 구로구청의 남은 수천 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간 투표함을 끌어안고 피흘렸던 것이다. 무자비한 폭력은, 언제나 그런 것 처럼, 정치적 묵계의 선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들의 머리를 내리친다. 야당지도자 중 한 사람에게 건네진 부정선거의 증거들은 설명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1987년 이후 오랫동안 대림역(구로구청역)에서 내리지 못했다. 내릴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돌 속에 갇힌 말>은 그같은 진술로 시작된다. 나는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다. 양원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의 이름을 어디에선가 무단으로 거론한 적이 있다. 구로구청의 옥상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어 지금까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사는 그는, 자신의 고통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짧게 대답한다.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 용납될 수 있다면, 불구가 된 그의 신체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참담한 실체를 상징한다. 그는 현재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함으로써 아직은 물신화의 영역안에 뭉뚱그려지지 않은 다른 정신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이 시대 민주주의의 새로운 정치주체들로 부상한 자들이 ‘386’이라는 의미없는 숫자들의 조합으로 사물화해버린 1980년대의 시대경험과 기억들이 간절히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후략)


2006/02/07 02:33 2006/02/07 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