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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입니다.

엄마랑 새해를 보낸 건

거의 13년만이다.

아주 색다를 줄 알았지만 별로 그렇진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명절에 할아버지댁에 안 간 적이 없던,

아주 착실한 나는

그냥 내가 없어도 모든 건 잘 돌아간다,

라는 명쾌한 진실을

또 다시 깨닫는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와 새해를 보냈고

나는 새해 직전에 집으로 기어들어가

늦은 밤까지 엄마와 수다를 떨다 잠들었다.

그리고 새해 직전까지는 그와 함께 있었다.

그랬던 적이 있었나.

문득

새롭다고 생각했다.

 

 



2002년 2월,

설이라고 지방으로 내려가기 하루 전날,

나는 정말 술을 옴팡지게 마셨다.

정말 지겹고 지겨웠던 한 학회의 차장자리를

후배한테 넘겨주던 날이었다.

나이가 졸라게 많던 한 선배가 술을 사겠다며 나와 그 후배를 불렀는데

나에겐 소주를, 그 애에겐 콜라를 주었다.

평소 같음 개기고 안 먹었을 것을 나는 주는대로 족족 잘도 받아 먹었다.

그 때까지만해도 나는 나만의 명절 증후군 같은 게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도망치곤 했다.

후배는 집으로 갔고

나와 그 선배는 소주 4-5병을 마셨다.

그 선배는 갑자기 그를 불러냈다.

그는 내 앞에 앉았고

나는 취했고 그가 내 앞에 보였고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의 마음을 찢어놓았으며

나를 데려다 준다고 나선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는 이후에 내가 되게 무서웠다고 했다..ㅋㅋ)

 

집에 들어간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아부지 차는 할아버지댁으로 향했다.

술냄새를 풍기며

나는 고속도로 휴게실을 3-4번을 들르며 토 해댔고

결국 카키색 쓸개즙까지 토해낸 후에야 잠이 들었다.

 

영화 원더풀라이프처럼

죽을 때 어떤 하나의 기억만 가지고 평생을 가져가야 한다면

난 어쩐지 그 때의 불쌍한 나를 선택할 거 같다고

그 영화를 보며 생각했었다.

엄마에겐 미안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편해졌고

당시 만나던 사람에겐 미안했지만 마음이 들떴던 날.

 

이제 오래된 얘기다.

그는 더이상 나를 무서워하지 않고

엄마도 나도 서로 덜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

나는 그 이후로 명절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었고

어른들에게도 굉장히 싹싹하게 굴고 있다.

그래도 설이 되면 나는

그 날이 떠오른다.

 

이번 설에는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 엄마가 낳은 두 딸,

이렇게 삼대의 네 여자가 함께 앉았다.

아, 우리 또또도 있었으니 다섯 여자로구나.

외할머니는 수다쟁이고

엄마는 그걸 말리느라 바쁘고

나와 동생은 그걸 구경하느라 웃고

또또는 집에 손님이 많아 좋은데 좋은 척 안 하느라 바빴다.

 

외할머니는 일찍간 외할아버지 얘길하다가

외할아버지를 아끼던 외할머니의 엄마 얘기가 나왔고

그러다 그 분이 나를 한 번 보러 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는 산모라 누워있고, 나는 아기라 그 옆에 누워있고

외할머니와 당시 약간 치매기가 있던 외할머니의 엄마는

힘이 들어 그 옆에 잠깐 누웠더란다.

고 와중에 엄마가 생각하니,

아이고, 4 대의 장녀들이 나란히 누웠고나 싶어

그 얘길하니 나 빼고 셋이서 호호 웃었다는

훈훈한 이야기였다.

안토니아스 라인 같다고 얘기하고 싶었는지

엄마는 안데라스 라인이란다..ㅋㅋ

이름바꾸기 대마왕.

여하튼 간만에 편안한 설이었다.

 

물론 진짜 못 내려간 이유인 일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누르고 있었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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