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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밤

뭐가 됐든 해야해, 하고 나를 다독여본다. 힘들어 못하겠어 그런 말은 그만. 해 보고 안 됨 말지 뭐. 밤이 되니 뭐든 주절거리고 싶다. 이런 저런 생각들 끝에 고민의 원흉들 몇 가지를 포착했으나 풀 길을 모르겠다. 지친 몸에 담배연기를 불어넣으니 몸은 쉬라는 신호로 착각하는지 몸이 자꾸 까부라진다. 감정은 오락가락. 식욕도 오락가락. 때로는 너무 단호해지고 때로는 너무 물러터졌다. 엉엉 울고 싶을 땐 엉엉 울어지지 않더니 어이없게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줄줄. 그러다 '그녀'의 글을 읽고 기어코 울고 말았다. 나에게도 절실한 무엇인가가 있나. 얼마 전 또래 친구들과 미래, 혹은 삶의 전망 따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우리에게 지금 지워진 선택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평생을 어떻게 살지 지금 당장 며칠 만에 정해야 할 것같은 무게감. 그게 어쩌면 나를 너무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주제에. 쩝. 뭐가 됐든 잘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그럼 일이나 해 볼까!! -_-;; 어두운 밤이지만 여전히 빛나는 개청춘!


***5.6매짜리 '청춘'에 대한 글을 하나 써야 했는데, 밝고 긍정적인 글을 부탁한 편집자에게 미안하게도 내 청춘의 글은 이렇듯 무겁고 어두운 글이 되어 버렸네요. '노년'에 대한 글이었다면 훨씬 밝고 가볍게 써줄 수 있었는데.... 5.6매에 마구 우겨넣은 글입니다. 지금 스물 여섯인 내 큰딸 지민이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여기에 올립니다. 지민이와 동갑이었던 과거의 나를 이해해주었으면.... 청춘에 대한 예의 이후경 청춘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늘 13평 아파트 좁은 베란다의 식탁에 앉아 누런 원고지 위에 한 자 한 자 글자를 써넣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섯, 남보다 일찍 결혼하여 막 둘째를 낳았을 무렵이었고, 마침 여고 강사 자리가 생겨 산후 2주 만에 그 일까지 하고 있을 때였다. 이틀마다 출근해 내리닫이로 일곱 시간의 수업을 치르고 복도로 나서면 세상이 휙휙 눈앞에서 돌았다. 그러고도 집에 가면 어린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대신 아이를 봐준 동생이 돌아가면 두 아이를 돌보며 밀린 집안일을 해야 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깨워가며 자정이 넘어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제야 뒤치다꺼리 일들을 마치고 잠시 눈을 붙였다 갓난것의 칭얼거림에 다시 깨어 우유를 먹여 아이를 재우고 나면 시계는 훌쩍 새벽 4시를 넘어섰다. 관 뚜껑을 미는 심정으로 억지로 일으킨 몸이었건만 차마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홀로 있는 그 시간이 흘리는 피처럼 아까웠다. 검은 입을 벌리고 나를 빨아들이려 덤비는 삶의 허무감이 아늑한 잠자리의 유혹보다 강했다. 겨우 뚜껑을 열고 나온 관 속으로 또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진하게 탄 커피 한 잔을 들고, 털로 짠 숄을 두르고, 베란다에 놓인 식탁으로 나갔다. 나는 그곳에 앉아 누런 원고지를 펼쳤다. 무엇을 쓰겠다는 작정도 없었다. 그냥 전날 쓴 것까지를 읽고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을 써나갈 뿐이었다. 감히 완성을 꿈꾸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숨을 쉬기 위해서라도 그 세계로 도망쳐야 했다. 펜대에 펜촉을 낀 옛날식 펜으로 검은 잉크를 꼭꼭 찍어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한숨을 쉬며, 무엇인가를 끼적거리다 보면 어느 새 동이 터왔다. 그제야 겨우 글줄이 풀려 무언가 막 쏟아져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또 하루의 일상을 위해 원고지를 덮어야 했다. 베란다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오면 곤히 잠들어있는 아이와 남편의 평온한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 앞에 나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랬다. 그것은 그 어떤 외도보다도 강렬한 배신이었다. 나는 잠시였지만 그들을 완전히 버렸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나이 스물여섯, 그것은 그 청춘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여 나는 간신히 청춘에 대한 예의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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