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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리뷰

영상원 방송영상과 20011213 김병구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리뷰

 

  “…날개를 다친 새들,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모두 아문 뒤에도 나는 법을 잊는다. 맑게 갠 날에 조차 그 빛이 들지 않는 건 창문이 닫힌 채로 있기 때문이지. 오, 삶이여.…”
                                                                             - 넥스트 5집, ‘서울역’ 가운데
 
  전국 실직노숙인 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의 자료에 따르면 2006년 12월 현재, 전국의 노숙인구는 5168명으로 집계되며 쪽방, 고시원, 여인숙 등에 기거 중인 ‘잠재적’ 노숙인구까지 합하면 그 수는 7~9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수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지하철역과 거리 곳곳에서 박스나 신문지를 깔아두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노숙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주변을 슬금슬금 돌아 피해가기도 한다.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혀를 차며 동정하기도 한다. 무기력한 그들의 모습이 짜증나기도 하고 낙오당한 그들의 처지가 안타깝고 한심하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직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얻고 등을 기댄 채 쉴 수 있는 안락한 공간에 감사한다. 이미 노숙자들은 우리와 동떨어지거나 열등한 조건을 가진 타자에 다름 아니다. 단지 남루한 행색이, 가진 것의 부족함이, 대낮부터 풍기는 술 냄새가 그들을 우리로부터 따로 떨어뜨려 놓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그들의 것으로 명명된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 대한민국에서 공간이 곧 생존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는 생존의 지분을 마련하려는 노숙인들의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더불어 사는 집’이라는 노숙인 자활 생산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려고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묘하게도 부딪침이다. 서울의 거리 어딘가를 부유하듯 떠다니기만 했을 노숙인들은 생존을 위해, 생존을 보장할 공간을 위해 어느 누군가와 부딪치고 있다. 삼일아파트 옆 쓰레기장의 쇠사슬을 끊을 때에도, 쌀을 얻기 위해 간 동사무소에서도 노숙인들은 부딪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돌하는 것은 노숙인들 그 자신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집’의 고문이라는 양연수라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곳에서든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되려 노숙인들이 그를 진정시키고 충돌한 누군가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양고문의 갈등이다. 영화 속 노숙인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전인미답의 점거운동이나 자활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모습보다 더욱 선명히 보이는 것은 바로 그 갈등이다.
  양고문은 거센 투쟁 외에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시종일관 노숙인들에게 ‘각을 세울 것’을 강요하고 그 스스로도 모든 것에 거세게 달려든다. 심지어 지원을 청하러간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조차 서슴없이 들이댈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 이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운동가, 투사로서의 양고문의 과도한 자의식과 남의 말 따위 들으려 하지 않는 독선이다. 그리고 그의 과도한 자의식과 독선적인 성격은 노숙인들을 향해 다소 폭력적으로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반복되는 강요와 왜 싸우려 하지 않느냐는 다그침은 투쟁보다 떠밀려 살기에 바빴을 노숙인들에게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방식에 거부감을 가지거나 불편해한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직접적인 생존의 방법론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속 대화 중 그래도 양고문의 방식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냐는 누군가의 말에 한 식구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게 싫어요!” 시청 앞에서 벌이려던 시위가 끝내는-양고문 혼자의-난동으로 끝나게 되는 것도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았던 양고문의 탓이 크다.
  결국 스스로를 세계적 빈민운동가라 칭하며 함께 하던 식구들에게도 강요하듯 운동가의 소양을 갖추게 하려던 양고문의 방식은 처음에는 양고문 자신과 식구들 사이의 균열을, 끝으로 가서는 더불어 사는 집 전체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더불어 사는 집’의 대표직을 수행했던 식구가 허탈하게 말했던 것처럼 함께하는 노숙인들을 ‘투쟁의 소모품’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양고문의 태도가 보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도 이러한 결말을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화내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덤덤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이유는 조용한 카메라 덕이다. 카메라는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상황에 개입하거나 누군가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냉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와 인물들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감독이 ‘더불어 사는 집’ 식구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투쟁 혹은 운동의 기록이 아니라 노숙인 공동체의 삶, 생활의 기록으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정릉 집의 점거에 성공한 뒤 축배를 드는 데서 기록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도 더욱 나아가서 그들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 일을 서슴지 않은 이유도 결국 생존의 기록이라는 것, 생존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그래서 어눌하게 꿈을 이야기하던 동환이라는 청년을 통해 기록은, 이야기는 끝이 나도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작게나마 남긴다.

  영화의 후반부, 사회단체와의 연대라는 조직의 위상을 이야기하던 양고문에게 조심스레 우리를 신경써달라고 하던 식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양고문에게 공동체는 투쟁을 위한 연대의 장이었을 것이고 그 식구에게 ‘더불어 사는 집’은 말 그대로 지금 더불어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이었을 것이다. 소통의 오류를 여기에서 또다시 목격한다. 양연수라는 사람은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지고 식구들과 대화했으며 정릉 집에 남게 된 식구들은 양고문의 진심을 무엇이라 판단했던 것일까.

 


덧붙임

양연수(梁連洙)  
직업 : 현 정당인
출생 : 1948년 4월 19일 전남 나주 출생
소속 : 전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지구당 지구당위원장
성별   남
출생지   전남 나주 
직업   정당인
경력
  .  ~   .    전국노점상연합 회장
  .  ~   .    IMF범국본 공동대표
  .  ~   .    사회민주주의청년연맹 의장
1999.04 ~ 1999.08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 공동대표
1999.04 ~   .    전국빈민연합 의장
1999.08 ~   .    민주노동당 공동대표
2000.03 ~  .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지구당 지구당위원장
2002.07 ~ 2002.08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 국회의원후보(8.8재보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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