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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26
    우리들은 정의파다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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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6/26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리뷰
    독립영화비평
  3. 2007/05/10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에 대한 질문-김현선(2)
    독립영화비평
  4. 2007/05/0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질문> - 김현지(1)
    독립영화비평

우리들은 정의파다 리뷰

영상원 방송영상과 20011213 김병구

 

<우리들은 정의파다> 리뷰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 만원씩 이십 만원에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있나요? 막노동판에라도 나가봐야죠. 불쌍한 언니는 어떡하나요? 오늘도 철야명단 올렸겠지요.
  돈 벌어대는 것도 좋긴 하지만 무슨 통뼈 깡다구로 맨날 철야유. 누구는 하고 싶어 하느냐면서 힘없이 하는 말이 폐병 삼기래.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약 사다 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리누나.
  이 옷을 만들며는 누가 입나요? 사장님 사모님이 사서 입나요? 코쟁이 노랑머리 사서 입나요?
  우리들은 작업복만 어울린대요.
                                          - 김민기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9)> 중, ‘공장의 불빛’

 

  현대 한국의 모든 문제점은 박정희로부터 출발한다. 경제, 노동, 통일 등 공적인 영역에서부터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에 이르는 사적인 영역에까지 박정희와 그의 시대가 잉태한 문제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의 곁에 남아있다. 그 문제점들을 통해 박정희는 아직 살아남아 있다. 좋았던 시절처럼 그 시기를 회고하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박정희는 망령으로 살아남아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점에 무방비로 오랜 시간 노출된 우리는 모든 것에 내성을 얻어 무감각해져있는지 오래이다.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70년대의 근대화, 공업화는 결국 외형의 급속하고 비정상적인 성장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그를 통해 독재의 안락함을 보다 오래 누리려 하던 독재자의 계략이었음이 97년의 IMF사태를 통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우리는 그저 우리의 소비습관과 느슨해져버린 정신 상태를 탓했다. 그때도 우리는 70년대와 같이 허리띠를 졸라맸다. 아이들의 돌 반지, 장롱 깊숙이 모셔져 있던 부모님의 결혼 패물들을 다시 한 번 ‘잘 살아 보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에 갖다 바쳤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나가떨어지던 것은 결국 노동자였고 자본가의 주머니는 변함없이 두둑해 있었다. 이 같은 착취의 형태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모델링된 시기가 박정희의 시대였다.
  자본과 국가에 의한 노동자 계급에의 노동력 착취 형태에 있어서 가장 하부에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계층은 여성 노동자 계층이었다. 급속한 공업화에 의해 공업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며 여성 노동자의 수도 대폭 증가했으며 특히, 성차별적 인식,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수준 등의 이유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이후 야학 등의 영향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생존권 등 노동자 기본권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흐름을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주도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이와 같은 초기 여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에 관하여-‘여성 노동자들은 어떻게 일어나 외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는 영화이며 여성 노동자 운동에 관한 하나의 연대기이다.
  <우리들은 정의파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정황에 관한 여성 노동자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진술과 그를 연결 짓는 나레이션, 그리고 진술을 더욱 구체화시키는 당시의 자료화면이다. 지나간 사건을 다루는, 특히 영상화된 자료가 부족한 사건을 이야기할 때에 흔히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던 당사자들이 그때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똥물이 입으로 들어오고 어딘가에서 날아와 얼굴에 들러붙고 하던 순간과 힘들어서 자진 퇴사하고만 싶던 순간은 생생한 진실로 보는 사람의 가슴에 가서 닿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인터뷰를 중심으로 사실의 전달을 효율적으로 진행함과 동시에 나레이션 화자를 1인칭으로 설정해 대상과 연출 주체의 거리감을 줄여버린다. 여성화자가 읊는 나레이션은 마치 그 때의 일기를 읽듯 회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바탕에 깔리는 과거 자료화면과 함께 영화에 정서적인 흐름을 부여한다. ‘나레이션+자료화면’의 조합은 자칫 단조로워 질 수 있는 인터뷰 다큐멘터리 편집에 방점을 주거나 인터뷰 사이의 연결을 돕고 급박하고 절망적인 흐름, 포기할 수 없다는 희망과 의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감정선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상과 시선의 밀착된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동정’과 ‘감상’은 피해가려 한다.
  당사자들이 눈물로 회고하는 순간에,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냉정히 그 자리에 서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는 위무하는듯한 줌의 동작이 없다. 그저 다시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카메라 주변에 있을 법한 감독도 역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영화 말미의 노숙투쟁 현장을 다루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카메라는 뜨겁게 반응하거나 질척거리려 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투쟁이며 변화된 것은 없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폭행․폭력 전과를 가진 범법자에 다름 아니고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당한 채 복직되기를 기다리는 노동자일 뿐이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들을 향해 ‘빨갱이 계집들’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 한 순간, 이제는 아줌마가 되어서도 투쟁을 이어나가던 그들이 결국은 동일방직 공장으로 들어갔을 때, “그렇게 쫄아있을 수가 없었다,”던 공장장실에서,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소리 높여 노동가요를 부를 때, 감격인지 회한인지 모를 이유로 눈물을 흘릴 때 그 한 순간만은 부드럽게 대상으로 접근해 간다. 그것은 질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체 누가 그들을 지금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끊임없는 투쟁에 나서도록 만든 것일까. 시대가 바뀌고 인식이 바뀌었다지만 기저의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이 그 순간 카메라를 통해 전달된다.
  파업 중에도 밥 짓는 노동을 강요당해야 했던, 그러고도 모든 쪽에서 내쳐졌던 식당 여성 노동자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밥․꽃․양’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처럼 평등한 조건의 삶과 노동은 여전히 우리로부터 멀리에 있다. 그래서 이제는 아줌마가 된 여성 노동자들 역시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엄마 오늘 못 들어가니까 알아서 아침 차려먹고 학교가.”라는 통화의 내용에서 느껴지는 것은 당당함이다. 영화 내내 반복되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라는 말의 울림이 그렇게 크게 남는 것 또한 거기에서 기인한 이유일 것이다. 당당함.

 

참고

동일방직 노동조합사건

  동일방직 사건은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을 방해하려 했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노동자들이 다수였던 동일방직이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72년에 여성집행부로 구성된 민주노조를 설립하자 협박과 폭행, 부서이동, 사표강요와 같은 회사측의 노조에 대한 노골적인 방해가 계속되었다. 1976년 7. 23일에는 회사가 주도하는 불법 대의원회의에서 새 지부장을 선출하여 여성노동자들의 파업농성을 야기, 사흘동안 계속된 노동자들의 농성을 폭력적으로 해산하려던 경찰과 회사측에 노동자들은 나체로 저항하였으나 72명이 연행, 백 여명이 부상당하는 등 노조와 회사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후 섬유노조위원장에 김영태가 선출됨으로써 동일방직 노조를 와해하려는 탄압이 본격적으로 자행되었고 노조수호와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처절하게 전개되었다.

1. 사건내용
  1978년 2월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섬유노조는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 한국노총이 위촉한 수습위원이 지부장 권한을 인계하도록 하고 외부세력 침투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행동대를 편성하는 한편 회사측은 조합원을 매수하여 대회를 무산시키려는 사전작업을 하였다. 회사와 섬유노조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2월 21일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를 감행하려 하자 이날 새벽 회사측에 매수된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 선거하러 오는 여성 조합원들의 입과 가슴, 옷에 닥치는대로 똥을 바르는 짓을 자행했다. 뿐만 아니라 똥을 뒤집어 쓴 조합원들은 폭행을 당하였고 40여 개의 투표함은 모조리 박살났으며 경찰들은 도움을 요청하며 울부짖는 노동자들에게 욕설을 퍼붓어댔다. 이 사건으로 섬유노조는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 전원을 제명처분하였다. 이로써 정부와 섬유노조, 기업주가 공모한 이 사건의 진상과 탄압을 알리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3월 10일 노동절 행사장에서 동일방직 노동자 80여명이 김영태 퇴진과 동일방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로 강제퇴장 당하고 31명이 연행되었다. 이로부터 동일방직노조 문제 해결과 산업선교회의 탄압 중지를 촉구하는 노동자들과 신·구교 종교인들의 단식농성이 시작되었고 노동자들은 3. 20일 기독교방송국에 진입하여 노동문제에 침묵하고 있는 언론에 항의하거나 26일 여의도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에서 단상을 점거하여 동일방직문제 해결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월 1일 회사가 126명의 여성노동자들을 집단해고 해버렸고 섬유노조는 이들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해버렸다.
  4. 26일에는 회사가 대의원 선거를 통해 어용지부장을 선출하는 것을 막고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이총각 지부장 등 해고노동자들이 회사에서 농성하다가 9명이 구속 및 불구속되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돌렸던 김영태 섬유노조위원장이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입후보하자 5.16일 해고노동자들은 부산에 내려가 김영태의 만행을 폭로하는 유인물 4백부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7명이 구속되었다.
  동일방직 폭력사태 해결과 산업선교에 대한 왜곡 비방에 대처하기 위한 NCC의 연대운동과 지원이 계속되었고 해고노동자들은 임시노조를 구성, 기도회, 집회마다 참여하여 동일방직 문제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6.4일에는 성남주민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다가 연행되는가하면 4. 26 회사기습사건으로 구속된 노동자들의 구형 공판이 있던 7. 18일 회사측 증인들과 충돌한 노동자들이 경찰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연행되기도 했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9.22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난입한 경찰들이 노동자들과 목사, 교수, 청년,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던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기독교 회관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노동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강제해산시키면서 35∼40명이 거의 실신했고 모두 43명을 연행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날 김주호는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다'라고외친 혐의로 구속되었고 또한 조화순 목사도 이후 신·구교 연합기도회에서 이날의 폭력사태와 동일방직 사건의 진상을 고발함으로써 구속되기도 했다.

2. 사건 관련자
78. 3. 10 노동절 행사장 항의시위: 최명희, 김연심, 김민심(이상 구류25일), 이총각(구류29일) 이상 전원 동일방직 노동자
*3. 26 부활절 연합예배장 시위: 정명자(징1, 집유2) 이외 5명 구속
(별도의 사건 정리)
4. 26 회사진입 농성사건: 이총각, 김인숙(이상 징10월, 집유2), 석정남, 임재옥, 정의숙, 최연봉, 최명희, 김연심, 김민심(이상, 징8월, 집유2) 이상 전원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5. 16 김영태 통대의원 당선저지 유인물 배포 사건: 추송례(징1), 박양순, 권분란(이상 징장8월, 단6월), 김옥섭, 공인숙(이상 징8월) 이상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이외 정인숙, 장춘애 등 2명의 JOC회원 구속
6. 4 유인물 배포사건: 김명자, 김영숙(구류 10일) 등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이외 김종국 (성남주민교회 청년, 구류 20일)
7. 18 공판정 충돌 사건: 김용자, 안순옥, 구예금, 김영순, 문형순, 안순애(이상 구류 20일), 석정남(구류7일) 이상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9. 22 기독교회관 경찰난입사건: 김용자, 최연봉, 석정남(이상 구류 20일), 안동순, 안순애, 조효순, 전창순, 이향자, 김영순(이상 구류 15일) 이상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이외 김주호(징·자3), 송재덕(민청석방자, 구류29일), 유재남(임천산선 실무자, 구류25일), 정강자(영등포산선 실무자, 구류20일), 황영환(해고노동자, 구류20일), 장현성(주민교회 교인, 구류20일), 정승남(산업대, 구류20일), 박성인(기장선교교육원생, 구류 20일), 김봉준(홍익대, 구류 20일), 임선임(인천광야교회 교인, 구류 15일), 전순옥(청계노조원, 구류 20일), 조화순(목사, 징5)

3. 사건의 성격
  동일방직 사건은 생존권적 요구조차 억압하는 유신체제와 철저히 어용화된 노총 지도부, 여기에 편승한 기업주가 산업선교와 관련된 민주노동운동을 파괴하려 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으로 시작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의 저항은 정부와 기독교, 어용노총에 대한 민주노조운동과 교회, 민주화운동 세력들의 대립을 불러온 핵심적인 이슈로 작용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노동문제의 심화와 노동자들의 사회인식의 발전에 따라 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는 것과 민주화 운동간의 유일한 교류의 장이었던 기도회와 예배를 통하여 노동운동이 기독교인권운동 및 기존의 지식인 운동과 연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연대투쟁은 이후 유신체제가 종말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조운동뿐만 아니라 인권운동 나아가 정권퇴진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출처 : 성공회대 사이버NGO 자료관(http://www.demos.or.kr/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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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리뷰

영상원 방송영상과 20011213 김병구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리뷰

 

  “…날개를 다친 새들,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모두 아문 뒤에도 나는 법을 잊는다. 맑게 갠 날에 조차 그 빛이 들지 않는 건 창문이 닫힌 채로 있기 때문이지. 오, 삶이여.…”
                                                                             - 넥스트 5집, ‘서울역’ 가운데
 
  전국 실직노숙인 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의 자료에 따르면 2006년 12월 현재, 전국의 노숙인구는 5168명으로 집계되며 쪽방, 고시원, 여인숙 등에 기거 중인 ‘잠재적’ 노숙인구까지 합하면 그 수는 7~9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수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지하철역과 거리 곳곳에서 박스나 신문지를 깔아두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노숙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주변을 슬금슬금 돌아 피해가기도 한다.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혀를 차며 동정하기도 한다. 무기력한 그들의 모습이 짜증나기도 하고 낙오당한 그들의 처지가 안타깝고 한심하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직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얻고 등을 기댄 채 쉴 수 있는 안락한 공간에 감사한다. 이미 노숙자들은 우리와 동떨어지거나 열등한 조건을 가진 타자에 다름 아니다. 단지 남루한 행색이, 가진 것의 부족함이, 대낮부터 풍기는 술 냄새가 그들을 우리로부터 따로 떨어뜨려 놓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그들의 것으로 명명된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 대한민국에서 공간이 곧 생존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는 생존의 지분을 마련하려는 노숙인들의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더불어 사는 집’이라는 노숙인 자활 생산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려고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묘하게도 부딪침이다. 서울의 거리 어딘가를 부유하듯 떠다니기만 했을 노숙인들은 생존을 위해, 생존을 보장할 공간을 위해 어느 누군가와 부딪치고 있다. 삼일아파트 옆 쓰레기장의 쇠사슬을 끊을 때에도, 쌀을 얻기 위해 간 동사무소에서도 노숙인들은 부딪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돌하는 것은 노숙인들 그 자신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집’의 고문이라는 양연수라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곳에서든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되려 노숙인들이 그를 진정시키고 충돌한 누군가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양고문의 갈등이다. 영화 속 노숙인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전인미답의 점거운동이나 자활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모습보다 더욱 선명히 보이는 것은 바로 그 갈등이다.
  양고문은 거센 투쟁 외에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시종일관 노숙인들에게 ‘각을 세울 것’을 강요하고 그 스스로도 모든 것에 거세게 달려든다. 심지어 지원을 청하러간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조차 서슴없이 들이댈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 이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운동가, 투사로서의 양고문의 과도한 자의식과 남의 말 따위 들으려 하지 않는 독선이다. 그리고 그의 과도한 자의식과 독선적인 성격은 노숙인들을 향해 다소 폭력적으로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반복되는 강요와 왜 싸우려 하지 않느냐는 다그침은 투쟁보다 떠밀려 살기에 바빴을 노숙인들에게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방식에 거부감을 가지거나 불편해한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직접적인 생존의 방법론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속 대화 중 그래도 양고문의 방식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냐는 누군가의 말에 한 식구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게 싫어요!” 시청 앞에서 벌이려던 시위가 끝내는-양고문 혼자의-난동으로 끝나게 되는 것도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았던 양고문의 탓이 크다.
  결국 스스로를 세계적 빈민운동가라 칭하며 함께 하던 식구들에게도 강요하듯 운동가의 소양을 갖추게 하려던 양고문의 방식은 처음에는 양고문 자신과 식구들 사이의 균열을, 끝으로 가서는 더불어 사는 집 전체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더불어 사는 집’의 대표직을 수행했던 식구가 허탈하게 말했던 것처럼 함께하는 노숙인들을 ‘투쟁의 소모품’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양고문의 태도가 보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도 이러한 결말을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화내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덤덤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이유는 조용한 카메라 덕이다. 카메라는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상황에 개입하거나 누군가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냉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와 인물들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감독이 ‘더불어 사는 집’ 식구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투쟁 혹은 운동의 기록이 아니라 노숙인 공동체의 삶, 생활의 기록으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정릉 집의 점거에 성공한 뒤 축배를 드는 데서 기록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도 더욱 나아가서 그들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 일을 서슴지 않은 이유도 결국 생존의 기록이라는 것, 생존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그래서 어눌하게 꿈을 이야기하던 동환이라는 청년을 통해 기록은, 이야기는 끝이 나도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작게나마 남긴다.

  영화의 후반부, 사회단체와의 연대라는 조직의 위상을 이야기하던 양고문에게 조심스레 우리를 신경써달라고 하던 식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양고문에게 공동체는 투쟁을 위한 연대의 장이었을 것이고 그 식구에게 ‘더불어 사는 집’은 말 그대로 지금 더불어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이었을 것이다. 소통의 오류를 여기에서 또다시 목격한다. 양연수라는 사람은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지고 식구들과 대화했으며 정릉 집에 남게 된 식구들은 양고문의 진심을 무엇이라 판단했던 것일까.

 


덧붙임

양연수(梁連洙)  
직업 : 현 정당인
출생 : 1948년 4월 19일 전남 나주 출생
소속 : 전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지구당 지구당위원장
성별   남
출생지   전남 나주 
직업   정당인
경력
  .  ~   .    전국노점상연합 회장
  .  ~   .    IMF범국본 공동대표
  .  ~   .    사회민주주의청년연맹 의장
1999.04 ~ 1999.08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 공동대표
1999.04 ~   .    전국빈민연합 의장
1999.08 ~   .    민주노동당 공동대표
2000.03 ~  .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지구당 지구당위원장
2002.07 ~ 2002.08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 국회의원후보(8.8재보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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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에 대한 질문-김현선

하나의 집단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공통된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집단 내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공동의 입장을 세우고 공통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을 대표하고 관리하는 인물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어떠한 집단이나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이 그 집단의 구성과 함께 자연스럽게 생겨나곤 한다.

 

여기에서 질문 1.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은 그 집단의 존패나 흥망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 혹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요소)는 무엇일까?

 

질문 2.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현실 안에서 '투쟁을 위한 연대'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을 얻기 위해서는 너무난 당연하게 개인의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돈 역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벌어들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 사회의 기본적인 체제 안에서 '집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해관계와 반드시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과 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에서 그들이 외치는 '생존의 권리'는 '당위성' 이외에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들의 투쟁이 힘을 얻기 위해서 '노숙인'이라는 같은 조건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이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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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질문> - 김현지

김현지

 

1. 어떤 이름의 약자이건 상관 없이 투쟁에 관한 발제자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은 노숙자들의 투쟁에 관한 얘기이지만, 이제껏 보아왔던 많은 투쟁을 토대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2. 양고문 뒷조사를 해보고 싶네요. 이후 더불어 사는집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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