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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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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정의파다 리뷰

영상원 방송영상과 20011213 김병구

 

<우리들은 정의파다> 리뷰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 만원씩 이십 만원에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있나요? 막노동판에라도 나가봐야죠. 불쌍한 언니는 어떡하나요? 오늘도 철야명단 올렸겠지요.
  돈 벌어대는 것도 좋긴 하지만 무슨 통뼈 깡다구로 맨날 철야유. 누구는 하고 싶어 하느냐면서 힘없이 하는 말이 폐병 삼기래.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약 사다 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리누나.
  이 옷을 만들며는 누가 입나요? 사장님 사모님이 사서 입나요? 코쟁이 노랑머리 사서 입나요?
  우리들은 작업복만 어울린대요.
                                          - 김민기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9)> 중, ‘공장의 불빛’

 

  현대 한국의 모든 문제점은 박정희로부터 출발한다. 경제, 노동, 통일 등 공적인 영역에서부터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에 이르는 사적인 영역에까지 박정희와 그의 시대가 잉태한 문제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의 곁에 남아있다. 그 문제점들을 통해 박정희는 아직 살아남아 있다. 좋았던 시절처럼 그 시기를 회고하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박정희는 망령으로 살아남아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점에 무방비로 오랜 시간 노출된 우리는 모든 것에 내성을 얻어 무감각해져있는지 오래이다.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70년대의 근대화, 공업화는 결국 외형의 급속하고 비정상적인 성장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그를 통해 독재의 안락함을 보다 오래 누리려 하던 독재자의 계략이었음이 97년의 IMF사태를 통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우리는 그저 우리의 소비습관과 느슨해져버린 정신 상태를 탓했다. 그때도 우리는 70년대와 같이 허리띠를 졸라맸다. 아이들의 돌 반지, 장롱 깊숙이 모셔져 있던 부모님의 결혼 패물들을 다시 한 번 ‘잘 살아 보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에 갖다 바쳤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나가떨어지던 것은 결국 노동자였고 자본가의 주머니는 변함없이 두둑해 있었다. 이 같은 착취의 형태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모델링된 시기가 박정희의 시대였다.
  자본과 국가에 의한 노동자 계급에의 노동력 착취 형태에 있어서 가장 하부에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계층은 여성 노동자 계층이었다. 급속한 공업화에 의해 공업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며 여성 노동자의 수도 대폭 증가했으며 특히, 성차별적 인식,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수준 등의 이유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이후 야학 등의 영향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생존권 등 노동자 기본권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흐름을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주도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이와 같은 초기 여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에 관하여-‘여성 노동자들은 어떻게 일어나 외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는 영화이며 여성 노동자 운동에 관한 하나의 연대기이다.
  <우리들은 정의파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정황에 관한 여성 노동자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진술과 그를 연결 짓는 나레이션, 그리고 진술을 더욱 구체화시키는 당시의 자료화면이다. 지나간 사건을 다루는, 특히 영상화된 자료가 부족한 사건을 이야기할 때에 흔히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던 당사자들이 그때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똥물이 입으로 들어오고 어딘가에서 날아와 얼굴에 들러붙고 하던 순간과 힘들어서 자진 퇴사하고만 싶던 순간은 생생한 진실로 보는 사람의 가슴에 가서 닿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인터뷰를 중심으로 사실의 전달을 효율적으로 진행함과 동시에 나레이션 화자를 1인칭으로 설정해 대상과 연출 주체의 거리감을 줄여버린다. 여성화자가 읊는 나레이션은 마치 그 때의 일기를 읽듯 회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바탕에 깔리는 과거 자료화면과 함께 영화에 정서적인 흐름을 부여한다. ‘나레이션+자료화면’의 조합은 자칫 단조로워 질 수 있는 인터뷰 다큐멘터리 편집에 방점을 주거나 인터뷰 사이의 연결을 돕고 급박하고 절망적인 흐름, 포기할 수 없다는 희망과 의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감정선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상과 시선의 밀착된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동정’과 ‘감상’은 피해가려 한다.
  당사자들이 눈물로 회고하는 순간에,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냉정히 그 자리에 서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는 위무하는듯한 줌의 동작이 없다. 그저 다시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카메라 주변에 있을 법한 감독도 역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영화 말미의 노숙투쟁 현장을 다루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카메라는 뜨겁게 반응하거나 질척거리려 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투쟁이며 변화된 것은 없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폭행․폭력 전과를 가진 범법자에 다름 아니고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당한 채 복직되기를 기다리는 노동자일 뿐이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들을 향해 ‘빨갱이 계집들’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 한 순간, 이제는 아줌마가 되어서도 투쟁을 이어나가던 그들이 결국은 동일방직 공장으로 들어갔을 때, “그렇게 쫄아있을 수가 없었다,”던 공장장실에서,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소리 높여 노동가요를 부를 때, 감격인지 회한인지 모를 이유로 눈물을 흘릴 때 그 한 순간만은 부드럽게 대상으로 접근해 간다. 그것은 질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체 누가 그들을 지금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끊임없는 투쟁에 나서도록 만든 것일까. 시대가 바뀌고 인식이 바뀌었다지만 기저의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이 그 순간 카메라를 통해 전달된다.
  파업 중에도 밥 짓는 노동을 강요당해야 했던, 그러고도 모든 쪽에서 내쳐졌던 식당 여성 노동자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밥․꽃․양’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처럼 평등한 조건의 삶과 노동은 여전히 우리로부터 멀리에 있다. 그래서 이제는 아줌마가 된 여성 노동자들 역시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엄마 오늘 못 들어가니까 알아서 아침 차려먹고 학교가.”라는 통화의 내용에서 느껴지는 것은 당당함이다. 영화 내내 반복되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라는 말의 울림이 그렇게 크게 남는 것 또한 거기에서 기인한 이유일 것이다. 당당함.

 

참고

동일방직 노동조합사건

  동일방직 사건은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을 방해하려 했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노동자들이 다수였던 동일방직이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72년에 여성집행부로 구성된 민주노조를 설립하자 협박과 폭행, 부서이동, 사표강요와 같은 회사측의 노조에 대한 노골적인 방해가 계속되었다. 1976년 7. 23일에는 회사가 주도하는 불법 대의원회의에서 새 지부장을 선출하여 여성노동자들의 파업농성을 야기, 사흘동안 계속된 노동자들의 농성을 폭력적으로 해산하려던 경찰과 회사측에 노동자들은 나체로 저항하였으나 72명이 연행, 백 여명이 부상당하는 등 노조와 회사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후 섬유노조위원장에 김영태가 선출됨으로써 동일방직 노조를 와해하려는 탄압이 본격적으로 자행되었고 노조수호와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처절하게 전개되었다.

1. 사건내용
  1978년 2월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섬유노조는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 한국노총이 위촉한 수습위원이 지부장 권한을 인계하도록 하고 외부세력 침투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행동대를 편성하는 한편 회사측은 조합원을 매수하여 대회를 무산시키려는 사전작업을 하였다. 회사와 섬유노조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2월 21일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를 감행하려 하자 이날 새벽 회사측에 매수된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 선거하러 오는 여성 조합원들의 입과 가슴, 옷에 닥치는대로 똥을 바르는 짓을 자행했다. 뿐만 아니라 똥을 뒤집어 쓴 조합원들은 폭행을 당하였고 40여 개의 투표함은 모조리 박살났으며 경찰들은 도움을 요청하며 울부짖는 노동자들에게 욕설을 퍼붓어댔다. 이 사건으로 섬유노조는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 전원을 제명처분하였다. 이로써 정부와 섬유노조, 기업주가 공모한 이 사건의 진상과 탄압을 알리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3월 10일 노동절 행사장에서 동일방직 노동자 80여명이 김영태 퇴진과 동일방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로 강제퇴장 당하고 31명이 연행되었다. 이로부터 동일방직노조 문제 해결과 산업선교회의 탄압 중지를 촉구하는 노동자들과 신·구교 종교인들의 단식농성이 시작되었고 노동자들은 3. 20일 기독교방송국에 진입하여 노동문제에 침묵하고 있는 언론에 항의하거나 26일 여의도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에서 단상을 점거하여 동일방직문제 해결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월 1일 회사가 126명의 여성노동자들을 집단해고 해버렸고 섬유노조는 이들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해버렸다.
  4. 26일에는 회사가 대의원 선거를 통해 어용지부장을 선출하는 것을 막고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이총각 지부장 등 해고노동자들이 회사에서 농성하다가 9명이 구속 및 불구속되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돌렸던 김영태 섬유노조위원장이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입후보하자 5.16일 해고노동자들은 부산에 내려가 김영태의 만행을 폭로하는 유인물 4백부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7명이 구속되었다.
  동일방직 폭력사태 해결과 산업선교에 대한 왜곡 비방에 대처하기 위한 NCC의 연대운동과 지원이 계속되었고 해고노동자들은 임시노조를 구성, 기도회, 집회마다 참여하여 동일방직 문제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6.4일에는 성남주민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다가 연행되는가하면 4. 26 회사기습사건으로 구속된 노동자들의 구형 공판이 있던 7. 18일 회사측 증인들과 충돌한 노동자들이 경찰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연행되기도 했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9.22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난입한 경찰들이 노동자들과 목사, 교수, 청년,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던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기독교 회관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노동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강제해산시키면서 35∼40명이 거의 실신했고 모두 43명을 연행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날 김주호는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다'라고외친 혐의로 구속되었고 또한 조화순 목사도 이후 신·구교 연합기도회에서 이날의 폭력사태와 동일방직 사건의 진상을 고발함으로써 구속되기도 했다.

2. 사건 관련자
78. 3. 10 노동절 행사장 항의시위: 최명희, 김연심, 김민심(이상 구류25일), 이총각(구류29일) 이상 전원 동일방직 노동자
*3. 26 부활절 연합예배장 시위: 정명자(징1, 집유2) 이외 5명 구속
(별도의 사건 정리)
4. 26 회사진입 농성사건: 이총각, 김인숙(이상 징10월, 집유2), 석정남, 임재옥, 정의숙, 최연봉, 최명희, 김연심, 김민심(이상, 징8월, 집유2) 이상 전원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5. 16 김영태 통대의원 당선저지 유인물 배포 사건: 추송례(징1), 박양순, 권분란(이상 징장8월, 단6월), 김옥섭, 공인숙(이상 징8월) 이상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이외 정인숙, 장춘애 등 2명의 JOC회원 구속
6. 4 유인물 배포사건: 김명자, 김영숙(구류 10일) 등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이외 김종국 (성남주민교회 청년, 구류 20일)
7. 18 공판정 충돌 사건: 김용자, 안순옥, 구예금, 김영순, 문형순, 안순애(이상 구류 20일), 석정남(구류7일) 이상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9. 22 기독교회관 경찰난입사건: 김용자, 최연봉, 석정남(이상 구류 20일), 안동순, 안순애, 조효순, 전창순, 이향자, 김영순(이상 구류 15일) 이상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이외 김주호(징·자3), 송재덕(민청석방자, 구류29일), 유재남(임천산선 실무자, 구류25일), 정강자(영등포산선 실무자, 구류20일), 황영환(해고노동자, 구류20일), 장현성(주민교회 교인, 구류20일), 정승남(산업대, 구류20일), 박성인(기장선교교육원생, 구류 20일), 김봉준(홍익대, 구류 20일), 임선임(인천광야교회 교인, 구류 15일), 전순옥(청계노조원, 구류 20일), 조화순(목사, 징5)

3. 사건의 성격
  동일방직 사건은 생존권적 요구조차 억압하는 유신체제와 철저히 어용화된 노총 지도부, 여기에 편승한 기업주가 산업선교와 관련된 민주노동운동을 파괴하려 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으로 시작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의 저항은 정부와 기독교, 어용노총에 대한 민주노조운동과 교회, 민주화운동 세력들의 대립을 불러온 핵심적인 이슈로 작용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노동문제의 심화와 노동자들의 사회인식의 발전에 따라 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는 것과 민주화 운동간의 유일한 교류의 장이었던 기도회와 예배를 통하여 노동운동이 기독교인권운동 및 기존의 지식인 운동과 연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연대투쟁은 이후 유신체제가 종말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조운동뿐만 아니라 인권운동 나아가 정권퇴진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출처 : 성공회대 사이버NGO 자료관(http://www.demos.or.kr/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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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리뷰

영상원 방송영상과 20011213 김병구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리뷰

 

  “…날개를 다친 새들,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모두 아문 뒤에도 나는 법을 잊는다. 맑게 갠 날에 조차 그 빛이 들지 않는 건 창문이 닫힌 채로 있기 때문이지. 오, 삶이여.…”
                                                                             - 넥스트 5집, ‘서울역’ 가운데
 
  전국 실직노숙인 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의 자료에 따르면 2006년 12월 현재, 전국의 노숙인구는 5168명으로 집계되며 쪽방, 고시원, 여인숙 등에 기거 중인 ‘잠재적’ 노숙인구까지 합하면 그 수는 7~9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수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지하철역과 거리 곳곳에서 박스나 신문지를 깔아두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노숙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주변을 슬금슬금 돌아 피해가기도 한다.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혀를 차며 동정하기도 한다. 무기력한 그들의 모습이 짜증나기도 하고 낙오당한 그들의 처지가 안타깝고 한심하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직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얻고 등을 기댄 채 쉴 수 있는 안락한 공간에 감사한다. 이미 노숙자들은 우리와 동떨어지거나 열등한 조건을 가진 타자에 다름 아니다. 단지 남루한 행색이, 가진 것의 부족함이, 대낮부터 풍기는 술 냄새가 그들을 우리로부터 따로 떨어뜨려 놓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그들의 것으로 명명된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 대한민국에서 공간이 곧 생존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는 생존의 지분을 마련하려는 노숙인들의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더불어 사는 집’이라는 노숙인 자활 생산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려고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묘하게도 부딪침이다. 서울의 거리 어딘가를 부유하듯 떠다니기만 했을 노숙인들은 생존을 위해, 생존을 보장할 공간을 위해 어느 누군가와 부딪치고 있다. 삼일아파트 옆 쓰레기장의 쇠사슬을 끊을 때에도, 쌀을 얻기 위해 간 동사무소에서도 노숙인들은 부딪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돌하는 것은 노숙인들 그 자신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집’의 고문이라는 양연수라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곳에서든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되려 노숙인들이 그를 진정시키고 충돌한 누군가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양고문의 갈등이다. 영화 속 노숙인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전인미답의 점거운동이나 자활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모습보다 더욱 선명히 보이는 것은 바로 그 갈등이다.
  양고문은 거센 투쟁 외에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시종일관 노숙인들에게 ‘각을 세울 것’을 강요하고 그 스스로도 모든 것에 거세게 달려든다. 심지어 지원을 청하러간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조차 서슴없이 들이댈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 이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운동가, 투사로서의 양고문의 과도한 자의식과 남의 말 따위 들으려 하지 않는 독선이다. 그리고 그의 과도한 자의식과 독선적인 성격은 노숙인들을 향해 다소 폭력적으로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반복되는 강요와 왜 싸우려 하지 않느냐는 다그침은 투쟁보다 떠밀려 살기에 바빴을 노숙인들에게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방식에 거부감을 가지거나 불편해한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직접적인 생존의 방법론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속 대화 중 그래도 양고문의 방식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냐는 누군가의 말에 한 식구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게 싫어요!” 시청 앞에서 벌이려던 시위가 끝내는-양고문 혼자의-난동으로 끝나게 되는 것도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았던 양고문의 탓이 크다.
  결국 스스로를 세계적 빈민운동가라 칭하며 함께 하던 식구들에게도 강요하듯 운동가의 소양을 갖추게 하려던 양고문의 방식은 처음에는 양고문 자신과 식구들 사이의 균열을, 끝으로 가서는 더불어 사는 집 전체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더불어 사는 집’의 대표직을 수행했던 식구가 허탈하게 말했던 것처럼 함께하는 노숙인들을 ‘투쟁의 소모품’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양고문의 태도가 보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도 이러한 결말을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화내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덤덤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이유는 조용한 카메라 덕이다. 카메라는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상황에 개입하거나 누군가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냉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와 인물들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감독이 ‘더불어 사는 집’ 식구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투쟁 혹은 운동의 기록이 아니라 노숙인 공동체의 삶, 생활의 기록으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정릉 집의 점거에 성공한 뒤 축배를 드는 데서 기록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도 더욱 나아가서 그들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 일을 서슴지 않은 이유도 결국 생존의 기록이라는 것, 생존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그래서 어눌하게 꿈을 이야기하던 동환이라는 청년을 통해 기록은, 이야기는 끝이 나도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작게나마 남긴다.

  영화의 후반부, 사회단체와의 연대라는 조직의 위상을 이야기하던 양고문에게 조심스레 우리를 신경써달라고 하던 식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양고문에게 공동체는 투쟁을 위한 연대의 장이었을 것이고 그 식구에게 ‘더불어 사는 집’은 말 그대로 지금 더불어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이었을 것이다. 소통의 오류를 여기에서 또다시 목격한다. 양연수라는 사람은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지고 식구들과 대화했으며 정릉 집에 남게 된 식구들은 양고문의 진심을 무엇이라 판단했던 것일까.

 


덧붙임

양연수(梁連洙)  
직업 : 현 정당인
출생 : 1948년 4월 19일 전남 나주 출생
소속 : 전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지구당 지구당위원장
성별   남
출생지   전남 나주 
직업   정당인
경력
  .  ~   .    전국노점상연합 회장
  .  ~   .    IMF범국본 공동대표
  .  ~   .    사회민주주의청년연맹 의장
1999.04 ~ 1999.08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 공동대표
1999.04 ~   .    전국빈민연합 의장
1999.08 ~   .    민주노동당 공동대표
2000.03 ~  .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지구당 지구당위원장
2002.07 ~ 2002.08   민주노동당 서울 종로 국회의원후보(8.8재보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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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해서...

독립영화(다큐멘터리)는 독립해야 하는가? 안창현 (영상이론 3) 영화 매체는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를 보여주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려 하든 카메라가 존재하는 한 찍혀진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앵글을 선택해서 어떤 사이즈로 보여주는가에 따라, 또한 렌즈나 조명 등 그 밖의 많은 요소들에 의해서, 그 대상의 다양한 측면을 부각시킬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영화 매체는, 그래서 다큐멘터리적이다. 빌 니콜스의 말대로, 모든 영화는 얼마간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겠다. 다큐멘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허구의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고, 다큐멘터리는 찍는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준다고 우리는 흔히 믿게 된다. 영화는 분명 매체 그 자체로 그러한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고,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생각해 보았을 때 사실, 영화만큼 그것에 잘 어울리는 매체는 없을 것이다. 극영화나 실험영화와는 다르게 다큐멘터리에서 유독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쟁점들이나 영화의 진정성이 중요한 문제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영화에서의 카메라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줄 수 있다는 생각과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큐멘터리는 감춰진 자리를 비추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함께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잘 보지 못했던 자리, 그 속의 사람들을 비추는 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아니, 다큐멘터리라는 특정한 장르에만 그러한 기능이 주어진다는 것보다, 이는 카메라 자체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우리들이 흔히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 일상화된 시선으로 자연스럽게만 바라보는 주변의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카메라다. 카메라라는 객관적 기계 장치에 의해 찍혀진 것들을 이렇게 다시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자연스런 일상의 모습으로 무심히 지나쳤던 것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거나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일 수도 있다. 우리들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들 주변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회의 이면을 비춰주는 것, 이러한 카메라의 기능은 우리에게 카메라의 윤리적 측면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이는 논픽션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게 되는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극장에서 상영되는 주류의 대중적인 극영화에서도 사실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원래 무언가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든 사람은 그 안에 찍히는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윤리가 필요한 것 아닐까? 물론, 카메라로 찍혀진 현실이 그것 자체로 진실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그럴 것이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을 표방한다고 하는 것, 그래서 그 영화가 우리들 현실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정확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영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 현실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리얼리즘이 반영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이미지이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다큐멘터리적인 효과, 현실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그 현실 효과를 특징으로 할 수 있다고 하겠으나, 그것 자체로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악의적으로 왜곡의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현실의 진실을 드러내려 한다고 해도, 최소한 그것은 현실의 어떤 측면만을 드러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영화 속에 표현된 작가의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분명 영화를 통해서 작가의 진정성을 느낄 수도 있을테지만, 그 힘겨운 환경 속에서 전력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진정성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그 진정성이 진실을 보증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진정성이 거짓과 비극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자행한 나치에게서 진정성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큐멘터리가 말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큐멘터리들을 어떤 진실의 모습으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 도대체 영화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진실이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면 어떨까? 아마도 많은 진실들 중에 하나를 다큐멘터리들은 겨우, 간신히 드러내려는지도 모른다. 영화 한 편이 온전히 그 진실 전체를 드러낼 수는 없다.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다큐멘터리들을 본 우리들 관객이 아닐까? 혼란스런 현실 속에 어떤 진실을 담으려는 다큐멘터리는 현실 속의 남겨진 진실들을 온전히 관객들의 몫으로 남긴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다큐멘터리의 가치이고 진짜 힘일 것이다. 진실은 이것이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대해 다양한 진실들을 드러내고 환기시키는 힘 말이다. 독립(다큐멘터리)영화는 독립해야 하는가? 우리는 자본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 다큐멘터리들이 독립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에 기생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독립영화는 자본에, 권력에 당당히 기생해서 자신의 다양한 모습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도처에 있는 자본과 권력에서 독립영화가 왜 독립해야 하나? 독립영화는 어디에서도 독립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자본과 권력의 숙주에 기생하면서, 그 거대한 숙주에서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당당히 피 빨아먹으며, 독립영화는 그렇게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있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른다. 숙주가 빈혈로 쓰러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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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이경순, 2006) 발제문...

"빨간눈사람"이 <쇼킹 패밀리>를 이야기하다 안창현 (영상이론 3) Ⅰ. "빨간눈사람"은... 독립프로덕션 빨간 눈사람은 1998년 4월 20일 창립되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항상 난감한 일입니다. 때문에 "빨간눈사람"에 대한 소개를 우리의 "영화 선언"으로 대신합니다. Ⅱ. "빨간눈사람"의 영화 선언... 우리의 인습, 제도가 완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억압하고 우롱하는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내)가 영화(저술)작업에서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 완전히 뒤집어 엎어 버리는 날까지 이 정신과 작업은 지속될 것이다. - 미셸 푸코의 1971년 어록을 재구성함 우린 억압없는 세상, 차별없는 세상, 착취없는 세상, 편견없는 세상,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 꿈을 실현하는 도구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영화"다. - 빨간눈사람의 오리지널 어록 Ⅲ. 우리의 적과 현실... 1. "CONTACT"를 믿지 않는 오만한 인간 우주인에 대한 일체의 편견과 조장된 적개심을 경계하고자 한다. 생명과 자연의 가능성을 짓밟고 서려하는 인간의 오만함은 가장 우려할만한 파시즘이다. 우리는 우주에 비해 지극히 작은 인간으로서 우주를 동경한다. 우리는 우주 곳곳에서 문명을 번창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지켜보고 있을 그들에게 살아있는 자로서의 우정을 표시하고자 한다. 2. 자연을 잠식하는 문명인들 문명과 자연의 이원론적인 인식이 지구전체의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칭하는 낯 뜨거운 왕자병, 人本主義라 부르는 我田引水격 가치관의 썩어가는 속내를 보여주고자 한다. 3. 성과 인종을 차별하는 자들 유색인종, 소수인종, 국외자들의 차별은 모순의 적나라함으로 인해 쉽게 인식하고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차별보다도, 지능적이고 조직적이며 일상적인 차별이 여성에 대해 작동되고 있다. 인류의 절반에 대한 노예화에는 어떻게 이처럼 관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류의 절반이 가해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4. 제3세계의 식민지화에 열 올리는 제국주의자들 경제와 문화를 앞세워 우리의 영혼을 잠식해 오는 제국주의를 우리는 경계한다. 전 인류의 2/3가 그 나머지 인류의 포식을 위한 식민지가 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5. 한국이라는 미친 개 애국, 혹은 민족, 윤리란 미명하에 자행되는 전 국가적 규모의 비이성적인 광기가 우리를 당혹케 한다. 파쇼적인 극우와 완고한 보수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이 땅의 현실을 마냥 함구하고 지켜볼 수는 없다. Ⅳ. 우리의 믿음과 자세... 1.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또한 세상은 영화로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의식과 기술과 자본으로 생산되는 "영화"란 매체는 우리의 지적, 정서적 환기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는 변혁을 도모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세상이란 거대한 유기체는 수많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란 화학작용으로 생성, 변화해 가기에 "영화"란 일개 매체 하나만으론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하고도 낭만적인 믿음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많은 역활과 매체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선택한 "영화"란 무기로 발언하고 변혁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고 믿는다. "카메라를 무기 삼아"란 낡아 보이는 수식이 우리에겐 여전히 유효하다. 2. 우리는 "독립영화"를 만든다. 우리가 믿는 독립영화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 그리하여 작가의 창작정신이 작업 전 과정에 걸쳐 온전히 살아있는 영화" 3.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 자신은 이러한 구분을 모른다. 태초에 영화가 있었고 후세사람들이 형식을 규정지었다. 하지만 영화란 존재 자체는 규정지워진 형식을 비웃으며 스스로 자유로이 발전한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나 "픽션"을 만들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 뿐이다. 4. 전술은 바뀐다. 전술의 변경은 언제든 가능하다. 본 영화선언정신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5. 문제는 다시 "자기로부터의 자유"다. 스스로를 깨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습과 체제속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내부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다. 스스로 자유롭지 않은 자가 떠드는 자유는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한다. 몇 십년에 걸쳐 자신에게 거짓 입력된 가치를 깨부수는 아픔을 감내하고자 한다. 6. 적과 현실앞에 겸허해 진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적을 보지 못하고선 내부에 더 큰 적을 키우게 된다. 적과 현실 속에서 스승과 교훈, 그리고 전술을 찾는 자세만이 진정한 변혁의 싹을 틔우게 될 것이다. 7. 우리는 싸움꾼임과 동시에 창작인이다. 또한 "우리"에게 "영화"는 무기임과 동시에 작품이다. "우리란 주체"와 "영화란 객체"의 정체성에 관한 이러한 양면은 함께 공존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위험할 뿐 아니라 진실이 아니다. 이 인식은 곧 영화의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내용이 형식이고 형식이 내용이라는 익히 들어온 얘기는 여전히 진부한 것이다. 진보적 내용은 진보적 형식을 필요로 한다. 형식의 변혁은 내용의 변혁을 수용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창작의 제1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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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독립영화의 미래는 있다...

 

<단편영화산책 발제 - 2007. 6. 14>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독립영화 !


<독립영화를 위한 비평적 접근 방식>

- 독립영화의 미래는 있다 !!!!!


 독립영화는 급속도로 변화, 발전하고 있는 미디어 시대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개발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객관성과 진리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과거의 기호들과 의미화 방식을 관습적으로 따르는 그 고집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독립영화에 대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관객들을 끌어들여 독립영화의 매혹에 빠질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변화가 절실해 보인다.


90년대 이후 독립영화

 90년대 이후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92년 문민정부의 출범 등으로 나타난 운동세력의 퇴조는 영화운동에도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독립장편영화의 제작 움직임은 급격하게 퇴조하였으며, 독립영화의 제작은 ‘푸른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 ‘서울영상집단‘ 등 비디오다큐멘터리의 활발한 제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90년대 사회주의 몰락이후 급격히 등장하게 된 포스트모던 열풍은 사람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문화로 이행하게 했으며, 영화 역시 이 시기의 중요한 문화적 화두가 되었다. 기존 독립영화 진영 내에서도 과거의 영화운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전개되었으며, 이런 새로운 모색은 영화운동에서 ‘운동‘을 강조하기보다는 ‘영화‘를 강조하는 ‘영화제작소 청년‘의 지향으로 대표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 대한 접근은 영화지망 인력을 양산하게 되고, 단편영화의 급격한 양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기존 독립영화단체의 새로운 모색과 새로운 인력의 등장으로 인한 단편영화의 발전은 충무로로 대표되는 주류영화의 대안을 요구하는 영화분위기 속에서 대안영화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 쟁취‘라는 테제 속에서 독립다큐멘터리 진영과 보조를 맞추게 되고, 이 단편영화군과 독립다큐멘터리 진영은 한국독립영화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다시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지배문화 대 피지배문화, 자본가문화 대 노동자문화, 고급문화 대 대중문화라는 선명한 이분법이 상존했던 90년대 초반까지의 독립영화의 정의는 선명했다. 특히 87년 민주화항쟁에서 92년 대선까지 독립영화의 전선은 너무나 명확했다. 오히려 이런 명확했던 독립영화의 성격이 현재의 독립영화를 재정립하는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 시기의 독립영화가 가지고 있었던 영화의 제작과정과 상영투쟁이라는 뚜렷한 기억이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와 모순이 혼종된 90년대 이후의 상황은 하나의 단일하고 총체적 실체로의 수렴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예전의 잣대로 독립영화를 규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정치의 빈자리를 채운 문화가 만들어낸 ‘언더그라운드‘, ‘서브컬처‘, ‘마이너리티‘, ‘얼터너티브‘ 등의 다양한 개념으로의 분화는 ‘독립‘이라는 문화적 아이콘을 더 이상 한가지로 사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소비문화의 전면화, 엷어진 정치적 검열의 상황 등은 더 이상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나 ‘정치적 검열로부터의 독립‘이라는 테제로 독립영화를 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 다양해지고 더 폭넓어졌다‘라는 독립영화에 대한 평가나 ‘독립영화 개념이 혼란해지고 있다’는 독립영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독립영화를 재정립하려는 의도들에서 비롯된 입장들이다. 전자의 경우는 다원화된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론적 입장이며, 후자의 경우는 90년대 초의 독립영화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가지는 사고의 혼란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제 독립영화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해야할 시점이다.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함몰되어 있거나, 문화의 다양성에 근거해 전선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회는 여전히 모순들로 가득 차 있고, 오히려 이런 모순들은 중층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영화의 대안적인 역할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법과 자본‘이라는 거대담론이 아닌 ‘성, 젠더, 계급, 지역‘ 등 현재 문화를 가로지르는 정체성의 화두 속에서 독립영화는 스스로의 입장을 재정립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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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전쟁>을 감상하고....

 

<대추리전쟁>에 대해서....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대추리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뉴스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접할 수 없었던 대추리 주민들의 치열한 싸움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기에 된 그들의 심정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 할 수 있을까? 그냥 적당한 보상금을 받고 이주해서 피터지게 싸우지 않고 편안하게 살면 될 것 아니냐며 대부분 많은 이들이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아직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땅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은 다시금 전쟁을 위해 농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고 말이다. 

 대추리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그들이 평생 일궈온 농토와 터전을 지켜내고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는 것뿐인데, 정치권력의 힘은 어김없이 그들의 소박한바램과 희망을 묵살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영화가 짧았지만 대추리 주민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느 정도 잘 전달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과연 관객들의 동요내지는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큼 호소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여기에는 구성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면 짧은 분량에 비해 너무나 긴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거나, 보상신청을 한 주민들과의 갈등, 주민들의 촛불시위와 주민회의 모습, 공권력과의 대치와 유혈 사태를 보여주는 것들이 마구 흐트러져 있어서, 주민들의 좀 더 세밀한 실제적인 상황과 심정에 대해서 전달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추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전쟁의 모습이 아직 멀게 느껴지는 것이 개인적인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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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3

 

단편영화산책 발제문

<대추리 전쟁>과 신자유주의


                                              20041235 도유리 / 2005138016 정지원



1. <대추리 전쟁>


* 제작기간

2005년 2월 ~ 2006년 5월 (1년 3개월)

* 시놉시스

평택 미군기지 대규모 확장이 추진되면서, 예정지인 팽성읍 농민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행사를 벌인다. 보상과 도시에 대한 유혹으로 마을의 분위기는 흉흉하지만, 주민들은 이웃과 땅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는 않다.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팽성을 찾아오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

* 연출의 변

2005년 3월 나는 평택을 찾았다. 미군기지확장예정지인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는 평택에서도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대추초등학교로 가는 길, 창 밖에는 평야가 보인다. 누구는 200만평이라고 하고, 누구는 300만평이라고 했다. 그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선다고 했다. 평야는 따뜻한 봄기운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그래, [들이 울고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투쟁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갈등하는 주민들을 만나고, 서로 싸우게 되는 주민들도 만나게 된다. 그 와중에 하늘에서는 미군의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 미군의 가족들은 대추초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구경하곤 한다.

미군은 왜 평택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려고 할까? 주민들의 일상은 야만적 폭력에 의해 점거당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데모하는 대학생들이 싫었다던 주민들은 이제 그들을 이해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활동가들은 대추초등학교에 모이고 있다.

나는 그곳에 희망을 안고 걷고 있다.

- 출처: 푸른영상 홈페이지, “대추리 전쟁” 보도자료 중


1). 형식 - 시네마 베리떼

<대추리전쟁>은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 이전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정부와 주민들 간의 갈등, 그리고 주민들 서로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언뜻 보기에 이 작품은 대추리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주는 듯하지만, 설명적 다큐라고 보기에는 상호작용적 양식, 즉 시네마 베리떼의 형식을 더 강하게 띄고 있다. (표 1참고)


이 다큐멘터리가 가진 가장 뚜렷한 상호작용적 양식은, 작품 전체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주민들의 인터뷰이다. 주민들의 인터뷰는 그들의 의견과 주민들 간의 갈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연출의 관점을 명확히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정일건 감독은 정부와 주민이라는 갈등 관계에서 주민의 편에 서서, 사건의 전말을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다.

 

표1)- 표가 제대로 붙이기가 안되어서 그냥 텍스트로 올립니다.

 (빌 니콜스의 다큐멘터리의 4가지 양식 참고)

설명적 양식

▶정보제공, 교훈적, 교육적, 나레이션과 화면의 일관성

▶논리적 태도로 일반 대중에 접근한다.

▶나레이션이 과다하고 神(이성-합리)의 권위를 가장

▶대화<훈계,  논쟁<해설

▶상식적,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일치하는 형식

▶인간상호간에 인정되는 확실성의 인식론에 근거 

예)플레허티, 그리어슨을 포함한 60년대 이전의 다큐  대부분의 T.V다큐

 상호작용적 양식 (시네마 베리떼)

▶제작자의 노출, 사건참여, 대상을 자극, 간섭한다 (노골적/간접적)

▶제작자의 목소리, 모습등장

▶인터뷰를 자주 사용

▶촉매자의 역할-대상과 관객을 매개

▶진실은 기다린다고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개입하여 잠재해있는 진실을 드러나게 한다.

▶제작자의 관점을 명확히 노출

▶관객들은 제작자- 대상, 그들의 상호관계에 모두 관심 갖게 됨

▶실재 접촉과정에 대한 이해

예) 카메라 때문에 드러나는 노조원들과 지도부의 갈등이 주된 내용이 될 수도 있다.

▶현재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제작자의 개인적 관점, 과거와 현재의 관계/ 현재에 대한 과거의 영향

▶나레이션이 설명적이지 않고 개인적 경험에 의존

▶제작자가 판사라기보다는 변호인에 가깝다.

▶카메라가 대상을 압도하진 않는가?

 

2). 구성 - 사건의 흐름 순서에 따라


<대추리 전쟁>은 2005년부터 3개월 동안 이 사건이 진행되는 순,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 되어있으며, 더불어 큰 사건들 사이에 주민들과 평화 유랑단의 인터뷰를 첨부하여 관련된 인물들의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프롤로그 - 사건 배경 지식 (자막으로 전달)

▶ 타이틀

▶ 주민 탐문 - 형편과 싸움의 이유

        #주민들의 인터뷰

▶ 촛불행사 - 촛불행사의 경과와 의미

▶ 지장물 조사 - 주민들의 갈등

        #교장집 지장물 조사

        #대책위 회의 “명단을 받아야 돼”

        #주민들의 싸움

▶ 대책위의 갈등 - 주민분열에 따른 입장차이
        #동네 할머니 인터뷰 (농사짓는 모습에서)

▶ 수용한 주민들의 입장

        #수용한 주민들의 인터뷰

        #마을 앞 지키는 주민들 (반대측)

        #찬성 측 인터뷰

        #노인잔치

        #반상회 (수용측 제외하고 새로운 반장 선출)

▶ 2005년 7월 10일

        #마을 스피커 방송 (평화 대행진 취소 방송)

        #7월10일 싸움 (전경과의 대치 장면, 농작물 피해)

▶ 7월 10일 후 싸움의 경과

        # 가을에 추수

        # 문정현 신부 인터뷰 및 찬성 주민 인터뷰

        # 중앙토지수용위원회 결정

▶ 새로운 삶, 새로운 투쟁

        #이주자들 (찬성 주민들은 보상을 받아 떠나고, 평화 유랑단원들이 들어온다)

        #농사교실

        #영농차단작업 (농지훼손, 수로폐쇄 등)

▶ 절망, 그리고 희망

        #5월 4일 행정대집행 (대추 분교 철거)

▶ 에필로그

        #음악 

        #대추리 전경    


*  푸른영상 홈페이지, “대추리 전쟁” 보도자료 참고



3). 나래이션과 음악


▶나래이션


<대추리 전쟁>은  나래이션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주민들의 모습과 인터뷰, 그리고 자막만을 통하여 사건을 전달한다. 영상과 인터뷰를 통해 주민들의 격한 감정은 충분히 관객들에게 전달되며, 나래이션의 배제는 연출자의 감정이 절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 


나래이션과 같이 음악의 사용 또한 매우 절제 되어 있다. 중간 중간 삽입 되는 음악은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현장음을 사용하여 거칠지만 그 장면의 정서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에필로그 부분의 감독이 “생명의 땅”이라고 묘사하는 대추리의 전경을 보여주는 장면에만 유일하게 음악이 삽입되고 있다. 이처럼 몇 안 되는 장면에 적절하게 음악을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감독은 사건의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다.



2. 대추리 사건의 History


- 2001년 11월 제 33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 : 주한미군 기지, 훈련장 재배치 합의

- 2003년 6월 한미동맹 정책구상 2차 회의 : 주한미군 2사단 한강이남 이전 합의

- 2003년 10월 주한미군 대책 기획단 정식 출범 : 주한미군 한강이남 이전 문제 담당기관

- 2004년 1월 한미동맹 정책구상 6차 회의 : 주한미군 용산 기지 전체 한강이남 이전합의

- 2004년 4월 연합토지관리계획(LPP) 첫 사업 시작 : 오산 공군기지 확장공사 착수

- 2004년 6월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9차 회의 협상 결렬 :

  미군, 미 2사단 주둔지 반환 대신 오산/평택 기지 늘려줄 것 요구

- 2004년 7월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10차 회의 : 용산 기지 이전 협상 완전 타결

- 2004년 8월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11차 회의 : 미군 이전 오산/평택 부지 확정

- 2004년 8월 정부 : 평택지원 특별법 입법 예고

- 2004년 10월 윤광웅 국방장관 /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 :

  용산 기지 이전 포괄협정(UA) 및 연합토지관리계획(LPP) 개정안 공식 서명

- 2005년 3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 대책 위원회 출범

- 2005년 7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한반도 전쟁반대 7.10 평화 대행진 개최.

              경찰 폭력진압 논란

- 2005년 8월 평택시 교육청 : 대추분교 소유권 국방부에 이전, 시민단체에 퇴거 요구

- 2005년 9월 건설교통부 중앙토지수용위원회 : 평택 미군기지 이전 예정부지 수용 결정

- 2005년 9월 국방부 : 평택 미군기지 예정터 중 협의매수 되지 않은 땅에 대한 강제수용

                       절차 착수

- 2006년 1월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전국평화행진 개최

- 2006년 2월 헌법재판소 :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연합토지관리계획 에 대해 평택

                           주민들이 낸 헌법소원 각하

- 2006년 3월 국방부 : 대추분교 강제 퇴거 시도, 실패

- 2006년 5월 국방부-범대위 대화 결렬 : 범대위 공동대표, 팽성대책위원장 참석 거부

- 2006년 5월 ‘여명의 황새울 작전’ : 대추리 대추분교에 군/경 병력 투입해 행정대집행

                                    (강제퇴거) 감행, 524명 연행, 부상자 210명

- 2006년 9월 대추리, 도두리 빈집 철거 시작 : 주민 및 지킴이 23명 연행, 부상자 4명

- 2006년 11월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장 김지태 씨 (대추리 이장) :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혐의로 징역 2년 선고

- 2006년 11월 평화영화제 개최 : <대추리 전쟁> 상영논란

- 2006년 11월 평택 미군 부지 철조망 추가 설치 시작 : 영농행위 원천봉쇄

- 2006년 12월 국제 앰네스티, 김지태 이장 양심수로 지정 및 석방촉구

- 2006년 12월 김지태 이장 보석 석방

- 2007년 1월 정부, 평택주민대책위 협상 재개 : 평화적 해결 원칙 합의 및 세부사항

                                               논의 시작

- 2007년 1월 평택기지 주민 이전원칙 합의 체결 : 평택 기지 이전에 사실상 동의

- 2007년 2월 평택기지 주민 이주 및 생계지원 방안 합의 : 최종합의

- 2007년 3월 29일 평택주민 이주 시작

- 2007년 4월 15일 평택주민 이주 완료



3. 전략적 유연성이란?


해외 주둔 미군을 전 세계 어느 곳으로든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도록 군대를 신속 기동군으로 만들어 재배치하며, 그 작전 범위를 유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략적 유연성은,


① 장비의 유연성 ; 장비들의 전 세계적 범위의 이동이 가능하도록 한다.

② 미군 병력이동의 유연성 ; 신속 기동군 체제로 모든 미군체제를 전환한다.

③ 기지 사용의 유연성 ; 미군 기지와 주둔국의 기지를 공동으로 사용한다.

④ 사전 협의 절차의 유연성 ; 미군 입출입의 제약요소를 최소화한다.


등을 모두 포함한다.


2003년 11월 25일에 부시 행정부가 발표한 ‘해외미군 재배치 계획(GPR : Global Posture Review)' 은, 부시 대통령이 9.11 사태 이후 선포한 ’테러와의 영구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GPR은 대테러 전쟁 시대의 군사 기술과 운용의 틀이 될 부대 재배치 계획으로서, 테러문제를 치안의 대상이 아닌 전쟁의 대상으로 다루기 위한 것이다.



4. 쟁점으로서의 전략적 유연성


① 북한과의 대립


주한미군은 북한에 대한 정밀타격과 신속한 공격을 위해 전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더불어 주한미군 핵심전력을 북한의 장사정포 사거리에서 벗어난 한강 이남지역인 평택에 재배치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과 미군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 또한, 현재 주한미군 재배치는 북에 대한 선제공격계획(CONPLAN 8022)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미국정부가 판단한다는데, 이것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직 미국의 결정에 의해 우리는 또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② 해외침략의 전초기지


주한미군은 지금까지 ‘한국방어’ 라는 명분으로 한국에 주둔하였으나, CONPLAN 8022에 따르면 한국방어는 이제 한국군에게 넘기고 주한미군은 세계 다른 나라들의 분쟁, 소요사태, 전쟁 등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동북아 지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에 주한미군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이 상시적인 주한미군 해외침략의 전초기지 또는 병참기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이 주둔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이 테러의 대상이 되었듯이, 평택 미군기지 이전이 현실화된다면 한국도 테러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③ 한국정부의 태도


NSC (National Security Council ; 국가안전보장회의) 와 한국 외교통상부는, 애초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하여 이것이 단순한 주한미군의 출입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한미동맹의 성격과 한국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 재배치 논의가 본격화되자 국회와 국민들에게는 주한미군재배치와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주장하며 기지 재배치 일정이 늦추어질 것을 우려해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된 문제를 덮어버렸다.



5. <대추리 전쟁>과 대추리


대추리와 도두리를 비롯한 평택미군기지 예정부지는 이제 빈 땅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곳에서는 대추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대추리 주민들을 위한 고향 땅 회복 기원제 등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앞서 보았듯, 미군기지 확장은 대추리 주민들의 아픔을 별개로 치더라도 많은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대추리가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정일건 감독의 다큐멘터리 <대추리 전쟁>. 이제는 지나간 사건을 담은 작품으로 존재할 뿐이겠지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대추리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그리고 미군기지 확장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들을 두고두고 돌이켜볼 수 있게 해주는 의미 있는 작업으로 남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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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독립영화

영상이론과 박지연

 

 현재 독립극영화를 만드는 독립영화인들은 대체로 20 후반에서 30 중반의 연령대에 걸쳐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메인 세대이며, 주요 소비자인 동시에 한국 영화산업의 풍부한 예비인력이기도 하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영화들의 다양성은 극히 개인적이며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회문화적 동기가 있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권력도 자신조차도 믿지 않을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희망이라든가 사회공동체적 질서 등을 지켜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한국독립영화의 정체성의 방향이 세대에 따라 그리고 주관적이나 객관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져 일관성 있게 방향을 설정할 없는 혼란의 발생은 독립영화에 대한 본질의 추구나 우리의 독자성을 발견하고 강조하는 정체성의 창출을 체계적이며 적극적인 태도로 시도하지 못했다는 데에 기인한다. 정체성은 본래의 형체로 존재의 본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독립영화의 정체성의 추구는 존재의 목적을 쟁취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한국영화미학의 정체성 문제를 지적하자면, 영화스타일의 변화가 전통의 내재적 유산의 발전이라기 보다 외래문화의 수용에 따른다는 사실이다. 한국문화의 전통은 내용은 저항적 현실성이요 표현은 풍자적 상징성이다. 그러나 문화의 근대화는 서구문화에 함몰되어 전통의 본질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운규의 <아리랑> 보여준 저항의식은 바로 전통적 내용이며 몽타쥬기법은 상징      풍자였으나 <아리랑> 이후 한국영화미학의 기조는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는 사실주의를 선호하였다. 한국의 전통예술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엇갈린 만남을 갖는 것은 민중의 현실은 처절하게 느끼면서도 표현은 우회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적인 내용을 형식주의로 표출하는 양식의 수용이 우리의 문화적 정서라 하겠다. 그러나 근대문화의 수용에 따르면서 우리의 의식은 서구화되어 카메라가 갖는 유물론적 기능은 자연스럽게 사실주의적 표현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정치적 현실은 반제국주의나 반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사실주의 영화를 요구하였다. 여기서부터 한국영화미학의 정체성은 빗나가기 시작한 것이다.(김수남, "한국영화의 미학", [아세아 영화연구], 행복한 , 1998, 44-5.)

 

따라서 한국독립영화의 정체성의 방향은 상실한 우리의 전통적 문화정서를 어떻게 부활시키냐를 모색하여야 것이다. 한국독립영화계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어떤 간섭도 받지않고 독립영화의 무한한 미학적 성취가 가능한 시점에 이르렀다. 문제는 한국영화의 미학적 전통과 정체성의 규범을 어떤 기준으로 제시하여야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한국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 서구영화문화의 수용의 과정을 거꾸로 고찰하면서 모색되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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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기술>

파산의 기술_ 낯설음

                                                                                                           박지연

 

 

《파산의 기술記述》은  우리 주위를 낯설게 만든다. 제작방식과 표현, 소재들은 충분히 익숙한 방식으로 이해가 가능하지만, 영화가 시사되면서 영화가 보여지는 모습들은 상당히 낯설다. 지하철의 사람들과 주거지역의 사람들, 도로와 자동차들, 영상 밖에서 말하고 있는 뉴스나 라디오의 목소리들은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환경’들이다. 이런 환경들이 낯설어 지는 것은 《파산의 기술記述》이 일반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감독은 -“‘파산’이라는 소재를 선택해 지난 10여 년 간의 한국사회를 보여주는 장면들을 나열한다. 분석이나 설명이 아닌 이 같은 ‘기술’은 세계의 변하지 않는 작동 방식을 발견하게 한다.” – 영화가 사회에 대한 대항으로서 영화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러한 ‘기술記述’은 관객들이 보았을 때 불편한 영화로 다가온다. 구체적인 흐름이나 형식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인지 영화는 일반적인 영상들의 나열임에도 불구하고 거리감을 둔채 진행 되어져 간다. 사회적 문제로 ‘파산’은 개인이나 가족이라는 집단에 가장 큰 고통이다.  이러한 문제가 사회의 체제나 경제의 불공정한 성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상당히 이성적이며 긍정적이다. 여기서 《파산의 기술記述》이 낯설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자신들의 문제를 견뎌내고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디서부터 문제가 커지게 되었는지 또 무엇이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영화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TV 광고들과 파산한 이들의 인터뷰, 카드회사의 인터뷰가 교차되어 나타나면서 영화는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조세희의 소설과 사진들, 감독 자신의 나래이션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파산’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영화를 이해하기에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 감독의 생각과 의도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과 사진의 분석-이러한 요소들이 영화가 가진 진지함을 더욱 어눌하게만 이끌어나간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소재에서, 표현 방식에서, 그리고 감독의 의도, 모두가 일반적인 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영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파편화된 영상과 인터뷰 때의 카메라 앵글들, 갑자기 나타나는 이산가족 찾는 방송-이 처음부터 낯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이 친근한 것도 아니 였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회와 사람이 만나는 부분을 어색하게만(익숙한 것들이 한데 모여 의미를 만들어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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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일기

 


 

 

"농가 일기"                                                            방송영상과 정지원

2004년, 젊은 농민 운동가들은 우리의 농가를 지키기 위해 추운 겨울 국회 앞에서 밤을 지새운다. 2007년, 젊은 농민 운동가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다. 어느 화창한 봄 날, 농민들은 칠레의 농작물 홍수의 여파를 이겨내기도 전에 한미 FTA 타결이라는 폭풍우를 맞게 되었다.


2004년, 어느 따뜻한 봄 날, 젊은 농민 이근혁은 동료 농민들과 함께 씨 뿌릴 준비를 한다. 이제 귀농 5년 째, 아직 알고 있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 능숙하게 씨를 뿌리며 농사준비를 시작한다. 그의 어린 아내 김은심 또한, 초보 농민으로서 남편을 도와 농사를 짓는다. 남편의 눈에는 한 없이 부족하고 어설픈 아내이지만, 농사를 짓겠다는 남편을 도와 짓는 모습이 아름답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농작물을 돌보면서 FTA 저지 시위에 참가한다. 가을에는 수확을 하고, 떨어지는 농작물 값에 근심만 쌓여간다. 겨울에는 칠레와의 FTA 저지를 위해 국회까지 가서 싸운다. 그리고 아픈 딸의 수술을 위해 서울로 간다. 1년 내내, 쉴 수 있는 틈은 없다. 농민의 일 년은 힘들고 고달프다.


그런데도 한 - 칠레 FTA 비준안은  너무나도 쉽게 통과했다. 추운 겨울, 편찮으신 아버지를 뒤로 하고 국회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시위를 해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정부는 한국의 핸드폰과 전자산업을 칠레의 과일, 농산물과 맞바꾸었다. 농민들은 정부에게 배신을 당했고, 비준안 통과로 인해 그들의 우려했던 다른 국가와의 FTA 체결 움직임은 너무나 빨리 진행되고 있다. 농민들은 우리의 먹거리를 지키기 위해 아직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근혁과 동료 농민들에게 봄은 다시 찾아왔고, 그들은 다시 씨를 뿌린다. 또 다른 폭품우가 몰려오고 있지만, 씨를 뿌려 모 심을 준비를 한다. 이러한 어두운 미래가 그들을 힘들게 하지만, 딸아이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근혁을 비롯한 많은 젊은 농민 운동가들이 정부와 싸우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어쩌면 잇따른 FTA 체결로 우리의 농촌은 사라질 지도 모른다.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을 등지고 대 도시로 떠나고,  싼 가격에 눈이 먼 많은 장사꾼들이 수입 농산물을 국산으로 둔갑시켜 소비자들을 속이려 든다. 이 많은 방해의 장벽 속에서 그들의 힘겨운 싸움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몇 몇의 젊은 농민 운동가들이 그들의 신념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과정을 통해 조금은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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