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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의파다(리뷰)

우리는 정의파다 <발제 리뷰>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우리는 정의파다 (We Are Not Defeated 2005, 이혜란)


개인적 질문들

독재정권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의해 희생자로 전락해 버린 ‘언니들’

‘그녀들의 투쟁은 젠더의 차별에 의한 것일까?

가부장적 정치 이데올로기를 침범한 단죄인 것인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친 한국 사회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위치는?

그리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어떠한가?

무시되고 짓밟혀 버린 그녀들의 ‘아름다워야 했을 그 시절’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언니들’은 여성도 노동자도 아닌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는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여성노동자들의 위치는 과연 나아졌는가?

 사회 정치적 시선

 이혜란 감독이 만든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다큐멘터리 옥랑상' 수상작이며

제8회 여성영화제 상영 당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작품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1978년 동일방직에서 해고당해 현재까지 28년 동안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인천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 중 하나였던 동일방직은 197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 노조지부장을 선출했고 여성 중심의 노조 집행부를 탄생시켰다. 남성 관리자 중심의 어용노조가 득세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15세~18세 정도의 어린 나이의 '공순이'들이 노조를 장악했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동일방직에는 1,30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었고 그중 1,000명이 여성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당시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여성 중심의 민주적인 노조가 결성되자 노조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고 '공순이'로 불리던 여성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획득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동일방직의 근로조건은 비약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의 노동자들이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동일방직 노조가 다른 사업장의 노조원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사업주와 전국 단위 노조 상부조직,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부당한 탄압에 맞서 싸우는 조합원 124명을 해고시켰으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전국의 사업장에 배포해 이들의 재취업을 막았다.

갈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던 이들은 재취업도 힘든 상황에서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우며 긴 고난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고, 2004년에는 이들 중 37명을 동일방직에 복직시키도록 권고 조치했다. 하지만 동일방직 측은 아직도 권고조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그녀들은 현재까지도 124명 전원 복직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바라보고 싶은 시선


나이 어린 노동자에게 언니 노동자가 말한다. “넌 오지 않아도 돼, 겁이 날 거야” 후배가 답한다. “언니들을 따라갈래, 언니들은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잖아” 언니는 웃는다, “간들이 부었구나”

 영화는 이 길고 긴 투쟁의 세월을 살아 온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거의 인터뷰만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중간 중간에 사실 중심의 정보가 끼어들어 가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객관적' 이 아니라 '주관적'이다.

시나리오는 '언니'(감독의 표현)들의 말투로, 언니들의 기억대로, 언니들의 판단대로, 언니들의 감정대로 만들어진다. '지부장님'이 아닌 '언니'이고, 어용노조와 사주와 유신정권은 '그놈들'이다.

똥물을 퍼서 숨겨 놓았다가 힘없는 어린 여성들에게 뿌려 대는 그놈들에게 화가 난다기보다는 '인생 왜 그렇게 사는지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고, 대의명분이 아니라 '언니 따라 간다'이며, 해고를 당했을 때 '이제 누가 우리 동생 공부시키나'가 걱정이고, '그놈들'이 원칙을 내세우며 복직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내가 거기서 얼마나 뼈빠지게 일했는데…'이며, 복직되면 보란 듯이 내 손으로 사표 써서 사장 코앞에 내던지고 나오는 게 바람이고, '이것이 옳다'라고 강요하기보다는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가 그녀들의 이야기다. 또한 영화는 특정 사건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동일방직 하면 떠오르는 '똥물사건'이나 '반나체시위사건'은 그 투쟁의 맥락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그녀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다른 방법도 몰랐던 그녀들에게 똥물사건은 어이가 없는 일이며, 반나체시위는 잡혀가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설마 옷을 벗어도 잡아갈까?' 했지만 '그놈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너희들 여기서 다 죽여도 내가 감방 갈 것 같냐?'는 것이 '그놈들'의 반응이었다. 반나체시위사건이 어린 여공들의 반나체 때문에 사회적으로 떠벌려졌지만, 이렇듯 그녀들에겐 '그놈들'의 거대한 벽을 확고하게 느끼게 한 계기였을 뿐이다. 또한 영화는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인터뷰를 한 이 중에는 노조 지부장을 지낸 사람도 있고 평조합원이었던 사람도 있지만 지부장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도 않고 그가 지부장이었던 아니던 별로 관계없이, 누가 지부장이었는지 관객들이 기억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 없이 이야기는 전개된다. 누가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언니들’의 이야기 방식에 익숙해지고 각 인물의 감성과 인생사들이 친근하게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을 노동자로 자각하고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자와 다른 여성적인 모습들, 예를 들면 ‘사철나무’나 ‘차돌’ 같이 여성 취향이 반영된 모임 이름들, 세익스피어 전집을 할부로 사면서 뿌듯해 했다는 고백들, ‘같은 여자이고 언니기 때문에 조합원들을 믿을 수 있었고 힘든 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증언처럼 여성적인 모습이 많이 드러난다. 이런 모습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단순히 ‘여자들이 뭉쳐서 싸웠다’는 사실의 증명이 아니라, 이 투쟁이 다른 남성 위주의 투쟁과 어떻게 달랐으며 흔히 약점으로 지적되던 여성성이 어떻게 강점으로 작용됐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증언을 영화에 담고 있다. 회사와 경찰 폭력에 대항하는 투쟁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많은 사진 속에서 이들은 웃고 있다. 회사에서 쫓겨나 합숙을 하며 공동체 투쟁을 하면서조차도 예쁘게 화장하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화장하는 모습이 재밌어서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는 말이나, 속옷과 칫솔을 같이 쓰고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 간지럼을 태우고 싸우고 면서 정이 들고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는 말은 ‘동지의식’처럼 남성적이거나 무성적으로 느껴지던 단어에 전혀 다른 감성을 부여한다. 이런 동지의식은 ‘순종하며 살아야 할 여자가 노조를 하는 건 말도 안 된다’며 가족이 반대하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고, 경찰에 잡혀가 욕을 먹고 얻어맞고 구치소에서 구류를 사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강했으며, 30년 가깝게 세월이 흐른 현재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언니들’의 이야기는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그녀들 인생 그 자체이며, 노동자라는 계급에 앞서서 여성들만의 유대감과 정서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서

 1970년대의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십대 소녀들이 하루 14~15시간의 노동을 각성제 타이밍과 왕소금으로 버티며 남자들 임금의 반도 안 되는 급여를 받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해 들어 본적은 있는가?

누구나 알다시피 당시는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로 1972년은 유신체제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유교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 정권 하에서 민주노조를 만들고, 여성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집행부를 구성하자고 들고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노동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주로 이야기되는 것은 남성 노동자의 역사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타자로 밀려나 있어야 했던 시간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정의파다>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던 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의 한 순간을 담고 있으며 앞으로의 우리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과제 또한 던져주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여공1)과 ‘정치적인 것’

 여성 노동자들은 가족 및 공장, 그리고 교육체계 등 각종 제도와 담론에 의해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여성 노동자들은 공적 영역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 유신 정권하에서 주창되던 유교 이데올로기에 있어서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면 여성다움을 상실하고, 남성은 무기력해진다는 담론이 우세했었다. 이는 여공이 노조라는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면 남성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유방식이 전제된 것이다. 그러나 여공의 익명적인 지식들에 대한 탐색은 여성 노동자들이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관습적인 지식체계와 담론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많은 남성 노동사가들은 ‘정치적인 것’, ‘의식적인 것’ 그리고 ‘정치 투쟁’은 거칠고 전투적이며 공적이며 국가와 정부에 격렬하게 반항하는 무엇으로 규정했다. 대부분 노동사 서술에서 정치적 계급의식의 소유자는 그 주체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남성적인 경험’ 혹은 ‘무성화된 경험’으로 통일된 주체였다. 따라서 여성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투쟁 역시 중성화된 주체로 묘사되었으며, 내러티브의 구성도 남성적 표상에 의해 독점되어 왔다. 그 결과 노동자 혹은 노동운동을 다룬 서술에서 여성 노동자의 존재는 간과되었고, 가족, 젠더와 욕망 등 역사적 중요성은 무시되었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권리위식을 획득하더라도 이것은 여성으로서 경험에 입각한 것이 아닌, 중성적인 ‘투사’란 담론의 형태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점차 의식화 과정에서 노동자로서 ‘계급 정체성’과 자신의 ‘인격’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안에 ‘여성’으로서 문제의식은 여전히 빠져 있었다. 의식, 조직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에 앞서 ‘노동자’임을 인식해야 했으며, 중성적 투사 - 동지라는 담론들에 의해 주체화되었다.


남성지배 노조

 1970년대 한국 남성 노동자의 세계 안에는 ‘남성-친자본-폭력-권위적’이라는 의미의 계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0년대 노조 운동사는 이러한 내부 균열 구조 아래 진행된 것이었으며, 특히 남성지배 노조의 위계질서는 전형적으로 작업현장의 그것과 ‘일치’했다. 다시 말해 거의 대부분 남성 작업반장들이 직장 대표위원 내지 대위원이 되었으며, 작업장의 성별 위계질서는 그대로 노조의 질서로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동일방직에서 여성 조합원들이 기존의 작업장 질서, 권위를 대표하던 남성들 대신 대의원이 된다는 일은 작업장과 노조 질서, 대표 체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되었다.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는 노조 운영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 간부노조를 만들려는 남성 노동자들의 ‘무의식적 습성’에서 비롯되었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가 간부를 하면 노조와 남성 노동자들이 무기력해진다는 담론을 생산해냈고 이를 통해 여성 노동자들을 노조와 작업장 내부에서 ‘부차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한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성별 분업 담론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잃어버린 ‘이름’ 찾기

 산업화 시기 노동체제의 수준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또 하나의 ‘배제의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노조 및 작업장에서의 ‘성별 위계질서’가 그것이었다. 산업화 시기 여성 노동자들은 ‘산업전사’이자 ‘승공의 역군’등 군사주의적 남성 주체로 호명되었다. 작업장 위계질서역시 군사주의적으로 조직된 성별 위계질서의 또 다른 변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주목해야할 점은 여성 노동자들의 잠재력이었다.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에게 노조 그리고 노조의 조직적 기반이었던 소모임은 그녀들의 ‘잃어버린 이름’을 돌려주었다. 공장으로 오기 전 여성 노동자들은 사적 가부장제의 젠더 불평등 아래 교육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또한 작업장에서는 성별위계질서 하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했으며, 이런 과정은 그녀들이 ‘시민’으로서 권리를 여성이란 ‘차이’로 인해 박탈당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최초의 여성 노조 지부장을 선출하게 된 1972년 동일방직 노조 선거였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가 노조 지부장을 맡는다는 것은 ‘여성답지 못한’것으로 의미화 되었고, 이는 공사 영역의 남녀분리와 연관이 있었다. 유교담론에 기초한 가부장제도 아래에서 국가조직과 가정은 질서유지를 위한 위계적 관계로서 특징을 지녔다. 특히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 특징과 능력이 다른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맡아야만 하는 직분도 달라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이른바 ‘분리 원리’는 남녀 역할과 활동 공간 분할의 원리로서 공적영역과 사적 영역을 성별에 따라 나누고 여성의 공적 영역 진입을 차단했다. 이처럼 공사영역의 분리 관념이 여전히 지배적이던 시기에 여성 노동자가 노조의 지부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경악’이자 ‘충격’이었을 것이다.

 IMF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계급구조는 급격히 ‘양극화’되었다. 특히 계급구조 변화 과정에서 주목을 받는 집단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비정규노동자들은 고용주와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주변화 되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조합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주변 계급’(under class)이 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는 ‘여성’이자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주홍 글씨’가 그녀들의 이마에 새겨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산업화 시기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정부, 고용주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의 시각이 다시 재림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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