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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기술記述

<단편영화산책>

강 지 혜

파산의 기술記述

 

내용-1날조된 희망들에 대해

재건축 아파트를 부수고 있다. 분명 저 조밀한 평수 대 아파트에는 가난한 누군가 들이 살았을 텐데. 여명처럼 들리는 어느 아이들의 웃음 혹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일찍이 간소한 짐을 챙겨 그곳을 떠났을 터. 청약이다 분양이다 이미 몇 채의 집을 소유한 자들이 재산을 더 불리기 위해 이곳에 달라붙을 것이다. 재건축은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기 위한 자들에게만 희망적이다. 희망이 보입니다 라는 채용공고를 보는 남자. 그는 희망을 보았을까? 비정규직인 인터뷰어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막연한 희망.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광고와는 엄연히 다른 삶들. 나는 내내 영화 앞에 나온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남자를 지울 수가 없다. 한 달에 85만원씩 96개월간 갚아야 된다는 블라인드의 남자. 정말 열심히 일해서 갚겠다는 말을 한다. 그의 미래를 점쳐본다면 선로에 뛰어 든 후 암전이 된 그 것이 아닐까. 이미 그는 블라인드 뒤에서 그림자로 된 모습이다. 이제 불만 꺼지면 될 듯. 이 희망은 집행자들, 승리를 선포한 자들의 사기극이다.

 

내용-2파산, 숫자들에 대해 혹 시간.

수학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아니 자본주의가 오셨다. 하물며 시간은 12시가 넘으면 다시 1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 시간마다 생산되어 정리된 미친 숫자들. 자본의 숫자 그 숫자를 불리기 위해 다른 곳에서 빼앗아온 파산의 숫자들이 미친 듯이 성장한다. 사망의 원인조차 숫자로 개조된다. 말도 안 되는 숫자들이 넘쳐난다. 숫자로 정의되는 삶. 강제 집행 중인 암전된 화면에서 200만원 205만원 220만원 이라고 부르는 숫자는 너무나 과학적이고 견고하고 폭력적이라서 감히 딴죽 걸지 못한다. 내 삶이 숫자로 분해되어 파산되어 빠져나가는 광경들.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가 시작한지 44분 50여초가 지났다 우리가 보아온 풍경들에 관해 주석을 달고 맺음말을 달아주어야 할 시간이라고 한다. 하물며 영화조차도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 있는데 40여 년간 집행자들에 의해 휘둘러진 우리의 역사에 대한 거짓된 결론과 숫자들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시간을 인질삼아 카멜레온처럼 변하며 알리바이를 늘리고 있다.

 

 

방식

밥상 위에 차려진 반찬이 넘친다. 지하철CCTV 화면에서부터 라디오, 인터뷰들, 시시각각 치고 들어오는 난쏘공의 대사들. 엔딩에 나온 빠르게 스케치를 하는 남자의 손길처럼 숨 가쁘다. ‘소재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목표였다.’ (감독의 말) 과연 그럴까? 멀어지는 것은 이미 불가능 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러하다면 감독은 이미 내성을 가져버린 우리들의 유약한 선한 얼굴을 질타할지도 모른다.

 

방식-1 파산자(여)들, 대비 교차

왜 하필 파산된 인터뷰어들은 셋 다 여성이었을까? 월드 이코노믹 포럼 장면과 교차 된다. 그 포럼에 참석한 양복쟁이들은 모두 남성들이다. 그리고 대부업 과장이라는 자도 남자다. 그는 자기자본 적정성에 대해 떠들며 대기업보단 가계대출이 남는 장사라는 식으로 말하며 이 시장을 누가 먼저 선점할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안타깝게도 이 시장에서 처참하게 망가진 세 여성은 그 희생물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하는 식으로 붉은 립스틱을 칠한 여성은 처음엔 입부분만 클로즈업 되어 있다. 이러한 남/여 대비 구조는 더 극적인 효과를 준다. 더구나 애 아빠가 3개월을 못 넘겨 혹은 애기 아빠가 놀기 시작 등등의 인터뷰로 이 바닥에는 먼저 침몰하고만 가장들의 그림자도 보인다. 점차 여성들의 얼굴이 넓게 클로즈업 된다. 하지만 잔해물을 꽉 비틀어 쥐는 중장비기계의 몸짓아래 그녀들은 무방비상태로 공개된 기분이 든다.

 

뒤에서 가장 강하게 대비되었던 부분은 서울시청 앞 민주화운동 콘서트 장면과 죽창을 든 민주노총 시위장면이다. 감독은 따뜻한 기념식의 밤, 얼음 같이 차가운 대낮의 딱딱함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자체도 우리가 흔히 알던 밤과 낮의 느낌을 전복시킨다.

 

방식-2 낯설게 하기?

선로에 뛰어든 남자. 암전이 된다. 강제집행을 온 집안은 암전처리 된다. 마치 누군가가 눈을 질끈 감아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강제집행원의 사무적인 말투가 관객의 귀를 후벼 판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게 아니다. 어두운 화면에 진열한 난쏘공의 문장들처럼 우리를 더 불편하게 할 심사인 거 같다. 호기심조차 갖는 것을 부끄러워 할 만큼 그는 단호하다. 이건 눈물까지 쏙 빠지게 만들만큼의 냉정함이다.

인터뷰어들의 모습이 (이런 영화기술방식에 대해 모르겠음.) 저화질의 화면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웃음을 짓거나 행복 희망에 대해 서술할 때 더더욱 그 장면이 더 자주 잡히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마치 매스미디어가 던져주는 날조된 희망을 말하는 느낌도 든다. 비정규직 그들은 잠재적인 파산을 안고 있다. 하지만 잘될 거야 희망적이다 라고 말한다. 중간에 삽입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광고에서 나온 문구는 인터뷰어의 삶과는 현저히 차이가 있다.

 

마치며

식약청에서 발표한 황색포도산구균의 내성이 높아지는 것만치로 영문도 모른 채 미세먼지에 당하는 것처럼 우리도 집행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세뇌되는 이 메커니즘에 깊은 내성을 지닌 채, 영문도 모른 채 파산되어 가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든 바보 같은 생각은 이 영화 무척 세련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감독이 넘치도록 말하고 싶은 세상의 기록들에 숨이 차기도 했다. 더구나 속이 다 후련해야 하는데 왜 이리 갑갑해지기만 할까. 어쩌면 감독이 말하는 집행자들의 정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똑바로 소리 내어 그들을 세세히 다 잡아내는 그의 모습에 질리기도 했다. 하지만 차가우면서도 무언가 넘쳐나는 어휘로 포장된 내레이션을 들으면 그의 분노가 얼마나 오랫동안 깊게 정리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켜켜이 쌓여 우리에게 다가온 전단지의 벽처럼 우리는 또 오랜 시간동안 그 전단지 지층을 벗겨내며 진정한 나의 적을 보아야 한다. 양치기 소년들이 양산되는 그 곳을 박멸하길 바라며.

 

나의 목숨을 달라하면 너의 가슴에 칼을 꽂겟다. 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이 이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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