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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위해 퍼나른다.

  • 등록일
    2005/04/27 12:34
  • 수정일
    2005/04/27 12:34
노동과 소외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주장은 가장 오래되고 동시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비난이다. 사회주의는 훌륭한 이념이지만, 우리가 인간 본성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빈곤과 착취와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공격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아마도 기독교의 오래된 원죄 개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이야기할 때 여성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은 자기 이마에 카인의 낙인을 찍고 태어난 타락한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현세가 아닌 내세에서, 신의 축복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러한 주장을 세속적 용어로 바꾸어, 18세기 영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발흥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시장경제의 기원을 '거래하고, 바꾸고, 교환하려는 인간 본성의 경향'에서 찾았다. 이러한 생각들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스미스의 자유시장 경제학은 통화주의 속에 살아 있다. 모든 종류의 '과학적' 이론들은 경쟁과 전쟁이 인간 본성에 내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예컨대, 사회생물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이비 과학은 인간들이 실제로 땅뙈기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주장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예컨대 생물학은 저주를 섞어, 여자는 천부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요리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불변의 인간 본성을 전제하는 사상 전체를 뛰어넘었다. 그는 여섯 번째 테제에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란 개별적인 인간 각각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사회관계의 총체이다"하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추상적인 의미에서 '인간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가 변동함에 따라 인간의 신념이나 소망이나 능력도 변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유형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으로 변동해 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나의 분석방법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주어진 사회 단계로부터 출발한다"고 썼다. 비록 마르크스가 불변의 인간 본성 개념은 거부했지만, 그는 매우 상이한 사회들에서 사는 인류가 어떤 것들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진실로 이러한 공통 속성이야말로, 인간사회가 변동하고 이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신념과 욕구 그리고 능력이 변동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요인이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자신의 생각을 상세히 전개했다. 여기에서 그는 포이에르바하의 유(類)적 존재로서 인간 개념을 이어받고 있지만 거기에 근본적으로 다른 내용을 부여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를 다시 한 번 인용하면, "인간의 본질은...... 그[포이에르바하]에게는 단지 '유(類)'로서만, 즉 많은 개인들을 오직 자연적인 방식으로 결합시키는, 내적인 무언(無言)의 보편적 성질로서만 파악될 수 있었다." 포이에르바하에게는 사람들을 사회로 함께 결합시키는 것은, 개인들을 서로에게 끌어당기게 하는 자연적이고 불변의 감정인 사랑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는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며 사회의 토대이다.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의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 대상세계를 상대로 노동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 생산은 그의 활동적인 유적 삶이다. 이 생산을 통하여 자연은 그의 노동으로 그의 현실로 나타난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그래서 인간은 생존하고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짓는 것은, 인간이 그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동물은 그 자체로서 생명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기 생명활동 자체를 자기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의식적인 생명활동을 가지고 있다....... 의식적인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의 생명활동과 직접 구별되게 한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그 자신이 수많은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추를 보면 더 명확해질 것이다. 하나의 꿀벌통은 고도로 조직된 분업사회인데, 개개의 꿀벌은 꿀벌 경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꿀벌의 작업은 반복적이다. 그 작업은 수백만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한 마리의 꿀벌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리부터 매우 좁은 범위의 행동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이러한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인간은 생산의 방법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고도의 지적 능력때문이다. 인간은 반성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서 물러서서, 그것을 같은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다른 방법들과 비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목표를 생각해 낼 수도 있다. 인간이 역사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연 역사는 어떤 종류의 동물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행동이 어떠한가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자연 세계의 변화는 단지 새로운 종이 나타날 때만 일어난다. 이와 달리 인간 역사는 같은 종이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의 변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의식은 인간이 참여하는 생산활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강조했다.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은 의식이나 종교 또는 그가 무언가를 욕구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들 자신과 동물을 구별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는데, [이러한 생존수단의 생산은] 인간의 신체조직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는 바의,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자라는 주장은 이전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회에 관한 기본 가정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합리적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에서는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는 힘을, 다른 모든 활동, 특히 역사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주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상의 고된 육체노동으로부터 구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노예 사회의 산물이다. 고대 세계의 지배계급은 육체노동을 노예에게만 적합한 활동으로 보았다.(노예에 대한 로마법의 정의는 말하는 도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보다 고상한 정신적인 일을 추구할 수 있는 노예소유주의 이미지였다.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부르주아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구별했는데, 그러한 구별 자체가 바로 그들이 살았던 계급사회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인간사에서 오직 정신적인 생활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취급했으며,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음식, 의복, 주거와 같은 잡다한 물질적 재화를 자신들에게 제공해 줄 것이라고 가정했다. 마르크스와 말한 바와 같이, "헤겔이 알고 인정했던 노동은 오직 추상적인 정신노동이었다."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을 인간 존재에 기본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뒤집었다. 그는 노동을 인간이 자연과 결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이 자연에 의존하여 생존한다는 것은 자연이 그의 몸체이며, 그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연과 교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의 이 '끊임없는 교환'은 이중의 과정이다. 인간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킨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영원한 '유적 존재'로 보는 개념을 조소했던 것처럼 자연이 불변이라는 생각을 조롱했다. 그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성적 세계가 영원한 옛날로부터 직접 주어져 항상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산업의 생산물이고 사회 상황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즉, 감성적 세계는 역사 속의 각 세대들이 이전 세대의 어깨 위에 서서 활동한 결과라는 의미에서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간단한 '감성적 확신'의 대상들조차도 오직 사회 발전과 산업 그리고 상업교류를 통해서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벗나무는 다른 거의 모든 유실수와 마찬가지로 겨우 수백 년 전에야 상업에 의해서 우리들이 사는 지역에 이식된 것이며, 또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회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만 이 벚나무는 포이에르바하에게 '감성적 확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생산은 마르크스에게는 사회적 활동이다. 그는 노동을 '이중의 관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자연적 관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사회적이라 함은 어떠한 조건 아래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목적으로든지 간에 여러 개개인들의 협업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사람들을 사회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치경제학자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 개념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자본주의 시장의 작동이 이러한 '자연인'의 욕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마르크스는 이들을 공격했다.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홉스가 말한 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즉 권력과 부를 둘러싼 끊임없는 투쟁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하는 데 쉽게 봉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환상을 '로빈슨주의'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이 마치 무인도에 사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경쟁 사회에서는, 개인은 이전의 역사 시대에는 자신을 특정한 인간 공동체의 부속물로 만들었던 그러한 자연적 유대 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 사회적 동물[공동체 속에서 사는 동물]이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오직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개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동물이다. 사회 바깥에서 고립된 개인이 생산한다는 것은...... 함께 살면서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인간세계 바깥에서 언어의 발전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이다. 생산이 가장 기초적인 인간활동이라면, 사회를 분석하고자 할 때 우리는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관계들', 영주와 농노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관계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생산이 사회적 활동이라면, 생산 조직의 변동은 사회의 변동을 초래할 것이며, "인간의 본질은 사회관계의 총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념이나 소망, 긔ㄹ고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의 핵심이다. 그 성숙한 해석은 다음 장에서 다를 것이다. 여기서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 나타나 있는 역사 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첫 번째 소묘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그의 비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분석방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게는 소외란 세계를 어떤 잘못된 방법으로 봄으로써 나타나는 순수히 지적(知的)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소외를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과정으로 파악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는 자신의 근력과 기술을 자본가에게 팔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통제할 수도, 자신의 노동 자체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된다. 그의 '생명활동'---그는 이를 통해 자신을 인간으로서 혹은 '유적 존재'로서 확신할 수 있다---이 되어야 할 것이, 어떤 목표를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인간 본성으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왜냐하면 그가 자연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인간화하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인간들로부터도 소외된다. 이러한 소외된 노동의 조건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를 낳는다. 이 관계에서는 일하지 않는 자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통제하고 그들로부터 이윤을 얻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노동자가 자기 노동생산물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세계로 보았다. 이 노동생산물은 소외된 형태인 자본이라는 모습을 취한다. 이러한 해석은 '1844년 수고'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개진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론'을 포함하는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들에서도 그러한 해석이 발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에 대한 그의 분석은 아직 자신의 ㅊ러학적 과거라는 딱지를 떼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모든 해석이 인간 본성이 어떠어떠하다---타락하고, 왜곡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존재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대조위에 구축되어 있다. '수고'에서는 자본주의는 여전히 일차적으로 비자연적인 사회이며, '지옥같은 사회'이다. 이는 푸리에나 다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인간 본연의 욕구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 관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약점에 대한 이러한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분석은 어떤 사회주의 이론에서도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들을 이전 사회주의자들의 저작들과 구분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전복시키는 물질적·사회적 조건을 창출하는 방식에 관한 그의 분석이었다. 마르크스는 '수고'에서는 아직 그가 '자본론'에서 말한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에 실제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일차적으로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을 어떻게 부인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데 관심이 있었다. 또, 계급투쟁을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고'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전복에서 계급투쟁이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질적인 언급도 없다. 공산주의는 '수고'에서는 아직 철학적 범주로서 그려지고 있다. 즉, 전체 역사가 그 목표를 통해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의 결과는 절대정신에 내재한 모순의 화해로서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헤겔의 순환적 변증법의 영향이 아직 강력히 남아 있다. 이러한 철학적 궤적은 정치적 효과를 가진다. 소외된 노동의 분석이 가지는 하나의 함의는 자본가들 자신도 소외되어 있으며, 비인간적이고 타락한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저주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주장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뿐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호소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은 자본가들 또한 부르주아 사회의 전복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가 1892년 그 자신의 초기 저작들에 관해 말한 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 대해서도 옳다. 근대 국제사회주의는...... 1844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책은 그 맹아적 발전 단계의 하나를 대표한다. 그리고 인간의 태아가 그 초기 단계에서는 아직 우리 물고기 선조들의 아가미 흔적을 재생산하듯이, 이 책도 근대 사회주의 선조들의 하나인 독일 철학의 흔적을 모든 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단지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교조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비롯한 사회 전체를 그 당시의 협소한 조건들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이론이라는 점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추상적으로 보면 분명히 옳지만, 실천에서는 완전히 무용하거나 종종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부유한 계급이 어떠한 해방도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집요하게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에 반대하는 한, 사회혁명은 오직 노동계급에 의해서 준비되고 쟁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의 저작들, '독일이데올로기', '철학의 빈곤', '자본론'과 그 초고들에서 마르크스는 그의 역사 이론을 충분히 발전시켰으며, 자본주의적 착취가 어떻게 노동자로 하여금 그 전복을 위해 집단적으로 조직하게 강요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1844년 수고'의 소외된 노동에 대한 분석은 엥겔스가 말한 바대로 후기의 성숙한 이론의 맹아이다. '자본'의 논리 "마르크스가 후세에 '논리학'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본론'의 논리를 남겼다"고 레닌은 썼다. 레닌이 이렇게 말한 것은, 비록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합리적 핵심'을 추출하는, '인쇄 전지 두세 매 분량'의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본론'이 그의 방법의 적용을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연구해 보면 우리는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해석에 깔려 있는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출발점은 헤겔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헤겔에게서는 그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립적 주체로까지 전화시킨 사유과정이 현실적인 것의 창조자이고, 현실적인 것은 다만 그 외적 현상을 이룰 뿐이다. 나에게는 그와 정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접근방법은 달리 말하면 유물론적이었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자의적인 전제들이 아니고 독단들도 결코 아니며, 오직 상상 속에서만 도외시될 수 있는 현실적 전제들이다. 이들 전제는 현실에 실재하는 개인들, 그 개인들의 활동, 그리고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그들 생활의 물질적 조건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들은 오직 경험적인 방식으로만 확인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실재하는 개인들, 그 개인들의 활동, 그리고 그들 생활의 물질적 조건들'을 단순히 관찰하거나 기록하는 것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은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항상 그것이 보이는 대로가 아니다. 예컨대 우리가 관찰을 통해 판단하면, 지구는 정지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러한 예를 '자본론'에서 들고 있다. "천체의 외견상의 운동은 그 실제 운동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고 감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대상세계의 운동을, 숨겨져 있는 실재와 외견상으로 나타나는 왜곡으로 구분했다. 그가 말하는 사물의 본질, 즉 내적 구조와 현상, 즉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 사이의 구별은 '자본론'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만약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사물의 본질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쓸모 없게 될 것이다"하고 주장했다. 현상이 실재와 다른 일반적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마르크스는 특히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그렇다고 생각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계급사회로서 자본주의는 그것의 운동에 대한 인식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의 배후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 마르크스는 그가 '추상력'이라고 부른 것에 호소한다. 그에 따르면 이 추상력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현실의 가장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을 포착하는 한편, 다른 모든 이차적이고 상관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개념을 형성시켜야 한다. 예컨대, 물리학은 어떤 물체의 색깔, 화학적 구성, 그리고 그것이 죽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혹은 살아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하는 문제들을 일단 제쳐 두고 그것의 질량을 다룬다. 이러한 질량 개념에 기초해 과학자들은 모든 물체에 적용되는 관성의 원리, 중력의 법칙, 자유낙하 법칙 등의 이론을 구성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노동가치론을 구성했을 때 이와 비슷한 추상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으로 보았다. "드디어 리카아도가 나타나서 과학을 불러낸다. 서라! 부르주와 체제의 생리학을 위한---그 내적 유기적 통일성과 생활과정을 이해하기 위한---기초이자 출발점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의 결정이다." 문제는 그러한 추상이 보통 현상과 모순된다는 사실이다(그래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학은 쓸모 없을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예컨대, 모든 물체는 1초에 32피트의 가속도로 떨어진다고 하는 자유낙하 법칙은 오직 진공 상태에서만 진리이다. 현실에서는 공기저항 때문에 돌맹이와 깃털은 동시에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리카아도와 마르크스 둘다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상품은 실제로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교환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추상이란 단지 과학적 분석의 출발점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은 우리가 기본 특징을 분리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음에 우리는 이러한 기본 특징이 우리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자신이 구성한 추상적 개념(노동가치론)과, 자신이 설명하고자 한 살아 있는 현실을 단순히 병렬시켜 놓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양자는 하나가 그 옆에 놓여진 채로, 각각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에게 추상은 단지 목료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즉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우회로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일반적 이윤율을 예로 들고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것은 노동가치론과 겉으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리카아도는 단순히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를 받아들였을 뿐, (마르크스가 한 것처럼) 노동가치론으로써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이 일반적 이윤율을 전제하는 데신에, 리카아도는 그것의 존재가 사실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과 얼마만큼 일치하는가을 조사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일반적 이윤율은 이 가치규정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모순되며, 따라서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는 수많은 중간항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추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수많은 중간항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이러한 과정을 마르크스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방법'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구체'란 우리가 관찰하는 바의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 그래서 경제학에서 예컨대 모든 사회적 생산 행위의 기초이고 주체인...... 인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것은 틀렸음이 드러날 것이다. 인구는 만약, 예컨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계급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하나의 추상이다. 이러한 계급들 또한 만약 그것을 규정하는 요소들, 예컨대 임금노동이나 자본 등을 알지 못하면 공허한 개념이 된다. 임금노동이나 자본은 다시 교환, 분업, 가격 등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자본은 임금노동, 가치, 화폐, 가격 등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인구로부터 시작한다면, 처음에 이것은 전체에 대한 혼돈되 개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간 규정으로써 더 단순한 개념들로 분석적으로 나아가고, 상상된 구체로부터 더 높은 추상으로 나아가서, 결국 가장 단순한 규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여행은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으로 다시 인구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구는 전체의 혼돈된 개념으로서 인구가 아니라 많은 규정들과 관계들을 가진 풍부한 총체성으로서 인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분석방법이다. 우선 우리는 현실이 다양한 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복잡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구체는 많은 규정들의 집적이며, 따라서 다양성의 통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력'을 사용하여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 이러한 '가장 단순한 규정'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추출해 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여, '이번에는 ...... 많은 규정들과 관계들을 가진 풍부한 총체성'으로서 구체적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구체적인 것을 헤치고 그 '가장 단순한 규정'에 도달하고, 다음에 추상에서 구체로, 이러한 규정을 사용하여 전체를 재구성한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할 때 이러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적 현실을, 그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총체성', '다양성의 통일성'이라고 불렀다. 사회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의 방법에서 핵심적이다. 사회의 다양한 측면은 오직 전체의 부분들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전체를 '가장 단순한 규정들'로 분해하는 것은 단지 그것들을 '많은 규정과 관계들을 가진 풍부한 총체성'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자들이 사회를 서로 현실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는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리하여 [그들의 이론에서는] "사회체제의 각 분야가 탈구되어 있다"고 했다. 일단 우리가 사회를 총체성으로 보게 되면, 사회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동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자들에게 가한 또 하나의 비판은, 그들이 자본주의를 설명하기위한 법칙을 모든 형태의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생산관계를 ......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범주로 표현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위에서 언급한 [생산]관계에서 어떻게 생산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관계 자체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문제, 즉 그것을 출현시킨 역사적 운동을 그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방법은 다른 한편에서는 항상 역사적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그리고 일시적인 사회 형태이다. "경제적 범주들은 단지 사회적 생산관계의 추상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들 역시 사회가 변동함에 따라 변동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헤겔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사회형태를 포함하여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 모순적" 이라고 헤겔은 말했다. 그러나 헤겔은 사회의 적대관계를 결국 절대정신으로 해소시켜 버렸지만, 마르크스는 모순에는 끝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변동을 일으키는 것은, 봉건 사회의 모순이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동을 가져오듯이, 모순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변동을 일으킬 자체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변증법은 헤겔의 생각처럼 신이나 절대정신의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역사 발전의 이론이 된다. 각각의 사회조직은 그 안에 변동의 잠재력을 제공하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대립물의 통일'이며 역사발전은 이러한 대립물의 투쟁이다. 우리가 모든 계급사회가 대립물의 통일이며 한 계급이 다른 대립하는 계급을 착취한다고 말할 경우, 그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우리는 각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다만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은 임금노동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의 활력의 원천인 이윤의 창조자가 임금노동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은 ......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은 그래서 사회학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 사회학자들은 계급을 노동분업 속에서 수행하는 그들의 기술적 기능(화이트칼라 노동자, 육체노동자, 경영자, 전문직 종사자 등등) 으로 정의한다. 마르크스에게 계급이란 오직 적대적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어떤 의미에서는 계급투쟁이 계급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집단들이 계급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충돌하여 갈등하는 이해관계를 인식할 때이기 때문이다.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함의는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내재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회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사회갈등'의 존재를 기꺼이 수용하고 그것을 연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우연적인 어떤 것,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긴장의 산물로 간주되며, 기존 질서의 기본 틀을 해치지 않고 능숙한 '사회공학'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대부분의 비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에게는 사회란 본질적으로 조화로운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와 반대로 사회는 대립물의 통일이며, 그 속에서 계급투쟁이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투쟁은 기본 모순, 즉 사회 심장부에 있는 착취적 사회관계가 제거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헤겔의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 헤겔 변증법에서 세 번째 단계는 대립물의 화해를 포함하고 있다. 상호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들은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절대정신'의 동일한 두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각각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에게는 모순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한 쪽이 반대 쪽에 대해 승리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임금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는 단순히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변화나 사물을 보는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혁명적 사회변동을 통해서만 폐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방법은 사회를 서로 다른 모든 측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대립물의 통일로 보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오직 사회를 그러한 모순적인 통일로 봄으로써만 하나의 총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루동의 이른바 '변정법적' 방법은 모든 것을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으로 나누고 역사는 오직 나쁜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진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증법적 운동을 구성하는 것은 두 모순적인 측면의 공존, 그들의 갈등, 그리고 새로운 범주로의 용해이다." 나쁜 측면이야말로 투쟁을 제공함으로써 역사를 만드는 운동을 생산한다. 마르크스에게는 '나쁜 측면'---폭력, 착취, 투쟁---이 없이는 어떠한 역사적 운동이나 발전도 있을 수 없다. 영국의 인도 지배의 영향을 논의하면서 마르크스는 식민주의자들의 탐욕과 파괴성, 그리고 그 결과 '부지런하고 가부장적이며 비공격적인' 촌락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동정심을 가지고 기술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 식민주의가 '동양적 전제주의의 굳건한 기초'였던 '목가적인 촌락 공동체'를 쓸어버리고, 그 대신에 계급의 완전한 폐절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로 대체시킴으로써,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혁명을 야기하는 데서, 단지 가장 비열한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했으며, 또 이익을 얻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서 근본적인 혁명이 없이 인류가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영국은 그러한 사회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 노릇을 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폭력과 착취는 그래서 공산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것들은 불가피하다. 위대한 사회혁명이 부르주아 시대의 결과물인 세계시장, ㅤㄱㅢㄹ고 근대적 생산력을 정복하여 그것들을 가장 선진적인 인민(국민)들의 공동 관리에 복속키셔 버리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진보는 피살자의 두개골로부터만 감로주를 빨아먹으려고 하는 저 소름끼치는 이교도의 우상을 더 이상 닮지 않을 것이다. 실천의 철학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른 점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역사를 객관적 과정으로 보았다. 역사는 거기에 붙잡혀 있는 인간들의 의식과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사상가의 태도는 '웃거나 울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 스피노자에 두 사람은 모두 동의했다. 마르크스는 또한 단순한 도덕적 비판을 거부하는 것을 헤겔로부터 배웠다. 헤겔 좌파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도덕적 비판은 현존하는 사태와 바람직한 이상을 단순히 대조하고, 사회가 '어떠한가'와 그것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사이의 모순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정신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다. 그것은 현실 그 자체의 모순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는 현존하는 사태에서 변동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고 현재의 상황 속에서 그 변동을 야기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행동은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에 그 기초를 두어야지, 사상가의 머리에서 나온 환상이나 좋은 의도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의식적인 인간 행동이 역사변동에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위대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빌면, '실천의 철학'으로 이해되어야 옳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사상을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역사를 본질적으로 관념의 역사이며 세계에 대한 개념의 변동이라고 본 헤겔과 그 추종자들, 계몽주의,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명백히 거부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상은 오직 사회생활의 부분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사회생활과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들의 개념, 관념 등등의 생산자이다. 즉, 그들은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산력 발전의 특정한 수준과 그에 조응하는 교류의 일정한 발전 수준---그 발전의 최고 형태에 이르기까지---에 의해 제약된다. 의식이란 의식된 존재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으며, 인간 존재는 곧 그들의 현실적 생활과정이다. 인간의 사상은 그래서 '현실적 생활과정', 즉 인간 생활의 물질적·사회적 조건들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이러한 생활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성이며 반향'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변동의 원천은 인간 존재가 새로운 세계관을 채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은 물질적·사회적 조건에서 일어나는 변동의 결과이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은 자신들의 현실 세계와 함께, 자신들의 사고방법과 사고의 결과물을 변화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열한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단지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고 주장했다. 이것은 청년 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 그들은 "모든 의식의 산물에 ...... 자립적인 존재로서 의의를 부여하고, 그것이 인간들을 실제로 얽매는 굴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의식을 변화시키라고 하는 [그들의] 요구는 결국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요구, 즉 세계를 다른 해석방식으로 인식하라는 요구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사상의 변동이 현실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을 변하지 않은 상태로 그냥 둔 채 단순히 현실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사상이 물질적·사회적 조건의 반영임에도 불구하고, 사상투쟁이 물질적·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투쟁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은 밑바닥부터 보수적인 관점이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인간을 단순히 사회의 희생물로 간주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비판자들은 노동자들은 착취로 인해 너무 볼품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독자적인 사상과 행동을 가질 수 없다고 너무나 쉽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인종주의·성차별 이데올로기, 그리고 선진 산업국가들에서 고용주들과 국가로부터 얻어낸 경제적 양보가 노동계급을 효과적으로 타락시켜 왔다고 믿는 사회주의자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점(그것은 마르크스 시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서 유행했다)은 밑바닥부터 엘리트적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세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은 환경과 양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반드시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그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하다---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그가 공격하고 있는 관점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부패하고 타락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 하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만들어 내는 사회주의에서나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치 절망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가 대중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폐절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면, 사회주의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어떤 식으로든 벗어날 수 있는 소수의 선각한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을 위해서 사회를 변화시킬 때에만 사회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유물론적으로 보이는 이 견해는 관념론으로 빠져들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난, 따라서 계급투쟁으로부터도 초연한 사람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취급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와 블랑키 같은 엘리트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모든 주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과 사회를 변동시키는 데 있어서 투쟁이 수행하는 역할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세 번째 테제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오직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들은 사회에 의해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조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착취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 형태이기 때문에, 즉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발생시킨다. 이 투쟁의 효과는 노동계급을 변화시킨다. 고용주와 싸워야 한다는 압력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해관계를 의식하는 계급으로서 점점 집단적으로 조직화하고 행동하게 된다. 투쟁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자본가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승리의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쟁점을 둘러싼 것이라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해 준다. 계급투쟁은 또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도 결정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모순 때문에 붕귀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승리는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변증법의 결과는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 그리고 자신감에 달려 있다. 이상의 논의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사회주의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주장에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해방자이다. 다른 어떤 사람도 그들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좋은 의도를 가진 공상적 개혁가도, 블랑키주의적인 모험가의 음모도 그들에게 사회주의를 선물할 수 없다. 마르크스가 쓴 국제노동자협회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들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 해석이 '결정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주의가 불가피한 것이라는 의미라면,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계급투쟁의 '혁명적 실천'이라는 형태로서 인간의 행동이 자본주의의 운명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머리에서 명확하게 썼듯이,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넘겨받아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에 인간 행동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지배적인 물질적·사회적 조건에 달려 있다. 이러한 조건에 대한 분석이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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