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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5/28
    전국정보운동포럼에 다녀와...
    간장 오타맨...
  2. 2005/05/28
    전화통화
    간장 오타맨...
  3. 2005/05/28
    모란공원 가다
    간장 오타맨...
  4. 2005/05/28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가능하다
    간장 오타맨...
  5. 2005/05/28
    [시/김남주] 한 사람의 죽음으로
    간장 오타맨...

전국정보운동포럼에 다녀와...

  • 등록일
    2005/05/28 22:22
  • 수정일
    2005/05/28 22:22

작성일  2002년 03월 04일 11시 17분 24초
 

진보네트워크센터를 위시한 전국의 정보운동단체들이 정보운동 의제들을 함께 고민하기 위한 방안으로 작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2회째 행사를 진행하였다.

 

장소는 대전에 있는 경하장... 대전이 지리적으로 지금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제일 중앙에 위치해 있어, 전국행사를 대전에서 많이들 진행한다고 하더군요. 이에 올해는 비용이 다른곳보다 저렴한 경하장에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숙박비용도 저렴하고, 특히 경하장 안에서 식사를 할 경우 지하 세미나실 사용이 무료라고 하기에 비용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경하장으로 잡음.)

 

작년에 비해 많은 단체들이 오지 못하였다. 특히 지역에 있던 정보운동단체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오지 못한 것인지 단체가 없어진 것인지 확인이 되지는 않지만, 현재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면서 실시한 정보통신 무료교육에 대한 지원금이 더이상 나아가지 않아 정보화 교육을 위해 단체를 설립하여 교육을 진행하던 지역단체들에 대한 연락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특히 지역의 경우 재정적 어려움으로 단체유지에 있어 힘들다고 함. 그나마 부산정보연대 PIN, 전주 정보통신연대 PIN 정도가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임. 그외 단체들의 움직임은 미진함.)

이렇듯 1회의 성황리에 진행되었던 행사가 올해는 인원이 팍줄어 반정도의 인원으로 대전 유성에 있는 경하장에서 2회 대회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새로운 주제들도 등장하였다. 올해부터 새롭게 대두시켜 나아가고 있는 주민등록증 거부 반대자 모임에서 주민등록증의 문제와 지문날인 반대를 위한 강연을 진행하였으며, 보안문제, OS 반독점 문제 등 1회 대회에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들을 첨가하여 정보통신운동 영역에 있어 의제들을 확장하였다.

 

무엇보다 작년과 다르게 진행된 점은 2박 3일의 일정을 가지고 중요한 이슈들 에 대한 강연과 그리고 주요 이슈에 대한 전체토론의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내용들을 선택하여 강연을 들을 수 있으며, 아울러 많은 고민들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나마 나도 발제하나를 맡아 진행하였지만, 내가 맡은 것이라 그런지 제일 못한 것 같아 내 주제토론에 들어온 사람들에 게 이 게시판에서나마 사죄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같다. 그러나 못내 아쉬웠던 것은 건한 뒷풀이후 마지막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일정내내 같이 하였으면 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내년에는 또다른 정보통신운동의 의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 같다.

 

봄과 함께 정보통신운동을 진행하던 모든 이들또한 새로운 도약을 하기를 기원한다.

 

p.s 봄이 오는 소리를 대전에서 듣고 왔습니다. 이런 회의가 많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자연과 함께 더 많이 누릴수 있기를 올해 소원으로 기원해 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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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통화

  • 등록일
    2005/05/28 13:04
  • 수정일
    2005/05/28 13:04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아노아르 위원장과 전화통화를 하였다. 충주에서 힘들게 투쟁을 하고 있을 터인데.... 가보지 못한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한통도 아니구 두통씩이나 해주었다. 제대로 오산분회 건설사업도 힘있게 추진하고 있지 못한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힘내라고 한다. 자신도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말할 것은 많은데 머리가 새하얀 도화지 처럼 백지가 되어버렸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에서 계획한 일들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이 미안 할 따름이다. 앞으로 진행될 일정에서 함께 할 사업들을 하나둘 계획하고 뒷쳐졌던 오산분회 건설을 이제 모인 동지들과 의논하면서 집행해야 겠다. 시간을 꼭 내어서 아노아르 위원장이 있는 보호소에 가서 전화가 아니라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털어버려야 겠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 활동에 있어 자명하다. 우리가 할 일들을.... 이제 그 계획들을 하나둘 풀어해치며 연대단위들과 어떻게 노동탄압 국면을 극복하고 이주노동자들이 외치는 노동3권 보장, 노동비자 쟁취, 전면 합법화를 위한 전국이주노동자노동조합 단일노조를 세우는 그 길에서 함께 연대하리라.... 비록 지금 오산지역 이주노동자들이 조직되지 못하고 투쟁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함께 투쟁하며 한걸음 한걸음씩 성숙하리라는 확신을 가져본다. 소중한 이주노동자 동지들을 믿는다. 그들의 투쟁이 정담함을 확신한다. 함께하는 연대속에서 더 많은 동지들과 더 많은 활동을 이주노동자들 중심으로 할 수 있도록 함께 연대하며,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 강화를 위한 지원을 오산이주노동자센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보리라 다짐해본다. 이제 어려운 조건이지만 투쟁을 위한 이주노동자들의 활시위를 함께전개해 보고자 한다. 함께하는 오산이주노동자센터 사업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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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 가다

  • 등록일
    2005/05/28 10:38
  • 수정일
    2005/05/28 10:38
공부방 아이들이 5월 마지막 토요일 나들이를 마석모란 공원으로 간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하여 많은 노동/민주/통일 열사가 있는 곳으로 간다. 광주 망월동을 너무 멀어 가지 못하고 마석으로 간다. 변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전태일 평전을 비롯해 하종강 소장의 페이지에 들어가 박준성 선생님이 쓴 글들을 갈무리하여 아이들에게 독후감을 쓰게하며, 5월을 아이들 시선으로 바라보겠금 유도하였다. 아이들이 어느정도 인지한지는 모르지만... 한원CC 노동자 자녀인 공부방 초등학교 6학년 아이에게 비친 어머니의 투쟁 모습이 이와 대치된다. 그렇게 5월을 공부방 선생님과 아이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거대하지도 않고 슬픔을 느끼지 못하지만 5월 광주 그리고 무수히 산화해간 젊은 넋들의 삶에 대해 아이들에게 진솔하게 전해주고 싶다. 아이들에게 미래엔 이런 사람들이 없이 평등과 해방으로 착취와 억압을 부수는 사회를 바램하며 작은 단위이지만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이도 스스로 힘들어 주저앉을 때가 종종 있지만 목적을 갖고 살아가려고 부던히 애를쓴다. 이 보듬은 손 맞잡은 손이 계속되어 작지만 다솜 공동체라는 공간에 안주하여 그늘에 쉬는 아이들과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둘 나누었으면 좋겠다. 비록 시간이 없거나 정신을 놓고 살아가지만 내가 이 공간에 왜 서있는지를 늘 생각하면서 간다. 어제 술한잔 하면서 우리 다솜공동체와 센터엔 다 왕따들만 모였다고 넋두리 하며 넌지시 웃음을 짖게하는 말.... 왕따가 뭐 대수냐 내가 가는 길을 갈 수 있다면 왕따도 좋다. 다만, 내가 속한 공간에서 같이 하는 이들이 함께 어려움을 덮어주는 그 따스한 연대의 손이 계속되는 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으리라.... 5월 눈물 훔치며 죽은자가 살아있는 자를 부르는 달이 지나가고 있다. 이 달이 어찌보면 1년을 버티게하고 이 1년이 차곡차곡 쌓여 운동의 삶으로 이어질 것을 소망해 본다. 5월 지나면 6월 일어서는 달이 또 찾아온다. 4, 5, 6월에 우리 가는 길에 나의 삶을 추스려본다. 오늘 마석모란 공원에서 전태일/ 문익환/ 계훈제/ 등등 수많은 노동/민주/통일 열사들이 다솜공부방 아이들에게 함박웃음을 뛰우며 맞이해주기를 사무실에서 마음으로 나마 빌어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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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가능하다

  • 등록일
    2005/05/28 09:16
  • 수정일
    2005/05/28 09:16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가능하다 미디어 / DMB 시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DMB 사업자가 결정났다. ‘지상파이동멀티미디어방송’이라는 긴 이름을 지닌 이 DMB 사업은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 쏟아져 들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방송통신서비스 가운데 하나다. 목적은 한 마디로 이동중인 사람들이 손쉽게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란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아직도 이동을 할 수 없어서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이동하며 감상할 수 있는 매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이런 매체를 만들지 말자는 건 아니다. 만약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면 DMB도 의미있는 일보전진일 것이다. 바로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장애인들의 이야기가 논쟁되고 소통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이 DMB 사업의 얼개에 깊숙이 반영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 ? 아직까진 전혀 (혹은 거의) 그렇지 않다. 김명준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소장 mjkim@mediact.org 누구나 겪고 있지만 별로 고민해보지는 않는 상황을 한번 되새겨보자. 디지틀 미디어 시대에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이 결정해버린다. 그런데도 우리 주머니를 털어 그 사업을 진행하는 기묘한 현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세상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살아보면 그냥 알 수 있는 것인데, 이 쪽 사업의 진도는 항상 거침없이 나간다. 단 한사람도 정부청사앞에 가서 “지금 보는 TV가 워낙 화질이 안좋으니 디지털로 바꿔라!”고 외친 일도 없거만 이제 수년내로 모든 아날로그 TV는 고물이 될 판이다. 모두를 위한 디지털 미디어 자본주의? 아무런 싸움도 없이 왜 이렇게 진도가 빨리 나가는지에 대한 답변은 다음 두가지중 하나다. 그게 워낙 좋은 것이긴 하지만 대중들이 무식해서 요구를 안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워낙 이권이 크게 걸려있는 것이라 앞뒤 안 가리고 진행하는 것이다. 어느 답변이 맞든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것이긴 하지만, 이 분야의 사업들이 지난 10여년간 보여준 규칙들을 보면 하나같이 똑같은 궤적이 그려진다. 언제나 시작은 장밋빛 환상이다. 언론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어느날 아침 눈을 뜬 A과장은 이동용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로 어쩌구 저쩌구 … 어쨌든 그런 편리한 세상이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따위의 기사들이 분위기를 잡아주고, 새로운 미디어가 유발할 산업 연관 효과가 그럴듯한 통계로 포장되어 등장한다. 그런데, 이 통계들을 다 모아보면 우린 하루종일 온갖 미디어의 숲에서 바보처럼 버튼을 눌러대고, 수입의 대부분을 방송통신장비에 지출하고 있어야 한다. 어쨌든, 주로 영어약자로 암호처럼 이름 붙여진, 이상한 미디어에 대한 정책이 수립되고 거대한 이권을 노리는 사업자들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이런저런 시비가 붙고, 어쨌든 사업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경쟁이 장려된다. 독점되면 안된다고,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사업이 과잉투자임이 드러나면서 수사학은 바뀐다. 소비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지 않고 경쟁은 치열하니 다시 효율성의 논리가 등장하면서 독점이 경쟁을 대체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시장이 경쟁을 낳고, 그를 통해서 소비자의 권리가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이 사실은 경쟁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결국 경쟁은 오직 사업권을 따기 위한 핑계이자, 공적 책임을 떠맡지 않기 위한 변명임이 드러날 뿐이다. 상황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이제 이런 과정 전체가 마치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양 그럴듯한 개념으로 포장되기 시작하는데, 산학협력이라는 이름 하에 동원되는 학자들은 이런 자본의 운동에 대해 온갖 논리적 구조를 부여해준다. 그것은 패배주의이거나 혹은 적극적인 동참의 표현이다. 게다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기술 개발은 그 기술 자체가 수용자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하기도 한다. 하나의 DVD 규격을 확정하자마자 이번에는 거꾸로 전 세계를 멋대로 분할통치해버린 지역코드라는 황당한 발상이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긴 호흡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이건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자본은 언제나 세상을 자신의 이름으로 구상하고 만들어왔으니까. 그러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상황을 열심히 분석하면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바꿔내는 것이다. 현실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아가 그들의 이름과는 다른 이름으로 (그것이 민중이든 시민이든)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 가운데 일단 두 가지만 점검해보자. 괴제는 자본 중심의 미디어환경 극복 그 하나는 공공성이다. 시장근본주의의 문제점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은 공공성, 공적 영역, 공익성 등의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사적 이익의 파괴적인 욕망과 운동을 제어하려했다. 미디어 영역에서 이 공공성은 아날로그 시대를 관통하며 다양하게 굴절되어왔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면서 함께 확대되기도 했고, 때로는 아래로부터 일어난 정치적 변화와 맞물리지 못하면서 위축되기도 하는 등 ‘불균등발전’은 불가피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그 변화의 폭은 짧은 시간동안 무척 컸다. 방송 영역에서 공공성의 문제는 우선 공영방송이라는 일종의 대의제 성격을 지니는 방송의 역할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해서, ‘시청자 주권’이라는 무척 추상적이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개념으로 표현되면서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나 시청자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또 ‘퍼블릭 액세스’의 번역판인 시청자 제작 참여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 사업의 확대로 등장하기도 했다. 정보통신 영역에서는 이와 달리 주로 보편적 서비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공공성의 담론이 발전되었다. 사람들이 값싸고 손쉽게 누구나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조건과 정책에 대한 논쟁이 공공성을 둘러싼 갑론을박의 주요한 축이 되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런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이른바 정보통신융합의 시대, 미디어간의 경계가 파괴되고 융합된다는 이 ‘디지털 미디어’ 세상에서 기존의 공공성은 어떻게 재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또 새로운 공공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그리고 과연 이러한 공공성을 전 사회적으로 담보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국가기구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혹은 제안하고 있을까. 애석하게도, 답변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다. 워낙 미래가 혼미하고 상을 잡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답답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잡아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방송 혹은 통신중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아야할지에 대한 암중모색이나 갈등만이 아직까지 우리 앞에 드러난 현실이라는 것이다. 섣부른 답변을 하기에 앞서서, 하지만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는 환경에서 산업,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 중심의 논리를 극복하면서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그야말로 미래지향적인 공공성을 구상하기 위한 단서중 한 가지를 양쪽 미디어에서 초보적인 논의 수준에서나마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주류미디어, 참여미디어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 한국의 미디어 역사가 지닌 주요 특성은 인터넷이 발전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은 시민들이 공동체 라디오나 TV를 소유하고 운영해본 경험 없이 곧바로 광대역 인터넷(초고속 인터넷이라는 황당한 상업적 용어는 되도록 쓰지말자)을 접하면서 미디어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확대한 유일한 국가이다. 즉 허가받은 주체가 컨텐츠의 생산과 소통을 독점하는 기존의 대의제적 미디어 시스템과 다른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적 참여형 미디어 시스템’의 가능성이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폭발적으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역설적으로, 인터넷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을 그 접근에 대한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 자본이 시장을 통해 인터넷을 독점하게 되는 위험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접근권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를 넘어 커뮤니케이션 권리의 보장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정책의 필요성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른바 주류 미디어의 한계는 명확해지고 동시에 그 역할이 더욱 확장되어야 함이 분명해지고 있으며, 주로 정보통신 영역으로 분류되는 새로운 미디어 또한 그 새로움과 함께 이른바 올드 미디어가 지닌 한계를 어떤 수준으로든 내포하고 있음도 분명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존 주류 미디어의 혁신과 그러한 주류 미디어와 새로운 참여적 미디어를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의 프레임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아닐까. 말하자면 방송과 정보통신이 모두 공존하는 바로 지금, 이미 드러났지만 공공성의 담론에 아직 포괄되지 않는 방송과 통신 영역의 새로운 의제들을 포괄하면서 아직은 맹아로만 존재하지만 미래에는 틀림없이 드러날 의제를 역시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의 재구성은 불가피하면서도 가능한 것 아닌가 말이다. 이제 공적 이해를 대변해야 할 사람과 조직들은 이 질문에 대해 책임있게 답변해야 한다. 누가 주도적으로 융합을 할지 따위의 논쟁을 벌이기 훨씬 전에 이것부터 해명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자본의 힘은 막강하고 국가 기구와 공적 체계도 자본의 힘과 그 힘에 근거한 시장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이 디지털 미디어의 영역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서야 할 운동주체, 그리고 수용자의 상황을 둘러싼 특수한 조건이 도사리고 있다. 그 이름부터가 부담스러운 이른바 뉴미디어는 마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처럼 언제나 저 높은 고지 위에 서있다. 공적 이익을 고려한 대책을 준비하면 대상 자체가 기술 개발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바뀌어버리기도 하고,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이미 결정난 상태이기 일쑤다. 무엇인가 제안을 하려해도 그 제안을 이해하면서 공공성을 함께 고민할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돈도 벌기 전에 무슨 요구가 그리 많냐는 핀잔도 융단폭격처럼 쏟아진다. 이건 정말 힘든 싸움이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건 해야할 뿐만 아니라 해볼 만한 싸움이다. 기존 매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싸움이 주로 그 자유를 당장 침해하는 세력에 대항한 수세적인 투쟁의 확대로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이 싸움은 미래를 그려가는 싸움인만큼 공세적인 싸움이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고, 누구도 미래를 단언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지금 한국은 디지틀 미디어의 초기단계가 아니라 이미 그 한계와 성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이른바 ‘IT 강국’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상황을 알고 있으며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첫단추들이 꿰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디지틀 TV의 전송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시대의 채널 정책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고, DMB는 어리둥절한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그러니 비록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빨리)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 정해놓은 게임의 규칙안에서 이리저리 휩쓸려다니지 말고, 게임의 규칙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운동을 시작하자는 말이다. 처음부터 규칙을 통째로 다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지부터 논의를 해나가면 된다. 새로운 시대의 공공성과 미디어 전략을 한꺼번에 논의에 붙여보든지, 수용자 주권, 커뮤니케이션 권리, 퍼블릭 액세스 권리 등의 각종 권리 개념을 중심으로 인권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논의를 하면서 전체적인 얼개를 잡는 단서를 찾아가든지, 앞으로 남아있는 다른 매체들의 도입 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 정책을 토론하든지, 도입된 혹은 정착된 매체에 대한 재평가를 새로운 개념에 대한 상상력을 기초로 시도하든지,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누가 모여야 할지, 머리를 맞대야 할 때가 왔다. 해방의 가능성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좁고, 짜임새있게 설명하기에는 내공이 모자란 상태에서 이 거친 글을 억지로라도 쓰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 아직은 작아 보이는 이런 시도들이 분명 현재의 갈증을 채워주는 강력한 힘으로 성장해갈 수 있기 때문이고,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시도가 정말 지금과 다른 세상을 현실적으로(!)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핵심이라는 ‘기술 결정론’ 혹은 ‘생산력 지상주의’를 믿어서가 아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이 지닌 해방의 가능성과 참여와 다양성의 확대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를 한껏 키워나가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장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요약하자.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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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남주] 한 사람의 죽음으로

  • 등록일
    2005/05/28 09:08
  • 수정일
    2005/05/28 09:08
*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또 5월 27일이다] 에 관련된 글.

한사람의 죽음으로 - 박관현 동지에게 혼자서 당신이 단식을 시작하자 물 한모금 소금 몇 알로 사흘을 굶고 열흘을 버티자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배고픈 저만 서럽제 그러며 밤으로 끌려가 어딘가로 끌려가 만신창이 상철도 당신이 돌아오자 돌아와 앓은 소리 끙끙으로 사동을 채우자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맞은 저만 아프제 그러며 물 한모금 소금 몇 알로 끼니를 때우고 스무 날 마흔 날을 참다가 심근경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자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죽은 저만 불쌍하제 그러며 그러나 나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냉수 한 사발로 타는 목 축이고 남은 물 그 물 손가락으로 찍어 세수하고 세수한 물 그 물로 양치질하고 여름이면 철창 밖으로 고무신을 내밀어 빗물을 받아 갈증을 풀더 그들이 당신의 죽음 그 덕으로 철철 넘치는 대야물에 세수하고 따뜻한 물로 십년 묵은 때까지 벗기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일년 삼백예순 날 햇살 한 줄기 제대로 못 구경하던 그들이 푸르고 푸른 오월의 하늘 아래서 입이 째지도록 하품을 하고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듯 기지개를 켜는 것을 나는 또한 보았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게 제 분수라 여기고 때리면 때린 대로 맞는 게 제 분수라 여기고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었던 그들이 간수한테 대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말을 한다고 항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식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야단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섞은 배추가 싱싱한 상추로 둔갑하여 그들의 식단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박관현 동지여 우스운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만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싸우는 인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 솔직히 말하자 김남주 신작시집<풀빛시선>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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