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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릴륨에 의한 건강영향과 관리' 보고서 제출 소감

  2003년 2월 우리 병원에 두 명의 젊은이가  개인 의원에서 치료해도 호전되지 않는 기침과 숨가쁨 등의 증상으로 입원하여 원인미상의 간질성 폐질환을 진단받았다.  당시 주치의는 내과에 파견나가 있던 우리 과 전공의였다(우리 과 전공의들은 48개월의 수련기간중 21개월을 다른 과에 파견나가 임상 수련을 받음).



  환자들의 직업력을 상세히 청취했고, 그 결과 이 두 사람이 같은 공장에서 일했으며 그 공장에는 비슷한 증상의 작업자들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나는 우리 과 진찰실 책상앞에 앉아 있었는데  전공의가 상기된 얼굴로 나타나서 상황을 설명하고 대책이 필요하며 내가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좀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이럴 땐 직업병 역학조사를 해서 원인을 규명해야 하는데 민간기관인 대학병원에서 나서기에는 제도적인 한계가 있다. 또 당시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상황이라 내가 뭔가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게 망설여졌다. (세월이 꽤 지나서 확실치 않지만) 내가 미지근하게 말하자  전공의는 그럼 누가 하냐고 화를 버럭 냈다.

 

   일단 근로감독관한테 전화를 했는데 자기들도 근거없이 사업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산재신청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직업병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전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쪽에서 산업안전공단에 의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까지가 내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통화가 끝나고 나서 우리가 알아서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근로감독관의 안일함에 화가 났고 거기서 똑같이 안일한 내 모습을 보았다.   

 

  회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막막했다. 그 회사가 생긴 지 얼마 안되었고 50인이상 규모라는 점에 착안하여 사업장 보건관리자 제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진단을 하도록 권고하는 방안을 생각해내어 우리 산업위생사 선생님한테 사업장에 좀 가보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틀후인가, 우리 병원에 작업환경측정기관 감사를 나왔던 다른 경험많은 근로감독관이 우리 병원 산업위생사들로 부터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면서 급진전되었다. 그날 밤 근로감독관과 우리 산업위생사들이 '떼지어' 회사를 급습했다(회사측 관리자 표현임). 그날 밝혀진 새로운 사실은 그 회사에서 원료로 사용하는 물질 중 하나인 베릴륨은 독성이 강하여 사용허가대상 물질인데 그 회사는 노동부에 허가없이 조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근로감독관은 회사측에 작업환경측정, 특수건강진단, 보건관리자 선임 등의 사업주의 의무를 즉각 실시하도록 했고 허가가 날 때까지 조업을 중단시켰다. 작업환경측정결과 반이상의 샘플에서 베릴륨이 노출기준을 초과했고, 특수건강진단결과 7명의 추가 환자 발생을 확인했다. 생산직 43명중 9명에서 급성 베릴륨 질환이 발생한 것이다. 이 질환은 작업장 노출기준의 설정과 산업위생의 발전에 힘입어 미국에서는 1950년대이후로, 일본에서는 1970년대 초반이후로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집단 발생한 급성 베릴륨 질환. 그 직접적 원인은 높은 농도의 베릴륨 노출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업주가 건강한 작업장을 만들어 놓고 작업하도록 할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허술한 규제와 감독이었던 것이다. 조업 3개월째에 환기시설이 가동된 후 작업을 시작한 사람들중에서는 단 한명의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결국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 때 회사측 관리자가 수시로 찾아오거나 오밤중에 술먹고 전화해서 '모르고 한 일이니 선처바란다'며 울먹이기도 하고 이렇게 경제가 어려운데 회사 문닫게 해서 실업자 양산할 꺼냐고 협박하기도 했다. 나더러 직업병 유소견자 판정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덕분에 마음고생을 좀 했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작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베릴륨에 만성적으로 노출되면 유육종증이라는 질병을 닮은 만성 베릴륨 질환이 생기고 폐암과 골육종의 발생 위험도가 높아진다. 작업자들은 지난 몇 달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우리 병원에서 직업병 유소견자 판정을 내고 나서 회사측과 급격하게 관계가 악화되어 더이상 작업장 접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그 몇달후 회사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2년의 세월이 흘러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의뢰를 받아 베릴륨의 건강장해 예방을 위한 지침서를 쓰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외국의 지침서를 번역하고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이었다. 보고서 작성을 위해 여러 자료들을 읽으면서 2년전에 내가 좀 더 많이 알았더라면 할 수 있었던 행동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전공의 시절 이 분야에 대해서 수련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어 독학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알량한 지식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느라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었다. 

  

  보고서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지키기 쉬운 약속은 아니지만 이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을 적어본다. 

 

o 막연히 누군가가 하겠지 라고 생각하지 말라. 정말 너밖에 해결할 사람이 없는 상황은 놓치지 말자. 

 

o  필요한 일은 당장 해야 한다. 회사와 관계가 나아지면 보건교육을 하려고 했지만 회사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문을 닫았다. 중소기업에선 흔한 일이다.

 

  어이쿠 여기까지 쓰니  여러 작업장의 아직 해결 안 된 문제들이 아우성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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