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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 검진 첫 날

  하반기부터 업무가 조금 조정이 되어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출장 검진을 하게 되었다.  사무직 2년 1회, 생산직 연 1회 받는 직장건강진단은  싸구려 검진이라 형식적이라는 오해가 많이 있지만 뇌심혈관질환의 예방에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검진이다. 한편으로 난립하는 영세검진업체들이 의사를 구하지 못해서 사무장을 대신 내보내는 황당한 일이 있다는 말이 돌기도 한다.

 



  영국계 반도체 장비제조및 수리 회사에서 4시간에 105명을 만났다. 105명을 짧은 시간에 검진하는 방법은 이렇다. 

  과거력과 문진상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일분 이내에 통과하는데 약 1/3 정도가 이렇게 걸러진다. 

  근무기간이 짧거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 특별한 문제가 없다. 배치된 작업의 유해인자와 건강영향과 대처법에 대한 짧은 설명을 하고 보낸다.

  복잡한 과거력을 가진 사람, 현장에서 검사상 이상소견이 확인되는 사람, 심각한 유해인자에 노출되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이야기 하려고 노력한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짜증이 나 있다. 어차피 형식적인 검진인데 뭘 그리 길게 물어보냐 궁시렁 궁시렁.......경험상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차례가 되면 순한 양처럼 돌변하고 질문도 많다.

 

  그래도 이 사업장은 보건관리도 우리 병원에서 하기 때문에 수검자의 과거력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진찰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객관적인 검사결과가 같더라도 한 사람의 건강상태의 역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판정과 권고사항이 달라질 수 있다. 수검자에게 통보되는 문서는 판에 박힌 판정결과이지만 검진후에 얼마나 충실한 상담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 효과가 달라진다. 마침 현재 복지부에서 논의되는 건강진단 개선안에 검진후 의사 상담이 보완이 포함된다고 하니 반갑다.

 

  문진지에 거의 모든 증상을 표시한 젋은 남자가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증상은?" 하고 물으면서 얼굴을 쳐다보니 낯익다.

"제가 강박증이 있거든요" 대답하니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맞아, 정신과에 다닌다고 했지' 환자관리카드를 찾아보니 일년전 쯤 상담기록이 있다.

 그는 이삼년째 투약하고 정신과 상담을 받아도 좋아지지 않는 불면증과 강박 증상으로 인해 괴롭다. 치료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어 증상이 심해서 아주 아주 힘들 때만 병원에 간다. 몇달전부터는 투약중단상태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꾸준히 치료받으면 좋아질 수 있다는 격려. 그리고 우리 간호사가 좀 더 자주 그를 만나서 점검하도록 하는 것.  

검진의 지속성은 중요하다. 

 

  검진하면서 지난 일년간 건강상담을 했거나 근골격계 증상 호소가 있어 정밀진단과 치료 등의 조치를 받은 사람들의 현재 상태를 파악해보았는데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개선된 것 같다. 이 회사는 수백 킬로그램의 중량물을 밀거나 끌면서 요통이 많이 발생했고 쪼그리고 앉아서 일하는 작업때문에 무릎 통증이 흔했었다. 약간의 작업장 개선, 그리고 증상 발생자에 대한 즉각적인 작업전환 등의 조치가 효과가 있어 보인다. 

 

   끝나고 나오다가 안전보건총괄 책임자를 만났다. 차 한 잔 하라는 말에 다음 사업장 가야한다고 뿌리치고 나온다. 물론 회사에서 중점 관리중인 불산으로 인한 화상 예방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엄청나게 칭찬하기를 잊지 않았다. 불산화상은 시급히 대처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피부를 녹이고 전신에 퍼지는 심각한 문제를 낳기 때문에 현장에 칼슘 글루코네이트라는 약품을 비치하여 응급실 오는 동안 맛사지를 하고 와야 한다.

 

  이 사람은 작년에 어린이날인가 현충일에 구미사업장에서 불산화상 응급 환자가 생겼다고 내 휴대폰으로 전화한 적이 있다. 사업장에 대처요령을 문서화해서 주고 교육도 했기 때문에 그냥 지침대로 하고 병원에 가면 되는데 불안하니까 나한테 전화를 한 것이다. 본사에서 안전보건 감사를 받는 외국계 기업 특유의 철저함이 느껴지는데 그다지 감동적이지는 않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철저한 안전보건총괄 책임자한테 붙들리면 삽십분이 후딱 지나가기 때문에 할 일이 조금 더 남아있는데 다음으로 연기하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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