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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

이해심 많고 인내심 많은 우리 직원들이 서슴지 않고 악덕기업이라 부르는 D공업.

생산직원의 1/3은 개방교도소에서 인력을 충당하고, 1/3은 용역회사에서 공급, 1/3은 소사장이다. 사무직과 기술개발직만 그 회사의 정규직원이다. 작업장은 매캐한 용접 흄으로 숨을 쉴 수 없고 프레스 울리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것 같다. 



특수건강진단비용이 아까와서 개인부담으로 시키고(소사장이니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음), 건강상담 장소를 제공하지 않아서 작업장 옆의 식당을 쓰는 데 프레스 소리때문에 혈압을 잴 수가 없다.  회사의 소유주와 그 일가는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고혈압 환자이지만 절대 약물치료를 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다. 자신들의 건강에도 무관심하니 직원들의 건강이야 당연히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보건관리 담당자인 총무과장은 어찌 그리 얄미운지 형식적으로 법을 지키는 건 잘도 알아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고 자기 볼 일 끝나면 우리 간호사를 쳐다도 안본다. 즉, 마음같아서는 계약해지를 하고 싶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불쌍해서, 우리가 안 가면 만성질환 관리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워서 그냥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좀 달라졌다. 그동안 이 회사에서 이주노동자가 2명이나 사망을 했는데 한명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 한 명은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고혈압, 당뇨병같은 기초질환에 대한 관리에는 엄청 적극적으로 바뀌어서 작업중 건강상담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람이 죽어야 생각들이 바뀌는 현실이 기가 막히지만 곧 사람이 죽어도 눈하나 깜짝 안하는 회사들도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회사담당자가 얼마전 쓰러진 적이 있다고 하면서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야기를 해보니 횡설수설 횡설수설한다. 한참동안 문진끝에 알아낸 사실은 그가 치료가 필요한 주요 정신병 환자이고 용역회사소속의 청소부라는 것이었다. 

 

  내가 용역회사 관리직원과 이 사람의 치료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고 회사에서 이 사람을 짜를 생각인가 질문하는데 악덕기업측 담당자가 " 이 사람은 내가 잘 알아요" 한다. 그래서 친척이라도 되는가 싶어 "어떤 사이시지요?" 물었다. 중소기업에서는 친척들도 흔히 보니까. 그랬더니 "총무과장과 청소부 사이지요" 한다. 맥이 빠져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물었더니 자신들이 바라는 것은 이 사람이 지금처럼 일하되 아프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것이란다. " 이 사람은 우리마저 내치면 갈 데가 없어요" 한다. 그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들이 나한테 바라는 것은 내가 이 환자의 가족들과 상담해서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언을 주는 것이었다.  용역회사 직원에 따르면 역시 청소부인 그의 부인은 두드려맞으면서도 이 남자를 포기하지 않고 보살필 의향이 있는데 도대체 어디가서 무엇을 치료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부인이 8시가 넘어야 퇴근할 수 있다고 해서 일단 연락해보라고 전화번호를 주고 나왔다.

 

저녁에 우리과 노과장과 밥을 먹으면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얼마전에 검진하러 그 회사에 가보고 세상에 그런 악덕기업이 있는가 흥분을 했었던 그가 "요지경이네" 한다. 불의를 못참으나 마음착한 노과장은 사업장에 가서 담당자들과 대판 싸우고 나서도 나올 때는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더군.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야." 로 결론을 내리곤 하는데 오늘따라 노과장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하다. 지금까지 말도 하기 싫었던 그 담당자가 갑자기 좋은 사람으로 느껴지면서 용서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다른 일들도 잘 될 것 같은 기분까지 들다니. 헛된 기대를 했다가 상처받기 싫어서 착각이라고 다짐을 하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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