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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례행사 - 계약해지

    점심을 못 먹어서 빵 사러 나가다가 과장을 만났다.  골치아픈 일이 있다하여 만성 골치거리말고 응급 상황이면 말해보라했더니  보건관리대행 계약해지 공문을 3장 받았다고 하며 직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개탄을 한다.  

 

  그 회사는 일년 정도 장기투쟁을 했던 곳이고 노조측의 요구로 2006년부터 우리 병원과 계약을 해서 사업장 보건관리와 특수검진을 받는 곳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검진비용이 많이 나와서 인데, 작년 대비 약 60만원 정도 증가한 듯 하다. 나는 지난 번 특수검진때 소변중 유기용제대사물 검체 채취시기를 둘러싸고 말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원래 작업 종료후 소변 채취는 우리 과 직원들이 현장에 가서 하게 되어 있다. 작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변을 받아보았자 유기용제 노출에 대한 평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검진을 하다가 뭐가 좀 이상해서 확인해보니 모두들 오전 중에 소변을 받아서 제출했다고 하더라.  사업장 담당자 불러놓고 사실 확인을 한뒤 보는 앞에서 우리 병원 담당 간호사를 야단을 쳤다.  업무가 바쁘다 보니 가끔씩 사업장 담당자에에 소변 채취를 부탁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럴지라도 검체채취 시기가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결국 모든 노동자들이 작업종료후 소변을 다시 받아서 냈고, 결과는 내 예상처럼 지난 번과 많이 달랐다.  두번째 검사비용은 받지 않았다.

 

  또 한 장의 해지 공문은 소규모 반도체 회사에서 왔다.  특검을 하다가 화학물질노출 파악이 워낙 안되어 있어서 다시 사업장을 방문해서 순회점검을 하고 소변중 벤젠대사물 검사를 냈더니 세 명중에서 한 명에서 의미있는 농도로 검출되었다.  아마 내가 작업장을 둘러본 날 똑부러지게 공정설명을 해 주었던 숙련된 여성 노동자일 것이다.  스스로가 아니라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진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그 녀의 눈동자가 기억이 났다.  사업장 재방문시 회사 업무담당자에게 딸같은 사람들이 발암물질을 취급할 위험에 대해서 심사숙고해달라고 최소한의 기본적인 조치는 해주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결국 벤젠 노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오자 새해 선물로 해지공문을 보냈다.

 

  마지막 한 장의 공문을 보낸 곳은 작업환경 측정결과 유기용제 노출 초과가 되었다 한다.  여기도 특수검진때 문제가 있었다.  톨루엔에 무지무지하게 노출되는 젊은 남자에 대한 문진을 계기로 심각한 노출이 의심되는 6명에 대해서 추가로 호흡용 보호구 착용 전후 소변중 대사물검사와 신경행동 검사를 냈었다.  사업장에서 매우 기분나빠했다는 이야기를 담당 간호사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호흡용 보호구 착용 전후의 소변중 유기용제 대사물 농도의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앞으로 보호구를 꼭 착용하기로 약속했다. 근본적으로는 환기시설 개선이 답이지만 일단 보호구라도 쓰게 했다는 점에서 좋은 사례라고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도 새해 선물을 주는 구나. 

 

  또 해지예정인 사업장도 하나 있다 한다.  민주노총 사업장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역시 검진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것.   전반적인 자본의 공세 강화에 따라 노조의 힘이 약화되는 가운데, 민주노총 사업장의 계약해지 사태가 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 회사 노조는 생긴지 한 오년 되는데, 회사측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지난 몇 년동안 추억도 많고 정이 많이 든 곳이라 더 마음이 아프다. 

 

  이런 일을 두고 직원들이 사업장 관리를 세심하게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문제발생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 하더라도 직원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직원들의 상급자인 교수들의 책임이다.  그동안 직원들이 (내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사업장 다니면서 욕먹는 것 때문에 사기가 땅에 떨어져 고민을 많이 했고 대화도 많이 했고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어서 실시했다.  하지만  우리 과 직원들이 나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사업장 관리자들의 불만을 들으면서 다니는 것도 힘들것이고, 어렵게 개척하고 관리했던 고객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괴로울 것이다. 

 

   연례행사처럼 연말연시에 계약해지공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무엇인가 더 잘했어야 하지 않을까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을 해 왔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사업장의 관리자를 만나서 충분한 설명을 하는 등 대책도 강구해보고,  노사간의 힘을 고려해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만이라도 확보되면 그냥 눈 감고 넘어가는 일도 많았다.  지난 일년 반동안 가급적 비싼 검사를 내는 것을 자제하고(해당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으니까),  노동자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업무의 초점을 두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최소한의 원칙을 저버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들었던 사업장을 떠나보내면서 담담해지는 법을 배웠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업장이란 언제 떠나보낼지 모르는 곳이기 때문에,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사무치게 배웠다. 

 

   잔뜩 스트레스 받은 과장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직원들의 대처능력이 아니라고. 직원들을 야단치지 말라고  이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 모든 문제는 결국 교수들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고.  교수들만 얌전히(?) 있으면 사업장이 왜 떨어져나가겠는가 하는 것이 과의 정서라는 것을 왜 모르시냐고.

 

   과장은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회의를 소집했다고 하지만,  갑자기 소집된 회의에 대해서 관련된 직원들은 문책받고 있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다. 나라면 회의소집 대신 연초부터 해지공문을 3장이나 받은 그 부서 직원들에게 위로주를 한 잔 살 것 같다. 

 

  견디는 법을 배웠어도 담담해지는 게 쉽지는 않다.  첫 번째 회사는 피부질환 문제를 삼년 동안 해결해주지 못해서 화를 버럭 냈던 노동자에게 미안해서, 두번째 회사는 최근에 바뀐 공정에서 더 유해한 화학물질을 쓰는데, 앞으로의 위험에 대해서 파악조차 안 될 것이라는 상황이 서글퍼서,  세번째 회사는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그 젊디 젊은 여성 노동자에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작업환경 개선을 못 만들어 준 것이 안타까와서 담담해지지가 않는다. 

 

  내년에는 해지공문을 몇 개나 받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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