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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4)

'할례고백'의 데리다가 '진리', '가족', '고백'이라는 제은유를 동결시키는 이유를, 우리들은 여기서부터 간단하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데리다의 은유=개념 계에서는 그 3자가 모두, 투명하고 이상적인 우편제도에 의존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예를 들어 68년의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를 시작으로, 데리다는 많은 텍스트에서 진리의 문제 계와 가족의 문제 계를 결합한 논술을 진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양 형이상학에 있어서, '진리'라는 것은 항상, 정보가 매개(에크리튀르)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발신지의 상태와 같은 상태로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진리'의 진리성은 일반적으로, 정보의 전달과정에 따르는 열화, 사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감소시킨 이상상태로서 이미지되고 있다. 그리고 사고가능성의 그 배제는 또한, 정보의 전달경로를 완전히 소행하는 것, 바로 경로 자체를 무화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지폐를 받을 때, 그것에 각인된 중앙은행의 인장이나 제조번호에 의해서 지폐의 진정성을 신빙하는 것이고, 그 내력(지폐가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가)에 유의하는 일은 없다. 인장이나 제조번호는 특정의 지폐를 발신지(조폐국)까지 한 번에 소행시켜 버림으로써, 그것이 거쳐 온 구체적 경로를 말소해버린다. 역으로 경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위조지폐의 경우다. 경로의 말소가능성이야말로 '진리'를 지탱한다.(6) 반면 '가족'이라는 용어 또한, 정보의 전달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와 당신이 같은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배우 관계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와 조부와 조모를 공유한다는, 혹은 내가 당신의 자식이나 부모라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나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피'의 계열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당신의 계열과 겹치고 있다. 즉 배우 관계 이외의, 바꿔 말하면 결코 스스로의 의지로는 해소되지 않는 종류의 '가족'은, 피의 소행가능성을 근거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의 계열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 정보(유전자)의 전달 경로이다. 진리는 지(知)의 우편제도, 가족은 피의 우편제도의 완전성에 의해 보호받는다. 그리고 데리다의 비판은 바로 그 완전성으로 향하고 있다.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에서 강조된 '에크리튀르는 부모 살해자다.'라는 테제와(7), 철학적 사고의 '사생아 bâstard' 성은 여기서부터 유도된다. 이 논문은 '산종'이라고 이름 붙여진 논문집에 수록되어 있지만, 그 용어부터가 데리다의 발상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종=정자(semen)를 흩뿌려, 진리와 가족이 의지한 전달경로의 순수성을 교란하는 것. 아니 오히려, 순수한 전달경로 따위는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순수한 전달 경로라는 것은 어의모순이 될 뿐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 따라서 데리다의 '고백', 탄생의 순간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인생을 투명한 시선으로 다시 이야기하는 그 작업 또한, 기억의 순수성, 즉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정보전달의 순수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데리다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미 '그라마톨로지에 대해서'의 제2부에서 루소의 '고백'을 참조해 자세한 분석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작은 일역도 나와 있으므로, 상세한 설명은 할애하자. 6) 이후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데리다는, 경로의 말소가능성과 진정성의 이 커플링이 낳는 모순을 철학적으로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지폐의 예에 관한 한, 그 모순은 전자 머니의 출현에 의해서, 이미 현실에서도 의문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간단히 되짚어 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완전히 현실통화를 모방한(즉 분산처리 결제가 가능한) 전자 머니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장 곤란한 과제는, 먼저 그 희소성과 진정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반면에 그 익명성을 유지한다는 2중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다. 희소성과 진정성의 유지는 위조나 카피의 방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원리적으로 개개의 전자 머니(디지털 정보의 괴(塊))에 암호화한 시리얼 넘버를 부여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대폭으로 침해한다. 어떤 전자 머니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로 건네졌는가, 그 정보가 발행은행에 집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순은 극히 데리다적이다. 경로의 말소가능성이라는 것은 정의상 그 소행가능성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경로를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즉 전자 머니의 진정성을 늘리고자 하면 할수록 경로의 현실적 존재가 확인되어, 개개의 전자 머니는 익명성으로부터 멀어져 버리게 된다. 이상의 사태는 이론적으로는, 경로의 말소가능성이 진정성을 유지하는, 즉 '화폐는 그 내역과는 무관계하게 받아들여진다.'라는 이념이 처음부터 일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태는 소행적으로, 전자 머니 이전의 분산처리형 화폐, 예를 들어 지폐에 있어서의 이런 종류의 모순이 하고 있었던 역할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지폐가 이미 일종의 버추얼 머니라는 점은 자주 지적된 대로지만, 사실 그 가상(버추얼) 진정성은, 제조번호에 의한 경로의 말소=소행이, 이념적 가능성에 의해서 항상 유지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언제나 이념상으로 가능할 리 없다는 모순에 의해 지지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데리다가 '대리의 이론'이라고 부른 것과, 정확하게 같은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7) La dissémination,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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