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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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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

낸시 홈스트롬 엮음 | 유강은 옮김 | 메이데이 | 2012.5.18
신국판(152*225) | 708쪽 | 33,000원

 

 


 

*한국어 2판(2013.3.8)에는 독자모임, 세미나 등에서 나온 의견을 새겨,

옮긴이가 각 장 글쓴이 소개를 간략히 정리해 함께 담았습니다. -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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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성의 노동은 이렇게 평가절하되어야 하는가? 왜 남자로 가장한 채 주인임을 자처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압제자들이…… 여성의 시간과 재능을 독점하는가? 자매들이여, 더는 복종하지 말자.…… 하나로 단결해서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자!
- 프랜시스 모리슨, 18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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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정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폭정과 비슷하며, 여러 면에서 남성의 폭정이 부르주아지의 폭정보다 훨씬 극악하다. 프롤레타리아 남성은 한정된 시간 동안만 고용주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판매하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더 나은 고용주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영원히 묶여 있으며, 매일 매시간 남편과 싸우며 산다. 결혼한 여성은 죽는 날까지 족쇄를 차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남성은 다른 남성에 비해 훨씬 독립적이다. 동료들과 제휴해서 한결 쉽게 존중과 정의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여성은 온갖 불의를 감내해야 하며, 법률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남성에 비해 여성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는다. 어쨌든 가장 어려운 상황에나 처해야 보호를 받을 뿐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갈라설 필요가 있지만, 이혼을 하면 여성은 비참한 고독으로 전락하는 반면 남성은 다른 아내를 얻는 즐거움을 누린다.
- 아우구스트 베벨, 「여성의 현재와 미래 지위에 관하여Üer die gegenwätige und küftige Stellung der Frau」, 18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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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발전과 자유와 독립은 여성 스스로, 자기 자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여성 자신을 성적 상품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주장해야 한다. 둘째,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타인의 권리를 거부하라. 즉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임신을 거부하라. 신, 국가, 사회, 남편, 가족 등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라. 그리고 삶을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깊고 풍요롭게 만들라. 복잡다단한 삶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려 애쓰고, 여론이나 대중적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 에마 골드만, 「여성 참정권Woman’s Suffrage」,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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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셔와 요크셔에서는 여성이 거의 예외 없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정식으로 조합비를 내고 각종 혜택을 받지만, 노동조합 지도부에 단 한 명도 참여하지 않고, 조합 기금의 관리에 대해서도 전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노동조합 총회에 대의원으로 참석한 적이 없다. 대표와 행정은 전적으로 남성 노동자의 몫이다.
여성들의 이런 명백한 무관심과 무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여성 조직의 상당 부분에도 흔한 일이지만, 여기서는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여성은 여전히 두 가지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여성은 프롤레타리아로서 일당을 벌어 자신과 아이들이 먹고살아야 한다. 다른 한편 가정의 노예, 즉 남편과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을 위해 무상으로 일하는 하인이다. 아침 일찍 공장에 가기 전부터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만약 남자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면 이 일만으로도 하루치 노동으로 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불쌍한 남자들이 자기를 위한 시간이라고 하는 저녁때에도 불쌍한 여자들은 일을 해야 한다. 집안일을 해야 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며, 옷을 빨고 꿰매야 한다. 요컨대, 영국 어느 공장 도시의 남자들이 10시간을 일한다면, 여자들은 최소한 16시간을 일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떻게 여자들이 다른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 엘리너 마르크스Eleanor Marx, 「영국 여성 노동자 운동에 관하여On the Workingwomen’s Movement in England」, 18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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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라는 야만적인 경제 현실은 물론 세계 곳곳의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그러나 여성이 받는 충격은 더욱더 크다. 급속한 경제 변동에 의해 밀려나는 여성들은 세계 곳곳에서 더 무거운 노동의 짐을 짊어진다. 제3세계의 구조조정 계획이나 미국의 이른바 복지 개혁 때문에 사회복지 사업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며,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고, 신흥산업국의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다. 게다가 여전히 성폭력의 대상이 되며,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스스로 재생산 과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더 중요하게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 역사, 자본주의, 사회 변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이 이런 경제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분석 범주를 젠더 중립적이거나 인종 중립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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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행의 한 영역에서 조금 진보가 이루어진다 해도 다른 곳에서 퇴보가 나타날 수 있다. [...]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웠던 일부 젊은 남성 활동가들의 놀라운 변신을 보라. 1995년 이래 이 활동가들은 남아공 강간자협회South African Rapists Society라고 이름을 바꾸고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박탈된 정치적 에너지’의 배출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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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1997)는 ‘매 맞는 여성’이라는 용어조차 여성들의 수많은 경험을 1차원적인 규정으로 환원한다고 주장한다. 억압된 공동체에서 경제적 폭력을 비롯한 일상적인 고통을 겪는 여성과 매 맞는 여성을 선을 딱 그어서 분리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극단적인 폭행 사례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가정폭력 반대 운동은 여성의 신체와 정신에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극적이지 않은 폭행을 과소평가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
실제로 많은 가정폭력 사건은 가족 내 남성 권력에 대한 여성들의 이의 제기를 중심으로 벌어진다(Gordon 1988을 보라). 억압의 역사에 기인하는 분노는 손쉽게도 치환된 과녁으로 향한다. 멀리 떨어진 지배자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
실제로 가정에서 남성이 보이는 수동성이야말로 공공연한 폭력 행위보다도 더 여성의 분노를 일으키는 원천이며 만성적인 문제이다. [...]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도 엄마에게 발길질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에 대해 권력과 통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냄비를 던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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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남성이 여성에게 자행하는 폭력은 다른 남성들에게 여성의 보호자라는 익숙한 외투를 걸치는 정당화를 제공하는 한편, 정작 여성들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의 올가미에 걸릴 때 정치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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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 대한 이런 낙관적인 기대를 감안할 때, 최근 페미니즘 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은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세계 곳곳의 여성의 삶에서 수집한 증거를 살펴보면, 민주화는 자원과 책임의 성별화된 재분배로 이어졌고 여성들의 삶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 200년 동안 페미니즘 정치 동원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세계 곳곳의 나라에서 공직의 12퍼센트 이하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이 국회에 단 한 명도 진출하지 못한 나라도 100여 개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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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적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의 힘이 점점 커지는 시기에 우리는 민주화의 성별화된 탈구gendered dislocation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주주의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개인에게 권리와 면책을 부여하고, 개인의 자유와 발전을 촉진하고,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한 집단행동을 장려하는 협치 양식으로 이해한다면, 왜 이토록 성별화된 결과가 뚜렷한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주류 사회과학자들과 정치인, 언론의 눈에는 이런 노골적인 불공평이 전혀 보이지 않고 관심 밖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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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론은 민주화의 성별화된 탈구에 기여하는 일부 요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페미니즘 학문은 주류 정치 이론과 사회과학 접근법의 ‘중립성’, ‘객관성’, ‘포용성’에 관한 주장이 매우 의심스러움을 보여 준 바 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내의 페미니즘 비평의 특징은 각종 이론과 방법론, 실증적 조사 결과에서 남성중심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남성중심주의라는 개념은 가정, 개념, 신념, 주장, 이론, 방법, 법률, 정책, 제도 등이 모두 ‘성별화’해 있음을 시사한다. 암묵적으로나 공공연하게 한 성별을 특권시하면서 다른 성별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실천은 다양한 방식으로 젠더화될 수 있다. [...] 공식적으로 ‘몰성적’이거나 ‘젠더 중립적인’ 또는 ‘동등한 기회’ 또한 젠더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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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사랑한 수많은 사람을 파괴한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기를 쓰면서 자라났고, 남들을 피해 숨는 습관을 익히면서 나 자신으로부터 숨는 법도 배웠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단지 그들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람들, 중요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느끼도록 없애 버리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 무렵이면 숨는 습관이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마치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본능인 것처럼 말이다. 숨자, 살아남으려면 숨자, 라고 생각했다. 내 삶, 내 가족, 내 성적 욕망, 내 역사에 관한 진실을 말하면 저 미지의 영토로, 그들의 땅으로 넘어가서 나 자신의 삶을 명명할 기회를, 즉 내 삶을 이해하고 삶의 권리를 주장할 기회를 영영 놓칠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왜 그렇게 두려워하니? 애인과 친구 들은 내가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보일 때마다 내게 물었다. 나는 애인과 친구에게 말을 하려 하지 않았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사실을 갖가지 방식으로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내가 얼마나 두려운지를, 나 자신이 얼마나 부정된다고 느끼는지를 분명히 납득시킬 수 없었다. 나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세상에 사는 동성애자이고, 가난뱅이를 경멸하는 세상에 가난뱅이로 태어났다. 내가 산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 그런 세상도 있음을 믿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어떤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느껴야 한다는 것을, 가령 절망 같은 것은 절대로 충분하게 분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절망은 직접 살아 봐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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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가부장제 탓이라고, 빈곤과 사회적 멸시는 아버지들이 지배하는 세상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나도 종종 내 성의 역사를 깡그리 무시한 채 내 계급적 배경 가운데 남들과 기꺼이 공유하고 싶은 것들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레즈비언이자 노동계급에서 탈출한 사람으로서 나의 삶이 가부장제에 의해 구성된 것처럼 행세하고 싶었다. 아니면 정반대로, 가난했던 성장기가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무시한 채 근친상간으로 인해 여성이자 레즈비언으로서 내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해서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삶에서 문제가 된 모든 것을 단순 명쾌하게 가부장제나 근친상간의 탓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고 존재조차 부인되는 우리 사회의 계급 구조 탓으로 돌리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내가 욕망을 포기하기를 기대했다. 페티시즘과 젠더 역할 놀이를 즐기고 역사적으로 정상에서 벗어난 욕망 범주를 장난 삼아 해 보거나 점잖게 깔아뭉개면서도 그런 범주 때문에 성적 정체성을 주장할 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정상적인 여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이성애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를 뿌리치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가난하고 혐오스러운 아이이자 신체적, 정서적, 성적 폭력의 희생자로 자라났으며, 고통을 겪는다고 사람이 고귀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고통은 사람을 파괴한다. 파괴나 자기혐오, 평생을 따라다니는 무력감에 저항하려면, 경멸받는 데 익숙해지기를 거부하고, 간단한 말로 무시되는 그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벗어던져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흠이 있고 보통이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보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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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변화하고 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새로운 집단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새로운 요구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이/레즈비언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노동조합이 레즈비언/게이 권리를 위한 캠페인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거기에 기여하기를 요구한다. 노동조합에 속한 페미니스트들은 낙태권을 위해 ‘당당하게 나서도록’, 즉 낙태권에 대한 지지를 노동조합의 문제로 보도록 조합을 압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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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 해방의 전망은 결코 ‘협소’하지 않았다─어느 활동가의 말을 빌자면, 이 운동이 추구한 미래상은 페미니즘보다 더 전면적이고 죽음 자체보다 더 무시무시한 혁명이었다. 일부 투사와 이론가 들은 국가와 계급이 없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미래상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면서 장기적인 혁명을 꿈꾸었다. 개인의 삶과 사회제도를 철저하게 뒤바꾸어 투쟁이나 동원, 또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범주 자체도 사라지게 만들 그런 혁명 말이다."

 

 

-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 사회주의 페미니스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 책 속 곳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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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진영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의 반성은 구체적인 꼴을 갖추었다. 노동해방이라는 평등한 사회구조의 시스템을 꿈꾸는 집단 속에서도 가부장제는 어찌나 견고하던지. 여러 차례의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고 나 자신이 금속노조 안에서 두 번이나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발생한 사내하청 여성노동자의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 대한 피해자 대리인이 되어 활동하며, 나는 이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마음먹게 되었다. 더 이상 ‘동지’에게 성폭력을 당하며 사회주의를 말하고 실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웹진 이프] 권수정, '여성노동자의 망치질 소리'_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서평(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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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출판사 분들이 이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야근을 하셨잖아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두 번째는 번역자 유강은 선생님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닌데, 최근 본 책들은 희한하게 전부 유강은 선생님 번역작이었어요. 정말 박식하시고 번역을 잘 하는 분이라 부럽기도 하고 감탄했었거든요. 그래서 좌담에 참석하기로 결심했지만, 제가 어울리는 사람일지 계속 의문을 품었던 이유는, 일단 사전에 받은 질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웃음) 좌파가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는데, 매력적이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60년대 시민운동과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미국을 배경으로 좌파와 흑인과 여성, 이렇게 세 집단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에요. 거기서 백인좌파들이 저지르는 성폭력과 인종차별에 질려 버리게 되는데… [...]
이를테면 제가 어느 학회를 가든 일상적으로 겪는 고민은 이겁니다. 여성주의자들이 옛날 옛적에 이뤄놓은 업적을 최근의 남성 연구자들이 처음 발언하는 양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성이나 주변인들의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한 상태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걸 보면서, 페미니즘이 얼마나 무시당하는 분야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를테면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여성의 감정노동을 분석했어요. 하지만 에바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가 새삼 화제를 모은 건 그 사람이 여성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기 때문입니다.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좌파다'라는 말을 하기 어려운 시대에 억압을 느낀다거나 문제의식을 가지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면서 말을 시작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거죠.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을 싫어하기 때문에 일단 '난 아니지만'이라고 밝히면서 의견을 제시한다는 점을요.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당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말 못하는 약자들이 수다하다는 것, 그 부분도 같이 생각하면서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의견이었습니다."

 

 

"제게는 좌파로 산다는 맥락과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맥락이 연결되어 있지만, 이 부분을 설득하거나 설명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네요. 객관적으로 힘든 상황도 규정하기 까다롭지만, 사회적으로 재현하거나 가시화되기도 힘든 부분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신다면, 좌파로 산다는 좌파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분들께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이나 좌파는 스스로를 보편적이며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른 존재로 자리매김하려 해요.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당파성, 듣기 좋은 말, 소위 '정치적 올바름'이 주가 되죠. 장애인이나 여성, 동성애자 등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사회적 이해관계에 있어 특수한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차이적이며 사소한 무엇으로 치부해 버려요. 하지만 지당하고 올바른 말만 하면서 어떤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파성이라 할 수 없어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그런 윤리의식이나 책임감이 없어요. 그게 저를 가장 좌절스럽게 합니다."

 

[프레시안] '불행한' 한국인, 민감한 '곁'의 언어를 찾는다! (바로 가기)

- '한국에서 좌파로 살아간다는 것' 장석준-정희진-엄기호-노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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