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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19
    센델을 읽는 사람들과 월린을 읽는 사람들(3)
    김강

센델을 읽는 사람들과 월린을 읽는 사람들

인문학의 흥기. 많은 이들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빵처럼'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이후 몇 차례의 커다란 운동이 좌절을 겪으면서 대중적으로 '정의'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려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그것이 오늘날 '센델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꺼림칙한 지점들이 있다. 센델의 저 책은 분명히 많이 팔리고 있고, 심지어 액세서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읽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인문학이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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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해해 달라. 나는 여기서 인문학을 하나의 '엘리트적 삶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렇다. 인문학은 엘리트의 것이며, 귀족의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날의 '엘리트'나 '귀족'들은 그다지 부유하거나,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귀족이란 말하자면 '잉여'로 사는 이들일텐데, 내 주변의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잉여로 살아야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센델을 읽듯이 그들도 센델을 읽는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혹독했다. "진짜 지루하다!" 물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센델은 좋은 강사이고, 그는 훌륭하게 여러 개념들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센델의 책을 읽으며 지독한 지루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것은 센델의 책과 결부되어 접하게 되는 트위터나 언론 보도 속의 달뜬 반응과는 무척 다른 것이었다. 

 

그 지루함은 무엇보다 센델의 책이 "쉽다"는 데서 나왔다. 오오오. 재수없는가? 그렇다. 이들은 보통 『정의란 무엇인가』 수준의 책은 사서 읽지도 않는다. 일단 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 돈 모아서 그들은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데리다의 『법의 힘』 따위를 산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재밌다고 읽는다. 참 재수없는 색히들이다. 그런데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자. 발리바르나 데리다를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은 센델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보다 압도적인 지성이나 정보량을 소유하고 있을까? 별로 그렇지 않다. 이것은 양적인 문제이거나 '양적 이미지로 환원될 수 있는 질적 문제'가 아니다. '재미'라는 정서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이 서로 상당히 다른 것이다. 

 

센델의 책은 말 그대로 '쉽고 재미'있다. 그는 풍부한 예를 통해 정의의 개념사와 논쟁들을 짚어내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물론 센델은 수많은 '방통대 교재'(나는 여기서 방통대 교재 필자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다만 책의 목적이 다른 것이다.)들처럼 쉬운 '설명'만을 제공하지 않고, 많은 질문 거리들도 준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은 여기서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쾌감을 느끼는 메커니즘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훈련된 감각일 것이다. 교과서-참고서-문제집을 통한 지속적인 훈육은 우리로 하여금 잘 이해되는 책=재미있는 책이라는 감각을 갖도록 만든다. '귀족'들은 이 감각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쉽고 잘 이해되는 책=지루한 책의 감각이다. 그러니 별로 재수없을 일도 아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데리다의 책이나 발리바르의 책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로 갈수록 읽어내는 책의 난이도는 격차를 갖게 되겠지만, '인문학'의 길에 처음 접어드는 사람들의 경우 수준은 비슷하다. 센델의 책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이나 지루해 하는 사람들이나 데리다나 발리바르가 이해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나는 이런 사례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센델과 같이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셸던 월린"의 책, 『정치와 비전 1,2』를 가지고 「정치철학 입문」이라는 이름의 세미나를 하면서였다. 1권이 끝날 때까지도 멤버들은 지속적으로 나를 탄핵했다. "이게 어떻게 입문 세미나인가! 너무 어렵다!" 여기에는 '입문' 세미나라 하면 자고로 『정의란 무엇인가』 정도의 책을 읽으며 제반 지식을 스케치를 하는 세미나여야 한다는 감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 『정치와 비전』은 그런 감각에 따르면 입문서로는 적절하지 않은 책이다. 월린은 이 책에서 센델의 기획과 비슷하게 플라톤부터 근대 자유주의에 이르는 정치철학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지만, 그 목적은 이 사유들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데 있지 않다. 월린은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등을 '연구'하고, 다른 논자들과 때로 '논쟁'하는 글을 쓰면서 이들의 사상을 '풀고' 있다. 당연히 때로는 월린의 연구가 원전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플라톤이나 어거스틴의 원전의 난이도가 훨씬 더 낮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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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입문인가? 반응은 1권이 끝날 때 쯤 시작되었다. 멤버들 중 몇명이 "월린을 책을 보다 보니까 짜증이 나서 원전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 읽고 싶어졌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 등을 읽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치철학 입문」 세미나의 멤버들은 진짜로 '인문학'에 "입문"한 것이다. 고대의 비의 종교나 수행 전통에서 "입문"이란 용어는 사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며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갖게 됨으로써 이전의 삶과 사유와는 단절하는 것이 아닌가.(그런 점에서 사실은 '입문'이 모든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입문한 사람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이들은 이제 어려운 책, 이해되지 않는 책이지만 그것을 재미있게 느끼는 감각을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대학원에 가서 정규 코스를 밟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문학도'이다. 반대로 대학원의 정규 코스를 밟고 있더라도 여전히 인문학도가 아닌 사람들도 많다.(물론 정상적인 학교와 선생님들이라면, 이런 학생들을 그냥 두지는 않는다. 대학원은 여전히 쓸모 있는 배움터이다.) 

 

인문학은 소위 '인문학의 내용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인문학 함'이라는 실천의 형식인 것이다. 따라서 센델의 책이 아무리 빵처럼 팔려나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인문학 붐'은 아니다. 그것은 모 신학대학원 입시를 위해 예비 전도사들이 아무리 철학 문제집을 풀어도 그들이 '철학도'가 아닌 이유와 동일하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을 계속해서 돌려가며 읽거나, 책 읽기의 지난함을 피하기 위해 여러 아카데미들의 강좌들을 올려가며 듣는 것이 인문학이 아닌 이유와도 동일하다. 대중의 감각이 귀족의 감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인문학 붐은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소위 지식의 단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과 그것에 의해 형성된 우리의 습속 - 이것 역시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이다. - 을 폐기해야 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자신 앞에 주어진 과제를 충실히 이해하고 습득하여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지식의 모델이야말로 인문학을 가로막는다. 인문학 책이란 건 보통 누가 읽어도 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앞의 단계를 이해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책을 읽다가, 부딪힐 때마다 참고할만한 자료들을 보면서 소위 '앞의 단계'가 자동습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감각이다. 물론 단계별 학습을 전제로 한 교육과정이라도 의도치 않게 인문학적 효과를 낳을 수 있기에(이를테면 글을 읽는 게 너무 즐거워서 '언어영역' 문제집만 미친듯이 풀어대는 경험 따위?), 중고등학교를 충실히 다니고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이 좀 더 빨리 인문학의 감각을 습득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반대로 여기에 함몰되어서 오히려 인문학으로 '입문'하지 못한 채 『정의란 무엇인가』 수준의 책을 돌려가며 읽으며 소위 한 사회가 '상식' 수준에 머무르려는 경향 역시 이들이 주도한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여론을 주도하는 '대중'이다. 책도 안 읽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책을 보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대중인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귀족의 학문이다. 이 귀족들은 언제 어디서나 솟아날 수 있다. 때로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낙오된 이들이라도 기연을 만나 인문학에 '입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인문학의 흥기나 '대중화'는 바로 이 '기연'들이 얼마나 구축되어 있는가를 통해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센델의 책이 아무리 팔려도 그것이 인문학을 대중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월린의 책 따위를 읽는 독서모임들이 많이 생겨나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인프라들 - 이를테면 도서관이나 연구단체들 - 이 구축된다면 대중들이 '귀족의 감각'을 갖게 되는 사태가, 즉 한 사회가 '상식'을 넘어서 다른 사유와 다른 삶을 추구하는 이들로 넘실대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의 흥기는 그 때 가서 말해도 늦지 않다. 다른 걸 다 차치하고, 지금 김영사 말고 어떤 다른 출판사가 돈을 벌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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