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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25
    ROCK KID(1)
    투덜 투덜
  2. 2006/07/10
    .....
    투덜 투덜
  3. 2006/06/30
    .....
    투덜 투덜
  4. 2006/06/05
    개를 기르다/우리 개 이야기/수지(6)
    투덜 투덜
  5. 2006/06/02
    뭐이, 마누라가 이리 마니 나왔어(1)
    투덜 투덜
  6. 2006/05/31
    5. 31
    투덜 투덜
  7. 2006/05/23
    평택
    투덜 투덜
  8. 2006/05/22
    단어나열
    투덜 투덜
  9. 2006/05/18
    김반장, 강풀, 변영주....
    투덜 투덜
  10. 2006/05/12
    변영주와 만나다....
    투덜 투덜

운동과 작은누이

 

  

내가 운동을 시작한지 별로 안 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수대를 결의하게 되었다.

운동을 시작한 짧은 기간 동안 경찰들과 몸싸움은 있었지만,

대로변에서 지대로 싸울 것이 예상되는 판에서는 처음이었다.

내 가슴은 전후좌우 100미터로 요동치고.


첫 임무는 안테나였다.

어떤 지정장소에 있으면서 경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경찰은 내가 서있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왔고

투쟁대오와 격렬하게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멀리서나마 보였다.


투쟁대오는 방향을 꺾고 내가 있는 곳과 점차 멀어져갔다.

지금 같으면 손전화기로 후딱 연락을 해서 어찌 하겠지만,

당시는 그 문명의 이기는 소수의 자본가만이 가질 수 있을 때였다.

안테나의 필요성은 소멸되었다고 판단,

멀어진 대오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본대오에 간신히 합류했고, 대략의 소통을 한 후

2차 격돌이 예상되는 지점에 결합하기 위해 본대오를 나섰다.

다시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마음을 다잡으며 안면에 마스크를 쓰려는 순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무엇인가가 뒤통수에 레이져를 쏘는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레이져의 출처가 나의 친누이라는 것을 알았다.

둘 다 3초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3초가 지나 해동이 되자 난 마스크를 쓰며 앞으로 나섰고

나의 작은누이는 대여섯명을 선동하면서 선전전을 다시 시작했다.


작은누이를 투쟁장소에서 만났다는 알싸한 충격으로

경찰과의 대치상태는 머리에 크게 입력이 되지 않았다.

그 여파로 한숨을 크게 쉬다

발 앞에 떨어진 최루탄 가스를 깁게 빨아드렸고,

결국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반기절 상태로 본대오로 질질 끌려나오고 말았다.


그 이후 작은누이가 운동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난

집에 들어와 작은누이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방에서 무수히 돌아다니는 씨뻘건 책들과 문서

그리고 무슨무슨 선대본, 무슨무슨 실천단같은 T들이 다량 검색됐다.


아이고, 이 인간이


후에 안 사실이었지만, 작은누이는 여러 집회에서 이미 날 보았다고 한다.

작은누이는 자기 캠에서 대오지도를 하는 역할을 맞고 있어

내가 있는 대오가 옆으로 올 때면

‘천천히 갑시다’ 혹은 ‘거리가 멀어집니다. 빨리갑시다’이러면서

나와 마주치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 사악한 것!


작은 누이가 속해 있는 캠과 내가 속해 있는 캠은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쁘락션을 거는 관계였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공동활동도 많이 하고

접촉의 면을 넓히던 시기였다.

나는 운동을 막 시작하던 때였기에 상세하게 모르고 있었지만,

작은누이의 경우 그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을 위치였다.

하이고, 내가 움직이는 걸 보면서

지 혼자 얼마나 킬킬 거렸을 지 안 봐도 비데오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이 인간이 대략 재수없다.


그 이후 작은누이와는 집보다는 집회에서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고

이래저래 둘이서 할 얘기꺼리도 많아졌다.


그리고 상부상조를 했다.


과외를 충분히 할 수 있는 학벌인 작은누이는

“어이, 요번에 선거나가는 데 결의금이 필요해”라는 식의 얘기를 하면

풍부한 자금력으로 나에게 보조하고는 했다.


작은누이는 늦은 귀가와 외박으로 인한 집의 탄압이 골칫거리였는데

나의 방만한 삶을 부모님께 설명하며

작은누이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느냐며

부모님을 설득(이라기 보다는 윽박)했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험한 집회같은 경우는 서로 격려하며

친남매이자 동지의 길을 걸었다.


이런 둘 사이에 불문율이 있었다.

정파적인 문제는 토론하지 않았고

서로의 문서를 훔쳐보지 않으며

각자의 민감한 개인적이며 정치적 문제는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작은누이는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학생운동 이후가 큰 문제로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불문율에 따라 묻지 않았다.


작은누이는 결국 한국노총 산하의 연구소에 취직을 했다.

작은누이가 속해있던 그룹은 소규모 조직으로

학생운동 이후의 전망을 함께 건설할만한 조직의 상태가 아니었다.

해당 주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작은누이는 그렇게까지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어중간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 어중간한 결정은 반년만에 사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고,

곧 일반적인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난 곧 군대에 가서 작은누이의 자세한 행보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전역 이후도 작은누이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작은누이에게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운동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살아있는지

아니면 단절되었는지, 혹은 원망하는지 아는 것이 두려웠고

그 동안 둘의 정치적 대화는 단절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군대가기 전까지는 그녀가 속해있던 그룹과

최소한 선은 남아있던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남아있는 그 선만큼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 약간의 방황의 시기를 넘겨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곧 정식적으로 한 정치단체의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작은누이에게 했다.

그 이야기는 나의 삶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지만,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소’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많은 고민을 했었겠네. 열심히 하고 이젠 너의 삶을 돌아보렴’

그녀의 짧은 대답으로 더 이상 그녀가 운동과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있음을(혹은 단절 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작은누이는 다시 공부를 하고 있고

난 그냥 살아남아있다.


작은누이를 운동과 멀어진 한 사람으로 바라볼 때

그 사람은 작은누이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녀뿐 아니라 전망의 문제와 조직의 문제로

운동판을 떠난(밀려난) 사람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내 작은누이는 내 조직의 동지이기도 했고,

다른 조직이지만 함께 운동을 했었던 어떤 동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몫을 고스란히 개인이 져야 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운동하는 자들의 기억에서 버림당한 그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은누이를 생각할 때면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살아남아서 나에게 비판을 가해야 하는 것 아냐?

살아남아서 그 무능한 조직들에게 욕을 해야 하지 않아?

살아남아서 치졸한 운동판을 공격해야 하는 거 아냐?

살아남아서 나와 했던 이야기를 지켰으면 안 돼?

살아남아서 나와 대화할 수 없는 거야?


그래도 작은누이가 고맙다.

이제는 아파하지 않아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씩씩하게 만들어가서

이제는 웃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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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KID

스쿨 오브 락을 보았지

재미나게 보았지

으~~~ 고노메 설명불가의 롹스삐리뜨가 되살아나

 

롹을 어떻게 접하게 되었더라...

 

웨 날 뷁~~~~~~~

 

 

울 집에 첨에 오디오를 샀을 때(중1,2때??)

기념으로 산 CD중에 QUEEN이 있었고(짠누나의 추천으로, 근디 알고보니 짭퉁)

신기한 음악이다고 생각하고 걍 넘어갔지만

뭔가 다른 찡함이 있었지...

 

그리고 리발이벌 되는 기억들

친구가 들려주었던 큰남정네와 총들과 장미들

그치만 그때까지는 마이꼴짹쏜과 다를바없는 음악중에 하나였고

(그치만 가요란 달를단 요런 생각을 했지. 어릴 때도 역쉬 건방졌어)

 

글다가

고2때 잡지보고 커트의 사진보고 뻑가 산

NIRVANA의 IN UTERO

 

첨 들었을 땐 거의 소음이었지

돈 아까워서 대여섯번 들었더니

갑자기 가숨을 때리는 울렁거림

그 울렁거림 생각하믄...

눈물만 주루룩주루룩

(이때 첨으로 영어사전들고 첨으로 답안지없는 것을 해석했을꺼여)

 

고러면서 주변의 롹키뜨들과 대화를 했지만

주변의 롹키뜨들은 메딸리카, 감마뤠이져, 잉위맘마가턴 테크니션 아니믄

미스따 빅, 뽄쪼비, 스끼도로 가턴 말랑말랑 취향들이어써

(뭐, 지금에서야 고런 음악이 후지다기에는 쪽팔려 말 몬하지만

난 아직도 그들에 대한 심각한 편견이 이따고 --;;)

고랴서 주변의 롹키뜨들과 싸우기만 열라 싸우고

교감 혹은 정보교환의 대상은 업써부려찌

 

고때만해도 이너넷이 있지도 않았고

래디오에서 하는 쫌 좋은 음악플그램덜은

아뜨락을 중심으로 하는 취향이어꼬(성시완의 뭐시기가 대표적이었는디)

아니믄 걍 팝소개 플그램이 고나마여서

정보 부족에 시달렸찌

(고때 PC통신 음알음알 생겨나기 시작해찌만, 얼리어뎁터는 아니었기에 퍄쓰~)

 

이래저래 잡지를 두지고

경재력과 여러조건상

일딴 콜랙한 것덜덜이 OST앨범들여써찌

 

당시 얼터롹 OST가 마니 나왔는디

(장사가 쪼매된다는 증거여찌만, 한국은 아니어쓰리라 사료돰)

고놈을 통햐 다양한 뺀뜨들의 음악을 듣따가 괘아는 놈들의 앨범을 샀는디

 

대략 고놈들이

오야시수

뿌셔지는 호박덜

기계에 대한 분노땡이

돌땡이사원대빵

쑤신진주

아홉말못덜

래디오대가리

.

.

.

. 뭐 요정도 되거따

 

굴다가 한국말을 하는 롸글 듣고 시퍼졌는디

고때 '시나위'가 인끼가 솰랴솰랴 나갈 때라

골로 흡쑤되샤 80년대 고닥다리 고놈돌 앨범까지 사셨다

 

또 구러다 인띠씬이 뜰땨라 열라 인디밴드들 쑤시샤

양놈덜 OST사던것마냥

고때 유행한 껌쁠래션앨범들을 모디가

또 앨범덜을 샀는디

 

탸미킴

유얀미뿔루

노주가던

뗄리수파이수

언뉘이빨꽌

노쁘레인

위뻐

레니썬

미써니

윤뺀도(2집까지멍해도 파딱파딱 튀었는디 짐은 음악쩍우로나 하는거나 넘 마깐 노미라...)

.

.

. 또 요정도 되거따

 

 

고로다가

운동한답시고

아님

어른질한답시고

아님

나이쳐먹었다고

아님

들을만큼들었다고

 

롹을 멀리해떤거시어

 

림뿌빠수레기

림낀퐉

꼴뜨플렝이 도 알고

 

오부라다스

윈디씨띠

수웨따도 듣지만

 

인생살아가는데

요놈들 들으면서 벌렁거림은 거의 사라지셔따는 거돠

 

 

 

군뒤

스쿨오부롹이

고 벌렁거림을

재생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언진가부터 듣는

문짝덜과

레도제쁠을

파고시퍼지게 만드는 것이다.

 

엠삐쓸이와 벌랴덜로만 듣는

레도제쁠의

앨범을 사고시퍼져다 이거다.

 

그래서

돈지랄과 헛지랄이 걱정되지만

가섬이 쪼매 따땃해져부렸다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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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수성과 감정적

 

 

합리적과 사무적

 

 

이성과 냉정

 

 

비판과 비난

 

 

열정과 폭주

 

 

반성과 자괴

 

 

침묵과 침잠

 

 

훈련과 훈육

 

 

고집과 아집

 

 

돌파와 독주

 

 

자신과 자만

 

.

.

.

.

.

 

어디까지 이런 말을 만들 수 있을까

말이 아니라 마음을 만들 수 있을까

서로 닿기는 하는걸까

진심은 어디에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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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장과 조바심

 

 

 

여유와 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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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기르다/우리 개 이야기/수지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였고, 어찌할바를 모르는 목소리였다.

'수지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먹고 계속 누워있어'

가슴이 철렁내려 앉아버렸다.

 

.................

 

어머니가 동물병원에 수지를 데리고 갔더니, 간이 굳어가 희망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울기만 했다.

주말에 집으로 가서 가망이 없으면 내가 안락사 시키겠다고 했다.

 

....................

 

집으로 가기 이틀 전 어머니가 수지가 갑자기 괜찮아졌다고 했다.

수의사도 수지가 좋아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주말에 집에가서 이틀동안 수지랑 같이 있었다.

집을 떠난 후 처음으로 집에 제대로 붙어있었다.

오직 수지때문이었다.

집을 나서서 울산으로 돌아 갈 떄 수지를 다시 못볼 것같았다.

나가는 나를 보던 수지의 얼굴이 선명하다.

 

 

.....................

 

그리고 보름 후 수지가 죽었다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베낭에 수지를 데리고 가 산에 묻었다고 한다.

울산으로 온지 2년이 안됬을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8개월 전쯤이다.

 

......................

 

군대를 전역하고 방황으로 학교에 발길이 뜸할 때

오랜만에 사람들 얼굴이나 보려고 총학생회를 찾아갔다.

혀를 쪼금 내밀고 있는 요크셔 한마리가 있었는데 너무 귀어웠다.

그 때 감기걸려 기침을 하다 콧물이 나왔고,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무도 대려가지 않아서 총학생회실에 임시방편으로 살고 있던 개였다.

사흘후 내가 키운다고 하고 집으로 대려갔다.

 

 

.....................

 

밤에 식구들 몰래 수지를 집에 대리고 왔다.

다음 날 아침에 수지는 식구들을 만났고, 가족들은 모두 당황해 했다.

어머니는 일거리 생긴 거 아니냐고 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한다고 하면서 어찌저찌 설득을 시켰다.

불안한 맘에 한달넘게 집에 붙어있으면서 수지를 지켰다.

그 때처럼 집에 빨리 들어간 때는 없었다.

 

...................................

 

집에 수지가 온 지 6개월정도가 지나서야 식구들이 수지에게 정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1년동안 수지 뒤치닥거리는 나 혼자 했다.

1년이 넘어가자 어머니가 수지를 처음으로 목욕을 시켰다.

그러나 어머니는 맘이 약해 수지를 혼내지 못했다.

수지에게 악역은 나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

 

수지는 사실 요크셔치고 다리와 주둥이가 길고 몸집도 쫌 큰 편이었다.

혀를 내밀고 있는 것은 기관지계열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해 자주 체하기도 했다.

요크셔답지 않게 너무 조용한 성격에 애교도 없는 개였다.

어찌보면 B급 애견이었지도 모르는 놈이다.

 

.........................

 

 

집으로 대리고 온지 얼마 후 수지의 사연을 들었다.

한 친구가 기르던 개를 젊은 부부에게 인터넷으로 분양을 받았는 데

그 친구가 기르기 어려워 다른 친구 집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 다른 친구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 갈 곳없이 총학생회에 있게 된 것이다.

한달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

 

수지는 낯선 남성을 매우 싫어했다.

최초에 길렀던 부부 중 남편이 못살게 굴었던 것으로 추정할뿐이다.

수지가 집으로 왔을 때는 중성화 수술이 되어있어, 다른 개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 집에 왔을 때 수지가 대여섯살정도일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

 

수지가 온지 1년정도 되었을 때 집에 너무 끔찍한 일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너무 싫었고, 모든 게 싫었고 괴로웠다.

한달동안 방에만 있을 때 수지가 내 옆을 지켜줬다.

그 때 집에 있을 수 있던 것은 수지덕이었다.

 

..............................

 

집을 떠나 울산으로 가던 날, 식구들이 모두 자고 있는 밤에 짐을 챙겨 나왔다.

내가 집을 나가는 모습을 수지는 뚤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집을 떠난 후 수지가 일주일동안 대문앞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되었다.

 

...............................

 

 

수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수지 사진이 있으면 가져다 달라고 했다.

다섯장 정도를 챙겨서 집에 가져다 주었다.

평소 모습의 수지 사진이었는데, 가족들은 사진속의 수지 모습이 아파보인다고 했다.

가족들은 수지의 아파한 한달동안 마지막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

 

수지가 죽기 열흘전부터 종양이 생겼다고 한다.

누워있기만 해서 생긴 종양이었을 것이다.

 

...............................

 

수지가 죽고난 후 집에 처음 갔을 때, 다시 문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수지가 없는 집은 너무 차가웠다.

수지대신 7개월 정도된 조카가 옹알거리고 있었다.

내가 사준 수지밥그릇은 구석에 있었다.

 

................................

 

수지가 죽기 서너달 전 집에 갔을 때, 수지는 화장실 앞 긴 줄에 묶여있었다.

돌이 안된 조카 옆에 수지가 못가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그 날 수지의 목줄을 풀고 같이 잤다.

수지가 죽기 보름 전에 집에 갔을 때는 목줄이 풀려있었다.

수지가 여덜,아홉살정도 되었다고 추정할 때였다.

 

 

...................................

 

수지가 죽고 두달 후

'개를 기르다'라는 만화책을 샀다.

그리고 얼마 전

'우리 개 이야기'라는 영화를 봤다.

 

....................................

 

수지야, 마지막으로 있던 우리 집에 있을 때 나쁘지는 않았지?

수지야, 내가 막 혼내도 맨날 너랑 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수지야, 발바닥 털정리, 발톱정리는 내가 다 해줬다.

수지야, 없는 돈에 이것저것 사느라 쪼매 힘들 때도 있었어.

수지야, 그래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

수지야, 그래도 나중에 너같은 친구를 책임질 수 있을 때, 다른 친구랑 살아가도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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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이, 마누라가 이리 마니 나왔어

 

지자체 선거기간동안 이유야 당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관심이 가니 여러 이야기를 했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나는 말

 

'뭐이, 활동가들 마누라가 이리 마니 나왔어. 지들끼리 다 해묵어라'

 

이번 지자체선거에 (울산에서) 민노당 여성후보들이 많이 출마했고

그녀들 다수는 한딱가리한다는 현장출신의 활동가와 결혼한 학출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다수는 운동일선에 물러난 상태였다.

 

추측컨데

그녀들은 열성적인 (노조)민주파 활동가였을 것이고,

가장 험난한 일들을 해왔던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어느 순간 운동일선에 물러났다.

그녀들이 운동일선에서 물러난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결혼과 함께 '주부'라는 일을 해야 했을 것이고

제도화되가는 민주노조운동에서 그녀들이 할 일은 많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은 운동일선에서 물러났기보다는 밀려나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녀들의 갑작스런(?) 컴백이

대공장 중년 남성 활동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또 추측컨데

그들의 불편한 심기의 이유는

하나. 현장에서 선명한 이야기를 하던 '학출'들이 어느 순간 운동일선에 안보이더니

갑자기 '제도정치'로 돌아 온 불편함일 것이다.

둘. 집에서 밥하던 '여자'가 '님'이 된 불편함일 것이다.


그녀들의 진출에 별 생각이 없던 나는 그들의 말에 의해

그들의 말이 불편해졌고

그녀의 행동이 불편해졌다.


그들의 말

학출과 여성을 분리하는 태도

자신과는 다른 무엇

학출은 뭔가 선도적이어야 하고, 투철해야 하고, 일선에 항상 있어야 하고...

여성은 뒤에 있어야 하고, 섬세해야 하고, 뒤치닥꺼리하고...


그녀의 행동

자신이 만들어 온 제도에 밀려나자 다른 제도로 가버리는 행동

제도가 있어야 안심하는 무엇


그들이 내게 물었다.

‘지들끼리 다해묵는 거슬 어찌 봐야하는 거고?’

나의 대답

‘어찟든 자기 활동하는거고, 활동 복귀하는건데 잘 하는거죠.

권력도 잡고, 활동도 재계하고. 잘 하는거죠...‘


비겁한 대답

무능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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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

늦잠을 잤더니 허리가 다 아프다.

아이고....

 

투표하러 나가서 정치를 대리시키는 것보다는

늦잠으로 휴일을 즐기는 편이 좋다며 위로하고 있다.

 

근데 지금 주민증을 잃어버려서 투표를 할래도 할 수 없다.

 

투표권이 생긴 이후로 몇 번의 선거를 치뤘는데

투표를 한 것은 딱 두번이다.

 

한 번은 군대에서

한 번은 투표사진을 찍기위해서

투표를 했다.

 

일부러 투표를 안 했다기보다는

투표일마다 주민증이 없어서 할 수 없었다.

 

투표일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신분증을 흘리고 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기 귀찮음의 표현일 수도 있고....

 

모든 영역에 적극적일 수는 없다.

의회정치는 운동진영이 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일 것이다.

 

의회정치가 주는 연막효과와

의회정치가 가지는 현실적 힘들을 두고

하나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 역시 고민하기 귀찮음의 태도인 것같기도 하고.

 

여튼 무의식을 가장한 의식적 해태는 별로 맘에 들지 않는 태도얌.

 

아고

너무 많이 잤더니, 생각도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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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평택이 가슴에서 멀어지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가슴의 울렁거림을 멈춘 것이다.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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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나열

블럭화
게토화
써클화
엄숙주의
배후조정
대리주의
비밀주의
주의주의

.......

 


쓰잘 데 없는 짓하기

(현실주의 극복)

IMF이후 세대의 확인

(줄세우기, 87년 운동 극복과 새로운 활로 찾기)

경계넘나들기

(운동'꿘' 극복)

몸과 마음이 부지런하기

(내안의 관성 극복)

뚜벅뚜벅 걸어가기

(엄숙주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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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장, 강풀, 변영주....

김반장

윈디시티 드러머 겸 보컬

음악이 좋다.

자신의 정치성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음악에 반영한다.

직접행동을 노력한다.

 

강풀

인터넷 중심의 만화가

만화가 재미있다.

자신의 경험과 양심의 문제를 자신의 만화로 들어낸다.

 

변영주

영화감독

운동권을 이탈한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지만, 경력으로 장사하지 않는다.

대중과 시대의 소통에 대한 노력이 항상 뭍어나온다.

 

 

이들은 좋아하는 음악가, 만화가, 감독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정치색(더 적절한 말이 있으면 좋겠다)'을

진심으로 드러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정치색이라는 것이 운동적이고

 

그들의 직업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직업이라는 특징도 있지만

그들의 작업과 대중과 호흡은

운동적이다.

 

그들에게 받은 인상은 열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고집도 느껴지고

 

운동을 시작할 때

'운동이란 말이야 대중과 호흡해야 하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 투명해야 해'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옳은 말이다.

근데 운동'꿘'이

대중과 호흡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열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운동가에게 입김이라도 불어넣을 것이고

정치적 신념도 더 선명해지겠지.

 

 

자신의 공간에서 살아움직이는 이 세사람은

게토화된 운동'꿘'들보다 훨 훌륭하다.

 

열씨미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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