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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번역 초안을 마치면서

<정신현상학> 서설 번역 초안을 마쳤다. 일을 보고 나면 개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현상학> 번역을 시작한 이유는 번역을 하면 좀 꼼꼼히 읽어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다.  <정신현상학>의 <사유발자취/Gedankengang>를 <내 힘을 보태 따라가/mitvollziehen> 보겠다는 의지였다.

 

근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많은 부분 <mitvollziehen>을 하지 않고 헤겔 흉내를 내버린 것 같다. 특히 이해가 안된 부분들은 그렇게 넘어간 것 같다. 물론 <mitvollziehen>이 잘 안되어서 헤겔 흉내를 내려고 했겠지만. 그리고 억대 수표를 보고 기가 죽어 동전을 요구하지 못하고 경건한 자세로 취하는 면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헤겔 흉내를 내는 나의 행위를 살펴보니 그 근간에는 번역에 대한 오해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번역을 저자가 만들어 놓은 항아리를 다른 재료로 다시 똑같이 만들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고스란히 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번역이란 것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아직 긍정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저자가 무슨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조차 틀린 것 같다. 기호, 낱말, 언어에 대한 숙고가 부족해서 이런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사유가 언어라는 매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 언어도 변증법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럼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변증법적 번역? 이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노발리스가 말한 <뮈토스적인 번역/mythische Übersetzung>과 같은 것일까?

 

 “번역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grammatisch/문법적) 방식, 변형을 주는(verändernd) 방식, 그리고 뮈토스적인(mythisch) 방식이다. 뮈토스적인 번역이 최상스타일의 번역이다. 이런 번역은 개별 예술작품의 순수하고 완성된 성격을 서술한다. 현존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 이상을 우리 곁에 갖다 논다는 말이다.” (노발리스, 꽃가루 6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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