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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말하기 – 크리스티안 불프 사임과 가우크 대통령 지명에 얽힌 이야기

크리스티안 불프의 사임과 가우크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한 것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민주주의와 말하기 혹은 말 못하게 하기가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 독일 정통 보수일간 FAZ와 자생 좌파일간 taz의 동시적인 기사가 눈에 뜨인다. 크리스티안 불프 전 대통령의 이임 의전예식과 관련해서 FAZ는 말 못하게 하기를 조명하고,  taz는 자유민주주의 가우크란 인물의 가공으로 가려진 구동독혁명에 관한 다른 이야기하기를 제시한다.

크리스티안 불프의 사임을 둘러싼 이야기가 뇌물수수 혐의에 이어서 대통령 연금을 주자 말자는 이야기와 대통령 이임 의전예식을 허용하자 말자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전직 대통령 모두가 불참을 선언하고 독일 의전서열 5위인 헌법재판소장이 „진행 중인 수사절차때문에 참석이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라는 사유로 불참에 가담했으나 연방상원의장 겸 임시 대통령 대행 호르스트 제호퍼, 메르켈 총리 등 내각이 거의 모두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이임 의전예식이 진행되었다. 대통령궁 앞에 집결하여 부부젤라 소음으로 의전예식을 방해하려는 시위대의 노력이 허사였다. 의전예식은 아무런 일 없이 진행되었다.
 
이를 두고 2012.3.9 FAZ는 의전예식의 의미는 [국가 권력의 자리에 올라간] 개인의 모순적인 행동을 덮어 그 뒤로 개인이 사라지게 하는데 있다고 지적하고 오로지 정해진 틀을 반복하고 그런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민주주의적인 말하기를 배제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고 분석했다.

가우크에 얽힌 이야기는 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전 국민이 지지하는 참신한 „시민대통령“(Bürgerpräsident)이란 평을 받았다가 SNS의 반가우크운동이 확산되어 이젠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 구동독 반체제운동이 다시 조명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서2012.3.9 taz 톰 슈트로슈나이더(Tom Strohschneider)의 평론 „가우크의 그늘에 덮은 것“(Aus dem Schatten Gaucks)을 전문 번역하여 아래 소개한다.

원문은 여기

요하힘 가우크가 인권운동가였나? 이 질문을 놓고 지난 며칠동안 이리 뒤집어보고 저리 뒤집어보는 답들이 있었다. 구동독 반체제 활동가들은 차기 대통령으로 선정된 가우크가 1989년 전환가을을 맞이하여 „막판에 떠나는 기차“에 뛰어 올라탔다고 1968년 이후 적극적으로 동독의 쾌쾌묵은 체제 반대에 참여한 목사 한스 요헨 취헤(Hans-Jochen Tschiche)의 표현을 빌려 기억한다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신포럼) 발기인인 하이코 리츠(Heiko Lietz)는 가우크가 수년을 거쳐 „세워진 가공된 인물“이라고 평한다. 다른 이들은 가우크의 편을 들기도 했다. 예컨대 [중도좌파] „쥐드도이춰 짜이퉁“의 구스타브 자이프트(Gustav Seibt)는 „[가우크를] 소급적으로 동독 반체제 활동가에서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환기했다. 그런가 하면 taz의 일코 자샤 코발추크(Ilko-Sascha Kowalczuk)는 „SED 독재에 대항하여 과감하게 싸웠던“ „89세대가 모두“ „그들이 대항했던 지배자들과 같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꿈을 공유했다“는 비판으로부터 방어한다.

이 말은 약간 [노이에스 포룸 대표자] 베를벨 볼라이와 [동독 최후 SED 서기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 에곤 크렌츠가 한 동아리 사람이었다는 뒷맛을 남긴다. 정말 그랬나? 반면 전환은 오늘날 공론장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었다는 지적은 옳다. – 1990년 10월 3일로부터, 즉 사건의 마지막 장에서 뒤돌아 보는 시각은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고 동반했던 꿈들을 사각지로 사라지게 했다.

이미 몇년전에 사회주의자 인권운동가였고 통합좌파당(Vereinigte Linke) 발기인이었던 토마스 클라인(Thomas Klein)이 동독 반체제 운동의 성격을 „오늘날 지배적인 정치가치관에 입각하여“ „차후적으로“ 규정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동독 반체제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그 발전과정과는 괴리시키고 단지 활동가들이 당시 지향했던 목적의 현재 독일 상황과의 합치가능성여부만을 가지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자기 자리를 확실하게 찾은 과거 동독 반체제운동 일부의 상징인 된 가우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가우크는 전환에 있어서 시민-자유주의적인 동기와 통일로 향하는 민족적인 흐름을 상징하고 슈타지 문서 보관소 초대 수반으로서 동독을 [동독 국가안보부 수장] 밀케유산으로만 보는 협소한 고찰의 체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9년 가을 초창기에 사안이 되었던 것은 절대 단지 „한 민족“, 슈타지 건물에 쳐들어가 자료실을 점거하는 것, 그리고 여행자유화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이 절대 우선적인 것도 분명 아니었다. 적극적인 행동을 했던 소수의 반체제운동가의 대부분은 제3의 길, 생태적인 재건,  결정참여권의 신장이란 깃발을 높이 들었다.
 
예컨대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운동은 „사회정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연대사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평의회민주주의 이념을 실험하고 새로운 경제모델과 법정치의 대안을 고안했다.
 
1989년에서 199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몇 달간에 전환에 관하여 적잖게 출판된 문건들을 모은 모음집의 제목 „역사는 열려있다“, „이성의 잠에 대항하여“ 등은 이런 역사의 개방성과 유토피아적 동력을 대변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몇 명 안되는 동독의  „꿈꾸는 자“에게만 매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었고 서독 좌파도 사로잡는 그런 것이었다.
 
예컨대 [녹색당의 유일한 지역구 의원/베를린 프리드리히하인-크로이츠베르크] 한스 크리스티안 스트뢰벨레(Hans-Christian Ströbele)는 당시 동독혁명의 „첫 귀결“로 „헌법보호청을 집어치우고 완전히 없애는 것“(„Abrüstung und Nulllösung beim Verfassungsschutz“)을 요구했다. [나찌] „민족지하연맹“(NSU) 살인마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오를 둘러싼 논쟁을 감안하면 아직도 매우 시급한 사안이다. 로버트 융크(Robert Jungk)는 당시 동독의 전환에 상응하는서독의 민주주의와 투명성 신장을 아젠다로 했다. 이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시급성을 상실하지 않은 사안이다.

어쩌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지만 당시 동독에서는 그 몇 달 어느 순간부터 한편으로는 서독 정치판의 패걸이들(Politikbetrieb)과 서독 경제의 이해관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충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동독 „인민운동“(Volksbewegung)의 서독 마르크와 통일 요구에 부응하여 실세를 등에 업은 현실정치세력 한 패가(eine realpolitische Kraft des Faktischen)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동독반체제운동가들의 요구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이런 괴리가 동독반체제운동이 접했던 큰 문제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이런 [예견 불가능한 휘발적인]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역동성에도 대항하여 당시 고안되고 토론된 것을 보면 어쩌면 나이브하게 보여질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이 이야기 했던 말의 흔적이 대체적으로 공론장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거기엔 정확한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를 개혁한다는  „재건청사진“(„Umbaupapier“)에, 기업에서 새로운 좌파적인 길을 모색하는 새로운 출발에, 아니 전혀 다른 새로운 헌법에 대한 논쟁에 근거하는 전통을 세우는 것을 신독일이 허용할 수도 없었고 원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문을 열어재꼈다. 그러나 정치는 다른 이들이 했다.“라고 22년이 지난 지금 취헤 목사가 말한다. 이 말은 가우크를 염두한 말이기도 하다. 가우크가 정치무대에 올라올 땐 정치적 봄이 이미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으로만 제한된 궤도에 올라 경직되기 시작했다. 1990년 1월 말 노이에스 포룸에서 처음으로 통일에 찬성하는 자들이 일어서는데 가우크가 거기 있었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깊은 단절을 느꼈다.  1990년 3월 선거로 소집된 인민의회의 의원으로서 그는 동독인권/시민운동가 다수의 지침에 역행하여 통일조약에 찬성했다.
 
역사학자 마르틴 자브로우(Martin Sabrow)는 오늘날까지 지배적인 동독혁명서술과 관련하여 그런 이야기하기는 무엇보다 먼저 „민족적인 자유 및 통일운동의 열정“(„Pathos einer nationalen Freiheits- und Einheitsbewegung“)을 강조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런 열정은 가우크란 인물에서 살아있는 기념비를 찾았다. 그게 제대로 된 일인지 안 그런지는 논쟁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려는 마음과 청산되지 않은 옛 개인감정이 일정한 역할을 하는 다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이 차기 대통령이 역사의 일부만을 대표하고 그리고 다른 것들을 그늘로 사라지게 하는 방법으로 대표했다는 것에는 아무런 변함을 주지 못한다. 1999년에 이미 인권운동가들이 가우크 앞으로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서 „당시 동독 야권과 1989년 가을 시민운동이 쟁취하려고 투쟁했던 것이 [통일] 독일에서 이루어졌다“라는 가우크의 주장을  우리에겐 적용하지 말라"고 항의한 바 있다.

이건 아직도 유효하다. 그리고 다시 전 동독반체제인사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기 대통령에 관한 논쟁이 [역사의 사각지로 밀려난] 동독 야권으로 하여금 공론장의 기억에서 그 전통의 위상에 알맞은 자리를 차지하게 하고 있다. 동독의 전환은 가우크를 초월하는 것이었고, 전환은 가우크의 좌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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