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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0

진리란 [모든 것을 다 꿰어놓은] 전체다[1] .[2] 그래서[3] 전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본질이다. 절대적인 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는 본질적으로 결과로서 끝에 가서야 비로서 그가 참으로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절대적인 것의 속성, 즉 자기모습을 갖춰가는 것으로[4] 존재함으로써 실재적인 것 또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담겨져 있다.[5] 절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결과로서만 온전히 인식될[6] 수 있다는 점에는 [절대자의 개념에 대한] 자체 모순이 있는 듯이 보이고 그 점을 계속 우길 수야 있겠지만 이점을 약간만 검토하면 이런 터무니 없는[7] 생각을 금방 바로 잡을 수 있다. 시초, 원칙, 절대적인 것 등 [학문을] 시작하자 마자 곧바로 내세워지는 것은 단지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모든 동물이라는 표현이 동물학을 대신하는 말로 통용될 수 없듯이 신,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등의 낱말이 그것이 포함하는 것은 말하고 있지 않는 것 또한 분명하다. 낱말을 단지 이와 같이 [외연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사실 직관 또는 직접적인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낱말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에는 매개작용이[8] 따르는데, 낱말이 비록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달리 됨을[9] 내포하고 있으며, [이렇게 뭔가 다른 것이 되는 과정에서 낯설게 된 것은] 매개작용을 통해서 다시 자기로 회수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매개작용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꺼린다. 그 이유는 매개를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 절대적인 것 안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개를 이런 것 이상으로 이해하고 허용하면 바로 절대적 인식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원문 . 이 개념은 서양철학이 시초부터 <일체성>과 함께 문제 삼았던 개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일체성> <전체성>이 동등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와 모두>라는 공식으로 서양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공식에서 <하나> <다수>, <전체> <부분>이라는 모순이 테마가 되는데 양자를 매개하는 일이 서양철학의 맥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독어어원 사전을 보면 상한 것이 없는 온전한 것(heil/unversehrt), 빠진 것이 없는 것(vollständig), 완벽한 것(vollkommen)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2] 원문 헤겔의 이 입장을 아도르노는 전체는 비진리이다.(Das Ganze ist das Unwahre. 최소한의 도덕, 29 참조)라고 전면 거부한다. 관련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대학살의] 역사를 경험한 현재에 와서 철학이 참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은 헤겔이 철학전통과 함께 관심을 거두었던 곳에 있다. 플라톤이 하루살이와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폄하하고 헤겔이 게으른 삶이라는 딱지를 붙인 개념의 저편에 서있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이 무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강등한 질들이다. (Philosophie hat, nach dem geschichtlichen Stande, ihr wahres Interesse dort, wo Hegel, einig mit der Tradition, sein Desinteressement bekundet: beim Begrifflosen, Einzelnen und Besonderen; bei dem, was seit Platon als vergänglich und unerheblich abgefertigt wurde und worauf Hegel das Etikett der faulen Existenz klebte. Ihr Thema wären die von ihr als kontingent zur quantié négligeable degradierten Qualitäten.(출처, Adorno, Negative Dialektik, 1975, S. 19 f.)라고 말한다. 이것을 아도르노 사망직후 호르크하미어가 비판이론의 바탕은 좋은 것, 절대적인 것을 [이젠] 서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무엇 아래서 고통하고 그래서 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적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있다.(출처: http://www.zeit.de/1970/19/Das-Ganze-ist-das-Unwahre)라고 한 말에 기대어 이해할 수가 있겠다. 철학이 해야 하는 일을 이렇게 설정한 연장선에서 아도르노는 철학은 개별자가(Subjekt) [억눌림 아래  어쩔 수 없이 견디다 못해 토해내는] 표현에 뱉어내는 것의 뒤를 따라간다. 주시해야 한다. 고통에 혀를 빌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요구가 모든 진리에 전제되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개별자를 압박하는 객관성이다. 개별자가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된 것이다. (Sie folgt dem Ausdrucksdrang des Subjekts. Das Bedürfnis, Leiden beredt werden zu lassen, ist Bedingung aller Wahrheit. Denn Leiden ist Objektivität, die auf dem Subjekt lastet; was es als sein Subjektivstes erfährt, sein Ausdruck, ist objektiv vermittelt. (같은 책 29)

[3] 원문

[4] 원문

[5] < zu sein>을 약간 하이데거식으로 번역했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 헤겔이 <매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두고 살펴보자.  

[9]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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