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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08
    [번역] 독일 대통령 가우크 연설 - 기억의 그림자(7)
    ou_topia

[번역] 독일 대통령 가우크 연설 - 기억의 그림자

원문

 

내일모레면 유럽에서 2차대전이, 독일이 시작한 살인적인 공포가 종결된지 70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대륙을 잿더미로 만든 전쟁이 마침내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유럽 유대인이 살해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수백만의 병사와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에 이어 다수의 국가에서 수백만이 고향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럽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독일이 반세기동안 분단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서방 연합군과 소련연방이 함께 독일을 항복하게끔 쥐어짬과 동시에 나치독재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종결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우리 후세는 서구과 동구의 지난날의 적국의 희생가득한 이 투쟁에 감사해야 할 이유밖에 없습니다. 저 투쟁이 우리가 오늘날 독일에서 자유와 존엄을 누리며 살게 해주었습니다.

 

여기 홀테-슈투겐브록(Holte-Stukenbrock) 성에서 이 시간 이 전쟁의 가장 큰 범죄에 속하는 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소련연방의] 적군(赤軍) 수백만명이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병들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굶어 죽었습니다. 그들은 살해되었습니다. 전시국제법과 국제사회의 협약에 따라 독일군의 보호를 받아야 했던 수백만의 전쟁포로가 [이렇게 생명을 빼았겼습니다.]

 

그들은 먼길을 []발로 걷도 또 걷도록 강제되었습니다. 그들은 텅 트인 화물차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혹은 집합소라 불리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그곳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몸을 누일 곳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위생시설이 전무했습니다. 진료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누일 자리로] 흙구덩이를 파야 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것을 긁어모아(notdürftig) 판자집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고 절망하는 가운데 온갖 시도를 다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dann) 강제노동에 집단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쇠약해지고 굶주려 지친 몸에 그들은 비번히 이 강제노동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불과 몇백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포로수용소 “스탈락 326 젠네” (Stalag 326 Senne, [StalagStammlager/‘줄기’수용소의 준말])가 있었습니다. 31만명 이상의 포로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대다수가 여기서 생명을 빼았겼습니다. 수만이 여기에 묻혀 있습니다.

 

숫자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근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들은 최소한 독일 포로가 된 소련병사들이 당해야 했던 공포와 무자비한 다루기에 대한 대략적인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30만명 이상이었던 소련 포로 중 분명 절반 이상이 생명을 빼았겼습니다. 수백만의 운명, 이름, 삶의 이야기. 러시아사람, 우크라이나 사람, 키르기스탄 사람, 조지아[그루지야] 사람, 우스베키스탄 사람, 투르크메니스탄 사람 등 이들은 소련연방의 민족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서구연합군 전쟁포로의 상황은 어땠는지 살펴보면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서방연합군 포로 중 약 3%가 포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서구에서와는 달리 동구에서의 전쟁은 나치 정권이 애초부터 세계관의 전쟁, [특정 인종을] 다 죽이고 [재생할 수 없게] 뿌리는 뽑는 전쟁으로 (Vernichtungs- und Ausrottungskrieg) 계획했습니다. 이렇게 계획된 전쟁은 계획에 멈추지 않고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를 떠올려 봅시다. 수백만의 이 도시를 굶겨 죽일 목적으로 수년간 포위망으로 에워쌌습니다. 모든 점령지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잔인성을 떠올려 봅시다. 그러나 특히 러시아에서, 매우 우별나게 거기서 그랬습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리고 히틀러의 명시적인 명령아래 자행되었습니다. 독일군(Wehrmacht)은 이 명령을 기꺼이 이행했습니다. 합참의장 할더(Halder)19415월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아타를 뛰어넘에] 군인간에 우애가 있다는 입장을 버려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전에도, 후에도 동료가 아니다.” 차후 이 요구에 부합하게 포로들이 다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전 소련연방 민족들의 지울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중략]


 

독일인으로서의 우리는 먼저 독일의 죄(Schuld)와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의 연장선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독일군(Deutsche Wehrmacht)의 책임하에 사망한 수백만의 죽음이 “2차 대전에서의 가장 큰 독일 범죄의 하나”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전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도 지금에 와있는 우리는 앎니다. 독일군 역시 [전쟁 일상을 넘어서는] 보다 심각한, 그리고 [해서는 절대 안되는] 극심한 범죄를 자행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Auch die Wehrmacht hat sich schwerer und schwerster Verbrechen schuldig gemacht.).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이와 같은 소련 포로의 참담한 운명이 독일에서 전혀 [사태의 중차대한 성격에] 부합하게 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종의 기억의 그림자(in einem Erinnerungsschatten)[갇혀]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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