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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31
    재번역: "흑대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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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번역: "흑대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 3

범민주주의자들과 열혈공민(Passionate Citizens/열정적인 시민들)

 

이들 각각의 저항운동은, 이집트에서든, 그리스 또는 미주리에서든, 잠재력 면에서는 뿌리가 깊었지만 정치적인 지리멸멸과 실천적인 미숙함 때문에 반신불구가 되었다. [다행히도] 그리스와 스페인 같은 몇몇 지역들은 보다 응집력 있는 좌파 정치의 전통이 있었고, 이 전통이 젊은이들에 의해서 지금 재발견되고 재활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또는 태국과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극우 그룹들이 운동을 사수하고, 확장하고, 조정하는 능력 면에서 다른 그룹들을 전술/전략적 차원에서 능가하면서 [운동 전체가] 급격하게 우경화되는 사조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불만을 가진 세대의 더 많은 사람들이 우익의 대열로 흡수되었다.

 

홍콩은 불행히도 많은 관점에서 전자의 사례보다 후자의 사례에 가깝다. 1967년 뒤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는 대중적 기반을 대량 상실하고 경찰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해체되었다. 동시에 홍콩정부는 노동자, 학생,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경제 재구조화 프로젝트에 자진 동참하는 것을 반대급부로 하여 어는 정도 양보하는 유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홍콩 특유의  냉전 분위기, 즉 중국과의 관계상에서의 냉전은 중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개방된 뒤에도 여전히 지속됐다. 결과 도시국가 홍콩에서의 냉전은 모든 자생적인 급진 소그룹들로 하여금 „중국문제“에 관하여 [중국을 멀리하는] 입장을 취하게 강제함으로써 견실한 공산주의자 좌파가, 그게 어떤 류가 되었든, 소생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어떤 항의에 „폭력“이 동반되면, 그게 어떤 형식을 취하든, 지금까지도 어김없이 본토 중국공산당이 보낸 앞잡이의 공작으로 호도된다.

 

결과, 홍콩에서 "좌파"로 일커어지는 세력은 수십 년 동안 본토의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주의"라는 천진난만한 담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북경 천안문광장 봉기에 의해 고무됨과 동시에 이를 분쇄한 무자비함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1989년 이후 홍콩의 급진적 학생 대부분은 천안문 봉기를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주도의 운동으로 묘사한 주류 매체의 회화(繪畵)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북경에서 학생이 아닌 사람들의 폭넓은 참여에도 불구하고, 북경공인자치연합회(北京工人自治联合会)의 [자생/자율적인] 결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학생의 범죄행위보다는 노동자의 그것을 더 중대하고 다루고 장기징역형에 처하는 등 더 심각하게 처벌한 국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메시지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적인 귀에 익숙한 정치경제 체제의 자유화를 촉구함으로써 서구에 어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과 유럽에 전달된 천안문 운동의 왜곡된  이미지다. 그리고 이런 왜곡된 이미지의 영향은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게 있다면 단지 더 증폭되어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왜곡의] 즉각적인 효과는 첫째 „향항[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香港市民支援愛國民主運動聯合會)의 결성이었다. 사도화(司徒華), 마틴 리, 그리고 이척얀과 같은 인물들이 이 연합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모두 어김없이  본토 정부에 의해서 비난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다. 2년 뒤인 1991년 홍콩은 첫 번째 직접 선거를 실시했다. 향항[홍콩]민주동맹(香港民主同盟)과 자유주의적 성향인 회점(匯點/Meeting Point)당 간의 선거연합이 보다 작은 자유주의 성향의 정당들의 병합과 함께 대승을 거뒀다. 1991년 선거를 계기로 하여 "친민주파"(Pro Democracy)진영이 탄생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진영은 그 후 20년 동안 여러 차례 쪼개졌다가 다시 결합했다. 현재 이 선거 정당들이 지식인, 활동가, 그리고 NGO들의 느슨한 결합과 함께 대략 "범민주파"고 불린다.

 


범민주파의 한 날개인 활동세력의 핵심 구성원은 중국 정부의 “정치 교육” 수업에 대한 저항을 목적으로 하여 결성된 학민사조(學民思潮)와 같은 중등학교 조직들과 홍콩의 7개 주요 대학 학생연합이 발기한 향항[홍콩]전상학생연회(香港專上學生聯會/HKFS)다. 이 조직들은 현상적으로 매우 폭넓은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지도부는 대개 어떤 문제에서나 범민주파들과 한통속을 이룬다. 법률에 엄격히 따르고 예의의 경로(polite path)를 통해서 개혁을 이루고자 한다. 학생 조직들이 종종 범민주파의 다른 날개인 보다 제도화된 세력을 밀어붙혀 불확실한 상황일지라도 우선 행동하도록 할지라도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홍콩의 공손"(Hong Kong civility)에 자부심을 가지며, 이런 자부심은 심지어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할 때 반격하는 이들까지 비난할 정도로 팽배하다. 최근 홍콩의 정치적 사건의 모든 단계에서 HKFS와 학민사조와 같은 그룹들이 선두적이었지만 결국에는 모두 운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신제(New Territories) 개발에 맞선 시위부터 올해 7월 1일 연례 행진 뒤 잠깐 동안 진행된 점거에 이르기까지, 시위가 날개를 펼치고 이륙하는 데에는 학생조직들이 필수적이었지만 실제 경찰의 탄압에 직면했을 때에는 거의 모두가 날개를 접고 말았다.

 


이런 관계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즉 홍콩의 젊은 시위대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약하지만 자금은 넉넉한 "범민주파" 자유주의와 범민주파의 모호한 변종인 人民力量(인민역량/People Power)을 중심으로 해서 느슨하게 그룹화된 熱血公民(열혈공민/Passionate Citizens)이라 불리는 극우 정당과 그 추종자들 사이에서 둘로 찢어지는 상황이다. 범민주파 변종 세력들은 이주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어떤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열혈공민의 경우 홍콩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조직내에서 활동하는 걸 폭넓게 받아들인 상황이다. 그래서 이주민(특히 본토 중국인)은 떠나라고 말하는 反이주민 집회에서 열혈공민의 멤버쉽의 상징인 흑황색 티셔츠가 자주 눈에 띄는 일이 되었다.

 

Wong Yeung-tat, a leader of the right-wing Civic Passion group, with an anti-CCP banner behind.

중국공산당 반대 배너 앞에 선 우익 열혈공민 그룹 지도자 황양달(黃洋達/Wong Yeung-tat)

 


다른 곳의 민족주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열혈공민은 민족적 소속으로 점철된 언어로 계급 대립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열혈공민의 정치 분석을 보면 이들 다수가 어찌되었든 알아볼 수 있는 좌파라기보다는 론 폴과 앨릭스 존스와 같은 사람들과 더 유사하다. 이들은 홍콩의 미래의 약탈 과정에서 국제 자본가 계급의 진정한 역할은 보지 못하고 중국본토 자본가들이 취한 역할에만 주목한다. 더욱 위험한 짓은 이들이 홍콩으로 이주한, 그들보다 더 가난한 수많은 본토 중국인들을(아니면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관광객으로  그저 홍콩을 방문하는 중국인들을) 홍콩의 모든 자원을 빨아먹고 고갈시키려고 떼거지를 지어 들어온 메뚜기들이라고 호도하는 등 완전히 왜곡된 꼬리표를 붙이는 짓이다.

 

反본토중국 감정은 홍콩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아주 공공연한 형식을 취하는 인종차별주의다. 이건 일상생활의 표면에서 가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인종차별주의다. 베이징의 직간접적인 검열을 받지 않는 소수 언론 매체 중 하나인 빈과일보(蘋果日報/Apple Daily)는 2012년 홍콩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메뚜기를 묘사하는 전면광고를 실었다. 이 광고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당신은 홍콩이 본토 부모들에게 태어난 아이들을 키우는데 매 18분마다 100만 홍콩달러를 지불하기를 원하는가?” 이어서 올해 초엔 100명 이상이 „반메뚜기“ 캠페인에 합류해서 „중국으로 돌아가라“, „홍콩을 되찾자“와 같은 문구가 새겨진 피켓을 들고 북경어를 사용하는 구경꾼들을 싸잡아서 큰소리로 욕설하면서 부유한 본토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값비싼 보석매장이 많이 있는 관동도(廣東道)로 행진했다. 사회적 긴장이 악화된 매 순간마다 이 같은 일상적인 인종차별주의가 손쉽게 억눌린 자의 감정을 배설하게 해주는 밸브가 된다. 이 밸브의 작동구조는 한편으로는 시위대를 분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들어 경계를 넘어 주강 삼각주에서 저항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의 천연적인 동맹자를 찾는 걸 가로막는데 있다.

 

An anti-mainlander ad run in one of Hong Kong's biggest newspapers

(홍콩 최대 일간지의 반중국인 광고)

 

그러나 범민주파동맹의 보수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극우적인] 인민역량이나 열혈공민과 같은 그룹들 외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대안그룹이 없다. 이들은 보다 전투적인 행동에 기꺼이 나서는 몇몇 안되는 그룹들의 일부로서 제일 먼저 가시적인 대안그룹으로 떠오른다. 젊은 사람들이 범민주파의 [촛불시위와 같은 평화적인] 시위와 정당의 영합주의가 성취한게 아무것도 없는 걸 지켜보고 난 다음 단지 몇 년 만에 이들 그룹의 대중성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가장 자주 인용된 사례를 보자. 주류 민주파 정당들은 매년 6월 4일에 1989년 천안문 광장 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연례 촛불 시위를 진행한다. 열혈공민도 연례적으로 대안집회를 치르기 시작했다. 이 집회는 보다 전투적이다. 그러나 이 집회는 (그들은 ‘지역주의자’라고 부르는) 민족주의자와 인종차별주의자 슬로건으로도 점철된 집회이기도 했다. 2013년 이들의 대안 집회에는 200명만 참가했지만 올해에는 7000명이 모였다. [민주파 정당들의] 본 행사가 여전히 훨씬 크지만 공식 시위 참가자는 같은 기간 수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현재의 “우산 혁명”에서 반중국 그룹은 다시 주변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범민주파가 활동 부족으로 날개를 내리면, 극우만이 전술적인 우세를 획득하기 위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과거 경험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전술적인 우세는 점점 더 전투적인 청년세대를 한 다발 한 다발 자기편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홍콩의 정치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이 벽에 부딪혀서 와해되었다.

 

A flyer in the umbrella movement protesting "Colonialism" and "New Hong Kong People" -- i.e., mainlanders.

(우산운동 개시 전야 왕각지역에서 찍은 식민주의와 본토중국인을 반대하는 스티커. "불요식민", 불요신향항[홍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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