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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대카다피 양날개 전략

리비아위기관련 서방세계가, 특히 독일의 유엔안보리 기권을 놓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는 시각이 푸코의 디스포지티프 개념에 기대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스라타 등 카다피군에 의해서 포위된 도시, 튀니지-리비아, 이집트-리비아 국경의 난민 등의 구조문제와 관련 독일 주도하 유럽연합군(European Union Force/EUFOR) 체제가 작동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조짐은 서방세계의 위기대응 디스포지티브가 다단계적으로, 특히 기구(apparatus)면에서 잘 다듬어져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관련SWP연구원 클라우디아 마요르(Claudia Major)와의 일문일답을 요약 소개한다.

 

유엔 인도주의 조정국(UN OCHA)의 신청이 있으면 EUFOR-Libya 체제가 작동될 것임. EU의 민간위기관리기구들은 8,600만 유로에 달하는 제정지원으로 이미 튀니지, 이집트 국경에서 어떤 민간구조지원이 필요한지 탐색중임. 유럽연합군은 인도주의 조직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보호하는 작전을 수행.

 

독일은 이와 관련 리비아-유럽연합군 구성에 크게 기여하고 나아가 야전사령부를 현지 작전지휘(Führung der Operation im Felde) 맡을 수 있다고 발표한 상황. 민간구조 작전에 반카다피 공습에 적극 참여한 나토는 이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 나토와 EU의 구조 밖에서 리비아를 공습한 프랑스, 특히 영국과는 달리 독일이 중립적인 작전을 수행하기에 알맞다는 것.

 

리스본협약체결로 마련된 소위 EU의 안보방위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EUFOR의 작동체계가 리비아위기를 맞아 처음으로 검증단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 유럽연합군은 이미 항시적인 EU-Battlegroup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이 경무장 전투부대는 신속하게 이동 투입될 수 있는 장점이 있음.

 

리비아의 항구 및 공항시설보호, 운송호위, 도시의 일부 지역 통제 등의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유럽연합군의 군과 민이라는 양날개 전략 수행이 과연 전개될 지, 전개되면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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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21 김하영님의 "리비아 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단상

마르크스21 김하영님의 “리비아 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단상.

 

세세한 흐름까지 반영한 일목요연한 글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근데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정한 진보 지지자라면 서방의 군사 개입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도 리비아를 포함한 아랍 전역에서 혁명이 확대·심화할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한다.”

 

우선 서방의 군사 개입은 현실이다. 그 정당성을 논할 수야 있겠지만 반대의 문제는 아니다. 지상군 투입이라면 물론 아직 찬반이 가능하겠다.

 

두 가지 생각나는 점을 그냥 나열해 보겠다.

 

1. 서방의 개입으로 새로운 역관계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대한 분석이 없다. 이런 저런 담론을 떠나서, 즉 어떤 주권자나 주체나 집단이 하는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지에서 (벵가지, 미스라타) 등에서 어떤 역관계가 형성되었는지 궁금하다.

 

2. 서방 군사개입과 생과사의 문제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것 같다. 푸고는 <성과 진실>에서 군주의 권력은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데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서방군사의 개입이 이상하게 이것과 겹친다. 단지 좀 다르게. 벵가지에 서방은 “죽게 내버려 두거나 살게 만들기 위해서” 개입했다는 것이다. 거절할 수 없는 권력으로 등장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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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나토개입과 제국의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

리비아내전과 나토개입의 유형이 뭔가 새롭다. 알듯하면서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헤르프리드 뮌클러(Herfried Münkler)의<제국들/Imperien, Berlin, 2005>이 도움이 될 듯해서 한 부분 소개한다. <제국들>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제국의 정의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현상까지 두루 관통하는 분석을 다 소개해야 할 것이다. 능력부족으로 그러지 못하고 서술 그 자체가 자명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 몇 군데를 연재식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뮌클러는 제국이란 현상의 분석에서 지금까지의 분석이 중심부에 주목하였다고 지적하고 제국의 현재와 미래는 주변부에서 결정된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주변부를 향한 제국의mission을 다루고 (132쪽 이하) 이어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과 제국 영역의 구성(Der Barbarendiskurs und die Konstruktion des imperialen Raumes)”제하 “야만인(der Barbar)과 “야만적인 것(das Barbarische)”이 어떻게 구성되고 이런 담론이 제국영역 구성과 어떤 상호관계가 있는지 살펴본다(150쪽 이하).

 

제국이 통치영역과 주변부를 중심부엘리트주도하의 개화(Zivilisierung)의 대상으로 규정하는데 있어서 이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은 빠질 수 없는 구성요소라는 것.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의 핵심적인 기능은 “제국의 경계선(Grenze)을 비대칭적인 충돌이 야기되는 공간으로 표시하는데 있다”는 것. 제국의 경계선에선 국경에서와 달리 원칙적으로 동등한 국가들이 맞서 있지 않다는 것. 이런 담론에선 이쪽은 선하고 우수한 세계고 저쪽은 혼돈과 믿을 수 없는 세계,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세계라는 것. 이쪽은 코스모스고 저쪽은 카오스라는 것.

 

이런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에 의해서 생성되는 비대칭은 무엇보다도 이쪽은 정치의 주체로 다른 쪽은 정치의 객체로 서술되고, 그리고 오로지 이렇게 구별되어 중심부의 정치적 상상력에서 작동하는 데에서 드러난다는 것.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에 의한 주체와 객체의 구별은 그저 사실적인 중심부와 주변부의 힘의 차이, 즉 잘 조직된 군사기구와 느슨한 부족연합간의 차이를 정당성의 차이(legitimer Unterschied)로 변화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정당성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야만인/족이 제국의 개화노력에 응해야 한다는 것. 즉 탈야만인화할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 제국에 출입하려면 제국의 거주민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 안 그러면 오직 포로로서, 즉 제국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야만인/족의 위협을 보란 듯이 내놓는 포로로서 제국의 영역에 끌려들어간다는 것. 이런 현상은 로마의 포로에서 미국의 포로가 된 탈레반까지 이어진다는 것.

 

이어 뮌클러는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이 민족과 민족간의 구별로(ethnographisch), 아니면 종교적인 차원에서, 혹은 인종차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고 그 유형을 정리하고, 하지만 비대칭적인 기본구도(Grundkonstellation)는 어떤 경우든 유효하다고 함.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이 제국의 주변부에서 제국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선을 엄연하게 긋는데, 이런 선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주변부의 방대한 영역에선 대려 안과 밖의 구분이 유동적이고 그 드나들기의(Übergänge) 폭이 넓다는 것. 그래서 한 부족 혹은 클랜(Clan)의 반제국 아니면 친제국적인 입장은 항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은 불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의미론적으로(semantisch) 확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야만인/족에 대한 담론은 „가상적인 분단선(imaginäre Trennungslinie)“을 생성하여 사실 윤곽이 불투명한 제국의 경계선을 보완한다는 것. 이렇게 “공론화된 비대칭(kommunizierte Asymmetrie)”은 사실 제국의 경계지역에 찾아볼 수 없지만 중심부가 통치영역의 경계선에서도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는 시도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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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내전의 "도요다 전쟁화"?

소위 “새로운 전쟁들” (Herfried Münkler, Die neuen Kriege)은 전쟁을 독점했던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과 달리 그 전선이 불분명하다. 그리고 뮌클러에 따르면 „새로운 전쟁“은 비용이 별로 들지 않는 전쟁이며, 유럽이 근대국가로 가는 핵심적인 전쟁이었던30년 전쟁과 유사하게 „전쟁이 전쟁을 먹여 살리는 전쟁“의 양태로 전개된다.

 

나토 전투기의 폭격을 피해 중장비는 숨겨놓고 도요다 픽업을 사용하여 진격하는 카다피의 군대가 시사하는 점이 많다. 카다피군과 붕기군의 비대칭에서 나토 전투기와 카다피군의 비대칭으로 이어지는가 했더니 이젠 카다피와 봉기군이 다 도요다 픽업을 사용하는 대칭전(?)이 된 것 같다. (참조: „도요다의픽업. 힘없는자의기마병“, FAZ).

 

물론 이런 조그만 현상에서 카다피군과 봉기군간의 힘의 대칭을 이야기하고 휴전과 더불어 리비아분할, 양측에 들어설 정권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겠다. 이런 와중에 함부르크 소재GIGA 연구소의 한스페터 마테스(Hanspeter Mattes)는 리비아 직접민주제의 기초기구인450개의 지방인민회에 희망을 걸기도 하지만 그 개진이 불투명하다(참조: „아프리카연합이중립적인중재자인가?“, SZ)

 

90년대 이후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전쟁“과 지금의 상황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전쟁의 경제적 토대에 주목하는 뮌클러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새로운 전쟁“이 지속가능한 이유는 전쟁을 이끄는 Warlords들이 글로벌경제체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로 거기에 종속되어 국제경제에 필요한 자원공급에 아무런 지장을 초래하지 않고 대려 그 수익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어 „전쟁이 전쟁을 먹여 살리는 상황“이 지속되기 때문이란다.

 

리비아내전과 코티디부아르사태가 이상하게 겹친다. 하버마스가 이야기한 „세계내정(Weltinnenpolitik)“이 제자리를 확립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신식민주의가 태동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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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혁명을 사유하는 바디우 - 인민주의론, 공산주의론, 그리고 국제주의론

알랭 바디우를 전혀 모른다. 이곳 진보넷에 블로그를 만들고 헤겔을 번역한답시고 하고 있을 때 어떤 블로거가 지나가다 알랭 바디우를 운운해서 그런 사람이 있구나 했다. 그러다가 작년 6월 베를린 <인민극장/Volksbühne>에서 개최된 <공산주의이상> 에 초대된 요즘 유행하는 3인방 네그리, 지첵, 바디우를 건성으로 언급하는 몇 개 기사를 읽어본 것이 다다.

 

그리고 여기 진보넷에서 바디우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것도 영어로 번역된 글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글이다. 그래서 바디우가 이러니저러니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눈에 띄는 것 한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1889년 파리 엑스포에서 „카이로의 거리“란 것이 있었다. 한 거리를 아랍분위기가 돌게 셋팅한 유흥거리였다. 아랫배춤부터 시작해서 당다귀를 타는 바보, 아랍식 도사, 물담배 등 서커스분위기가 조성된 거리였다. (관련 스위스 예술 역사학자 Beat Wyss의 „Bilder von der Globalisierung/글로벌화의 이미지“, 2011; 그리고 독일 꼴통우파 신문 „Die Welt“지의 베아트비스와의인터부 참조)

 

이 이미지가 지금까지 서구가 오리엔트(아랍)을 사유하는 패턴이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이런 패턴이 현재 진행중인 아랍혁명으로 인해서 붕괴되고 있지 않나 한다.  

 

아랍혁명을 유럽식으로 사유하는 한 예를 들자면 [신자유주의 골수분자] 독일 외부부장관 기도 베스터벨레가 타히르광장을 방문하여 이집트혁명을 1989년 동독혁명과 비교한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교의 리트머스테스트는 동유럽을EU에 편입시켰듯이 아랍국가를 EU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터키의 EU 가입문제와 함께 리비아 등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국가들을 „철성 유럽“에 난민이 못 들어오게 자물쇠를 채우는 정책에 필요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버리고 지중해를 정말 „공동의 바다“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물론 „mare nostra“란 구호아래 지중해를 지배했던 로마,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지중해의 해적을 다스린다는 빌미로 지중해와 연안국가들을 프랑스가 지배하는 „우리 바다“의 한 부속물로 만든 프랑스, 같은 구호아래 로마를 재건한다는 무솔리니의 제국주의 등 „mare nostra“란 청사진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행중인 아랍혁명이 „mare nostra“란 구호아래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mare nostra“를 „우리의 바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공동의 바다“로 번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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