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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14
    "뼈를 깍는" 박근혜, 쿼바디스? - 2
    ou_topia
  2. 2013/08/09
    내전으로 치닫는 이집트 - 누가 우리의 '동포'인가?(15)
    ou_topia

"뼈를 깍는" 박근혜, 쿼바디스? - 2

1.

 

산책하면 늘 그러듯 짝지는 어제 역시 느닷없이 동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같은 하늘 밑에서 사는 우리들

우리는 송이 송이 나라 꽃송이

너희 고향은 어디냐 너희 고향은 어디냐

함경도다 전라도다 평안도다 경상도다

황해도다 충청도다 강원도다 경기도다

그리고는 제주도다 ”

 

가사가 맞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 다닐 때 배웠다고 하는데, 난 아무런 기억이 없다.

 

2.

 

문득 작년 말 별세한 전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를 기리는 <슈피겔>의 표지가 떠오른다. 얼굴과 손이 어우러진 인물 사진이다. 밑에서 위로 비스듬하게 올려 찍은 사진이 손을 강조하고 있다. 상황이 요구할 경우 신속하게 결정하고 냉철하게 추진한다는 'Macher'('행동으로 옮기는 자,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는 자')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겼다. 담배를 피고 있다. “의지, 사람은 이게 있어야 해. 플러스 담배“라는 슈미트의 재담이 버팀목이 되어 손 쪽으로 치우쳐진 머리로 인해 불안정해진 삼각형 구도가 안정감을 되찾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담배가 의지와 함께 이성과 실천의 조화를 이루는 버팀목의 요소?

 

공적 공간에서의 금연 논쟁이 한참 진행 중일 때 독일 정치 풍자 개그맨 디터 힐데브란트(Dieter Hildebrandt)가 흡연을 - 좀 익살스럽지만 - 호평했던 게 생각난다. 담배는 인디언의 생활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 이상은 평화라고 했다. 전시 두 족장이 만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담배만 피우는 게 평화의 첫 걸음이 되었다는 것. 이런 ''의 유보에서 평화가 싹텄다는 것.

 

데리다의 “차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게 담배? 아니면 헤겔의 “매개된 직접성”(„Vermittelte Unmittelbarkeit“)이 더 어울리나?

 

3. 박근혜 대통령의 '외로운' 결정 vs. 헬무트 슈미트의 “大위기[상황]스태프”(Grosser Krisenstab)

 

1977년 가을 헬무트 슈미트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독일 적군파가 독일 연방고용주협회장 겸 독일 연방산업협회장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하고 수감된 적군파 전원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PLO도 가세하여 독일 루프트한자 여객기 '란쯔훗'(Landshut)을 납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헬무트 슈미트는 유관 부장, 야당 총수, 그리고 유관 경제계 인사를 망라한 “대위기[상황]스태프”를 소집했다. 이렇게 '국론'을 하나로 모았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의 '외로운' 결정이 국론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박근혜 대통령의 '깡지지' 보수 언론까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다.

 

4.

 

그나마 다행이다. 오는 16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회연설”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보수 언론이 요구하는 “대국민담화”의 포퓰리즘을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민심판론 등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를 우회하는 통치를 두고 볼 때 결코 밝게 전망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퓰리즘의 본질이 “직접성”에 있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매개된 직접성”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문제를 두고 모든 야당과 소통해야 한다.

 

5.

 

자타 모두 헬무트 슈미트의 정신적 지주는 포퍼 경과 칸트라고 했지만 생중계된 국장(國葬)을 보는 중 그건 보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국장 순서와 배열을 세심하게 지시한 슈미트는 포퍼 경과 칸트를 넘어서 삶의 아픔에 시달리는 '인민의 정서'를 갖춘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가 원했던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저녁노래/Abendlied>의 마지막 연 연주에는 눈시울이 좀 뜨거워지기도 했다.

 

Und laß uns ruhig schlafen!
Und unsern kranken Nachbar auch!

(그리고 우리가 편히 잠들게 해 주세요! 우리뿐만 아니라 병든 우리 이웃까지)

 

 

''과 이성의 외곽에 있는 뭔가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뭔가 성스러운 것,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게 슈미트의 선곡이 의도했던 것일까? 국장에서는 의례 군인들이 관을 들고 나가지만 슈미트는 먼저 민간인이 관을 들고 교회 밖으로 나가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 비로서 군인이 관을 위임하도록 했다. 국가 권력에 선행되는 성스러운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6.

 

한반도 상황에서 손을 대서는 안되는 성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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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으로 치닫는 이집트 - 누가 우리의 '동포'인가?

번역:  독일 주간지 Die Zeit에 2013.8.13 실린 기사

"경건한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인가? 정치적 이슬람을 천민의 이념으로 얕잡아 보는 시각이 (Klassendünkel) 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지." (http://www.zeit.de/2013/31/politischer-islam-demokratie)

 

글쓴이: Jan Roß, Mohamed Amjahid 공동 작업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소설 “야코비안 빌딩”의 작가인 이집트 글쟁이 알라 알-아스와니(Alaa al-Aswani)는 칼럼을 통해서 무바락 정권에 대항하고 혁명을 고무했다. 그는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해결책이다.”란 나팔소리 구호로 정치논설을 끝맺는다. 그러나 7월 초, 항쟁의 물결을 뒤이어, 이집트 군부가 [민주]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대통령을 축출했을 때, 아스와니는 쿠데타의 편에 섰다. 왠 일인가? 이 질문은 정치적 이슬람에 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서구가 이집트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의 핵심으로 이끄는 질문이다.

 

아스와니에게는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무슬림형제들의 편협과 광신을 마주한 상황에서 혁명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이 작가는 현재 집권하는 군장성들의 입가에 흐르는 군침을 핥는 아첨꾼이 아니다. 그는 옛 정권의 앞잡이들이 복귀하는 일이라면, 눈을 부릅뜨는 사람이다. 근데, 민주주의가 참말로 아직 그의 해결책인가? 2012년 12월, 이집트에서 이슬람으로 각인된 헌법초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질 무렵, 그는 이미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의 판단능력을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스와니가 재잘거리길(twitter), 함께 결정하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살라피스트들과 무슬림형제들의 민주주의: 그들은 문맹자들의 표를 설탕과 식용유로 사고, 이슬람의 이름을 빙장하여 투표소로 몰고 간다.” 이렇게 자기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Unmündige-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사용한 의미로/역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일정한 정치적 효과를 야기할 거라는 걸(그리고 바로 그걸 얻고자 애쓴다는 걸) 그는 숨기지 않고 명백하게 했다. “우리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선거권에서 배제함으로써 무슬림형제들의 유일한 득표지지기반을 빼앗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그게 엘리트주의적이고 공정하지 않는 자세라는 걸 부정한다. “선거권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로 제한하는 건 절대 민주주의적이다. 전혀, 차별대우가 아니다.”

 

이집트에서 문맹인은 주민 1/4를 넘어선다. 게다가 여성의 경우 그 비율은 몇 퍼센트(포인트) 더 높다. 그들의 입을 정치적으로 봉하는 건 물론 비민주주의적인 차별대우다. 아마 적지 않는, 리버럴하고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이집트인들이, 상황이 이렇게 개진되면, 좋아하고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슬림형제들과 그들이 지향하는 모든 것이 그저 후진성과 무지의 산물이고, 그렇게 뒤떨어지고 무지한 사람들은 배려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난처한 사실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정치적인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 계급현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위에서 아래로 가해지는 혐오다. 서구에서 널리 존경받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쿠데타 후 부대통령에 임명된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무르시 정권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는 지금 한 진영에는 [잘] 교육된 중산층이 있고, 그 바깥쪽에는 이른바 이슬람주의자들과 글을 모르는 주민 다수가 있는 상황이다.” 무슬림형제들이 [선거에서] 다수를 조직해 낼 수 있는 개연성과 관련해서 엘바라데이는 다음과 같은 계산을 [그 개연성의] 설명으로 제시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아마 30%정도가 될 것이다. 나머지는, 아시다시피,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집트인의 1/3 가량이다.”  [이어서] “이집트 사람 중 교육을 받은 사람, 능력이 있는 사업가, [질적] 능력이 요구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거의 다 무르시를 반대한다.”고 한다. 단순 노동자(Unqualifizierte)들을 정말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을 그저 정치적인 화면에 띄우는 것조차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마, 터키총리 에르도안, 그가 속한 개발정의당(AKP),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지방출신의 경건한 지지자들의 출세(出世)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이스탄불의 도시-서구화된 시민들과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이제 와서, 하루아침에, 진보한 사람들의 문화적인 우위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엘리트를 구성하는 대부분들이 자국민 동포를 업신여기는 건 이집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구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카사블랑카에서 캘커타에 이르는 지역에서의 [동포]업신여김은 거의 평범한 일이다. 이 지역의 상류층은 다층적으로 [폐쇄된] 자기만의 세계에서, 유럽-미국의 메트로폴리스에 눈높이를 맞추는 세계에서 생활한다. 모로코 [상류]사회의 마담은 보다 생색내야하는 쇼핑은 파리에서 해결하고, 파키스탄의 대지주는 [물론] 런던에 아파트가 있다.

 

저들과 다수 일반서민들 간의 골은 헤아릴 수 없게 깊다. 저들이 이들의 운명을 자기 운명으로 여길 개연성은 전혀 없다. 이유는 바로 엘리트들이, 오로지 그들만이, 진보의 성과에 접근하여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통적인 특권들의 파괴자로, 모종의 거대한 평등을 이루는 힘으로 알고 있는 현대에의 참여는 [이 지역에서] 역설적으로 행복한 소수(happy few)를 평범한 대중의 위로 완벽하게 올리는 슈퍼특권이 된다. 덧붙이자면, 이 도안은 유럽역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반은 외국에서 생활하고 모국어보다는 프랑스어로 대화하기를 선호하고, 그리고 재정러시아의 사회적 문화적 폐허(사막)와 완벽하게 [괴리되어] 아무런 관계와 책임이 없이 붕 떠 있었던 19세기 러시아의 귀족을 떠 올리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말이다.]

 

소설가 아스와니 혹은 정치인 엘바라데이는 저런 류의 이기주의적인 [서구 메트로폴리스를 유회하는] Jetset에 속하지 않는다. 아스와니를 보자면 그는 전문 치과의사다. 성공적인 문예 진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사로 일하고 있다. 카이로의 평범한 시민들과의 접촉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애․인도주의자들도 쉽게 인민 업신여기기란 [병에] 감염되나보다. 문맹인 발언 때문에 비난받자 아스와니는 그게 교육상 의도된 거였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문맹자들에게 선거권을 박탈하자는 건 단지 교육을 자극하는 거라고. 그건 글을 읽고 쓰는 걸 배우는 동기를 사람들에게 주자는 거라고. 인도주의와 교만이 이런 인민교육이상에 이상야릇하게 뒤범벅되어 있다. 무슬림세계의 최대 개혁자들은 이런 이중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현대 터키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는, 자국민 동포에게 유럽 문화의 혜택들을 빠져나갈 틈이 없이 강요했을 때, 틀림없이 동포를 생각하고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전해 내려오는 문화를, 종교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억누르고 타도했던 잔인성은 또한 자기 생겨먹음에 어쩔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가 전혀 없는, 섬뜩한 존중부재를 엿보게 하는 게 분명하다. 진보, 계몽, 현대 - 이 모든 건 이러한 상황에서 극도로 모순적인, 쌍날의 개념들이 된다. 이 개념들은 해방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선택되어] 추대된 소수를 식별하는 기호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에 기여한다.

 

[아랍권의]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극적인 훼방요소로 침입한다.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어 순조롭게 작동되는 서구사회의 우리가 어떤 [특권층이 불끈 반동하게 하는] 도전(Provokation)이 민주주의 원리에 실재하는지 명백하게 의식하는 게 드물다. 정치적인 권리란 온전히 아무런 대가나 전제 없이 [거저 주고] 승인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표가 부자들의 표와 똑 같은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멍청한 사람의 표가 천재의 표보다 가치가 덜하지 않고, 실패자의 표가 성공자의 표와 똑같은 가치를 갖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민통치(Volksherrschaft)에 의해서 도전을 받는다고 느끼는 집단은 물려받은 사회적 지위나 부를 카스트로 굳힌 특권층인 전통적인 지배패거리일 뿐만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는 또한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는 중산층이, 능력이 있고 능력발휘를 원하는 사람들이, 교육에 투자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무리한 요구라고 이르는 것으로 꽉 차있다. 아랍 세계와 같이 경제가 파탄된 지역에서의 도약에 대한 모든 희망은 이런 사람들 어깨에 놓여있다. 그러나 투표함에서는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줄을 서야 한다. 보수적으로 각인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여성의 평등, 예술의 자유(튀니스에서 수차례 일어난 것처럼), 대학의 강의, 자유로운 대도시에서의 일상생활 등 리버럴한 권리들을 위협할 수 있다. 하루아침에, 진보한 사람들의 문화적 우위가 모든 가치를 상실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경견만을 일삼는 떼거리가, 반동적인 신앙목자들의 명령을 따르는 거수기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결정한다?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다! 참을 수 없다! [바로] 이게 무슬림형제들과 정치적 이슬람에 맞서는 계급-혐오의 대체적 원천이다.

 

이런 격정에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이 표출된다. 맞는 것은 문화적-이데올로기적으로 이리저리 갈라진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갖는 한계와 관련이 있다. 한 무리는 (그 수가 많지 않다 하더라도) ‘클럽 메드’[모든 게 다 포함되어 있는 지중해 연안에서의 클럽호화휴가-역자]에서와 같은 생활을 원하고, 다른 무리는 쿠란학교에서와 같이 살기 원하는 국가에서는 어떤 쪽이 다수를 차지하더라도, 정치적인 권력에서, 그게 경건하든 말든, [한쪽 이념의] 이데올로기적인 “일괄적인 관철”[메르켈이 기민/기사연합/자민당 연정을 세우고 흑․적연정에서와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을 거침없이 관철(="Durchregieren")할 수 있다는 했던 말을 인용하고 있음-역자]를 연역할 수 없다. 여기에 무르시의 무슬림형제들을 [필히 사멸로 이끄는] 대죄가 있다. 이게 [=이데올로기적인 “일괄적인 관철“이] 정치적 이슬람 전반을 맴도는 의혹이다. 정치적 이슬람이 실지로는 [말과는 달리] 신[복종]과 신앙을 강요하는 국가를 이룩하는 걸 목적한다는, 참다운 다원주의는 원하지 않는다는, 이렇게 도덕독재 설립을 강제한다는 [의혹이다.]  [나치가 그랬듯이 사회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연결하여 의도된 한 방향으로만 돌게 하는] 사회의 획일화(Gleichschaltung)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51%를 득표하고 해서도 안 되고  2/3의 득표했다할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일에 엘바라데이가 말한 “교양인”( "Gebildete")들이 맞서 반항하면, 이들에게는 그리할 모든 권리가 있다. 다수지배를 절대화하고 거기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왜곡된 민주주의에는 전체주의적인 잠재력이 꽂혀있다. 무르시를 반대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종교적 파시즘의 위협을 말했다.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Spencer Platt/Getty Images)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3년 7월 카이로, 무슬림형제들)

 

반민주주의적인 격정에서 드러나는 맞지 않는 것은 반면 반인륜적인 [정서](Unmenschlickkeit)로 향하는 경향이다. 계몽이 되어야 또는 현대의 일원이 되어야, 지능, 교육, 혹은 능력에 의해서 비로소 인정․존중을 받을 권리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로 그게 아니다. 그 권리는 어디까지나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갖는 권리다. 그리고 정치적 평등은 이 사실의 표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정치적 평등을 [‘정말 그래?’하는] 질문의 [형]장으로 끌고 가는 사람은 단순히 국가와 헌법의 문제를 놓고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티의 기반에 손을 갖다 대고 [주무르려고 하는] 것이다. 알라 알-아스와니가 문맹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비판자들은 인종[차별]주의라고 비난했다. 주관적으론 분명 부당한 비난이었다. 그가 어떤 무리를 놓고 상투적인 [말을 일삼고] 그걸 옹호하는 가증스러운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찌 그렇게 개성 있는 사람들로 애정 깊게 구상해 낼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에 대한 비난에 뭔가 어렴풋이 느껴지고 인지되는 것이 있다. “교육받지 못한 자들” 혹은 “뒤처진 자들”의 배제는, 인종[차별]주의가 그러듯이,  우리와 [속성을] 달리하는, 하위의 인종을 정의하는 일을 이미 거의 다 하고  있다. 완전한 의식을 갖춘 사람들 대 자기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Vollbewusste gegen Unmündige).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견의 차이가 아니다. 전혀, 싸움과 적대관계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인종적] 열성(Minderwertigkeit)이다. 이런 시각의 종착점은 사회 파괴다.

 

우리의 연대는 민주주의 경기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서구 외 지역 엘리트들의 인민멸시는 서구의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자국민 동포들을 산골짜기에서 살아서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아래로 내려다보는 세속적인 상류층은, 주지하다시피(ja), 우리와 신념을 같이하는 자칭 동맹자로 우리 앞에 등장하여 우리의 동조와 지원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분명 Georgetown에서 대학을 다녔을 것이고, [영어로] CNN과 인터뷰할 능력이 있고, 그들의 부인들은 몸을 가리려고 겹쳐 입은 포대기 같은 불쾌한 옷차림대신 산뜻하고 멋진 의장일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서구의 우리와 유사한데] 턱수염을 긴 몇 듣보잡이들에게 고삐를 채우려고 하는데 [서구] 우리가 [눈을 잠깐 저쪽으로 돌리는] 관용(Nachsicht)을 기대해도 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아니오. 우리의 연대는 자신에게 고삐를 채워(sich) 민주주의 경기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침해되는 경우, 그런 침해를 통해서 뒷전으로 밀리고 기만을 당한 사람들이 편에 설 겁니다. 규범침해자들은 우리의 ‘동포’가 될 수 없다. 그들의 영어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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