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변증법적 이미지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4/12/12
    땅콩리턴: 돈, 권력, 그리고 땅콩(1)
    ou_topia
  2. 2012/08/27
    발터 벤야민 - 변증법적 이미지
    ou_topia
  3. 2012/08/27
    의자놀이, 단상 6
    ou_topia

땅콩리턴: 돈, 권력, 그리고 땅콩

땅콩리턴: 돈, 권력, 그리고 땅콩


이렇게 제목은 달았지만 글이 쓰여지지 않는다. 중첩되는 여러 이미지가 한 줄로 꿰매지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 들이다.

 

1.확인 사살

 

땅콩서비스가 잘못되었다고 회항하여 사무장을 내리게 한 것, 이걸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말이 있을까?  너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전쟁터에서도 금지되어 있는 확인사살.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사상에 근거해서 자행된 확인사살, 이 이미지가 ‘땅콩회항’ 사건에 겹친다.

군복차림의 한 독일인(중앙)이 우크라이나의 미조츠에서 유대인 집단학살후 한 유대인 여성을 확인 사살하고 있다. (인용: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ekdrn111&folder=103&list_id=8584089)

 

2.포용의 몸짓

 

학교에서 배운 그림읽기(Bildinterpretation)에서 접한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른다.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30년 전쟁 중 네덜란드의 브레다성의 항복을 묘사하여 그린 <브레다성의 항복>이다. 정복한 성은 반듯이 깔아뭉개버렸던 30년 전쟁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포용과 화해의 유토피아를  그린 그림.


3.도이체 방크(Deutsche Bank/독일은행) 회장의 “땅콩” 발언


힐마 코퍼(Hilmar Kopper)가 도이체방크 회장이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슈나이더라는 건설업주가 중소건설업자들을 등쳐먹는 일이었는데, 도이체방크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약 5천만 마르크를 등쳐 먹었는데, 힐마 코퍼가 이를 두고 “peanuts”라 하고 대신 갚아주겠다고 한 것이다. 빗발치는 언론의 비판에 여유있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비꼬는 사진으로 대하는 힐마 코퍼의 여유있는 자세.

http://www.s-f.com/public/files/media/s_f_group/images/Cases/FAZ/199901_FAZ_Hilmar_Kopper.jpg

(독일 중도우파 유력일간 FAZ 광고사진: "Dahinter steckt immer ein kluger Kopf."([FAZ 일간 뒤에는 항상 영리한 두뇌가 있다." 힐마 코퍼의 "피너츠" 발언 풍자한 광고 사진. 코퍼가 미국 땅콩 농장에서 땅콩을 가득 실은 컨테이너 위에 앉아서 FAZ를 읽고 있다.)

 

4.환대(hospitality)와 공손(Zivilität, civility)

 

지긋지긋한 세상을 그래도 훈훈하게 해주는 게 있다면 아마 환대일 거다. 환대의 법이 무너진 지금에 와서는 최소한의 도덕인 공손이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말이다.
한국 광산노동자들을 끝가지 챙겼던 독일인 기숙자사감(Kurt Koblitz란 분이었는데 나중에 사민당 직선 연방하원의원이 됨)의 장례식장을 찾은 한 한국 광산노동자. 그는 혼자 쓸쓸이 앉아 있었다. 근데 장래식 내내 그 곁에 앉아 동무해 주었던 헤르베르트 베너(60/70년대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와 함께 사민당 ‘3인방’으로 불림). 이 조그만 몸짓에서 우러나오는 훈훈함이 아직도 사민당에 애정을 갖게 한다.

 


5.한국사회의 일면을 “섬광처럼”(blitzhaft, 발터 벤야민) 보여주는 변증법적 이미지로서의 “땅콩회항”

 

“인간백정의 역사”(경향신문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에 사학자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사건. “땅콩회항”이 “인간백정의 역사”의 한 현실적인(actual) 형식이라는 인식.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발터 벤야민 - 변증법적 이미지

"Man sagt, daß die dialektische Methode darum geht, der jeweiligen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ihres Gegenstandes gerecht zu werden. Aber das genügt nicht. Denn ebensosehr geht es ihr darum, der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des Interesses für ihren Gegenstand gerecht zu werden. Und diese letztere Situation liegt immer darin beschlossen, daß es selber sich präformiert in jenem Gegenstande, vor allem aber, daß es jenen Gegenstand in sich selber konkretisiert, aus seinem Sein von damals in die höhere Konkretion des Jetztseins (Wachseins!) aufgerückt fühlt. Wieso dies Jetztsein (...) an sich schon eine höhere Konkretion bedeutet – diese Frage kann die dialektische Methode freilich nicht in der Ideologie des Fortschritts sondern nur in einer, an allen Teilen diese überwindenden Geschichtsanschauung erfassen. In ihr wäre von der zunehmenden Verdichtung (Integration) der Wirklichkeit zu sprechen, in der alles Vergangene (zu seiner Zeit) einen höheren Aktualitätsgrad als im Augenblick seines Existierens erhalten kann. Wie es als höhere Aktualität sich ausprägt, das schafft das Bild als das und in dem es verstanden wird. Und diese dialektische Durchdringung und Vergegenwärtigung vergangener Zusammenhänge ist die Probe auf die Wahrheit des gegenwärtigen Handelns. Das heißt: sie bringt den Sprengstoff, der im Gewesenen liegt (…) zur Entzündung. So an das Gewesene herangehen, das heißt nicht wie bisher es auf historische sondern auf politische Art, in politischen Kategorien behandeln."


Walter Benjamin: Das Passagen-Werk, in: Rolf Tiedemann (Hg.): Walter Benjamin - Gesammelte Schriften, Band V.1, Frankfurt am Main 1991, S. 494f.
 

 

"사람들은 말하기를 변증법적 방법은 [대상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대상이 처해있는, 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방법에서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방법이 대상으로 삼는 것에 개입하는 존재가(Interesse) 처해 있는 구체적-역사적 상황을 또한 충실하게 담아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근데 둘째 상황은 개입하는 존재(Interesse)가 항상 스스로 [변증접적 방법의] 대상 안에서 자신을 미리 형성한다는데, 특히 그 대상을 자기 안에서 구체화한다는데, 그 대상이 옛날있기에서 지금있기(깨어있기!)로, 보다 높은 구체화로 한자리 더 올라온 것을 느끼는데 내포되어 있다. 어떤 이유로 이 깨어있기 (...) 자체가 이미 보다 높은 구체화를 의미하는가?  - 이 질문은 사실 변증법적 방법이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아니 오히려 오직 바로 그 진보이데올로기를 모든 부분에서 극복하는 역사관에서만 제기되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역사관에서 [비로소] 증가하는 현실의 농축(통합)이 이야기될 수 있겠는데, 이건 지나간 모든 것들이 그들이 존재했던 순간보다 더 높은 현실성수준을 취할 수 있는 현실의 농축(통합)이다. 지나간 것이 자기를 보다 높은 현실성으로 드러나게 각인함에 따라 이미지가 창조되는데, 이때 지나간 것은  바로 그 창조된 이미지로, 그 이미지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나간 연관성들의 변증법적인 삼투(滲透)와 재-현재화가 [우리가 지금 맞서고 있는] 현재 실천의 진리에 대한 판가름인 것이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삼투와 재-현재화가 지나간 것 안에 있는 폭탄에 (...) 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나간 것에 접근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지나간 것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 (historisch) 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나간 것을 정치적인 카테고리로 다룬다는 말이다." (ou_topia)

 

 

<의자놀이>란 폭탄을 만들어 놨는데, 왜 뇌관을 때리지 않고 거기다 물총질만 하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의자놀이, 단상 6

하종강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논쟁을 보면 까깝하기만 하다.

왜 <의자놀이>의 이미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지?
 
난 <의자놀이> 출간과 관련해서 공지영이 한 일이 “의자놀이”란 제목을 만들어 낸 일 외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공지영의 기여보다 더 큰 기여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념의 노동이 엿보이는 제목이다. 이게 “교양시민”이 자기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성찰”의 결과라고 해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애플사를 한 번 봐라. “i-pad"란 이름을 완전히 자기 걸로 하기 위해서 중국 모 기업에 어떤 액수를 지불했나? 조중동이 왜 이리도 조용하나? “의자놀이”란 책 제목이 가지는 파워 때문이 아닐까?

“의자놀이”란 이미지를 평하는 글은 노정태의 “공지영, '쌍용차의 눈물' 보며 <도가니>에 빠지다!” 밖에 없다.

“공지영의 <의자놀이>(휴머니스트 펴냄)는 아주 좋은 제목이다. 이 책이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를 다룬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제목이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를 놓고 빨리 앉는 사람이 살아남는 놀이'의 은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분석이다. <의자놀이> 이미지를 은유의 수준에서 처리하고 있다.

구글에서 “벤야민”을 검색해보니 35만 8천개 등록이 검색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무려 239만개의 등록이 검색된다. 근데 “변증법적 이미지 ∧ 의자놀이”는 0 이다.

<의자놀이>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변증법적 이미지”가 아닌가? 벤야민 전문가들은 많은데 왜 이리도 <의자놀이>에 대한 “변증법적 이미지” 접근이 전무하지? 물총 쏘는 것만 배웠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