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불법국가

동독체제=불법국가(Unrechtsstaat)? - 4 (구스다프 라드부르흐)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인 법" (1946년)

원제: Gesetzliches Unrecht und übergesetzliches Recht

 

[일러두기: 한글은 Gesetz와 Recht를 구별하지 않는다. 제목 번역에서는 법률과 법으로 구별하고 있다.  ‘법’의 사용범위도 ‘Recht’의 사용범위와 일치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일치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에서 그렇다. Recht의 정의에 기본적인 구별인 주관적인 권리(subjektives Recht)와 객관적인 권리(objektives Recht)의 구별을 ‘법’이란 말로는 할 수 없다. ‘주관적인 법’ 혹은 ‘객관적인 법’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Recht’를 아래서는 제목에서의 번역과는 달리 ‘[권리]법’으로 번역했다. ‘Gesetz’는 ‘법’ 대신 ‘법률’로 번역했다. ‘Satzung’은 ‘법률화’로 ‘Setzung’은 ‘성문화’로 번역했다. ‘Unrecht’는 그냥 ‘불법’으로 번역했다.]

 

 


[법]실증주의는 “법률은 법률이다”란 확신으로 독일 법계를 전횡(専橫)적이고 범죄적인 내용의 법률들(Gesetze) 앞에서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게 엄연한 사실이다. [법]실증주의가 자력으로 법률들의 유효(Geltung)를 전혀 근거지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법]실증주의는 어떤 법률의 유효는 그 법률이 자신을 관철시킬 수 있는 권력(Macht)이 있었다는 걸로 이미 증명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권력(Macht)은 잘해야 강제(Müssen)의 근거가 될 수야 있지만 절대 [자발적인] 의무 및 유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의무 및 유효는 어디까지나 오로지 법률에 내재하는 가치로 근거지워 질 수 있다. 물론 모든 실정법률은 그가 지니는 내용과 무관하게 그 자체 가치가 있다. 실정법률이 최소한 [권리]법안전성(Rechtssicherheit)을 담보하기 때문에 법률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어쨌든 더 좋다. 그러나 [권리]법안전성은 유일한 가치가 아닐 뿐만 아니라 [권리]법이 실현해야 하는 핵심적인 가치도 아니다. [권리]법안전성 곁에는 이보다 더 핵심적인 두 개의 가치, 즉 합목적성과 정의가 있다. 이 가치들의 순위를 따지자면 공익을 위한 [권리]법의 합목적성을 맨 밑에 두어야 할 것이다. [권리]법이 항상 “인민(Volk)에게 유용한” 건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어디까지나 [권리]법인 것이, [권리]법안전성을 담보하는 것이,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민에게 유용한 것이다. 모든 실정법에 이미 그 실정성상 주어지는  [권리]법안전성은 합목적성과 정의간의 기이한 중간역에 자리하고 있다. [권리]법안전성은 한편으로는 공익이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가 요구하는 것이다. [권리]법이 안전해야 한다는 요구는, 즉 오늘 여기서는 이렇게, 내일 저기서는 달리 해석되고 적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는, 또한 정의의 요구다. [권리]법안전성과 정의간, 내용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실정적인 법률과 정의롭지만 법률형식으로 주조되지 않은 [권리]법간 대립이 발생하는 경우, 그 진상을 살펴보면, 정의가 자기자신과 대립하는, 사이비 정의와 현실적인 참다운(wirklich) 정의간의 대립으로 밝혀진다. 이런 대립을 복음서는 한편으로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로마서 13장 1절] 명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사도행전 5장 29절] 명령하므로써 적나라하게(grossartig/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다. 정의와 [권리]법안전성간의 대립은 아마 이런 방향으로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실정적인, 법률화(Satzung)와 권력에 의해서 안전하게 된 [권리]법이 내용적으로 정의롭지 못하고 합목적이지 않을지라도 [정의보다] 우위라 [해야 할 것이다.] 단 실정법률과 정의간의 모순이 참을 수 없는 정도(Mass)에까지 이르러  “옳지 않은 [권리]법”으로서의 법률이 정의 앞에서 물러나야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다. 법률적인 불법(Unrecht) 사례들과 옳바르지 않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법률들’간에 이보다 더 엄밀한 선을 그을 수 없다. 반면, 이와 다른 경계선긋기는 엄밀성을 총동원하여 실행할 수 있다. 정의가 추구조차 되지 않는 곳에서는, 정의의 핵심을 이루는 평등이 실정적인 [권리[법]를 성문화(Setzung)하는데 있어 의도적으로 부정된 곳에서는, 이런 곳에서 법률은 결코 단지  “옳지 않은 [권리]법”일 뿐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권리]법속성 자체를 결여한다. 왜냐하면, [권리]법을 정의하는데 있어 – 실정적인 [권리]법도 마찬가지다 – 그 목적상 정의에 봉사하는 질서와 법률화(Satzung)란 것 외의 것으로 달리 전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동독체제=불법국가(Unrechtsstaat)? - 3 (튀링엔주 연정합의서 전문)

원문

 

"동독 시민권운동 안에서 태동하여 발생한 정당인 동맹90/녹색당과 사민당뿐만 아니라 좌파당(Die Linke)에게도 SED-독재를 그 크고 작은 모든 면에서 면대하고 그 진상을 접수하는 일은 (面對、接受真相 -Aufarbeitung) 불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 지향적이지도 않다. 관건은 내일의 민주 문화다. 사회 전반을 아우르고 사회전반이 받아들이는 面對、接受真相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독은 독재였다. 법치국가가 아니었다. 자유롭지 못한 선거들로 인하여 이미 국가 행정의 구조적이고 민주적인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권리]법(Recht)과 정의가 동독에서는 크고 작은 권력자 하나가 원하면 [바로] 끝장났기 때문에, 모든 [권리]법과 정의가 체제에 순응하지 않게 행동하는사람들에게는 사라졌기 때문에, 동독은 결론적으로 불법국가(Unrechtsstaat)였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동독체제=불법국가(Unrechtsstaat)? - 1

글의 짜임새는 건축물과 비교될 수 있다. 건축물은 꼭 지붕이 있다. 그리고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이 있다. 기둥은 지붕을 지탱할 수 있도록, 지붕은 기둥에 맞게 계산되고 설계된다. 글에도 이와 같이 기둥과 지붕이 있다.

 

근데 어찌된 일인지, 글에서는 지붕과 기둥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린아이의 글에서 그런게 아니라,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글에서 그렇다. 기둥 하나는 동쪽 끝에, 다른 하나는 서쪽 끝에 세우고, 손바닥만한 지붕을 그 위에 올린다. 그리고 보란듯이 내놓는다. 건축물이라면 건축계에서 영원히 쫒겨날 짓을 서슴없이 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임금님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레기를 먹고 사는 글쟁이들이 “임금님 옷 참 멋있다”하듯이 “훌륭한 집이네” 한다.

 

“Bundesstiftung zur Aufarbeitung der SED-Diktatur”(보통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독재 청산재단”으로 번역되는데 “Aufarbeitung”의 개념을 살펴보고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겠다.)와 우드로우 윌슨 국제센터가 공동 저술한 “Coming to Terms: Dealing with the Communist Past in United Germany”가 이런 유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여기 영어 원문, 한글 번역본, 중국어(중국 본토/대만) 번역본, 그리고 스페인어 번역본을 내려 받을 수 있다.

 
우선 원문의 들어가는 부분과 한글 번역본을 비판해 보려고 한다.
 

해당 부분 원문은 아래와 같다.

 

“During the course of the 20th century Germany experienced two different dictatorships, the twelve years of fascist Nazi Germany’s “Third Reich” between 1933 and 1945 and the 40 years of communist rule in East Germany between 1949 and 1989 (the latter preceded by Soviet military occupation of Eastern Germany and East Berlin since 1945 when German communists were guided in building up dictatorial structures).

Both periods of dictatorships had some structural elements in common while they also displayed obvious contrasts. Both dictatorships started and ended very differently, with Nazi Germany resorting to a global war of aggression resulting in millions of war dead and the genocide of European Jewry. Respective crimes committed by the two German dictatorships differed vastly in scope and geographical range.”

 

여기서 주제화된 문제는 독일 정치지형에서 매우 현실적인(aktuell) 문제다.  독일연방대통령이 지난 9월 1일 폴란드 그단스크에 있었던 2차대전 발발 기념식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서 푸틴을 히틀러와 동일시하는 연설에 이어서 최근 튀링엔주의 좌파당 주도 연정 구성의 가능성을 앞두고 (사민당 당원들의 찬반투표를 앞두고) 좌파당이 아직 동독 통일 사회당과 결별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등 동독체제와 나치체제를 “불법국가”(Unrechtsstaat)란 개념을 적용해서 동일시하는 경향이 팽배하다. 

 

이건 오래전부터 다듬어진 인식이다.

 

참조한 글에서 나치독일과 동독이 어떻게 비교되고, 또 한글로는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나치체제와 동독체제를 “two different dictatorships”라 한다.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이성인가? 아니라고 한다. 최근류(genus proximum)와 종차(differentia specifica)를 따지는 전통적인 정의 방식을 동원해서 둘 다 한통속이라고 은근슬쩍 주장한다. 최근류로는 “some structural elements in common”(공통의 몇몇 구조적 요소들)을, 종차로는 “obvious contrasts”(자명한 차이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structural elements”(구조적 요소들)의 질적 정체를 밝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some”(몇몇의)이 10개 중 하나인지 둘인지, 100개 중 둘인지 셋인지 그 양적 정체도 밝히지 않는다. 양과 질이 밝혀져야 비교가능한 게 아닌가?

 

구조적 요소를 들먹이면서 나치체제와 동독체제가 같은 속성이라고 전제한 다음, 차이는 그 속성의 현상화에 있다고 한다. “obvious contrasts”(자명한 뚜렷한 차이)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당연히 각 현상의 시작과 끝은 다르다. “obvious”한 것이다. “길에 오르는”((라)ob viam = obvious)데 있어서는 각 현상이 다른 건 자명하다.

 

나치체제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설명한다.   

 

“Nazi Germany resorting to a global war of aggression resulting in millions of war dead and the genocide of European Jewry”

“나치 독일은 수백만명의 전쟁사망자와 유럽 유대인의 인종청소로 귀결되는 지구적 침략전쟁을 일으켜”

 

그러나 동독체제의 시작과 끝은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표현은 “war dead”란 표현이다. 이 표현에는 전쟁에서 어쩔 수 없이, 불가향력적으로 발생하는 사망자란 의미가 농후하다. 이건 역사 왜곡이다. 나치의 전쟁범죄로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주로 동유럽 슬라브 민족과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디터 폴(참조: Dieter Pohl: 1939-1945 나치 시대의 핍박과 대량살상, 2003 다름슈타트/위키에서 재인용http://de.wikipedia.org/wiki/Kriegstote_des_Zweiten_Weltkrieges#cite_note-5)에 따르면 나치전쟁범죄로 학살되 민간인은 1천 3백 37만명으로 집계된다. 그리고 인명피해가 가장 많은 국가는 2천 7백만명으로 쏘련이었다 (같은 곳 참조)

 

이런 ‘차이’를 말소할 수 없었는지 필자는 아래와 같이 결론한다.

 

 “Respective crimes committed by the two German dictatorships differed vastly in scope and geographical range.”

“이 두 독일 독재체제가 자행한 범죄들은 그 규모와 [범죄현장] 지역의 크기에 있어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이런 “어마어마한 차이”(differ vastly)가 나치체제와 동독체제를 비교불가능하게 하는 게 아닌가?

 

Vast의 어원은 (라) vastus로써 (라) immanis와 거의 함께 쓰인다.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치체제의 범죄와 동독체제의 범죄 간의 차이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다. 나치체제와 동독체제를 비교하려면 그 차이를 메워주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공허하다 (vastus).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시편 103편 12절) 서로 뚝 떨어져 있다.

 

이렇게 서로 뚝 떨어져 있는 곳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데올로기 공세가 주조한 손바닥만한 지붕을 올렸다. 말이 안되는 걸 스스로 인식하면서 억지로 집을 짓는다.  

 

   
2.  공식 한글번역

 

“통일 독일에서의 과거 공 산주의자 청산문제

20세기, 독일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간 파시스트 나치(제 3제국) 독재역사와 더불어 1949년부터 1989년에 걸친 동독 공산주의 독재역사를 경험했다. (1945년 소련군의 동독과 동베를린 지역 점령이래로 동독의 독재체제가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두 독재기간은 구조적 요소간의 공통점들을 가지는 동시에 시작과 몰락에 있어 큰 차이점을 보인다. 나치 독일은 세계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였고 유럽 내 유대인 대량학살을 자행하며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이 두 독재체제로 인해 발생한 범죄들은 그 성격과 지정학적 범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