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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28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 (반쪼각난 삶)(12)
    ou_topia
  2. 2012/01/25
    포이에르바흐 테제 받아들이기 힘들다
    ou_topia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 (반쪼각난 삶)

Hälfte des Lebens

Mit gelben Birnen hänget
Und voll mit wilden Rosen
Das Land in den See,
Ihr holden Schwäne,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Ins heilignüchterne Wasser.

Weh mir, wo nehm’ ich, wenn
Es Winter ist, die Blumen, und wo
Den Sonnenschein,
Und Schatten der Erde?
Die Mauern stehn
Sprachlos und kalt, im Winde
Klirren die Fahnen.


반쪼각난 삶

누렇게 익은 배 한아름 안고  
들장미 난무하게 가득 채운체
들판은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가네
여보시오 백조님들 [날 좀] 굽어 살펴주오  
그러나 백조님들은 [뮤즈의] 키스에 만취하여
초자연의 맑은 물에
머리만 적시네.

찢어지는 아픔 안고 어디가서 구할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두런거리는] 겨울이 오면, 꽃들을 [다시 피게하는]
해의 양기를,     
그보다 땅의 음기를 어디가서 구할까?
주고받는 말소리가 사라진 벽들은  
차갑게 서있고, 지붕위로 바람만  
풍향기를 삐걱거리네.




제대로 된 번역인지 모르겠다. 이해한 만큼 번역한다면 뭘 이해했는지 먼저 제시해야겠다.

이 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출간되기 2년전인 1805년에 발간되었다. 이 시를 읽어보는 동기는 헤겔과 함께 훨더린이 뭘 추구했는지 알고 싶은데 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이 „실천“이 아니었나 한다. 헤겔이야 어찌되었던 훨더린이 말하는 실천은 „Ge-spräch“, 즉 „말 주고받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실천을 통해서 삶이 반쪽으로 남지 않고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이 시가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훨더린은 이 시에서 백조가 보여주는 (초)자연적 아름다움의 자기연관성(Selbstbezüglichkeit)에 기대지 않고 Ge-spräch를 통해서 „꽃들을 다시 피어나게 하는“ 상호관계성이란 실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의 핵심단어는 „sprachlos/주고받는 말없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면 주노변증법이 핵심이 되고. 그러면 자기의식에서 „자기/Selbst“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성을 통해서 마침내 형성되는 것이 되고 …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여기저기 다니게 된다. 근데 종종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낼“ 때가 있다. 재미있는 현상은 사랑하는 사람과 경험했던 장소를 혼자 가보면 그 장소가 썰렁하다. 남아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경험했던 것의 반쪽도 안된다.  이런 직관에 기대어 이 시를 이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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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흐 테제 받아들이기 힘들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읽어 본 사람이 한두명은 아닐 것이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자본론은 읽어 보지 않았을지라도 몇 장 안되는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틀림없이 읽어 보았을 것이다. 11번째 테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알만한 것이다. 이 정도 모르면 이제 교양없는 사람이 된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인생의 기로를 바꾼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 현장에 뛰어들게 했다는 말이 아니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노동 현장에 뛰어든 학생들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의식화교육의 자료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의식화자료로 쓰기에도 알맞다. 양이 그렇고 내용이 그렇고 특히 말의 흐름이 그렇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동참한다는 힘차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오래만에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읽어보고 내키는데로 번역해 보았다. 힘들다. 번역이 아니라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우선 이디오진크라지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아마 수많은 비판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에 기댄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참 힘든 비판이었다. 내용보다 어투가 마음을 상하게 했고 결국 관계까지 파괴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안에는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거부하는 뭔가가 있다. 두번째로는 맑스가 후에 포이에르바흐 테제에서 멀어졌다는 느낌이다. 이는 맑스가 쓴 글을 조목조목 인용하면서 주장해야겠지만 우선 맑스가 노동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영국국립도서관에 10년동안 쳐 밖혀 자본의 운동을 담아내는 개념사업을 했다는 것으로 대체해 본다.

실천이란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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