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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01
    재번역: "흑대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 4
    ou_topia

재번역: "흑대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 4

최초의 점령운동과 항만 파업

 

현재의 „점령중환“(佔領中環) 그룹은 – 공식 명칭은 “양애여화평점령중환“(讓愛與和平佔領中環) – 홍콩의 최초 점령중환운동의 존재를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점령운동처럼 홍콩의 2011년 점령운동 역시 시내 금융센터를 공략의 목표로 하여 홍콩 금융가의 심장부에 있는 HSBC 은행 빌딩 아래바닥에 천막을 치고 시위를 했다. 홍콩의 점령중환운동은 2011년에 시작한 그 어느 점령운동보다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점령운동에 속한다(2011년 10월 시작해 2012년 9월 쯤에 끝남). 그러나 홍콩의 점령운동은 다른 지역의 점령운동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고 운동의 절정기에 비로소 100명 단위의 참가자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민 소요의 새로운 시대를 열였고, 최초의 점령운동 참가자 다수는 지속적인 운동으로 현재 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신제 개발에 맞서는 운동을 조직하거나 학생파과(罷課) 조직을 지원하는 등 "우산혁명"에 불을 당겼다.

 

Hong Kong's original Occupy movement

(홍콩 최최의 점령운동)


그러나 홍콩 최초의 점령운동 역시 다수의 다른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태동하는 아나키스트의 출현과 함께 점령운동은 음모설을 주장하는 무리들, 근시안적인 활동가들, 그리고 몇몇 안되지만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리버럴한 [진보]세력이 뒤섞여 있는 혼합체였다. 홍콩의 경우, 리버럴한 [진보]세력은 [좌파적이지 않는] 범민주파의 변종에 속한다. 그들의 정치적 관점이 기본적으로는 월가점령운동에 관여한 미국식 [좌파의] 리버럴한 세력이 내걸은 “정치에서 돈을 척결하라”는 얄팍한 비평과 동선에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점령운동 주변에 있었던] 홍코의 리버럴한 [진보]세력과 [점령운동에 직접 가담한] 젊은 교수들, 학생들, 실업자들,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 등 [광범위한 배경을 갖는 사람들의] 한묶음인 최초점령자들의 지향점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런 리버럴한 [진보]세력이 최초점령운동을 [복제하게 되었다]. 이들은 최초점령운동이 퇴거된 뒤 그들이 갖고 있는 언론과의 [좋은] 관계에 기반해서 국제사회의 찬사를 유도할 줄 아는 역량을 동원하고 현상적으로(effectively) 재점령일뿐인 [양애여화평점령중환] 계획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서 중환점령운동 자체에 참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베니 타이 교수, 진건민(陳健民/찬킨만) 교수, 그리고 주요명(朱耀明/추이우밍) 목사로 구성된 [양애여화평점령중환] 대변인 3인방은 일련의 의회 심의안을 작성하고 제안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정부를 요구하는 개혁프로그램을 의회에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홍콩에서 „보통선거“라고 불린다. 이 안이 국내 이주노동자 등 주민 일부를 선거권에서 배제하는 데도 말이다. 이 3명의 지도자는 이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중환에서 대중적인 시민 불복종에 나서겠다고 위협하면서 이 새로운 운동을 „양애여화평점령중환“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는 새로운 점령운동이 “비폭력적”이며 홍콩 사람들 다수가 원하는 것에 反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이름짖기였다.

 

 

The Logo for the new "Occupy with Love and Peace"

(재판(再版) 점령운동인 "양애여화평점령중환"의 로고: 화평점중)

 

그러나 새로운 중환점령 그룹이 온라인 선거를 실시하자 (최종적으로 홍콩 인구 10명 중 단 1명이 참가함), 점령 반대세력도 역시 도시 전역에서 청원과 서명운동을 지원했다. 여론 조사 결과 다수가 재점령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베니 타이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선언하게 된다. 점령운동이 현실화되면 이른바 “실용주의적인” 시민들 중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범민주파의 프로그램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가 실패선언의 배경이었다. 이즈음 대중버스에 반포된 광고에는 유행에 민감한 젊은 홍콩인부터 나이든 기업인까지 모두 나와 중환점령 계획이 소상점의 영업과 주말 쇼핑을 망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위운동이 시민사회의 지지를 잃게 될까봐 하는 이 두려움은 홍콩 정치에서 변함없이 유지되는 불안이다. 이 불안은 대부분의 운동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숨통을 죽이게 하는 효과적인 강요를 행사한다. 이 모든 게 예의(politeness)라는 이름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다.

 


과거로 소급하지만 과거와의 단절을 야기하는 (post facto)  브랜드로서의 점령운동 복제는 또한 손쉽게 최초 점령운동의 보다 급진적인 관점을 새로운 리버럴한 플랫폼으로 덮어 은폐했다. [여기에 함유된] 중요성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뚜렷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초 점령운동은 “No Future세대”의 구성원 일부가 함께 모여 홍콩의 정치 전반을 집단적으로 비판하는 몇몇 안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범민주파도 비판 대상에 포함되었고 예의는 빌어먹을 것으로 규정되었다. 점령운동 핵심구성원의 일부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명쾌한 비판을 배포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이런 비판은 결과적으로  홍콩의 “성우“(聖牛)인 자유민주주의를 „잡는“ 비판이었다. 이것은 89년 이후 이 도시의 역사 대부분에서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환경(milieu)을 배경으로 하는 학생과 젊은이들 사이의 보다 급진적인 계열이 결국 양애여화평점령중환 운동 지도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주의 깊은 심사“(deliberations)를 멀리하고 학생파과를 발의하고 중환뿐만 아니라 금종, 망라만, 그리고  왕각으로 이어지는 긴 구간을 점거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범민주파의 원로들과 충돌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최초 점령운동이 축출된 이후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을 때 이러한 새롭게 형성된 적대적 대립이 [내부모순의 문제로 머물지 않고] 외부화되기 시작했다. 2013년 3월 대중파업이 홍콩항 규용화궤마두(葵涌貨櫃碼頭/쿠이칭구 컨테이너터미널)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이 파업은 수십년 동안 홍콩에서 볼 수 없었던 규묘가 가장 크고 장기간 진행된 노동쟁의로 이어졋다.  최초 점령운동, 이 파업, 그리고 현재의 시위들 간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하지만 모두 다 동일한 경제적 침체와 심화하는 계급의 적대적 대립에 의해서 생성된 것만은 분명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운동이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정치의식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이런 새로운 인식이 다시 차후의 운동을 지지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파업은 크레인 운전자들의 주도하에 항구 내에서 독자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홍콩노총 및 노동당과 연계되어 있는 항만노동자노조 향항마두업직공회(香港碼頭業職工會/UHKD)가 급히 끼어들었다. 이 셋 모두 범민주파 원로들이 이끄는 집단들이다. 교섭을 주도하는 노동조합 대표단들은 급히 파업 노동자들의 초기 에너지의 방향을 틀어서 파업이 종업원 전체 대다수로 확산되는 걸 차단하였다. 리자청의 주력기업인 허친슨 왬포어가 소유한 이 항구는 홍콩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핵심적이다. 이 항구가 정말 폐쇄될 경우 홍콩과 본토 양쪽 모두에 있는 가장 부유한 지역자본가들의 이윤의 흐름이 고갈되어 전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노동당은 그렇게 항구가 폐쇄될 경우 언론 - 그리고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 동원되어 反노동자 입장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파업이 개시된지 겨우 며칠이 지난 후에 파업노동자들의 항구출입을 금하는 법원의 가처분을 받아들이도록 설득시켰다.

 


이것이 의미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들이 항구 자체를 점거하는 대신 항구 외부 한쪽 보도에 천막을 치고 항구 진입로 하나의 정면에서 상징적이지 밖에 못한 봉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전세계의 언론들은“파업”에 대해 보도했지만 이런 쇼의 뒤에서 항구는 평소보다 단지 살짝 느리게 가동됐을 뿐이다. 파업이 절정을 달했을 때에도 항구는 여전히 80% 정도의 가동율을 보였다. 항구 내 노동자들 중 조직된 조합원은 소수였다. 게다가 조직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항구의] 경제적인 가동 차단을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조합원들은 소외되거나 무시됐다. 보다 젊은 지지자들은 더 많은 노동자들과 접촉하려고 했지만 역시 노동조합의 주류를 이루는 자유주의자파의 원로들에 의해서 주변화되었다.

 

노동조합은 도로변 점거로 인한 사소한 방해도 (암튼 파업기금의 주여 기부자인) 시민사회의 구미가 감당할 없을 만큼 크다고  우려하면서, 곧 천막캠프를 다 해산하고 허친슨 왬포어 본사가 있는 시내 장강집단중심(長江集團中心/쳉콩센터) 아래에 훨씬 더 작은 제 2 농성장을 차렸다. 이후 “파업노동자들“은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고  파업은 시내 빌딩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일로 축소되었다. 결국, 파업노동자들의 요구는 일부만이 해결되고 노동자 다수는 파업이 패배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매스컴은 이 파업을 전례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번 파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많은 나이든 노동자들은 1997년 반환 이전에 이 항구에서 두번의 파업이 일어난 사실을 지적했다. 당시 노동당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다수의 노조도  불법이었다. 이들 나이든 노동자들은 예전의 파업들이 실제로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 시민사회의 입맛에만 어필하게 노동자들을 밀어붙이는 노동조합이나 정당 대표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불법파업들에 순수하게 가담하고 항구의 실제 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그들 요구들의 상당부분을 쟁취했다. 이와 비교하면 최근의 파업은 암울한 패배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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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정보는 최초점령운동계열의 여러 명과 진행한 인터뷰 기반한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조직하고 파업개시 후 최초 며칠 동안 파업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