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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24
    번역: unantastbar(7)
    ou_topia
  2. 2014/01/23
    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4 - 인간의 존엄성에 손찌검(2)
    ou_topia

번역: unantastbar

- 인간의 존엄성

 

독일 기본법 1조는 인간의 존엄성은 "unantastbar" (Die Würde des Menschen ist unantastbar.)라고 규정하고 있다.


먼저 ‘규정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문제다. 누가 무엇을 어디에 근거하여 어떻게 규정하고 있단 말인가? 기본법 1조의 위상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이성이 도출한 것인지 아니면 이성이 어디선가, 즉 이성 밖에서 발견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 도출했다면 무엇으로부터? 그저 발견한 것이라면 그 절대성은 어디서? 이성과 이성의 저편에 있는 게 묘하게 얽혀있다. 이성이 어쩌다 자기 밖에서 발견한 것에 기대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unantastbar"의 이해와 번역에 앞서 오고간다.

 

어원사전은 unantastbar의 일부인 tasten의 어원을 라틴어 ‘taxare’, ‘뭔가를 가늠하면서/하기 위해서 만지다’에서 찾고 있다. 이에 따라 ‘unantastbar'는 인간의 존엄성에 뭔가 다른 기준, 잣대, 상황 등을 갖다 대어 그 크고 높이, 적용범위 등등을 가늠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라틴어에서 한 쌍을 이루는 intactus 와 integer (tangere, 독 tasten)에서 다른 뉘앙스를 도출해 볼 수도 있겠다. 다른 것에 의해서 훼손될 수 없고(불가침성), 다른 것에 의해서 불완전하게 되는 일이 없고(완전성), 다른 것과 섞여 있지 않는(순수성) 의미로 integer가 사용된다. 종교적인 경외의 대상이 이렇게 ‘integer'하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

 

어떻게 번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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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4 - 인간의 존엄성에 손찌검

강신주의 글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역겹다.

 

글의 출발점(termininus a quo)은 밝히면서 도착지(terminus ad quem)는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뱀꼬리가 사라지듯 흐지부지 어디론가 사라진다. 몰라서 그런다면 멍청한 일이고 알고도 밝히지 않는다면 사악한 짓이다.

 

강신주 글의 도착점은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이다. 그게 공권력에 의해서 혹은 공권력을 위임받은 사적 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도덕담론을 통해서 강제된 자발성으로 이루어지던 도착점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이런 도덕담론은 공권력투입에 용이한 여론 조성에 유익하다.

 

문제는 모두에게 열린 (도시)공간이며, 이런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게 인간의 기본권리인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다. 기본권리란 인간존재 그 자체, 즉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여기에 어떤 전제조건도 있을 수 없다. 그게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내적 반성력, 혹은 외적 몸가짐이라 할지라도 전제될 수 없다. 이게 현대의 사상이다. 20세기의 비극을 경험한 인류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근데 강신주는 이걸 건드리고 있다. 근대이전의 사상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가 중앙일보로 간 건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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