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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청소년 보호법, 인성교육진흥법, 그리고 … 마광수 (1)

  1. 무엇이 문제일까?

 

글쓰기도 게임이다. 축구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가 목적이다. 아니 한 팀의 선수가 되어 뛰는 게 재밌다. 근데 이런 재미를 마다하고 굳이 심판이 되어 균형을 잡아보려고 애쓰는 글쓰기도 있다. 이런 글은 재미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울을 자행하면서까지, 심판의 눈을 속일 수 있다면 마라돈나의 “신의 손”을 빌려서라도 이기려고 하는 게 경기에 임하는 자의 자세다. 져도 그냥 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광수의 글과 맛이 좋다.

 

인생도 게임이다. 가장 철저하게, 인생을 게임으로 산 사람은 아마 시이저(Caesar)일 거다. 결국, 자기이름을 카이저(: Kaiser/황제), 짜르(:Царь) 등 절대통치자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균형의 편에서 보자면 루비콘 저편에서, 게임에 임하는 선수의 편에서 보자면 루비콘 이편에서 밤을 꼬박 새면서 주사위를 만지작 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동트는 새벽, 주사위를 던지고 루비콘을 넘었다. 무엇을 걸었을까? Dignitas, 자신의 명예와 존엄이었다. 로마의 힘이 닫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재앙의 근원이 될 횡(橫斷)이 가져다 줄 결과를 빤히, 그리고 총체적으로 내다보면서, 흔들리는 마음(thymos)을 가다듬고 분노에 찬 열정(thymos)으로 계산을 버리고 미래란 배에 몸을 실었다 (플루타아크, 시이저, 32). 이렇게 균형의 편을 적으로 삼아 자신의 존엄을 관철시키고 판을 새로 짲다.

 

물론, 주사위가 문제다.

 

아타의 전사자를 한자리 수까지 파악하고 보고하기에 익숙한 시이저가 계산을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전쟁의 승산을 저울질하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를 향한 충()으로 다져진 갈리치아 전쟁의 정예군이 옆에 있었다. 균형 세력은 시이저의 행동을 공화국 이념에 대조하여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했다. 반면 시이저의 눈에는 사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상황판단(Kritik)은 자신의 행위를 이념이란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 “하나의 사실을 다른 사실과 비교하고 대질하는 것”(“Vergleichung und Konfrontierung einer Tatsache […] mit der andren Tatsache”, MEW, 2판 후기 26)이었다. 아타의 역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사위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떨어진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던진 것이다.

 

  1. 주사위

 

헤겔과 마르크스에서 답습한 게 있다면, 1만 연속 나오는 주사위가 있는가 하면 6만 연속 나오는 주사위가 있다는 걸 거다. 신이 눈을 봉하고 공평하게 떨어지도록 만든 게 아니라 그때그때의 역관계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것. 현대과학도 시금석(Maß)이 없다는 결론에 도착했다. 현실에 충실한 철학도 일찍이 이 결론에 도착했다.

 

플라톤은 법률 마지막 부분에서 (법률 12, 968a 이하) 이런저런 법들을 토론하고 난 다음 국가를 지킬 야간회의에 관한 제반 사항을 애기한다. 야간회의는 헌법재판소쯤 된다고 할까?

 

야간회의 소집 관련 법을 만들고, 이에 따라 야간회의를 구성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유인즉, 야간회의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관련 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거다. 뱀이 자기 꼬리를 먹어가는 식이다. 요새 말로 하면 자기준거적(自己準據的: selbstreferentiell)이기 때문이랄까? 의사소통행위론이 해결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제시하는 문제와도 유사하다. 야간회의의 소재적 규정,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갖춰야 야간회의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법률은 [주권 행사를 하는] 회의로서의(κυρίους) 야간회의의 몫이라는 것.

 

결국 가르침/배움의 문제로 회부되는데, 야간회의 구성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서로 동지가 되어 머리를 맞대는 식으로”(μετὰ συνουσίας), 그것도 단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번 반복해서”(πολλῆς) – 장모음 이 주는 느낌으로는 끊임없이 –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모임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야간회의 준비모임의 형식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나서 거기서 애기되어야 할 소재적 사항을 세가지로 구분한다. 적격자 명부작성, [인성]교육 내용, 그리고 그 시작시기 및 기간을 규정하는 것.

 

이 세가지가 다 어렵다. 적격자 명부작성과 관련해서는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교육내용의 규정과 관련해서는 그걸 스스로 찾아 정하든 아니면 그걸 찾은 사람을 제자가 되어 그러든 다 “쉽지 않다”고 하고, 교육실행 관련 규정, 즉 시간규정과 관련해서는 그걸 명시적인 법률로 제정하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한다.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그 내용에 관한 지(ἐπιστήμην)가 어렴풋이나마 그 마음 안에 생성되어야만 비로서 적시(καιρὸν)에 배우고 있는지 안 그런지 알 수 있다는 것.

 

적격자 명부작성이 어렵다는 건 명시적으로 애기되진 않지만, 매우 어려울 것 같다. 감독관 적격자의 선출은 체질(φύσιν)에 따라 행해지는데 (πρὸς τὴν τῆς φυλακῆς φύσιν) 나이, 배움과 가르침 영역에서의 잠재력, 그리고 “τρόπων ἤθεσιν καὶ ἔθεσιν”이 그 체질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다. 원문 인용 부분의 번역이 어렵다. 트로포스의 영역에서의 애토스와 에토스를 참작해서 선출해야 한다는 말. 근데, 셋 다 성향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셋 낱말이 갖는 기본의미에 입각하여 번역을 시도해 본다. 트로포스는 탈구성이론이 참조한 trope의 어원으로서 ‘전환’이 그 기본의미다. 윤리의 어원인 애토스는 , 목장, 일상거주지가 그 기본의미다. “익숙한, 습관적”이란 의미의 에토스는 혼자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연대하는, 동지가 되는”이란 의미가 있다. 라틴어로는 연대(solidarity)의 어원인 sodalis로 번역된다. 이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한다. 목자가 목장에서 양과 더불어 살면서 [위기시 마다] 나아가야 할 길을, 전환의 길을 체험적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시할 줄 하는 능력과 유사한 능력을 참작하여.

 

야간회의 관련 법제정의 문제를 이렇게 전개해 놓고 플라톤은 이런 아포리 상황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지는 않지만 (ἀπόρρητα), 최소한 미리 말할 수 없는 금기사항(ἀπρόρρητα)이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지?”하고 묻자 주사위도 던지는데 한번 해보자고라고 말하고 끝맺는다.

 

 

3. 인성교육 vs 자유, 분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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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가우크 취임사 (이어서 2)

그리고 우리는 이런 공통성을 자유, 평화, 그리고 연대의 틀 안에서 더불어 살려고 하는, 유럽 안에 있는, 앞의 의미로서의 우리나라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무지와 잘못 이해한 [정치적] 올바름에 눈이 어두워 현실적인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그릇된 길로 들어 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미 연방대통령 요하네스 라우가 12년 전 베를린 연설에서 인상 깊게 그리고 명료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우의 지적을 참작하면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앞에서 말했듯이 불안, 원망(르상티망), 그리고 부정적인 투사라는(negative Projektion) 길잡이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손님/이방인을] 환대하는, 열린 사회를 위해서 연방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는 재임시 끈끈하고 탄탄한 자극을 주셨습니다. 연방대통령 불프님, 이런, 귀하의 마음이 밀접해 있는 것이 저의 마음에도 와 닫아 지속적으로 놓여 있게 될 것입니다. 귀빈 여러분, 우리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어디서 왔든지, 뭘 믿든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와 무관하게 똑 같은 위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성공한 사회융화의 대가로서 위엄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융화 거부에 대한 제재로서 위엄을 취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헌법은 우리의 인간됨과 함께 우리에게 타자 안에서  형제자매로의 우리를 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타고 난 참여와 권리를 갖는 형제자매로서 말입니다.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역사의 파격적인 진동이 지난 후 특히 유럽에 있는 우리 앞에 비좁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참다운 학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인용하겠습니다. „타자와 함께 산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로서 사는 것이다.“(„Mit dem anderen leben, als der andere des anderen leben.“). 그는 이런 맥락에서 유럽의 윤리적, 정치적 과제를 보았습니다. 이런 유럽을 향한 긍정도 이제 보존해야 합니다. 바로 위시시에 민족국가 차원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유별나게 두드려집니다. 유럽의 함께하기는 재차 확인하건데 연대란 삶의 숨결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위기시에 우리는 더 많은 유럽을 감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로 독일인 다수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이런 유럽적 사유에 다시, 그리고 계속해서 미래를 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확인합니다.  유럽은 우리 세대에겐  [다양한] 서양의 전통, 고대의 유산, 공통의 법질서, 기독교와 유태교적 유산 위에 세워질 미래의 약속이었습니다. 저의 손자손녀들에게는 유럽이 이미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와 기회와 열린사회의 걱정으로 [얼룩진] 가시화된 생활현실 입니다. 이런 생활현실이 저의 손자손녀들에게만 놀라운 득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우리 아이들과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라고 하기를 바라는 이 나라가 어떻게 더 모습을 갖춰야 할까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그리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그룹이익과 공동체[안녕]이익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데 유일하게 적합한 체제 입니다. 이 체제의 특성은 완벽성이 아니라 배우는 시스템이란데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정당과 다양한 민주적인 기구 옆에 우리 민주주의의 제2의 축이 존재합니다. 능동적인 시민사회 입니다. 시민발안, [특정 사안에 대한] 즉석 행동(Ad-hoc-Bewegungen), 디지털 네트워크공동체의 일부 또한 그들의 앙가주망 뿐만 아니라 대항으로 역시 의회민주주의와 그 부족함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하나 더 첨부하자면,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달리 우리나라는 광신자와 테러리스트들의 몹쓸 정신을(Ungeist) 물리치는 민주주의자들이 넉넉 합니다. 이들 모두, 서로 다른 정치적 종교적 기반에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앗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라고 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충성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충성하는 이유는 이 나라가 완벽하기 그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나라를 아직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우리 내 극우들에게 엄연명백하게 말합니다: 너희들의 증오가 우리를 고무한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우리의 불안을 선물로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과거로 떨어질 것이고 우리 민주주의 살 것이다.

다른 정치적 성향의 급진주의자들도 똑 같은 우리의 결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라는 겉옷을 두르고 광신주의와 테러를 우리나라 안으로 가져오고, 유럽 계몽의 뒤로 떨어지는 자들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말합니다: 민족들은 자유를 향해서 행군하고 있다. 너희들은 어쩌면 이 행군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궁극적으로 그 행군을 가로막지 못 할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적인 기구에 대한 시민의 거리감이 제게 걱정을 초래합니다. 낮은 선거참여율, 또 정치적 앙가주망에 대한,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폄하 혹은 심지어 경멸이 그리 합니다.  사적 공간에서 종종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뭐라고, 네 지역단체 회의에 참석하러 간다고?  내가 제대로 들었나, 노조 활동한다고? 그럼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활동을 쿨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 활동들이 없었다면 대체 우리 사회가 어디에 있을까라고. 우리 모두 이런 통치자와 피통지자 간의 거리로 얻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양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 입니다: 점점 더 벌어지는 거리를 어쩔 수 없다고 하지 말아라. 이 말은 정치 행위자에게 우선 이런 뜻입니다: 열어놓고 명백하게 말하라. 그럼 상실한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피통치자 시민에게는 이런 걸 감당하라는 말 입니다: 소비자만 되지 말아라.  너희들은시민이다. 건설하는, 함께 건설하는 사람이란 말 입니다. 참여가 가능한 사람이 까닭 없이 참여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 현존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큰 가능성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즉  책임을 삶 속에서 사는 (Verantwortung leben)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감히 선물 하나를 부탁하겠습니다. 신뢰입니다. 최종적으로 제 인격을 신뢰해 달라고 부탁 드립니다. 그 전에 우리 나라에서 책임을 떠맡고 있는 사람들을 신뢰해 달라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시 통일되고 건장하게 자란 이 나라의 주민들을 신뢰해 달라고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그 전에 다시 여러분 모든에게 과감하게 그리고 끊임 없이 자신의 [힘을] 신뢰하는 것에 굳건히 하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간디의 말 한 마디에 따르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진보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이건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한 나라에게도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후손과 후손에게 돈을 물려줄지 혹을 재산을 물려줄지 모릅니다. 그리나 불안을 따르지 않고 용기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꿈꾸지만 않았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신과 사람들에게 감사할 바입니다. 이런 유산은 우리 후손들이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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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가우크 취임사 (이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로 각인되고 그 때문에 망한 나라의 총리가 된 콘라드 아데나우어가 미래지향적인 유럽통합의 창설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먼 훗날1989년, 우리 기억자산이 된 다음 보물과 함께 감사하고 기뻐할 일입니다. 그때 동독인들은 평화로운 혁명, 평화로운 자유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권을 행사하는] 인민이(das Volk) 되었고 한 민족이(ein Volk)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는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 자신했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어나 우리가 [주권을 행사하는] 인민이다라고 말할 때 비로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고 전할 수 있을 것이고 장벽이 무너질 것입니다.

또한 당시 완전히 무혈적인 경로를 통해서 수십년동안 지속되었던 냉전시대의 동서대립의 [불을] 꺼졌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장한 전쟁위험이 굴복되고 제거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서 뜻하는 바는 제가 단지 그늘진 면만, 잘못과 좌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저 부분, 즉 자유에 입각한 정치문화의 신축, 삶 속에서 재현된 책임, 우리 민족의 평화능력과 연대를 포괄하는 부분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기억문화에서의 페러다임교체가 아닙니다. 페러다임보완입니다. 이런 보안은 반드시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날에 누차 달성하였듯이, 현시에서 우리의 도전을 요구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과제를 최선을 다하여, 곧바로 이상적이진 않을지라도, 해결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기억문화는 미래에 있어서도 우리의 용기를 크게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럼 이 나라가, 우리 아이들과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라고 할 이 나라가 지금 어떤 모습이어야 할 까요? 이 나라가 사회정의, 참여, 그리고 승진기회와 연관되어 있을 때 우리나라가 될 것입니다.

거기로 향하는 길은 어렴풋한 가부장적인 구제정책이 아니라, 장래에 필요한 것을 대비하고 자력을 심어주는 복지국가입니다. 우리는 기회균등이 없어서 어린이들이 자기소질을 펼치지 못하는 상황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힘써봤자 자기들에게는 돌아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없고, 승진의 길은,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애쓴 들, 막혀있다는 인상을 받는 상황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혹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우리사회의 일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 상황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자유는 정의의 필수부가결한 조건 그 하나 입니다. 왜내하면, 정의가, 사회정의가 의미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에 다가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가부장적으로 지시될 수 없고, 오로지 심도 있는 민주적인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정의를 둘러싼 애씀이 자유를 보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국가가 사회에서의 정의로운 질서를 신념으로 하면서 그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둘을 [하나로] 묶는 나라여야 합니다. 정의의 조건으로서의 자유와 자유와 자기실현을 체험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정의 말입니다. 그 다음 바로 요구되는 것은 여기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서 자기 집을 찾고 살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독어와 기독교 전통 곁을 이슬람과 같은 [다양한] 종교가 나란히 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른 언어, 다른 전통과 문화도 있고 국가가, 점차 사라지는, 자국민의 민족적인 소속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의 정치적 윤리적 가치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으로 정의되는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생성된 운명공동체가 배타적으로 공동체체제를 규정하는 국가가 아니라 점점 더 차이를 빗는 것들의 공통을 향한 열망으로 규정되는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즉 이런 의미로서의 유럽 안에서의 우리 국가입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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