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지식인의 말하기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5/05/02
    번역: 최소한의 도덕 65.(1)
    ou_topia
  2. 2014/02/25
    я́ма(구덩이) 와 моги́ла(무덤) 간의 차이 - 지식인의 말하기
    ou_topia

번역: 최소한의 도덕 65.

수염이 열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 노동자 특유의 말투들과(Dialekte) 지식인의 말하기를(Schriftsprache) 갈라 서로 맞서게 하는 건 반동적이다. 한가로움은 – 그게 비록 교만과 방약무인으로 물든 한가로움일지라도 – 상류층의 말하기(Rede)에 어느 정도의 자주성과 자제력을 부여한다. 그 때문에 지식인의 말하기는 자기소속의 사회영역인 상류층과 대립하게 된다. 지배자들에게 명령하기를 원하는 지식인의 말하기는 바로 그런 말하기를 [비지배자에 대한] 명령으로 오용하는 지배들에게 반항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한 복무를 철회한다. 반면 억압된 자들의 언어는 오로지 지배의 자국으로만 얼룩져 있고, 이런 지배에 의해서 아무런 뒤끝없이 감히 지식인의 말하기를 하는 자유인 모두에게 훼손되지 않고 자율적인 말이 약속하는 올바름(Gerechtigkeit/정의)마저 박탈 당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배고픔이 받아 쓰게 한 언어다. 가난한 자는 말들을(Worte) 씹고 또 씹어 공복을 채운다. 그는 말들의 객관적 정신에서 사회가 거부하는 영양가 있는(stark) 양식을 기대한다. 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보태어 입에 가득 담아 (den Mund voll nehmen)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언어에 복수 한다. 그는 지배자들이 사랑하지 못하도록 한 언어의 몸을 욕보이면서 자신에게 가해진 치욕을 무력한 힘으로 되돌린다. 재치있는 즉흥적인 답변과 타고난 기질로 요약될 수 있는 베를린 북부의 [노동자 거주지 베딩의] 사투리나 런던 사투리의 정수라 할지라도 절망스런 상황들을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흐름을 정당화하는 한 병들어 있는 건 마찬가지다. 문어체가 계급간의 소외를 성문화한다고 해서 이걸 구어체로의 퇴행으로 철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더없이 철저한 언어의 객관성의 귀결로 철회될 수 있다. 글쓰기를(Schrift) 자신의 내부로 끌어안는 말하기가(Sprechen) 비로소 인간의 주고받는 말하기(Rede)를 그게 이미 인간적이다란 거지거짓말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원문:

Kohldampf. - Die Dialekte der Arbeite r gegen die Schriftsprache ausspielen ist reaktionär. Muße, sogar Hochmut und Arroganz hat der Rede der Oberschicht etwas von Unabhängigkeit und Selbstdisziplin verliehen. Dadurch wird sie in Gegensatz zu ihrem eigenen sozialen Bereich gebracht. Sie wendet sich wider die Herren, welche sie zum Befehl mißbrauchen, indem sie ihnen befehlen will, und kündigt ihren Interessen den Dienst. In der Sprache der Unterworfenen aber hat einzig Herrschaft ihren Ausdruck hinterlassen und sie noch der Gerechtigkeit beraubt, die das unverstümmelte, autonome Wort all denen verheißt, die frei genug sind, ohneRancune es zu sagen. Die proletarische Sprache ist vom Hunger diktiert. Der Arme kaut die Worte, um an ihnen sich sattzuessen. Von ihrem objektiven Geist erwartet er die kräftige Nahrung, welche die Gesellschaft ihm verweigert; er nimmt den Mund voll, der nichts zu beißen hat. So rächt er sich an der Sprache. Er schändet den Sprachleib, den sie ihn nicht lieben lassen, und wiederholt mit ohnmächtiger Stärke die Schande, die ihm selber angetan ward. Selbst das Beste der Dialekte des Berliner Nordens oder der Cockneys, Schlagfertigkeit und Mutterwitz, krankt noch daran, daß es, um verzweifelte Situationen ohne Verzweiflung überstehen zu können, mit dem Feind zugleich auch sich selbst verlacht und so dem Weltlauf rechtgibt. Wenn die
Schriftsprache die Entfremdung der Klassen kodifiziert, dann läßt diese nicht durch Regression auf die gesprochene sich widerrufen, sondern nur in der Konsequenz der strengsten sprachlichen Objektivität. Erst das Sprechen, das die Schrift in sich aufhebt, befreit die menschliche Rede von der Lüge, sie sei schon menschlich.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я́ма(구덩이) 와 моги́ла(무덤) 간의 차이 - 지식인의 말하기

베를린에 오면 또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유럽에서 살다가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잊지 말라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유럽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이라고 번역한 적이 있는데 뭔가 아니다)이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반드시 지하 전시장을 들려야 한다. 이 ‘걸림돌’이 이야기하는 게 뭔지 알려면.

 

지하 전시장의 핵심어는 유대인 전통에 중요한 "기억하라"(זכור/자코르)다. 만행의 흔적을 다 불태워버린(홀로코스트) 나치에 대항하는 "기억하라"다.

 

거기에 기억을 위한 걸림돌이 되는 사료(史料) 중 마음을 짓누르는 사료가 하나 있다. 12살의 소녀가 죽음을 몇 분 앞두고 급히 아빠에게 쓴 몇 줄이다. 폴란드에서 살았던 유디트 비쉬니야쯔카야(Judith Wischnjatskaja)의 마지막 흔적이다.


나치가 얼마나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지 알 수 없다. 6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 대부분이 집단수용소에서 가스와 학살노동으로 살인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200만 명 이상은 허허벌판에서 총살되었다. [독일제국군은 반인도적인 범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200만 명을 총살하는 것이 어떻게 제국군대의 도움 없이 가능하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함부르크사회연구소가 마련한 제국군대전시회(Wehrmachtausstellung)가 보여주었다.]  총살벌판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매장될 구덩이를 파야만 했었고 발가벗은 채 총살을 기다려야 했다. 구덩이로 떨어져 진 사람들은 확인 사살되었다.

 


줄을 지어 총살을 기다려야 했다. 유디트는 이렇게 자신의 총살을 앞두고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종이를 땅에 흘렸다. 소련 적군(赤軍)의 뒤를 따르면서 다시 해방된 지역에서 나치 만행의 흔적을 찾아내고 기록하여 ‘검은 책’을 발간하려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유태인반파쇼위원회 소속 사람들이었다.

 

이 중 한 장교가 유디트가 흘린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폴란드어로 쓰인 편지를 러시아로 번역하여 타이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이핑한 장교는 유디트가 사용한 ‘구덩이’를 그어버리고 ‘무덤’으로 고친다. 왜 그랬을까? ‘구덩이’가 유디트의 존엄성에 맞지 않아서? ‘무덤’으로 고침으로서 유디트의 존엄성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지식인이 취해야 하는 자세는? 입만 빌려주면 될까?

 

"구덩이"를 "무덤"으로 고치는 행위 마음가짐에서 "유디트 되기“를 거부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탐지된다. "유디트가 되어야"하는 게 아닐까?   

 

질 들뢰즈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이 찢어진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