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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Zeit Online , © Sebastian Kahnert/ dpa
난민 사태와 함께 재부상하는 드레스덴 페기다 데모 (어제 약 만명으로 추산) .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친페기다, 친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 작센주에서 13% 지지율 확보. 사민당 수준.
메르켈 사진에 오스발트 스팽글러의 "서양의 몰락"을 연상시키는 문구 "Der Untergang"(몰락). 그 옆으로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체코에서는 국민의 대표가 통치하는데 독일에서는?" "체제교체외 대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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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지성은 하늘을 찌르는데 기억력은 붕어의 수준으로 떨어졌나? 기술적 지성과 기억력은 반비례 관계?
금융위기, 즉 은행의 연금술 = 금융파생상품이 본모습을 들어내 쓰레기가 되었을 때 수십억을 날려버린 투자은행가, 즉 사기꾼 닉 리슨, 크웨쿠 아도볼리 등이 회자되었다.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으로 폭스바겐 시가 증발이 300억 유로를 향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아도볼리의 23억 달러는 peanut.
폭스바겐 CEO 빈터코른(Winterkorn)은 조작 배경을 “몇 안되는 소수”의 행위라 규정하고, 문제의 실상을 건전한 ‘몸통’에 폭스바겐답지 않은 나쁜 ‘깃털’로 축소하고 있다.
금융위기가 ‘몇 안되는 소수’의 비윤리적 행위의 결과였을까?
'소수의' 기술적 지성이 투자 은행가들처럼 ‘Masters of The Universe’란 착각에 빠지지 않았나?
이런 심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사회적 진보’의 선두를 기술적 지성이 점령하도록 방치한 결과가 아닐까?
자동차 광고를 보라. ‘지속가능한’, ‘깨끗한 기술’ (clean technology), ‘Blue Motion’(폭스바겐) 등 사회적 지성의 주조한 개념들을 남용하고 있다.
‘저건 아니다’란 엄격한 부정으로 ‘진보’보단 일단 ‘멈춤’을 요구하는 비판이 사라진 결과인가?
BMW 전기자동차 선전에, 알리바이형 선전에 앞장서는 녹생당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피셔가 상징적이다.
댓글 설명용 추가 자료
국제청정교통위원회(ICCT)이 조사한 결과에 근거하여 캘리포니아대기국(CARB)이 2015년 9.18 폭스바겐에 보낸 편지 (출처: Anne Will 2015.9.23 화면 캡처)
폭스바겐 CEO 사퇴를 발표하는 후버(중간-노동대표), 왼쪽으로 볼프강 포르쉐(자본대표), 오른쪽으로 니더작센주 총리 바일(W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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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출처: cicero - 독일 우파 지식인 잡지)
영 The Spectator, 메르켈의 난민포용 정책을 뱃사람을 하아프로 현옥하여 암초에 부딪히게 하는 로레와 비교.
"Merkel's tragic mistake. Her siren call puts refugee's lives at risk."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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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10 연방이주난민청 베를린-스판다우 지부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와 연방이주난민청장의 엇갈리는 모습
(출처: RBB)
난민의 환호를 받고 활짝 핀 메르켈
(2015.9.10 ARD Tagesthemen 화면 캡쳐)
구석에서 줄담배 피는 연방이주난민청장 만프레드 슈미트. 오늘 퇴임.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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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ou_topia님의 [독일 난민 사태: 메르켈의 비전] 에 관련된 글.
2015/9/15 오스트리아 총리 파이만과 총리실에서 기자회견하는 메르켈
시리아 난민 수용 결정에 관한 비판에 관하여
"Wenn wir jetzt noch anfangen müssen, uns dafür zu entschuldigen, dass wir in Notsituationen ein freundliches Gesicht zeigen, dann ist das nicht mein Land. "
"우리는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친절한/환대의 얼굴을 보여 준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금 엄청 얻어 맞고 있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 우리가 [자진해서] 잘못했다고까지 해야 한다면, 그건 내 나라가 아니다."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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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low님의 [맑스는 자본을 모른다] 에 관련된 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없었더라면 유럽의 과학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아마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플라톤, 정치가/폴리티코스, 266e)이 난무했을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털을 다 뽑은 닭 한마리를 갔다 놓고 “ecce homo!”했을 때 플라톤의 낯은 뜨거웠을 거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거다.
디오게네스의 해학으로 유럽의 사유는 다행히도 목전에 있는 것을 찍어 올려 보여주는 허섭스레기 학문의 길을 걷지 않게 되었다. 서막에서 넘 챙피를 당했기 때문에. 그러나 불행히도 그게 근절되지는 않았다.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그런 챙피주기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도르노의 글엔 ‘허섭스레기’(Abhub, 목전에 있는 것을 들어 올린 것)에 대한 한숨이 곳곳에 서려 있다.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 “이성을 갖는 생명체” 혹은 “공동체(polis)를 이루고 사는 생명체”로 대체되었다.
인간에 대한 사유가 사물화(Verdinglichung)의 길에서 벗어났다. 인간이 관계와 실천의 범주가 되었다. 이성 혹은 합리성이 인간 내재적 성질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사물 간의 관계와 실천이 존재하는 영역의 문제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소재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인간과 영장류의 결정적인 차이는 사회성에 있다고 한다. 양적 차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침팬지와 어린아이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 인식에서는 심지어 침팬지가 앞선다고 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침팬지는 타인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 숨겨놓은 맛있는 것을 찾는 중 ‘저기 있어’하는 손가락질에 어린아이는 반응하지만 침팬지는 그렇지 않는/못한다는 것 (참조: http://www.3sat.de/page/?source=/scobel/147999/index.html). 이런 능력을 두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 할 수 있고 지시와 맥락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성이 존재하는 관계와 실천의 영역에 대한 사유의 대열이 유럽 정신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야말로 그 사유의 at its best고.
근데 마르크스가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 플라톤이라는 주장에 말문이 콱 막힌다.
“맑스는 자본을 물질적 재화라고 보았다.”
자본을 사회적 관계에서 분석하고 서술했던 마르크스가 ‘자본은 이것이다’라고 찍어 올려 보여 주었단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에 대한 더 자세한 상술은 이곳 EM 님 참조).
‘안 그랬다’라고 서부 영화의 카우보이가 권총을 꺼내어 쏘듯이 반박할 수 있겠지만, 그건 물론 마르크스의 방법이 아니다.
관계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명제의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건 내 명제와 상관없어’하지 않고 오히려 꾸정물처럼 탁한 현실에 뛰에 들어가 자기상실을 마다하지 않는다 (정신현상학 서설). 전체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온전히 아는 것(고린도 전서 13장)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의 ‘마이너스 이자’ 정책에(참조: 유럽중앙은행 집행이사 베노와 쾨레의 2014.9.9 연설,https://www.ecb.europa.eu/press/key/date/2014/html/sp140909.en.html) ‘그건 게젤이 아니야’하는 것과 같은 순수성 지키기는 마르크스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자본의 사물화, 즉 자본을 사물(Ding)로 보는 걸 마르크스는 자본운동의 일정한 단계의 현상으로 주제화한다. ‘자본의 사물화 없어’ 혹은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하지 않는다. 자본론 3권 24장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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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관문에는 이런 글이 없었다.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을
너의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올릴 터이니.”(에머 래저러스, 새로운 거장 [자유의 여신상])
독일 관문에는 되려 이런 글이 있었다.
“우리 언어는 하나요, 우리 말은 하나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끼리 살자.” (창세기 11장)
바벨 탑은 무너졌고, 독일이 아닌 것은 싹 쓸어버린 독일은 망했다.(참조: Fritz Stern, Verspielte Größe. Essays zur deutschen Geschichte.)
망해버린 후 독일은 수백만의 난민을 받아 들이고 이어서 “손님노동자”(Gastarbeiter)를 받아들였다. 통일과 함께 다른 ‘말’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독일에 더 많이 살게 되었다.
중동 난민의 대열이 독일로 향하고 있다.
이민 증가로 “독일은 자괴(自壞)하고 있”(“Deutschland schafft sich ab” 사민당 소속(!) 전베를린재무부장관 자라찐이 쓴 책 이름)는 게 아니라 “독일은 [바벨 적인] 자신을 파괴하고 [거듭나고] 있다.”(“Deutschland schafft sich ab”, FAZ, 2015.9.7 http://www.faz.net/aktuell/politik/fluechtlingskrise/fluechtlingskrise-deutschland-schafft-sich-ab-kommentar-13787352.html?printPagedArticle=true#pageIndex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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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 그리고 구조(救助)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걸 결국 꾸며낼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멀리서 아른거렸다. 마지막으로 눈뜨는, 점점 더 커지는 힘이 향하는,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구호는 환상, 환각일 수 있었다. 구조는, 관객이 거주하는 이 세계와 동 떨어진, 저 미래에 있었다. (페터 바이스, 저항의 미학)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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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인디펜던트 http://www.independent.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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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의 팔에 나치가 유대인에게 그리 한 것처럼 숫자를 새기고 있다. 표시된 자, 즉 경계에 있는 자, 경계 대상자로 구별되고 있다.
(난민의 손에 숫자를 적는 체코 여경) FAZ,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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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다(Pegida)는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의 두자어."자아중심적 동일성을 전제로 한 나르시시즘적 전체론(totalité)에
대항해 ‘초월’의 개념을 제시한 레비나스의 구상과 유사하다. 합리성으로 위장한 자기중심적인 전체론적 사고방식이 서양의 근대적 발상에서 기원한 사회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백승무, 대순환의 유토피아, 러시아연구 제23권 제2호,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91556/1/2_%EB%B0%B1%EC%8A%B9%EB%AC%B4_29-56.pdf)
기독교의 정체성이 '초월'에 있을까?
ᅟᅟ최근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21장)을 한독 대조 성경으로 읽으면서 3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란 부분의 루터 번역이 한글 번역과 좀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루터 "er selbst, Gott mit ihnen, wird ihr Gott sein."
원문 "αυτοσ ο θεοσ μετ αυτων εσται αυτων θεοσ."에 가장 가까운 번역인 것 같다. 한글 번역뿐만 아니라 킹 제임스 버전도 홀로 계시는 하나님이 (autos) 후차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met auton)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반면 루터는 met auton을 autos의 동격으로 번역.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 나 따로 너 따로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분'외 아무이도 아니라는 것.
초월의 개념이 아닌 것 같다. 즉자-대자-즉자대자의 운동도 아니다. 전치사도 'für'가 아니라 'mit' 다. 자아 중심적 인식론의 해체?
그들은 어떤 사람? 우선 '보편자'가 아니다. 특별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일까? 마태복음 5장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일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람을 '마음이 가난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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