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6년 연말 소망 /김영진(FILM2.0)

FILM2.0

Column - 김영진의 러프 컷

 

2006년 연말 소망

2006.12.29 김영진 편집위원

 

 

연말을 맞아 신문사 영화담당 기자들의 전화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한 해 동안의 한국영화를 총평해달라는 것이다. 하나 마나 한 소리로 그들의 노동에 보탬을 주지도 못하면서 여하튼 올해는 별로 재미가 없는 시기였다고 생각했다. 평가할 만한 영화들은 꾸준히 공개됐지만 한국영화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 생각이 유난히 강하게 들던 한 해였다. 혹시 지난 몇 년간 한국영화가 보여준 대단한 성장세의 착시현상이 예술적으로 운이 좋았던 게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편수가 제작됐고 그만큼 어이없는 영화의 층이 두터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연말을 맞아 타의에 의해 한 해를 결산하면서 왜 한국영화에 점점 열정이 떨어지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이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잔소리라고 여겨지고 면역이 생겨버린 탓에 하는 사람도 절실하지 않으니 듣는 사람은 오죽하겠느냐는 체념마저 생긴다. 수년 전부터 극장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기회가 날 때마다 떠들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과도기이니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올해는 <괴물>로 독과점 문제가 정점에 올라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영화계의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기양양하게 현재의 질서를 즐기는 시장의 승리자들도 있을 것이다. 또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머지않아 시장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도 작금의 비정상적인 유통질서에 크게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은 모기 목소리만큼이나 영향력이 작아진 평단과 중년남자의 머리카락 숫자보다 많이 존재하지만 앵무새처럼 비슷한 소리를 되뇌는 상당수의 기자들을 무시하면서 역시 대중은 좋은 영화를 알아준단 말이야, 라며 흐뭇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제작비에 육박하는 마케팅 예산을 쓰고 5백만 관객 이상을 동원할 목표치로 광역개봉 방식을 택하는 것은 불문율이 됐다. 대박영화가 아니면 쪽박을 차겠다는 배수진이 대다수가 감내해야 하는 규칙이 됐다. 살금살금 관객의 호응을 얻어가며 장기 상영하는 사례 따위는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됐다. 누가 먼저 대중의 관심을 끄느냐에 사활을 거는 이 시장은 불행하게도 너무 좁다. 단 한 번의 승부로 모든 것이 결정 난 끝에 하루 이틀 사흘 안에 영화의 흥행이 결정되고 나면 1등한 영화 외의 다른 영화들은 처분날짜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상품 회전율을 높이기 위한 멀티플렉스의 경영방침에 따라 좌판은 언제든지 신축성 있게 바뀌고 모든 것이 1등한 영화 위주로 돌아간다. 어제 개봉한 영화를 내일 극장에 가보니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뉴스감도 못 된다. 저마다 일등을 노리며 제작된 영화의 물량이 120편에 달했던 올해는 매주 두세 편의 한국영화가 불나방처럼 경쟁에 뛰어들었다 대다수가 나가떨어졌다. 이런 시장이 오래 지속된다는 게 이상하다. 따라서 이미 거품이 꺼질 기미가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영화사업 자체가 원래 위험성이 크고 도박성이 있는 것이지만 이 사업의 재미는 영화 자체의 힘으로 때론 예상치 않은 흥행을 거두기도 하는 데 있다. 또, 이 도박성 사업의 매력은 때로 질 줄 뻔히 알면서도 배팅을 하는 배짱이 용납이 될뿐더러 미담이 되기도 하는 분야라는 데 있다. 십수 년 전 지금은 한국영화의 주류가 된 젊은 영화제작자들이 막 충무로에서 자리다툼을 벌일 즈음엔 나름대로 각자 다른 방향에서 서로 모험을 벌인 측면이 있었다. 아직 산업화가 덜 된 탓인지는 몰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브랜드를 갖기를 원했다. 요즘에는 좋은 영화니, 예술영화니, 저예산영화니 하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영화를 만들었네요, 라고 덕담하면 장사가 안 될 줄 알고 낙담하는 기묘한 반응이 목격된다. 이제 이 판은 누가 더 삼삼한 영화를 갖고 있는가, 누가 더 선수들끼리 봐서 부러운 영화를 만들었는가를 가늠하는 도박꾼들의 세계가 아니라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누가 더 한판 화끈하게 몰아갖느냐가 관심사인 시골장터의 투전판 같은 곳이 돼버렸다. 더 많은 판돈을 걸고 이긴 사람이 몽땅 판돈을 가져가는 이 판에서는 구력도 소용없다. 다른 곳에서 더 많은 돈을 ‘땡겨’ 한판 지르려는 투전판 심리가 더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든 잘 돼가려면 일급 전문가들이 잘 먹고 잘 살거나 최소한 작품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구조는 돼야 한다. 영화계라면 좋은 영화, 품질이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이 잘 되는 사례를 거듭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싸이더스의 대표인 차승재는 젊었을 적 딱히 대박영화를 내는 제작자가 아니었는데도 충무로의 신망을 얻었고 그의 제작사 우노필름은 대중들로부터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았다. MK픽처스의 심재명 이사도 명필름 시절 민활한 기획력으로 대중의 신뢰를 받는 제작자였다. 이들의 영화는 고만고만한 영화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뚝 광채를 내는 뭔가가 있었다. 요즘은 누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어떤 브랜드 가치를 키워가고 있는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시장의 승리자들은 있겠지만 공적으로 영화의 가치를 말하는 목소리는 여간해서 듣기 힘들다. 비평적 상징 권력이라는 것은 길거리에 버려도 주워가질 것이 못 되었다. 홍상수가 한때 이 나라 젊은 영화과 대학생들의 우상이 되었던 것은 그의 영화가 흥행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좋은 영화라는 상징적 권력만으로도 충무로에서 상당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영화인들의 존재요건이 아니다. 불과 십여 년 사이에 한국영화는 모험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돈이 많이 들어간 대다수 영화의 모험이 실패로 돌아간 탓도 크겠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투자와 극장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대자본에 대해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시스템 탓도 크다. 영화인들은 그들의 전문성을 바깥의 투자자들에게 인정받는 데 실패했으며 투자자들과 매니저들의 입김에 휘둘리는 피고용인 비슷한 위치로 전락했다. 성공한 영화제작자들 가운데 투자배급업자들과 비슷한 위치에 오르고자 한 시도는 많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투자배급업계의 큰 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영화산업은 제작자들보다 배급업자들의 권력이 센 곳이 돼버렸다.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흥분보다는 대차대조표에 따른 계산만 있는 곳에서 영화의 멋은 풍겨날 수 없다. 올해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졌던 영화들 가운데 <가족의 탄생> <구타유발자들> <강적> <삼거리 극장> <망종> 등의 영화는 꽤 신경 쓴 타협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버려졌다. (그런 점에서 <가족의 탄생>에 작품상을 주고 여타 정당하게 주목받지 못한 영화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의 투표결과는 떠들썩한 연말의 각종 시상식 결과 가운데 가장 나름의 개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타를 캐스팅하고 상당한 마케팅 예산을 투여했는데도 소모적인 일회성 개봉주기에 맞춰 재단하는 것은 자원낭비에 가까운 재난일 것이다. 성공이라고 말하기엔 멋쩍지만 그럭저럭 주목을 받은 <짝패> <비열한 거리>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의 영화도 감독이나 배우의 브랜드 가치에 의존해 아슬아슬하게 시장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시장에서 실패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타협의 산물로 극장에 걸린 것인데도 충분히 음미될 만한 여유 없이 소비된다는 데 있다. 좋은 영화를 논하고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적 체험의 폭도 자꾸 협소해져 간다. 어디서나 시장이 원하는대로 해야 한다는 시장주의자들의 주장이 대세를 잡는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되었지만 공공성의 확대라는 근대적 이념의 부실함은 곧 장기적으로 그 사회의 공동체적 기반을 갉아먹는다. 돈이 되는 것만 모두 우르르 쫓아가는 사회에서의 미래적 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영화문화는 불행하게도 기존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첨예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곳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감성을 지닌 창작자들과 관객은 존재의 기반을 아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건 모든 이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이제 영화 자체를 말할 것이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수용 소비 환경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