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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 관한 시각 교정

[책소개] <인간의 땅, 중동>(서정민 지음, 중앙북스 펴냄) ⓒ프레시안

'메카콜라' 마시며 포니 택시를 타고 달려보자 / 황준호, 프레시안 2009-07-26 20:44

 

"여성에게 운전을 금지하는 나라는 중동 국가 중 사우디뿐이다. 한 국가의 사례가 중동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집트의 여성 공무원 수는 200여 만 명에 이른다. 남성과 여성의 공무원 비율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중동에서 여성이 '억압'받는다는) 전통을 이슬람 종교와 결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슬람 이전부터 내려오는 유목 사회의 강력한 가부장적 전통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중동 유목민의 가부장적 여성 억압을 두드러지게 개선한 것이 이슬람 종교다."

 

중동 전문가인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신간의 제목을 <인간의 땅, 중동>이라고 달았다. '알라의 땅' 혹은 '열사(熱砂)의 땅' 등 지극히 단순하게 규정되는 중동에 관한 시각을 교정하겠다는 뜻이 엿보인다.

그러나 2001년 9.11 사태 이후 중동 문제를 다루는 기자의 눈에 중동은 무엇보다 분쟁의 땅이요, '미국의 세계 경략이 벌거숭이로 드러나는 정치의 땅'이다. 9.11 이후 더 심각해진 테러와 전쟁과 갈등을 관찰하다 보니, 과장법으로 말하자면 전차와 견착식 미사일과 이슬람 전사들만 사는 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예컨대 이란 대선 부정 시비로 강력한 시위가 발생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주제들이 고정돼 있다. 이란의 신정체제는 어떻게 될 것이고, 이란의 영향을 받는 레바논의 헤즈볼라에는 어떻게 될 것이며, 중동 정세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따위의 것들이다.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거기에만 눈길을 빼앗겨 사회, 경제, 문화 등 그 밖의 중동 문제에는 관심을 갖기 힘들다.

 

요즘에는 <알자지라> 영문 인터넷판도 잘 돼있고 독립적인 시각에서 보도하는 언론인들도 늘었다. 그 때문에 중동에서 정치적인 갈등이 일어나면 서구중심적인 프레임을 벗어나서 기사를 쓰는 게 그리 어렵지만도 않다.

그러나 <인간의 땅 중동>(서정민 지음, 중앙북스 펴냄)을 읽은 결과, 서구적 시각에서 어느 정도라도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분야는 정치에만 국한됐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의 많은 분야에서는 여전히 <로이터>와 , 의 관점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자는 한국인들이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중동을 보는 이유로 서구중심적인 시각 외에도 무지와 무관심을 꼽았다. 그런데 정치 말고 사회와 문화·여성·종교 등을 다룬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과연 기자의 시각은 서구중심적이었고 무지했으며 무관심했었다.

그 중에서 편견이 가장 심한 분야라고 예상해서 제일 먼저 눈이 갔고, 읽어 보니 역시 그러했던 문제는 중동의 여성에 관한 것이었다. 명예살인과 여성 할례 같이 '이슬람의 여성'하면 떠오르는 이슈들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았을 뿐더러, 최근 여성과 가족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새로운 풍속도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슬람에서는 이혼이 어렵고 또 여성에게 불리하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급증하는 이혼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아주 사소한 문제로도 이혼이 발생하곤 한다. 위성방송에 나오는 섹시 스타가 아랍권 가정 파탄의 주범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크게 늘고 있다. 알제리의 경우 변호사의 70%, 판사의 60%가 여성이다. 대학에서도 재학생의 60%가 여성이며 의료계에서도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이슬람의 여성이 하루가 다르게 모든 면에서 변화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슬람의 여성들은 해방과 억압이 공존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2006년 파키스탄에서만 명예살인으로 730명이 살해됐다. 또한 지금도 매년 300만 명의 여자 어린이가 할례로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명예살인의 경우 아프가니스탄, 이란, 사우디 등 주로 보수적인 나라에 남아 있는 악습일 뿐 이슬람의 교리에 따른 전통은 결코 아니다. 그걸 이슬람의 일반 특징이라고 보는 건 잘못된 일반화다. 또한 할례는 이슬람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아프리카의 가부장적 부족의 전통이다. 이걸 이슬람의 전통이라고 보면 틀린 것이다.

이 같은 중동에 관한 편견과 오해는 비단 여성 문제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랑과 멸시를 동시에 받는 벨리 댄서 이야기, 아파트 종합 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왑' 이야기, 담배가 유일한 낙이 돼버린 이라크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걸 읽어가다 보면 중동은 별다른 곳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저자인 서정민 교수는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하고, 이집트와 영국에서 중동 정치로 학위를 받았으며, 언론사 특파원으로 5년간 현지에서 발로 뛰었던 남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를 누비는 포니 택시의 이야기를 그토록 자세하게 쓸 수 있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중동 사람들의 사생활까지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중동의 시각으로 중동을 읽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 보니 중동 하면 석유 혹은 건설이나 떠올리는 이들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중동을 더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대상을 '기회'와 돈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지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탐구일 터인데, 이 책을 읽으면 "세상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다 다르지만, 잘 들여다 보면 다 똑같다"는 한 여행가의 말이 와 닿기 때문이다. (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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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북협상 패턴 5단계

[정세현의 정세토크] '포괄적 패키지' 표현에 담긴 美의 속내 : "캠벨 발언의 이중성, 퇴로 열기 위한 첫걸음"

 

(...)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리언 시걸 박사가 미국의 대북협상 패턴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이 도발적인 행동을 하면 미국은 처음에는 'denial' 거부를 하고, 그래서 북한이 더 강수를 두면 미국은 'anger' 분노를 합니다. 그러다가 북한이 더 강하게 나가면 결국은 'bargaining' 협상으로 들어가는데, 북한이 또 말을 안 듣고 계속 강수를 두면 미국은 'depression' 좌절을 하고, 그러다가 막판에 가서는 국제정치적 고려나 국내정치적 이유 때문에 결국은 북한이 해달라는 것을 다 수용하는 'acceptance'가 나타났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도 이 다섯 단계를 그동안 두세 바퀴 돌아 봤어요. 오바마 정부 출범해서는 그동안 'denial'과 'anger' 단계를 거쳐서 캠벨의 동북아 순방을 계기로 다시 'bargaining' 협상으로 들어가려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협상에 들어가도 'depression' 좌절하는 단계가 또 올 겁니다. 그러나 결국엔 'acceptance'로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 미국은 내년 5월에 NPT 검토회의를 주도해야 합니다. 그에 앞서 3월에는 핵보유국 정상회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봐서, 러시아를 겨냥해 폴란드·체코에 구축하려던 MD(미사일 방어망)를 지금 전면 재검토하고 있어요. 사실상 포기했다는 거죠.

 

또 미·러간에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도 협상을 시작했지, 오바마가 말하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서....이러는 마당에 미국이 퇴로를 찾지 않을 수 있겠어요? 북한을 놔두고 그게 됩니까? 이란을 컨트롤하는 데는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 북한을 컨트롤하는 데는 중국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데, 그럼 이제 미국이 사인을 내놔야 합니다. '포괄적 패키지'가 구체적으로 나오면 중국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황준호 기자(정리) /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7-21 오전 9:24:2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721000941&section=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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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의 폭력 & 에너지 혁명

아래에 옮겨오는 레디앙 기고글의 작자인 장성열이 누구인지, 그의 진단이 얼마나 가능하고 정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지 내가 좋아하는 말씀들을 담고 있기에(내 생각과 비슷하기에) 모셔다 둔다. "에너지 혁명"과 -내가 한 1주일 노느라고 바빠 모르던 사이에 타결되고만- '한·EU FTA'를 비롯한 각종 자유무역이 갖는 맹점을 잘 짚어주는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마치 <<[발췌] 무능한진보 vs 농업정치 http://blog.jinbo.net/radix/?pid=85>> 포스트의 댓글러처럼!). 이하 펌글 전문이다.

 


[독자 투고] 유럽-맑스-공업-세계무역의 폭력 : “에너지혁명은 무의미하다”  
  
"독일의 마르틴 예니케 교수에 따르면, 스마트 성장은 생태적 현대화를 통한 지식 집약적이고 자연 절약적인 생산을 하자는 뜻이며 대체 에너지를 의미하는 에너지 혁명을 뜻한다. 즉 스마트 성장이란 숫자상으로 드러나는 성장률은 작더라도 실제 혁신의 비율은 높은 상태를 말합니다. 노동생산성은 줄어들지만, 자원생산성은 더 높아지는 상태이다. 제 3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친환경 경제가 단순히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정치구조까지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지금 세계를 흔들고 있는 식량위기는 미국 주도의 세계무역체제의 궁극적인 결과이다. 예를 들어 독립 당시에는 식량을 수출했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지금은 전체적으로 식량의 30% 정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채에 고통 받는 나라들에 대한 IMF와 세계은행의 은행관리이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색채를 강화한 이 두 조직은 세계에 선진국형 공업을 모델로 한 농업을 강제하여 대규모 농지에 수출용 환금작물의 재배를 장려했다. 게다가 GATT 체제하의 농산물 무역자유화 때문에 정부의 원조를 받은 값싼 구미의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지역에서 가족농업에 종사하는 자작농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IMF와 세계은행의 경제전문가들은 농업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가족농업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식량위기는 그저 식량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엘리트들의 세계무역의 논리와 민중의 지역적 자급의 논리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농을 대체한 식량위기

이런 갈등은, 1995년 창설된 WTO(세계무역기구)의 도하라운드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대립으로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WTO의 목표는 관세의 전세계적인 일괄인하였는데, 제네바에서 열린 153 개국 가맹국의 교섭은 완전히 결렬되어 재개될 전망조차 불투명하다. 결렬의 최대 원인은 정부원조를 받은 선진국의 과잉 농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되면 자국의 영세농민들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이유로 인도가 긴급수입제한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브라질도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역에서 북측의 선진국이 남측의 개발도상국에 제멋대로 규칙을 강요하는 시대는 완전히 끝이 났다. IMF와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는 자유무역은 약육강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것이 WTO를 좌절시킨 원인이 되었다.

개발도상국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이 1992년 온두라스에 본부를 두고 창설된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 농민의 길)이다. 비아캄페시나는 세계 각지의 자작농, 선주민, 농촌여성, 어민들로 된 백 개 이상의 조직이 연합한, 회원 수가 1억 5천만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민간조직이며, 창설된 지 얼마 안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종래의 식량안보 대신에 비아캄페시나가 주장하는 식량주권원칙을 헌법조항으로 삼는 나라도 생겼다. 식량주권이란 국제시장에 좌우되지 않고 인민이 자신의 먹을거리나 농업방식을 스스로 정의하는 권리다. 농산물을 단지 상품으로 유통시키는 무역자유화나 현지 자작농의 존속을 곤란하게 만드는 식량원조 등은 주권 침해에 해당된다. 나아가서 그것은 식량과 관련하여 국토나 식문화의 존재방식에까지 걸친, 자신의 독자적인 생활양식을 선택하고 지킬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활 양식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세계무역에 대한 근원적인 반대인 것이다.

 

“식량원조도 주권침해다”

비아캄페시나의 요구는 자급에 국한되지 않고 농민 이외의 지역주민들도 인간다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원과 물자를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요체는 선거의 유무와 경제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양식에 관련한 지역주민의 자치에 있다. 따라서 무역과 자급을 둘러싼 논의는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진보신당에서 또는 진보당에서의 유럽 사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자칫 근본적인 민주주의 위기를 가져 올 수 있다. 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의 富의 원천은 아직까지 남쪽 신흥개발국으로 부터의 약탈에 근본을 두고 있음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제는 과거와 같은 남쪽 나라로부터의 약탈은 더 이상 쉽지 않을 전망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는 유럽과 자유무혁협정을 맺었다. 앞으로 자유무혁협정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콜럼버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인도의 향신료와 일본의 황금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에 의한 신세계 아메리카의 약탈과 식민지화였다. 아즈텍과 잉카의 막대한 금은의 약탈은 유럽의 통화유통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맑스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실체가 바로 이 약탈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담배나 설탕 등 아메리카 산물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기는 한편,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은 종래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무한히 시장이 확대되었다. 시장의 거대한 수요를 생산하기 위해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노예노동이 필요로 했다. 풍부한 자본, 무한히 확대된 시장, 싼 노동력이라는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 이렇게 갖춰졌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제무역의 약탈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 뒤에 유럽의 강력한 국가들이 존재했었고, 유럽의 국가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무한한 자원과 싼 노동력을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 맑스, 유럽

무역은 전통적 생활양식에서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런 끊임없는 창조적 파괴가 오늘날 세계무역의 원리가 되었다. 이는 세계무역이 상호간의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무한한 확대에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는 자본의 유통과정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생산과정(플랜테이션 경영)까지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세계무역은 식민주의 폭력의 모태로 태어났고, 이에 종사하는 자의 막대한 이익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화나 흑인노예의 결과이다. 이는 곧 지역 간의 대등한 교역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교환을 위장한 항시적 약탈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가 곧 유럽의 자유 평등을 기반으로 한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와 같은 때였다. 따라서 유럽 근대 국가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자원수탈과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무역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이 중심이 되었고, 그것이 상대국의 생산까지 지배하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무역을 통한 식민지화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또 전통적인 무역에서의 서민들은 변함없이 지역적인 자급에 기초하여 생활 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근대국가가 이런 이유로 탄생이 되고, 신세계로 이주한 이주자들 역시 토지와 생산 수단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었다.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의 사회계약은 바로 새로운 이주자들이 약탈한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대가로 국가의 창설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세계의 약탈 무역을 기반으로 해서 유럽과 신대륙에 근대국가가 탄생되는 것이다. 영국은 세계무역을 통하여 대상업제국을 만들었지만, 영국이 경험한 시행착오를 의식적으로 계획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오늘날 세계무역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설계하고, 그것을 세계에 강제한 것이다.

 

근대국가와 무역전쟁

미국이 1, 2 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세계적인 무역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이는 제2차 대전 이후 IMF, 세계은행, GATT에 의해 보완되는 브레튼우즈체제로 실현되었다. IMF나 세계은행의 역할은 외환시장의 안정과 후진국 원조가 아니라 미국식 경제성장의 논리에 세계를 편입시켜서 성장조건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과로, 오로지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각 나라의 균형잡힌 국토개발과 경제 방식이 왜곡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공업용 자원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능가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거의 자급자족하던 식량과 원유에 대해 세계적인 수입국이 되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식량과 원유의 가격 상승은,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미국에 의한 왜곡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들의 번영에 종말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신흥 독립국이다. 미국은 자국에서만 통용되는 경제성장 논리를 그들 나라에 강제해 왔다. 근대화를 위한 자본이나 기술이 없는 나라들은 IMF 융자나 세계은행의 원조에 의지하여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구미형 경제성장을 위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나라들에서 그런 융자나 원조가 결실을 거두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극히 이례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한국이고, 일본의 경우는 식민지가 아니고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 올 징후가 뚜렷하다. 그리하여 남쪽의 신흥 독립국의 세계는 부채에 늘 시달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의 자유무혁협정에 못지않게 유럽과 그 어느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도 반대해야 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그것도 역시 반대해야 한다. 이 모든 무역의 국제질서는 대량소비와 대량 생산에 기초한다. 그 동안 선진국은 후진국을 착취함으로써 그들 나라의 소비와 생산을 유지해 왔다. 우리나라 또한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 협정을 맺으면서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마르틴 예니케 교수는 다음 과 같이 이야기 했다. "제 3의 산업혁명은 혁신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성장률에 촛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또한 각 나라별로 기술 이전이 아닌 기술협력을 통한 혁신이어야 한다고 했다. 예니케 교수의 스마트 성장의 핵심은 대체 에너지 기술 혁신을 통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혁명을 뜻한다.

 

과연, 기술혁신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러나, 설사 예니케 교수의 말대로 에너지에 대한 기술 혁신이 일어난다고 해서 바뀌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지금까지 누려 온 소비의 형태를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기득권층의 富는 절대적인 아성일 것이다. 에너지 혁명을 통해서 이것이 바뀌어질까? 아니, 에너지 혁명을 시도한 것은, 스스로 이런 소비와 부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만약, 대량 소비와 부에 대한 폭력성을 획기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화석 연료 사용 감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에너지보다 다른 것에 있다. 소비는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찾아왔다. 그래서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다. 바로 과학이라는 형태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분업과 노동생산물의 분배를 해결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정치경제학에 의하면, "분업과 분업을 통한 생산물의 향유(소비)는 수요와 공급에, 자본, 임차료,임금,가치,이윤에,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경제 활동을 지배하는 불변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많은 서적과 강연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결과 불균형은 점점 증가했다. 어떤 사람(나라)들은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나라)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지금까지의 산업혁명은 생산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 3차 산업혁명은 에너지의 효율과 생태에 대한 것들이다. 산업혁명이 사회전반의 변화를 야기했는데, 제 3차 산업혁명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이런 식의 대량 소비와 부의 불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에너지 혁명은 자칫하면 이런 사회구조를 더욱 확고히 할 수도 있다. 유럽의 사민주의가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했듯이. 다른 나라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에너지 혁명은 부질없는 짓이다. 기존의 성장의 경제는 이런 것들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1000조를 100조로 줄이자”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은, 1000조 달러를 1100조 달러로 성장해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성장을 할수록 분배가 더 어려워진다) 1000조 달러를 100조 달러로 감소시켜 분배하는 것이다.(성장이 감소할 수록 분배는 쉬워진다) 스마트 성장은 성장률에서는 관심이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기존의 경제구조(대량소비, 왜곡된 부)를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런 불손한 목적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성장은 더욱 감소해야 한다. 그럴수록 분배는 더욱 원활해진다. 성장할수록 분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야기 하나. 부모가 3000만원 전셋돈을 남기고 간 형제는 웃으면서 나누어 갖지만, 부모가 30억 땅을 남기고 간 자식들은 원수가 될 확률이 높다)

예니케 교수 또는 일부 생태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생태가 단순한 녹색만을 이야기 하는 줄 안다. 그러나 생태적인 철학의 기본은 관계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 그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는 데서 생태주의는 출발한다. 따라서, 생태적 해결 없이는 민주주의도 요원하다. 에너지 혁명보다 에코(생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들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에너지 혁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 성장을 대폭 줄이는 일이다. 불교에 中道라는 말이 있다. 불교는 정신적 해탈을 중요시 여기지만, 물질 또한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그 물질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디앙 2009년 07월 15일 (수) 11:35:49 장성열)

 

 

cf.) 사하라에 태양열발전소 ‘데저텍’ 건설… 유럽에 전력 공급 
독일 20개 대기업 컨소시엄… 사상 최대 4천억유로 투자

한국에너지신문 2009년 06월 19일 (금) 09:36:10 김경란 독일 주재기자
독일 대기업 20개가 뭉쳐 독일 신재생에너지 역사상 최대 규모인 4000억 유로를 북 아프리카 지역 사하라 사막에 투자해 태양열 발전소를 짓고 생산된 전력을 유럽으로 공급한다는 프로젝트가 드디어 현실화된다. 900만m²의 면적, 바위, 모래, 돌로 형성되어 있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사하라는 독일 면적의 20배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이다. 북대서양과 적해 사이에서 빛나는 태양은 여름엔 50~60℃까지 올라가는 뜨거운 에너지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에너지는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수년전부터 많은 과학자들은 사하라 사막에 태양열 발전소를 세우면 유럽에 ‘솔라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히고 이 꿈이 실현되길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오는 7월 13일 20개의 독일 대기업들은 뮌헨에 모여서 정식으로 사하라 프로젝트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  http://www.koenerg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44

 

cf.2) 관련 그림: http://blog.paran.com/blog/detail/postBoard.kth?pmcId=blue5191&blogDataId=33032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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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대한 좌파담론의 비극 (&quot;반동좌파&quot; 라는데...)

나는 지난 6월 13일 포스트(http://blog.jinbo.net/radix/?cid=4&pid=219)에서 이란 상황을 보는 좌파의 입장이 애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때로는 모순적일 수도 많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적-과정적 이해 대상이라는 것)을 힘겹게 언급했었다. 역시나 그런 난감한 입장을 해소하기 위하여(아마도) 레디앙의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인 장석준은 어떤 이란계 카나다 좌파 정치학자의 글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수고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좌파가 어떻게 "반동적 성직자 체제를 무작정 옹호" 할 수가 있겠냐는 비판적 동기에서 찾아낸 듯한 아래의 글이 작금의 이란 상황을 이해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특히 좌파들의 "시각을 교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역자는 말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별로 "큰 도움"은 안 되는 듯하고, 그래도 몇몇 난 좌파 분들의 시각이 비판의 도마에 올라오니 참고삼아 옮겨다 둔다.

혹여 어떤 좌파가 이란 보수 정권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무작정"의 옹호는 분명 아닐 것이며, 명색이 좌파가 반-미-제국주의라는 임박한 이란적 요청에 눈이 멀어 -본문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는- "여성, 청년, 노조 운동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주장이 갖는 민주적 성격을 외면하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열거된 반-보수적 외침의 주체들이 갖는 주장 내용의 민주성이 곧바로 그들의 좌파성(참 민주주의)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어쩌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혹은 미국식 민주주의)로 전락할 농후한(내 생각에) 가능성이 더 심각할 수도 있다는 것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런 측면에서, 아래의 글에서 글쓴이는 자기 혼자만이 상황을 꿰뚫고 있고 남들은 편협되고 무지한 시각을 갖는다고 말하지만, 그의 시각도 아주 객관적으로도, 상황에 충실하게도 안보이고, 그의 결론도 당연한 말씀 이상의 무슨 엄청난 혜안의 산물은 별로 아닌 듯하다. 이하 펌글.

 

[역자(장석준) 주] 이슬람 성직자 독재에 맞선 이란 민중의 투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전 세계 좌파 사이에서도 이 투쟁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한창이다. 혹자는 ‘이란 이슬람 체제 대 미 제국주의’라는 대립관계만을 중심에 놓고서 반동적 성직자 체제를 무작정 옹호하기까지 한다. ‘좌파’의 이름으로 말이다. 아래 소개하는 이란 출신 좌파 정치학자 사이드 라네마(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 교수)의 글은 이러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난 7월 10일 미국의 진보적 웹사이트 에 발표한 글이다. 

 

 

이란 근본주의 집권세력을 옹호하는 좌파 담론의 비극 : “모든 이슬람 분파는 자본주의자다”
글, 사이드 라네마(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 교수); 번역, 장석준
 
서방 언론은, 좌파든 우파든, 이란에서 벌어진 선거 쿠데타와 그에 뒤이은 반대파 투표자들의 봉기 및 그 억압에 자극받아 온갖 종류의 분석들을 쏟아내었다. 주로 네오콘 이데올로기와 반동적 관점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우파는 왕정복고를 꿈꾼다. 그들은 불만을 품은 이란 대중들 사이에서 친미/친이스라엘 동맹군을 찾고, 동유럽 식 벨벳 혁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에 비판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이 복잡한 이란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서방 좌파의 경우에도 심각한 혼돈이 나타나고 있다. 진보 좌파는 처음부터 이란 시민사회 운동을 분명히 지지했다. ,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캠페인>, <불렛(총탄)> 그리고 여타 언론은 복잡한 이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올바른 분석을 제공했다. 어떤 지식인들은 이란 동지들과 함께 선언서에 서명한 반면 또 다른 일부는 계속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하지만, 마치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무비판적으로 반제국주의의 주역으로 칭송받는 가자나 레바논 상황처럼, 아마디네자드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외관상 강경한 언사를 내뱉었다고 해서 좌파의 일부 논자들이 그를 반제국주의의 주역으로 떠받드는 걱정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혹자는 조잡한 계급 분석에 기반해서, 아마디네자드가 부유층에 맞서는 캠페인을 벌였다며 마치 그가 가난한 노동 대중을 지원한 것처럼 상상하면서 노골적으로든 은연 중에든 그를 칭송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석들 역시 생동하는 이란 시민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참된 운동을 무시하며, 민주주의와 정치적 개인적 자유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서방 정치 선전에 부화뇌동하는 중간계급의 관심 정도로 폄하해버린다. 이것은 바로 하메네이, 아마디네자드와 그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시각이기도 하다.

 

가장 기괴한 사례는 <먼슬리 리뷰>의 자매지인 온라인 저널 이다. 이 저널은 어떤 때는 바시즈(이란의 이슬람 민병대)의 무뢰한과 범죄자들의 정치 선전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이 웹사이트는 친이슬람주의 필자들에게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해왔다. 이들은 결코 좌파라고 할 수 없는 위인들이지만,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좌파들은 이들의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 한 필자는 이란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복지 개혁과 사적 소유권” 사이의 투쟁이며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재계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자 계급을 격분케 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의 금융 보수파 후보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이 필자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 안의 아마디네자드 파벌과 그를 지지하는 보수 성직자 세력이 장악한 또 다른 만만치 않은 “재계 이해”에 대해서는 언급도 안 하는 편의적 태도를 취한다. 아마디네자드가 국가 소유 주식을 자신의 패거리에게 넘겨주는 등 “사유화” 정책을 충실히 따른다는 점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1979년 혁명기에, 지금은 사라진 투데당(과거 이란 공산당-역자)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이슬람 체제의 요소들 속에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사회주의적 지향”을 추구하는 “비자본주의자들”을 찾으려고 헛된 노력을 계속했다. 이제는 저널이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희귀 생물종을 찾으려고 새로운 탐사 작업에 나선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슬람 체제의 모든 분파는 항상 철저한 자본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에 전재된 “이란: 대안적 독해”라는 글에서 아즈미 비샤라(이스라엘 안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이해를 대변하여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던 저명한 진보파 아랍-그리스도교계 정치인-역자)는 이란의 전체주의 통치 시스템은 다른 전체주의 시스템들과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란의 시스템은 '지배 질서와 그 이데올로기 안에 참으로 높은 수준의, 헌법에 명문화된 민주적 경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비샤라는 이러한 '경쟁'이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며, 온건파 무슬림이나 광범한 세속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좌파 등 다른 세력은 이슬람 체제의 반민주적 기구에 의해 배제당하는 현실은 설명하지 않는다. 비샤라가 제시하는 두 번째 차이점은 '통치 기구에 스며들어 있는 공식 이데올로기가 압도적 다수의 인민이 받아들이는 진짜 종교'라는 점이다. 다수 이란인들이 무슬림이고 시아파라는 점에서는 그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모든 이란인들이 종교적이라거나 집권자들이 신봉하는 것 같은 반계몽적인 근본주의 신조를 따른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또한 그는 이란에 상당수의 비종교 인구가 존재하며, 그 비중이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높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란에 존재하는 '정치적 다양성에 대한 상당한 관용', '비판의 허용' 그리고 '권력의 평화적 교체'를 칭송한다. 이쯤 되면 우리의 저명한 팔레스타인 정치가가 진짜 이란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상 속의 이란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인지 헛갈릴 만도 하다.

비샤라는 수천 명의 정치범 학살, 지식인들을 목 졸라 죽인 참극,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유능하고 진보적인 목소리들이 침묵을 강요받아온 것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는 말인가? 그는 12명의 비선출직으로 이뤄진 보수파 기구(혁명 수호 평의회)가 소수의 믿을 만한 사람들만 대통령이나 의회에 출마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권력’인 최고 지도자는 교체되지 않으며 성직자 총회에서 지명되기만 하면 종신 집권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선출되지 않은 지도자가 억압적 국가 기구를 주도하며, 1993년부터는 신속한 억압 행사를 위해 최고 지도자 직속의 '벨라야트 특공대'(NOPO)까지 거느리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관용이고 민주주의다.

비샤라는 참된 대중 개혁 운동을 무시하며, “개혁파 집권의 기대는 … 아마디네자드에 반대하는 서방 및 비서방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샤라는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다수의 여성 조직, 청년, 교사 그리고 일부 노동자 집단이 주도하는 대중 캠페인에 대해 배웠어야만 했다. 그는 우리에게 '엘리트주의'와 '거만한 계급적 우월감'을 갖는 것에 대해 경고하면서, 이러한 운동들이 '중간계급적인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젊은이들 중 다수가 아니라 특정 계급에 속한 젊은이들 중 다수”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가 빈곤층 젊은이들 중 대다수가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장 충격적인 글들 중 하나는 명망 있는 좌파 논객이자 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의 것이다. 그는 '이란 대선 : ‘부정 선거’라는 장난질'이라는 글에서, 이란 대선에서 아무런 부정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아무런 신뢰성도 전문성도 없으면서, 몇몇 이란 소도시 투표 결과의 통계학적 묘사를 통해 이런 확신에 도달한다. 엄청난 선거 부정의 증거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페트라스의 증거와 ‘정보들’을 반박하려고 시간 낭비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의 분석에 집중하겠다. 페트라스 글의 기절초풍할 측면은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닫자마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발적으로 거리에 뛰쳐나와 참으로 열정적으로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은 용감한 여성, 청년, 교사, 공무원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는 점이다. 대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안락한 상류 계급의 은신처”, “잘 차려입고 영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젊은이들 운운하는 돌발적인 언급들이다.

여성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없으며, 공개 체형, 일부다처제 그리고 합법적인 성 차별 같은 참으로 반계몽적인 정책들에 맞선 여성들의 놀라운 투쟁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식도 없다. 현재 다수가 투옥 상태인 노동조합 운동가들, 작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대신 페트라스가 강조하는 것은 조잡한 계급 분석에 따른 주장들이다. “투표 결과 통계는 고소득층, 자유시장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지지자들과, 종교 계율에 따라 고리대와 이윤 추구를 제한하는 ‘도덕 경제’의 지역사회 지지자들, 노동계급, 저소득층이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진정한 계급 양극화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보다 더 엉뚱하고 잘못된 해석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인 계급 갈등 패러다임에 아주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상상 속의 저 이슬람 경제학까지 더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보수파, 개혁파 양편의 고위 성직자들 모두 “시장 지향 자본가들”이며, 이슬람 수비대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기업을 경영하고 무역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며 주요 부동산 개발자들이다.

노동자들 역시 양편에 나뉘어 있다. 경제 정책의 실패, 30%로 치솟은 물가인상률, 실업난 그리고 노동조합 탄압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아마디네자드로부터 등을 돌렸다. 정부의 가혹한 방침에 맞선 이란 자동차 회사 노동자들의 성명서, 테헤란 공공운수 회사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과 거리 충돌 그리고 선거 직후의 봉기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 이 모두가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 사례들이다. 또한 이슬람주의자들의 ‘도덕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단견이다. 보수파, 개혁파 양편 모두 횡령과 부패에 연루돼왔고, 이 사건들 중 상당수는 이들 사이의 말싸움 과정에서 폭로돼버렸다. 서로 상대방의 부패를 폭로했던 것이다.

페트라스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제한된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반대파의 패배를 낳은 엄청난 표차를 보면, 이들이 인민의 핵심 관심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다른 많은 이들처럼 페트라스 역시 이 “반대파”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집단과 범주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더 고약한 것은 그가 이란 여성, 청년, 노조 운동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정치적 개인적 자유, 인권, 민주주의, 성 평등 그리고 노동권에 대한 그들의 요구와 “관심”들은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란 좌파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로파가(동지들), 당신들이 고문받고 감옥에서 썩는다 하더라도, 당신들의 책이 불타고 직장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오. “노동계급”은 정부로부터 보조금과 구호 물품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오.” 페트라스 교수와 그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와 특권이 문제가 된다면 이렇게 관용하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좌파는 역사적으로 진보 운동들과의 연대에 뿌리를 내렸다. 여성과 노동조합의 권리와 그 외침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의 요구였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좌파의 일부로부터 나오는 외침은 반동적이다(진보적이 아니라).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그들이 반제국주의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이라는 잘못된 가정 아래 역사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것은 반동 좌파다. 진보 좌파는 이와 다르다. 진보 좌파는 항상 진보하는 세력들 편에 서왔다.

 

지젝 역시 중요한 점을 놓치다 / 신좌파의 저명한 대변자 슬라보이 지젝은 훨씬 더 존경할 만하고 널리 읽힌 글에서 이란 사태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했다.지젝은 “무사비 지지자들이 … 자신들의 행동을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의 반복으로, 이후 부패해버린 혁명의 만회를 위해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바라본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호메이니 혁명의 기만당한 지지자들의 참된 대중적 궐기”를, “호메이니 혁명의 ‘억압된 것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지젝은 1979년 혁명 당시의 “호메이니 지지자들”과 자유주의적이든 좌파적이든 비종교적 세속적인 요소들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후자는 실제로 혁명을 처음 시작한 세력이며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호메이니의 지도력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때로 절망스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커다란 오류다.

그 연장선에서 지젝은 오늘날의 모든 운동이 무사비 지지 입장인 것으로 잘못 규정한다. “무사비는 … 호메이니 혁명을 떠받치던 대중의 꿈의 참된 부활을 상징한다.” 자신의 주장을 실증하기 위해 지젝은 “혁명 첫 해의 믿기 힘든 활기(‘끓어오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역자)”에 대해 언급한다. 사실 혁명 첫 해 혹은 미 대사관 인질 억류 이전의 ‘활기’는 호메이니를 지지하지 않은 세력들의 행동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 쿠르디스탄과 곤바드에서 벌어진 페다이스(Fedais. 이슬람 체제 등장 전부터 무장 혁명 투쟁을 벌이던 맑스-레닌주의 조직. 현재는 망명 상태에서 이슬람 체제 전복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독일 좌파당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있다-역자)와 여타 좌파 조직들의 무장 투쟁, 여성과 대학가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당시는 호메이니와 그 지지자들이 아직 권력을 공고히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인질 억류 위기와 이란-이라크 전쟁 개전 이후에야 “이슬람 체제”가 상황을 장악한다.이 때문에 지젝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슬람 안에 참된 해방적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지젝은 무사비가 보수적 이슬람주의자이며 따라서 그를 이러한 “해방적 잠재력”의 사례로 들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새로운 종류의 무슬림 지식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정교분리를 신봉하는 모하메드 샤베스타리(호메이니의 옛 동료 중 한 명이지만 정교분리와 이슬람의 현대적 재해석을 주장하는 이란의 신학자, 철학자-역자), 모센 카디바르(시아파 성직자로서 이슬람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개혁운동의 이론가로 앞장섬-역자), 레자 알리자니 그리고 핫산 에쉬케바리(이 두 사람은 개혁파 연합인 ‘민족주의 종교 운동’의 지도자들-역자) 같은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러한 해방적 잠재력의 주역이 될 수는 있지만, 호메이니와 무사비 같은 자들은 분명 아니다.

이란의 1979년 혁명이 미완성의 과업이며 그 주된 요구, 즉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적 평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호메이니의 요구들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요구들 역시 무사비의 것은 아니다.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30년간 반계몽적인 폭압적 종교 지배로 좌절을 겪어온 인민이 비록 선거 부정으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사실은 보다 실질적인 요구들에 기반해서 일으킨 자생적이며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봉기다. 성직자 체제와 나라 안팎의 그 지지자들에 너무도 실망한, 팽창 일로의 이란 시민사회는 선거로 열린 기회를 단호히 장악해 역사의 완강한 전진을 밀어붙였다. 이들은 이슬람주의 체제나 자신들의 역량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의 전략은 이슬람주의 체제와 그 헤게모니를 점진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세속 민주 체제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며 신중을 요하고 장기적인 투쟁이다. 이 과정에서 이런 시민사회가 서방 좌파로부터 광범하고 효과적인 지지를 받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이 좌파는 민주주의와 시민 자유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오해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 <주간 진보신당>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레디앙, 2009년 07월 13일 (월) 09:43:33 번역 / 장석준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4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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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주권과 석유 사이 (090630-기록)

Un militaire irakien à Bagdad, le 30 juin 2009.

AP/Khalid Mohammed - Malgré les incertitudes sur la capacité de ses forces nationales à assurer la sécurité, l'Irak a pris mardi le contrôle de ses villes en vertu d'un accord conclu en 2008 sous la présidence Bush.

 

[Portfolio] Les forces de sécurité irakiennes prennent le contrôle des villes
LEMONDE.FR | 30.06.09 | 13h00  •  Mis à jour le 30.06.09 | 14h17
http://www.lemonde.fr/proche-orient/portfolio/2009/06/30/les-forces-de-securite-irakiennes-prennent-le-controle-des-villes_1213397_3218.html#ens_id=1144734 [사진 6장]

 

[Reportage ] Les Irakiens retrouvent le contrôle de leurs villes / Irak : l'armée américaine quitte les rues de Bagdad
LE MONDE | 29.06.09 | 14h26  •  Mis à jour le 01.07.09 | 15h50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6/29/irak-l-armee-americaine-quitte-les-rues-de-bagdad_1212949_3218.html#ens_id=1144734 [사진]

 

[Reportage] L'Irak rouvre ses gisements de pétrole et de gaz aux compagnies étrangères
LE MONDE | 30.06.09 | 14h24  •  Mis à jour le 30.06.09 | 14h50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6/30/l-irak-rouvre-ses-gisements-de-petrole-et-de-gaz-aux-compagnies-etrangeres_1213429_3218.html#ens_id=1144734

 

[분석] Irak, un avenir sécuritaire et politique en pointillés
LEMONDE.FR | 30.06.09 | 17h11  •  Mis à jour le 30.06.09 | 21h08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6/30/irak-un-avenir-securitaire-et-politique-en-pointilles_1213377_3218.html#ens_id=1144734

 

[분석] Un eldorado sous-exploité mais risqué pour les majors (LE MONDE | 30.06.09 | 14h24)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6/30/un-eldorado-sous-exploite-mais-risque-pour-les-majors_1213431_3218.html#ens_id=1144734

 

[사건] L'Irak doit s'attendre à des jours difficiles, selon Barack Obama
LEMONDE.FR avec AFP et Reuters | 01.07.09 | 06h49  •  Mis à jour le 01.07.09 | 07h28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7/01/l-irak-doit-s-attendre-a-des-jours-difficiles-selon-barack-obama_1213729_3218.html#ens_id=1144734

 

Six ans de conflit

 

20 mars 2003 : Invasion de l'Irak.

9 avril : Entrée des Américains à Bagdad. Chute du dictateur irakien Saddam Hussein.

1er mai : George Bush annonce la "fin des combats majeurs".

8 avril 2004 : Le scandale de la prison d'Abou Ghraib éclate.

8 novembre : Offensive des marines sur la ville sunnite de Fallouja.

 

19 novembre 2005 : 24 civils irakiens tués par des marines à Haditha. Procès et condamnations.

7 juin 2006 : Le chef d'Al-Qaida en Irak, Abou Moussab Al-Zarkaoui, est tué dans un raid aérien.

30 décembre : Condamné à mort en novembre, Saddam Hussein est pendu à Bagdad.

 

10 janvier 2007 : M. Bush annonce 30 000 soldats supplémentaires.

26 novembre 2008 : Bagdad et Washington signent un accord de désengagement militaire.

 

1er janvier 2009 : L'Irak prend le contrôle de la "zone verte" à Bagdad.
 


지난 화요일(6/30) 바그다드에서 미군이 빠지고 이라크군이 자체통제시스템을 가동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르뽀1). 그러자마자 이라크 정부는 사담 후세인에 의해서 국유화 됐었던 석유-가스에 대하여 외국 기업들에게 문을 연다고 발표 (르뽀2). 외관상으로는 이라크가 그렇게 주권을 찾아가고 사회기반을 재건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그놈의 석유 때문에 앞으로 험난하게 이어질 그들의 미래가 걱정이라는 듯이 모두들 말한다. 걱정은 그냥 대충 그렇게 말로 해 주면 되는 것이고, 먹이감을 찾는 서구제국주의자들의 행동은 몹시도 재빠르다. 위의 발표가 있은 바로 이틀 후인 목요일 아침 이른 시간, 사르코지는 예고도 없다가 갑자기 총리 프랑수와 퓌용(F.Fillon)을 바그다드로 급파한다, 물론 몇몇의 기업체(당연히 석유관련 이겠지) 사장들을 대동시켜서. 뭔가 여러가지의 계약이 예정돼 있다는데... 이렇게 이라크전쟁 2차전은 시작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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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tien avec P.-F. Moreau (Spinoza 최고전문가)

Entretien avec Pierre-François Mo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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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 quoi sert l’histoire de la philosophie ?
Entretien avec Pierre-François Moreau

par Pascal Sévérac & Ariel Suhamy [30-06-2009]

Domaine : Philosophie.Mots-clés : spinozisme | livre | histoire

Le tome I de la nouvelle édition intégrale des œuvres de Spinoza, contenant les deux ouvrages de jeunesse, est paru cette année aux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ierre-François Moreau, qui dirige cette édition qui fait d’ores et déjà référence, en expose les principes fondamentaux. C’est l’occasion de mettre en lumière ce qu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apporte à la philosophie.
 

À quoi sert l’histoire de la philosophie ?
Entretien avec Pierre-François Moreau / par Pascal Sévérac & Ariel Suhamy

La vie des idées : Le premier tome, dans l’ordre chronologique, paraît des Œuvres complètes de Spinoza au PUF, dans la collection Épiméthée. Deux autres volumes sont déjà parus précédemment : le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et le Traité politique. Quels sont les principes de cette nouvelle édition critique ?

Pierre-François Moreau : il s’agit de tenir compte dans cette nouvelle édition de l’ensemble du travail scientifique qui a été fait sur l’œuvre de Spinoza depuis les grandes éditions précédentes qui remontent à près d’un siècle : celle de Van Vloten à la fin du XIXe et celle de Gebhardt dans les années 1920. Depuis, beaucoup d’eau ou plutôt d’encre a coulé sous les ponts. On a d’une part lu autrement un certain nombre de ses ouvrages, et d’autre part la réflexion philologique a évolué d’une façon telle qu’on ne peut plus lire ses textes comme on les lisait dans ce temps-là. En particulier, nous comprenons mieux le latin de Spinoza, qui parle le latin du XVIIe siècle. Or, il règne dans les éditions critiques du début du XXe siècle une normativité du latin cicéronien : le latin de Spinoza est corrigé en fonction de ce latin classique. L’histoire du latin s’étend sur des siècles et continue à vivre en tant que langue philosophique à l’âge classique, à l’époque de Descartes et Spinoza. Ces auteurs utilisent des références lexicales et syntaxiques beaucoup plus larges que les nôtres : ils trouvent normal d’écrire comme Tacite ou Suétone, et non pas seulement comme Cicéron ou César, et ils rendent ce latin vivant parce qu’ils créent de nouveaux termes pour expliquer ce qu’ils ont à dire en métaphysique, en droit, en politique. Essayer de le réduire artificiellement à une norme scolaire sous prétexte de le corriger, cela nous empêche de le lire réellement. La première chose à faire est donc de sauter par dessus un certain nombre d’innovations du XIXe siècle et de revenir aux éditions antérieures. À beaucoup d’égards, notre édition est plus proche des premières éditions que des suivantes, paradoxalement.

Il y a eu deux révolutions dans la lecture spinoziste à partir des années 1960, la révolution philologique (Akkerman, Steenbakkers aux Pays-Bas, Mignini, Proietti en Italie, etc.), et la révolution philosophique qui s’est mise à prendre au sérieux la pensée de Spinoza dans ce qu’elle a de systématique. Un certain nombre de choses qui paraissaient simplement bizarres quand on voulait lire Spinoza comme un cartésien ou comme un néo-platonicien, conduisaient à transformer son texte pour qu’il se conforme à l’idée qu’on se faisait de ce qu’il aurait dû dire, alors que depuis les grands travaux d’Alexandre Matheron, de Sylvain Zac, de Martial Gueroult, et de quelques autres, nous sommes habitués à penser que s’il dit quelque chose qui ne ressemble pas à du Descartes, ce n’est pas forcément une faute, quelque chose qu’il faut essayer d’interpréter autrement, mais que c’est une conséquence de sa pensée, et qu’il faut la prendre au sérieux en tant que telle, dans ce qu’elle peut avoir de massif, d’étonnant, voire de rebutant, parce que lire un auteur c’est cela aussi, l’accepter dans son originalité et sa spécificité.

La vie des idées : Ces grandes interprétations ont renouvelé la lecture même du texte et inspiré cette nouvelle édition. Mais alors, est-il possible de distinguer dans une telle édition l’aspect philologique de l’interprétation ? Peut-on vraiment rester en deçà de l’interprétation ?

Pierre-François Moreau : Oui, c’est relativement possible. Nous avons comme principe de séparer les deux, en particulier nous tenons à ce que les notes soient essentiellement historico-critiques. Il y a l’établissement du texte, puis l’annotation qui vise deux buts : d’une part fournir au lecteur de quoi lire les infra-textes de Spinoza. Spinoza a appris le latin très tard, il l’a appris comme on l’apprenait au XVIIe siècle, en lisant les auteurs classiques. Sa maîtrise du latin est à la fois forte – il arrive à dire ce qu’il veut dire – et compliquée : il a tendance à s’appuyer sur des phrases et des formules toutes faites. Il y a sous son texte toute une culture latine qui lui sert à s’exprimer. Nous qui ne baignons pas dans ce latin-là, nous avons besoin de savoir quelle est la phrase de Térence ou de Tacite qui apparaît sous son texte ; non qu’il veuille dire la même chose, mais il est intéressant de voir comment il modifie la phrase pour exprimer sa pensée, qui arrive à se glisser dans la phrase qu’il emprunte à un auteur. C’est le premier but des notes : fournir cette littérature latine dont se sert Spinoza. Le second, c’est de comparer à d’autres passages qui parlent d’un même thème ; fournir aussi les références aux autres auteurs, en laissant le soin au lecteur d’interpréter les différences. Enfin il y a toutes les allusions historiques et bibliques qu’il n’est pas inutile d’expliquer de nos jours. Tout cela fournit du matériel, ce n’est pas interprétatif. La part de l’interprétation, je dirais qu’elle est négative. Elle consiste à dire : attention, telle phrase qui vous paraît bizarre et qu’en bon cartésien ou lecteur de Thomas d’Aquin vous voudriez modifier, il existe une lecture de Spinoza qui nous apprend que cette phrase peut tenir telle quelle. Ce n’est pas la peine de torturer la phrase pour la faire ressembler à tel auteur antérieur ou contemporain.

Le partage entre philologie et interprétation se fait entre ces deux lignes de démarcation : d’une part séparer matériel et interprétation, et d’autre part usage négatif de l’interprétation, pour dire que le texte de Spinoza offre plus de possibilités que ce qu’ont pu croire les précédents éditeurs.

La vie des idées : Qu’en est-il maintenant des principes de la traduction ?

Pierre-François Moreau : Ils sont très simples. On part du principe que Spinoza, comme tout philosophe, s’exprime dans un lexique relativement stable. Cela ne veut pas dire que tous les textes spinoziens sont de la même intensité lexicale. Il y a deux pôles : un pôle systématique avec une série de termes qui renvoient à un champ sémantique dans lequel est prise une expression de sa pensée. Substantia, imperium, libertas, etc. ont une signification forte, qui n’est peut-être pas constante, mais qui varie dans des limites conceptuelles. À côté de cela, il y a la langue ordinaire. Ce serait trop simple, bien entendu, si l’on pouvait diviser le texte en ces deux catégories : il y a toute une série de degrés. Le rôle du traducteur est de jouer sur ces degrés et d’arriver à rendre au maximum une équivalence. C’est pourquoi le vieil axiome selon lequel le traducteur est un traître est parfaitement faux. C’est là une vision spiritualiste de la traduction. En réalité on peut très bien traduire sans trahir. Le degré de fidélité du traducteur renvoie à son degré de réflexion sur la conceptualité du texte. Celle-ci ne consiste certainement pas à rendre un mot latin par un mot français, car le mot latin peut correspondre à plusieurs mots, par exemple, le mot imperium renvoie à deux champs sémantiques classiques : le champ militaire (le commandement), et un domaine juridico-politique. Il est parfaitement légitime d’utiliser deux termes. Ensuite à l’intérieur d’un même champ sémantique, ce serait une erreur de le traduire par un très grand nombre de mots différents ; mais d’un autre côté ce serait une erreur de le traduire toujours par le même terme, ce qui reviendrait à tordre la langue d’arrivée. Il faut alors choisir un petit nombre de termes et les indiquer au lecteur. Par exemple, imperium au sens juridico-politique peut être traduit par « État » et « souveraineté ». Et ensuite il faudra éviter de traduire par un même mot français plusieurs mots latins. Sinon le lecteur risque de reconstruire une cohérence fausse en s’appuyant sur une permanence lexicale qui n’existe pas dans le texte latin. À cela s’ajoute la nécessité de constituer un glossaire qui permet d’exposer les choix que le traducteur a faits. Donner au lecteur les clefs et les conditions de sa lecture, c’est lui donner les possibilités d’une lecture scientifique.

La vie des idées : Dans le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Spinoza expose des règles d’interprétation de l’Écriture sainte. Peut-on s’en servir pour établir une édition spinoziste de Spinoza, ou est-ce sans rapport, d’abord parce qu’il ne s’agit pas d’interpréter et ensuite parce que les textes de Spinoza ne sont pas du même ordre ?

Pierre-François Moreau : La question est compliquée. Spinoza ne donne pas de règles d’édition. Certes on peut lire dans ses règles d’interprétation quelque chose comme des règles d’édition. À ce niveau-là, la règle qu’il donne : ne pas intervenir dans le texte, ne pas substituer nos imaginations au texte, c’est évidemment ce que nous tenons dans notre propre édition. De même, les règles de commentaire historique qu’il donne pour la Bible sont valables pour tout type de livre. La différence est que le statut de la Bible n’est pas celui d’un texte comme le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Le point de départ est que la Bible a des auteurs différents, nous ne pouvons donc pas présupposer qu’ils disent la même chose d’un bout à l’autre. Au contraire, les textes de Spinoza sont du même auteur, et nous devons supposer que chacun de ces textes a une cohérence interne. Il y a donc des règles de systématicité qu’on ne peut pas appliquer à la Bible, mais seulement à la lecture de l’Éthique ou du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Maintenant, on pourrait transposer la question de l’hétérogénéité à la biographie intellectuelle et se demander s’il n’y a pas entre les différents ouvrages de Spinoza une évolution, et donc une différence qui correspondrait – à une échelle très limitée – à celle des auteurs de la Bible. D’autre part il y a une différence essentielle : aux yeux de Spinoza la Bible est un ouvrage d’imagination ; ce n’est pas le cas de ses propres écrits.

La vie des idées : Quel rapport y a-t-il entre ce travail d’histoire de la philosophie qui se fonde sur l’établissement des textes et l’actualité du spinozisme aujourd’hui en neurobiologie, en sciences sociales, en politique ? Des penseurs comme Étienne Balibar, Toni Negri, Frédéric Lordon utilisent couramment la référence spinoziste. Y a-t-il une communauté entre ces deux activités ?

Pierre-François Moreau : Je disais tout à l’heure qu’il y avait eu deux révolutions dans la lecture spinoziste, philologique et philosophique. On assiste depuis dix ans à une troisième révolution qui est liée aux deux premières : le fait de relire les textes, de se rendre compte qu’il y a une force productive dans la pensée de Spinoza, cela amène à lire Spinoza en dehors de Spinoza, à se dire que si sa méthode fonctionne, si fonctionne sa façon d’aborder les objets théoriques que sont l’État, les passions, l’Écriture sainte, cela peut aussi marcher pour comprendre ce que c’est que la connaissance, la psychologie, une entreprise, le capital, la société de nos jours etc. De sorte que les chercheurs en sciences sociales ou cognitives s’intéressent effectivement à Spinoza non plus pour le commenter mais aussi pour avoir ce qu’ils pensent être une démarche spinoziste en sociologie, en économie ou ailleurs. Cette troisième révolution me paraît tout à faire cohérente avec les deux précédentes.

Pourquoi maintenant Spinoza sert-il de référence aux sciences humaines ? Même quand elles se proclamaient non philosophiques, elles avaient une philosophie implicite, qui était souvent une philosophie de la causalité simple, de type cartésien, ou encore une philosophie expressiviste, où chaque niveau du social reflète un autre niveau du social, c’est-à-dire de type leibnizien. Les sciences sociales ont très longtemps fonctionné ainsi, sur des modèles analogues. Et puis on s’est rendu compte que ça ne marchait pas et que le modèle spinoziste pouvait non seulement expliquer certains phénomènes, mais aussi, d’abord, tout simplement les faire apparaître. Des choses qui étaient invisibles à partir d’un certain discours devenaient visibles et donc réclamaient une explication. L’intérêt de la démarche spinoziste, c’est non seulement d’expliquer ce qu’on connaît déjà, mais aussi de nous donner à voir ce qu’il faut expliquer, avant même d’expliquer. Cela fait comprendre le renouveau du spinozisme en dehors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et des cercles proprement philosophiques.

Ce qui serait intéressant c’est de savoir si les premiers écrits auront un tel effet. Aujourd’hui ces renouveaux se fondent sur l’Éthique (l’illusion, la critique de la finalité, etc.) et les traités politiques. Or, le Traité de la réforme de l’entendement réfléchit non pas tant sur la méthode que sur la fiction, sur la manière de s’en délivrer ou de l’utiliser pour produire des idées justes. Il serait intéressant de savoir si les sciences humaines font le même usage de la fiction. Spinoza se pose la question en ce qui concerne les sciences de la nature : on pourrait exporter ces questions dans les sciences humaines. Dans le Court Traité, on trouve une première réflexion sur l’ontologie de la puissance, qui ne se présente pas encore sous forme géométrique, ce serait intéressant de voir si elle peut engendrer une réflexion sur les formes de puissance à l’œuvre dans le psychisme, dans l’inconscient, dans la société, dans les relations de pouvoir etc. Ce que j’espère, c’est que cette édition qui permet de lire ces textes sous une forme renouvelée, entraîne une nouvelle révolution, par son exportation dans des domaines scientifiques qui sont à la recherche de nouveaux modèles.

La vie des idées : On a aujourd’hui tendance à opposer une histoire de la philosophie qui s’occuperait essentiellement d’exégèse, à une pratique philosophique (notamment la philosophie dite analytique) qui s’occuperait « vraiment » de philosophie. Comment les deux s’articulent-ils ? Faire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est-ce encore faire de la philosophie ?

Pierre-François Moreau : La frontière n’est pas si étanche, d’abord, parce qu’on voit une certaine philosophie analytique se pencher sur l’histoire de la philosophie, et les discussions peuvent être instructives. Mais on peut se demander en effet à quoi sert l’histoire de la philosophie et s’il ne vaudrait pas mieux faire de l’économie ou de l’informatique… Je pense qu’il faut faire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Il me semble qu’on a au moins deux raisons de l’enseigner et de la pratiquer. D’abord, pour savoir ce que nous sommes, d’où nous sortons, quelle est notre identité. On parle beaucoup aujourd’hui d’identité. Mais une identité est produite par l’histoire, en particulier, dans l’histoire européenne qui est la nôtre par ce qui s’est passé entre la Renaissance et la Révolution française, c’est là que s’est mis en place une nouvelle façon de regarder le monde, une nouvelle explication du monde physique, une nouvelle façon de regarder le citoyen et l’État, sur laquelle nous vivons encore. C’est là aussi que s’est fondée notre conception de la religion comme institution privée, relativement séparée de l’État. Tout ce qui s’effectue à l’âge classique, nous vivons encore dessus, que nous le sachions ou non. D’autre part la philosophie de cette époque est faite à partir de la réflexion sur ce qui se passe dans les sciences, et dans les autres secteurs théoriques. La philosophie n’est jamais qu’un des domaines de l’histoire des idées, qui entretient des rapports spécifiques avec les autres domaines, qui les remanie, leur emprunte des concepts, etc. Faire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c’est faire, directement ou indirectement, l’histoire de tout cela. Faire de la philosophie, c’est donc faire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Simplement on le sait ou on ne le sait pas. Je pense qu’il vaut mieux le savoir.

Propos recueillis par Pascal Sévérac & Ariel Suhamy [30-06-2009]

Si vous souhaitez critiquer ou développer cet article, vous êtes invité à proposer un texte au comité de rédaction. Nous vous répondrons dans les meilleurs délais : redaction@laviedesidees.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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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da의 죽음, 그리고 1주일 (이란)

지난 토요일(6/20) 시위 현장에서 민병대가 쏜 총알을 맞은 네다(Neda)라는 26세(*)의 젊은 이란 여성이 세상을 떠난지 꼭 한 주가 지났다. 그녀의 죽음이 이란적 정서에서는 순교로 불려진다는데, 그 순교가 어떤 의미있는 작용을 낳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던 그간 1주일의 메모를 옮겨다 둔다. [* 최초정보에서는 16세 소녀라고 나왔었음 - 지난 22일자 포스트 수정 요망]

 

[전문가 인터뷰]
«En Iran, le martyr est aux fondements de la légitimité patriotique»
Liberation-Monde 24/06/2009 à 15h46 (mise à jour à 17h02)
INTERVIEW La mort de Neda, une jeune iranienne, est devenue le symbole à travers le monde des victimes de la répression du régime. Yann Richard, professeur à la Sorbonne Nouvelle, décrypte cette image du martyr.
En quelques heures, la vidéo (attention, ces images peuvent être choquantes) de la mort de Neda Soltani fait le tour du monde. Cette jeune iranienne de 26 ans, étudiante en philosophie, est tuée samedi à Téhéran lors des manifestations contre la réélection de Mahmoud Ahmadinejad. Touchée par un tir à la poitrine, Neda meurt quelques instants plus tard, dans les bras de son père. Les images de sa mort, très crues, deviennent le symbole de la répression. Sur Internet, les hommages à Neda se multiplient. En Iran, le nom de la jeune femme devient le cri de ralliement des opposants, qui brandissent son portrait lors des manifestations de lundi. Neda est-elle devenue une martyre? Que signifie ce terme? Libération.fr a demandé à Yann Richard, professeur à la Sorbonne Nouvelle et auteur de «Iran: naissance d'une république islamique», de répondre à ces questions.

Quel est l'origine de l'image du martyr, très forte dans l'islam chiite (la religion majoritaire en Iran)? / Le chiisme est fondé sur le martyre de l'Imam, comme la rédemption dans le christianisme, fondée sur la Passion du Christ. Cela remonte au massacre de l'imam Hussein à Karbala, dans le sud de l'Irak en 680 de notre ère. C'est l'épisode fondateur du chiisme, branche minoritaire de l'islam, réprimée par la majorité sunnite. Les chiites, pour accéder au salut, doivent participer par le deuil et les pleurs avec le martyr et partager son sacrifice rédempteur.

Quelle est la place du martyr en Iran? / C'est aux fondements de la légitimité patriotique de la République islamique, notamment avec la guerre Iran-Irak dans les années 80. Beaucoup de jeunes militants (entre 350.000 et 400.000 personnes) ont donné leur vie. La mémoire de ces martyrs est constamment réaffirmée pour recentrer l'idéologie qui est à l'origine du régime. Le premier massacre de la révolution a eu lieu le 8 janvier 1978 à Qom, quand les troupes du Shah ont tiré sur la foule. Le deuil, porté le 8e et le 40e jour après la mort, a fonctionné comme un relais symbolique puisque des nouvelles manifestations ont eu lieu pour rendre hommage aux martyrs.

En quoi la mort de Neda participe-t-elle de cette tradition? / C'est très significatif de l'état d'esprit iranien, où ce genre de commémorations a un impact psychologique très intense. A la fin de son prêche, vendredi dernier, le Guide Khamenei a dit qu'il pouvait aller au martyre pour défendre le régime. Le lendemain, Moussavi a affirmé lui aussi qu'il était prêt au martyre et qu'il défendrait la justice. La mort de Neda est réinterprétée dans cette tradition dramatisante. C'est d'autant plus fort qu'il s'agit d'une femme. En outre, le fait qu'un jeune homme se présente comme son fiancé a renforcé la portée de cette mort: Neda a fait le sacrifice de son amour. On peut aussi noter que les jeunes qui manifestent en Iran ne sont pas animés de sentiments religieux débordants, mais ils ne se situent pas en dehors de l'islam. Ils réutilisent le vocabulaire de leurs adversaires.

De manière générale, le martyr est-il souvent utilisé dans l'islam? / Dans l'islam, on ne parle pas de «victime de guerre», mais de «martyr de guerre». Il y a une sacralisation beaucoup plus forte de la mort au combat. Certains voient dans le martyrisme une sorte de justification du terrorisme, par un effet d'entraînement, comme en Palestine. Quand une société est bloquée, on a tendance à prendre le suicide et le don de sa vie comme quelque chose qui va faire avancer sa cause. (Recueilli par SYLVAIN MOUILLARD)

 

(*) 용어해설
Un imam (arabe : imām, إمام, persan : emām, امام, guide, celui qui est devant) est une personne qui dirige la prière en commun.
Un ayatollah (en arabe : آية الله ou en persan : آیت‌الله, signifiant « signe de Dieu ») est l'un des titres les plus élevés décerné à un membre du clergé chiite (mollah)
Mollah ( arabe : mawlān, مولًى, pl. mawâlin, موالٍ aide ; défenseur ; seigneur), mullah, mulla ou mollâ (en persan ملا ; मुल्ला en hindi), ce mot est utilisé pour désigner le clergé chiite.

 

Iran : les femmes en première ligne de la contestation
LEMONDE.FR | 26.06.09 | 20h32  •  Mis à jour le 26.06.09 | 20h44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6/26/iran-les-femmes-en-premiere-ligne-de-la-contestation_1212268_3218.html

(...)
DES DEMI-CITOYENNES

Les femmes avaient déjà joué un rôle lors de la révolution constitutionnelle de 1906 à 1911 et pendant la révolution islamique de 1979. Mais elles restaient minoritaires. Désormais elles sont nombreuses à descendre dans les rues. Cette évolution apparaît comme le miroir des évolutions de la condition des femmes depuis une vingtaine d'années en Iran. Notamment grâce à l'éducation. Elles y ont accès à parité avec les hommes et sont même majoritaires au moment de l'entrée à l'université, selon Farhad Khosrokhavar, directeur d'études à l'EHESS et chercheur au Centre d'analyse et d'intervention sociologiques. L'Iran est aussi un des seuls pays du Proche-Orient où les femmes sont représentées au Parlement, même si elles font partie du camp conservateur et ne revendiquent donc pas de droits supplémentaires.

Mais leur position toujours inférieure a alimenté un fort désir de changement. "Il y a une disparité grandissante entre leur condition juridique et la réalité de leur évolution au sein de la société", souligne Farhad Khosrokhavar. "Sur le plan culturel, elles sont de plus en plus présentes mais elles sont toujours très handicapées par le système juridique iranien."

Leur crispation s'est concentrée sur la personne de Mahmoud Ahmadinejad. "Aux yeux des jeunes filles des grandes et moyennes villes d'Iran, il représente le système de la police des mœurs qu'elles détestent. Il y a donc un antagonisme personnalisé envers lui", estime Farhad Khosrokhavar. Un point de vue partagée par la prix Nobel de la paix iranienne Shirin Ebadi : "A la racine des troubles actuels, il y a le mécontentement et la frustration face à une détresse qui date d'avant l'élection", a-t-elle déclaré dès les premiers temps du mouvement de contestation. "La présence des femmes est proéminente [dans les manifestations] parce qu'elles sont la catégorie la plus mécontente de la société."

LE CHANGEMENT QUOI QU'IL ARRIVE
Selon des témoins, elles ont été une cible délibérée pour les milices bassidjis. Elles sont tombées aux côtés des hommes et ont contribué à la médiatisation du mouvement. Surtout après la mort de Neda Agha Soltan, présentée comme la première femme-martyr du mouvement après que la vidéo de sa mort a fait le tour d'Internet.

Quel que soit le président qui sortira des événements actuels en Iran, le sort des femmes pourrait en être modifié. D'aucuns craignent un violent retour en arrière si Ahmadinejad conserve le pouvoir, son premier mandat ayant été marqué par de nouvelles restrictions des droits des femmes. Mais selon le chercheur Farhad Khosrokhavar, "la cassure s'est effectuée à parité". "Pour que les droits des femmes évoluent, il faudra qu'elles revendiquent leurs droits. Mais le premier pas est franchi. L'égalité totale est encore loin, mais symboliquement quelque chose s'est produit qui pourrait faire bouger l'ensemble du système." (Antonin Sabot avec AP)

 

En Iran, la contestation se poursuit alors que le Conseil des Gardiens de la constitution a rejeté

 

[6/22月] 무사비에게 가해지는 압력: 무사비 지지 신문의 기자 25명 체포; 그 중 5명의 여성은 화요일 저녁에 풀려남. 한편 보수 언론들은 시위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무사비에게 돌리는 중이라 함
En Iran, Moussavi sous pression (Liberation Monde 24/06/2009 à 13h13)
L'information remonte à lundi, mais on ne l'apprend qu'aujourd'hui. Les autorités ont arrêté quelque 25 journalistes et membres du personnel du quotidien Kalemeh Sabz du candidat malheureux Mir Hossein Moussavi, selon un membre de la rédaction en chef du journal. La police affirme que des «documents prouvant l'existence d'un complot contre la sécurité nationale» ont été trouvés lors de cette descente au siège du journal, qui était aussi le siège de Mir Hossein Moussavi lors de la campagne électorale. D'après un membre de la rédaction, Alireza Beheshti, cinq femmes qui faisaient partie des personnes arrêtées ont été libérées mardi soir. Zahra Rahnavard, la femme de Mir Hossein Moussavi, a demandé ce mercredi la libération des personnes arrêtées ces derniers jours, selon le site de campagne du candidat. Le quotidien, autorisé peu avant le scrutin présidentiel du 12 juin, a été interdit au lendemain du scrutin.
Par ailleurs, deux quotidiens ultraconservateurs ont lancé de violentes attaques contre Moussavi. «Vague populaire pour demander à Moussavi des comptes sur le sang versé», écrit en Une le quotidien Kayhan. Le quotidien Vatan Emrouz, proche du gouvernement, écrit en titre: «Qui est responsable des crimes de cette semaines à Téhéran?» «Moussavi est responsable du sang versé de mon fils et je le poursuivrai jusqu'à ce que mon droit soit obtenu», ajoute le journal citant le «père d'un martyr Ghanian» tué selon ce média lors des manifestations des derniers jours. (Source AFP)

 

[6/23火] 이란 내무장관은 '시위대가 CIA와 정권 반대파 망명자들에게서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고 밝힘. 외무장관은 이란과 영국이 서로 외교관을 추방한 데 이어서 영국과의 관계 수준을 줄여나갈 계획이라고 천명. 정보장관은 몇몇 영국여권 소지자들이 시위대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밝힘.
Iran: le régime dénonce des émeutiers financés par la CIA (Liberation Monde 24/06/2009 à 12h42)
Le pouvoir multiplie les accusations à l'encontre des régimes occidentaux. La Grande-Bretagne et les Etats-Unis sont au coeur des critiques. [Un manifestant iranien devant l'ambassade de Grande Bretagne le 23 juin 2009 à Téhéran (© AFP photo AFP) -생략-]
Après avoir durci le ton ce week-end à l'encontre la Grande-Bretagne, les dirigeants iraniens persistent. Le ministre de l'Intérieur Sadegh Massouli a dénoncé les «émeutiers» manifestant contre la réélection de Mahmoud Ahmadinejad, qui auraient selon lui reçu des fonds de la CIA américaine et de l'opposition en exil.
Le ministre des Affaires étrangères Manouchehr Mottaki a lui déclaré que Téhéran envisageait de réduire le niveau de ses relations avec la Grande-Bretagne, alors que Londres et Iran ont expulsé chacun des diplomates de l'autre pays. Il a également confirmé qu'il ne se rendrait pas en Italie pour une réunion sur l'Afghanistan en marge d'une rencontre du G8 à Trieste (nord-est d'Italie), du 25 au 27 juin.
Enfin, le ministre des Renseignements Gholamhossein Mohseni-Ejei a déclaré pour sa part à l'agence Fars que certains porteurs de passeports britanniques avaient «eu un rôle dans les émeutes». (Source AFP)

 

[6/24 水] 수요일에 다시 시작된 시위대와 경찰의 대결국면, 그러나 언로가 막혀 정확한 소식은 모르고 몇몇 증언들에 의해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는데, 물론 과장도 많겠고 영-미 권의 것에는 왜곡도 있겠다.
AFFRONTEMENTS MERCREDI À TÉHÉRAN
A Téhéran, la journée de mercredi a été marquée par de nouveaux affrontements. La situation reste toutefois assez confuse car l'information ne parvient aux rédactions occidentales que via des témoins. Selon ces derniers, quelques centaines d'Iraniens se sont réunis dans la capitale, près du Parlement. Selon des sources citées par le Guardian, la ville a même été le théâtre de "scènes de guerre" : la police, appuyée par des hélicoptères, a chargé les manifestants et usé de gaz lacrymogènes et de matraques pour les frapper. Des témoins affirment avoir entendu des détonations et indiquent que plusieurs personnes ont été arrêtées. Le New York Times rapporte qu'une jeune fille aurait été tuée lors de cette journée de répression. Un Iranien a envoyé cette vidéo sur le site de partage YouTube, mercredi 24 juin, dans laquelle on entend des détonations.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6/25/iran-des-manifestations-violemment-reprimees_1211082_3218.html#ens_id=1190750 [6/24,25일 분]

 

[6/25木] 무사비에게 정부차원의 압력이 계속 가해지지만, 무사비는 항의시위를 이어갈 것을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함. 한편 몽타즈리(1922~)라는 이슬람의 상당히 중요한 한 수장도 시위를 계속하여 현 정부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했다는데, 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이슬람 지도부에 반기를 들어 1997년부터 2003년까지 감호상태에 있기도 했다 함.
La régime iranien accentue la pression sur Mir Hossein Moussavi
LEMONDE.FR | 25.06.09 | 09h04  •  Mis à jour le 25.06.09 | 14h08 
A Téhéran, le bras de fer entre le pouvoir et l'opposition se poursuit. Mir Hossein Moussavi, le chef du mouvement de contestation de la réélection du président iranien Mahmoud Ahmadinejad, a déclaré, jeudi 25 juin, qu'il est "sous pression" pour retirer sa demande d'annulation de la présidentielle du 12 juin, selon son site Internet. "Rien ne pourra m'empêcher d'obtenir des droits pour le peuple iranien, a ajouté M. Moussavi, à cause d'intérêts personnels ou de la peur des menaces. Je suis prêt à faire la démonstration que les délinquants de l'élection se sont tenus aux côtés des instigateurs des récentes émeutes et ont versé le sang". M. Moussavi s'est retrouvé un peu plus isolé cette semaine car un autre candidat qui contestait jusqu'ici la régularité du scrutin, Mohsen Rezaï, a retiré sa plainte auprès du Conseil des gardiens. A cela s'ajoutent les arrestations de plusieurs de ses proches et de journalistes de son quotidien, Kalemeh Sabz. Plusieurs centaines de personnes ont été arrêtées en Iran depuis le début des troubles, dont au moins 140 hommes politiques, universitaires, étudiants et journalistes, selon plusieurs sources. Aucun chiffre n'a été rendu public pour rendre compte de l'ampleur des arrestations à travers le pays, alors que des ONG implantées à l'étranger ont fait état de nombreuses interpellations dans des villes comme Tabriz ou Shiraz.
Le grand ayatollah Hossein Ali Montazeri(*), dont le rang est le plus élevé dans le clergé chiite iranien et l'influence importante, a pour sa part averti que si la répression des manifestations pacifiques se poursuit, elle pourrait faire tomber le gouvernement. "Si le peuple iranien ne peut pas revendiquer ses droits légitimes dans des manifestations pacifiques et est réprimé, la montée de la frustration pourrait éventuellement détruire les fondations de n'importe quel gouvernement, aussi fort soit-il", a-t-il déclaré. L'ayatollah Montazeri a déjà dénoncé la réélection du président Ahmadinejad et manifesté sa défiance envers le régime et le Guide suprême, Ali Khamenei. Il appelle désormais ses compatriotes à poursuivre leur mouvement. M. Ahmadinejad demande, quant à lui, au président américain Barack Obama de cesser de "s'ingérer" dans les affaires de l'Iran, a indiqué l'agence de presse Fars.

(*)L'ayatollah Hossein Ali Montazeri ( حسینعلی منتظری en persan), né en 1922, est un des hauts dignitaires chiites iraniens. Il participa activement à la Révolution islamique en Iran puis à l'élaboration de la constitution iranienne de 1979 et à l'instauration d'une théocratie en Iran grâce au système du Velayat-e-Faghih. Il est pourtant aujourd'hui, le principal dissident religieux en Iran. Il a été placé en résidence surveillée entre 1997 et 2003 pour avoir critiqué le Guide suprême et pour avoir plaidé en faveur de la séparation de la religion et de la politique. Il a été mis en résidence surveillée dans sa maison à Qom, principale ville religieuse de l'Iran. Malgré ces restrictions, il a régulièrement publié des communiqués pour défendre la liberté et la démocratie ainsi que les réformes présentées par le président iranien Mohammad Khatami.

 

[6/26金] 이태리에서 G8 모임이 어제 있었고, 러시아는 이란의 고립을 원치않는다고 했다 함. 이란의 이웃나라로서의 아프가니스탄도 초대를 받았고, 역시 초대된 이란은 불참을 알려왔다 함. 한편 어제 이란 공공방송은 선거 반발 시위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2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함.
TRIESTE, Italie (AFP) - La Russie a mis en garde contre le risque d'"isoler" le régime de Téhéran alors que Rome et Paris appellent à une position "ferme" sur les violences post-électorales en Iran lors de la réunion du G8 qui s'est ouverte jeudi soir à Trieste (Italie). (...) La télévision publique iranienne a fait état jeudi de 20 morts depuis le début des troubles qui ont suivi la réélection contestée du président ultra-conservateur Mahmoud Ahmadinejad. (...) L'Iran, pays voisin de l'Afghanistan, avait été invité à Trieste par l'Italie avec le feu vert de Washington avant que les troubles n'éclatent, la réunion devant être largement consacrée à la stabilisation de l'Afghanistan et du Pakistan. Las d'attendre une réponse à son invitation, Rome l'a finalement retirée avant que Téhéran ne confirme qu'il serait absent. Une réunion du Quartette (Etats-Unis, UE, Russie et ONU) est également prévue vendredi. Le G8 de Trieste se terminera samedi à mi-journée par une déclaration finale. © 2009 AFP

 

[6/27土]무사비의 측근들을 압박하는 이란 경찰: 체포, 출국금지...
Iran : la police s'intéresse à plusieurs proches de Moussavi
LEMONDE.FR avec AFP | 27.06.09 | 15h50  •  Mis à jour le 27.06.09 | 16h00 
Plusieurs personnalités ou organismes réputés proches du candidat à la présidentielle Mir Hossein Moussavi ont été inquiétés par la police ces derniers jours, a rapporté, samedi 27 juin, le quotidien réformateur iranien Etemad Melli. Le siège du parti Kargozaran, qui avait soutenu Moussavi lors de l'élection du 12 juin, a ainsi fait l'objet d'une perquisition des forces de sécurité qui ont emporté des documents et des ordinateurs. Par ailleurs, selon le site internet d'Etemad Melli, un membre de la campagne de M. Moussavi, Ghorban Behzadian-Nejad, a été arrêté mercredi et n'a toujours pas été relâché. Enfin, Abolfazl Fateh, le responsable des relations publiques de la campagne de M. Moussavi, a affirmé qu'il faisait l'objet d'une "interdiction de quitter le territoire iranien".

 

반대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Iran: quel avenir pour les protestataires ? (Liberation Monde 23/06/2009 à 18h12)
Durement réprimée par le régime, la mobilisation des Iraniens contre la réélection de Mahmoud Ahmadinejad révèle néanmoins un mouvement de contestation profond, qui devra s'organiser pour durer. SYLVAIN MOUILLARD
A peine quelques milliers de manifestants à Téhéran, hier. La répression sanglante des manifestations par le régime iranien a forcé les contestataires à trouver «de nouvelles formes de résistance», selon Azadeh Kian-Thiébaut, chercheuse à l'Unité de recherche sur le monde indo-iranien du CNRS. Libération.fr fait le point sur les difficultés rencontrées par les militants réformateurs, ainsi que sur les évolutions possibles de ce mouvement.

Une opposition affaiblie
L'Iran dispose d'un vaste réseau d'associations (28.000) au sein de la société civile, ainsi que d'un certain nombre de partis réformateurs. Mais actuellement, ces organisations ne sont pas assez fortes et structurées pour ancrer un mouvement de protestation durable. Quant aux syndicats, ils ont perdu de leur influence et portent essentiellement des revendications corporatistes. Comme l'explique le géographe du CNRS Bernard Hourcade, la mobilisation actuelle passe davantage par des «cercles d'amis, très populaires, des réseaux de solidarité de cinq, dix personnes. Ces clubs informels ne compensent pas l'action des syndicats, mais ils permettent de mobiliser des foules importantes pour les rassemblements».


Un leader de crise
«Le chat d'appartement est devenu tigre»: c'est la phrase qui revient souvent à propos de Mir Hossein Moussavi. Cet ancien Premier ministre de Khomeiny, entre 1981 et 1989, passait plutôt pour un bon gestionnaire, proche du régime. Peu charismatique, il a néanmoins su profiter de son image d'homme intègre pour s'imposer: «Les gens ont découvert quelqu'un de très déterminé, qui a su s'entourer de spécialistes et s'imposer comme l'homme d'une situation de crise», souligne Azadeh Kian-Thiébaut. Bernard Hourcade tempère néanmoins: «Il est le représentant d'un mouvement qui le dépasse. Il manque également d'un réseau». Par ailleurs, les arrestations massives des leaders d'opposition depuis dix jours ont encore plus compliqué la tâche.

Difficulté de passer au politique
«On a assisté à un mouvement spontané sans organisation forte. Il existait un consensus de révolte, notamment contre la fraude électorale. Mais faute d'organisation solide derrière, la répression a été facilitée», note Bernard Hourcade.

Le chercheur estime que la province iranienne partageait globalement la même colère vis-à-vis des manipulations électorales. «En 30 ans, la société iranienne a beaucoup changé. Le territoire s'est homogénéisé, les gens sont éduqués», explique-t-il.

Mais le passage d'une transformation sociologique à un mouvement politique n'est pas évident. «Il y a des protestations très fortes partout, mais cela ne veut pas dire que c'est de nature révolutionnaire», souligne Bernard Hourcade, pour qui «la remise en cause de la République islamique n'est pas à l'ordre du jour. Les Iraniens sont très prudents, ils savent qu'on ne fait pas une révolution tous les 30 ans. Ces derniers jours, le mot d'ordre dans les défilés était à la maîtrise des slogans».


Les modes d'action
Comme l'écrit Time, les musulmans chiites portent le deuil aux troisième, septième et quarantième jours après la mort. Après la mort de nombreux manifestants le week-end dernier, ces moments pourraient être l'occasion de relancer la mobilisation. Bernard Hourcade estime néanmoins que les conditions pour une manifestation collective du deuil ne sont pas réunies: «Les tués sont dispersés géographiquement. En outre, il semble que les corps ont été confisqués de manière préventive».

Quant à l'hypothèse d'une grève générale, évoquée par Moussavi, elle pourrait être fortement suivie au sein du secteur public et de l'administration, selon Azadeh Kian-Thiébaut.

Plus sceptique, Bernard Hourcade estime que cela «était possible à l'époque du Shah, quand il y avait encore une certaine syndicalisation autour du Parti communiste». Mais ce tissu syndical n'existe plus aujourd'hui, tout comme le réseau du bazar: «Les commerçants du bazar, auparavant, étaient très liés au clergé. C'était un réseau social,économique, religieux. Désormais, les bazaris travaillent dans leurs tours en verre...», détaille le chercheur.

Des revendications profondes
«Ce mouvement n'aboutira pas du jour au lendemain. La révolution iranienne de 1979 avait commencé trois ans plus tôt et a pris différentes formes», rappelle Azadeh Kian-Thiébaut.

Il existe néanmoins aujourd'hui des tendances de fond contre la politique menée par Ahmadinejad et ses partisans. Elles portent sur l'appauvrissement des classes moyennes, l'isolement du pays sur la scène internationale, les restrictions des libertés.

«Moussavi est le porte-voix de ces contestations. Avec ou sans lui, la mobilisation continuera, notamment par des mouvements de grève ou de désobéissance civile», conclut la chercheuse.

Bernard Hourcade remarque quant à lui qu'un certain nombre de leaders (Rafsandjani, Rezai, Laridjani, Ghalibaf) restent «en réserve de la République, afin éventuellement d'intervenir dans quelques mois si les traces de la crise sont encore trop viv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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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공화국'과 '근본주의독재'와의 갈림길

1 2

1. Ayatollah Mesbah Yazdi.

2. Mohammad Khatami au Forum de Davos, le 25 janvier 2007

 

1. 메스바 야즈디(1934~): 대표적 이슬람근본주의 이론가-방어자 (이슬람공화국에서 공화국을 빼고 순수한 이슬람 국가를 선호).
Ayatollah Mohammad-Taqi Mesbah Yazdi (en persan : محمد تقی مصباح یزدی), né en 1934, est un membre du clergé chiite iranien et un homme politique. Il pense qu'il faut convertir la république islamique en gouvernement islamique. De plus, il est contre le pluralisme. Mesbah Yazdi est aujourd'hui le principal théoricien du fondamentalisme islamique en Iran. Le président Khatami l'a une fois appelé le théoricien de la violence. Ayatollah Mesbah Yazdi est généralement considéré comme le mentor idéologique du président Mahmoud Ahmadinejad.

1-1. 아마디네자드: 2005~2009 대통령 (메스바 야즈디를 이념적-정신적 지주로 삼음)
Mahmoud Ahmadinejad (en persan : محمود احمدی نژاد), né le 28 octobre 1956 à Aradan, un village proche de Garmsar, bourgade située à 90 km de Téhéran[2], est un homme politique iranien. Maire de Téhéran du 3 mai 2003 au 28 juin 2005, il est aujourd'hui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islamique d'Iran depuis le 3 août 2005, officiellement réélu le 12 juin 2009 pour un second mandat à l'issue d'un scrutin à la régularité fortement contestée par l'opposition. Il est membre de la Société islamique des ingénieurs, mais possède une base plus puissante dans l'Alliance des bâtisseurs de l'Iran islamique (Abadgaran) et est considéré comme un des personnages les plus importants de l'alliance des conservateurs.

 

2. 카타미: 1997~2005 대통령(재직시 많은 개방정책을 추진); 2009년 대선에서 무사비를 지지코자 후보 사퇴.
Seyyed Mohammad Khatami (en persan : سید محمد خاتمی), né le 2 septembre 1943 à Ardakan, dans la province de Yazd, est un homme politique iranien. Longtemps ministre de la Culture et de l’Orientation islamique, il est président de l'Iran du 2 août 1997 au 3 août 2005.il annonce qu'il se porte candidat à l'élection présidentielle de 2009[2]. Mais le mois suivant, il indique qu'il se retire pour ne pas contribuer à disséminer les voix de l'électorat modéré et qu'il soutient la candidature de Mir-Hossein Mousavi face au président conservateur sortant, Mahmoud Ahmadinejad.

2-1. 무사비: 1981~1989 총리(하메네이 대통령 재직기); 개혁진영의 기수, 그러나 이슬람+공화국(호메이니 혁명이념) 견지.
Mir Hossein Moussavi (en persan : میرحسین موسوی), né le 29 septembre 1941 à Khameneh (Azerbaïdjan oriental), est un homme politique iranien. Premier ministre de la République islamique d’Iran de 1981 à 1989, il est candidat à l'élection présidentielle de 2009, soutenu par les principaux partis « réformateurs ».

 

그러니까, 지금 이란의 정치-사회 상황이 갖는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보수냐 개혁이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슬람공화국이냐 순수이슬람국가냐'의 보다 근본적이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아래의 분석은 설명한다. '이슬람과 공화국의 융합'은 1979년 혁명 이후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로 이어지며 지금까지의 이란 국가 정체성을 나타내는데, 여기서 '공화국'을 빼버리고 순수하고 강건한 '이슬람 근본주의 독재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있고, 이 두 진영의 전쟁이 지금의 이란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사비 지지자들도 '혁명기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창한다고).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그룹의 대표자가 메스바 야즈디(1번)이고, 그는 아마디네자드(1-1)의 정신적-이념적 지주로서 역할한다고 함(아마디네자드는 야즈디와 하메네이의 절충점에 있다고). 야즈디가 갖는 이러한 근본주의적 사고는 일찍이 호메이니의 '이슬람 공화국' 주의에도 반대를 했었고, 카타미(2번)의 대통령 재직 기간(1997~2005)에 행해진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함. 그래서 차선책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택한 것이 아마디네자드라는 대안이라고 한다. 카타미가 지지하는 무사비 보다는 야즈디를 정신적 지주로 삼는 아마디네자드가 훨씬 낫다는 말이겠다. 그러므로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이슬람 공화국이 [이슬람 근본주의] 독재로의 선회"(아래 글의 제목) 과정이라고 봐야한다는 말인데, 이건 단순히 시위장에서 외치는 자유와 민주주의 등의 문제를 뛰어넘는(혹은 전재가 되는), '종교와 정치(or 전제주의와 공화국주의)'라는 낡았으나 지난하고 아주 중요했던 역사의 대결장으로 반복되는 초대가 아닌가!

 

 

En Iran, la République islamique vire à la dictature
Analyse Election. Les ultras excluent du jeu politique toutes les autres tendances.
JEAN-PIERRE PERRIN
 
L’Iran est-elle encore une république islamique ? La décision prise hier par le Conseil des gardiens de la Constitution de valider les élections du 12 juin, en dépit d’une fraude massive organisée de longue date, permet de répondre non. La question se posait déjà depuis que le Guide suprême, l’ayatollah Ali Khamenei, avait annoncé la victoire du président sortant, Mahmoud Ahmadinejad, avant la fin du dépouillement des urnes. Elle s’était reposé vendredi lorsque le même dignitaire avait écarté, dans son prêche, toute possibilité de trucage du scrutin.

 

A la soviétique.
Jusqu’à présent, les élections - présidentielles, législatives, municipales… - permettaient aux différentes factions du régime de se mesurer et de se partager le pouvoir sous le regard du Guide, théoriquement neutre. Avec ce coup de force, un quasi-coup d’Etat, la faction la plus radicale a montré qu’elle ne voulait plus de ces scrutins qui avaient tout de même permis, en 1997 et 2001, l’élection de Mohammad Khatami, un Président plus ouvert et plus libéral que ses prédécesseurs.

Cette fois, elle n’a même pas cherché à donner une apparence de crédibilité à l’élection du 12 juin, où Ahmadinejad triomphe avec un score à la soviétique. Désormais, la faction ultra a exclu du jeu politique toutes les autres tendances du système. Elle règne sans partage sur tout l’Iran.

Pourtant, c’est sans doute à tort que le Guide suprême apparaît comme le mentor d’Ahmadinejad. En fait, tout oppose les deux hommes. Le premier est un religieux docte, un doctrinaire, l’autre est un laïc plutôt anticlérical, un illuminé qui prétend être en communication avec l’imam caché, disparu il y a onze siècles, et avoir été nimbé de «lumière céleste» lors de son fameux discours aux Nations unies en septembre 2005. Ali Khamenei l’a d’ailleurs plusieurs fois remis à sa place. «Entre eux, c’est un mariage de convenance. Ils sont condamnés à divorcer un jour à l’autre, c’est inscrit dans leurs chromosomes», estime le chercheur Michel Makinski. «Ce qui les sépare, c’est d’abord une question de générations. La réélection d’Ahmadinejad participe de cette poursuite de la prise du pouvoir engagée par les pasdaran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ndlr] et les bassidji [miliciens]. On dirait que le Guide s’est laissé imprudemment ficeler par lui.»

 

L’homme idéal.
Derrière Ahmadinejad, il y a bien un religieux : c’est l’ayatollah Mohammed Mesbah-Yazdi. C’est lui son mentor et son référent religieux. Il est tellement extrémiste qu’il n’était guère aimé de l’imam Khomeiny, ce qui ne l’empêche pas d’ailleurs de diriger, dans la ville sainte de Qom, la fondation qui porte son nom. Mesbah-Yazdi veut remplacer le concept de république islamique par celui de oukoumat islami, soit un gouvernement islamique pur et dur, où toute autorité émanerait de Dieu. On les accuse dès lors de vouloir «dékhomeiniser» le régime. Pour atteindre ce but, Ahmadinejad est l’homme idéal : il est à la fois convaincu par les idées de Mesbah-Yazdi et un ancien Gardien de la révolution.

Ces ultraradicaux - que l’on appelle les hodjatieh - pensaient déjà s’emparer du pouvoir à la faveur des élections à l’Assemblée des experts (l’organe qui supervise les activités du Guide), en décembre 2007. Mais Yesbah-Yazdi et ses partisans ne sont pas arrivés à l’emporter. Ils semblent depuis avoir juré de ne pas voir cet échec se répéter. D’où la fraude massive à la présidentielle.

Cette offensive de Mesbah-Yazdi et Ahmadinejad, avec le soutien du Guide, les autres factions l’ont ressentie comme une menace pour leur propre existence. D’où leur alliance : elle rassemble en fait des personnalités très différentes, allant de l’ancienne gauche islamiste à l’ex-président Hachemi-Rafsandjani, un religieux conservateur très proche des milieux d’affaires. Tous se proclament les héritiers de l’imam Khomeiny, devenu une référence quasi permanente dans les déclarations de Mir Hussein Moussavi. Les tactiques d’une partie des manifestants s’inspirent d’ailleurs de la révolution islamique de 1979, notamment les slogans «Allah o Akbar» (Dieu est grand) ou «Mort aux dictateurs», utilisés hier contre le Shah. Ou les appels à commémorer les «martyrs» lors de manifestations de deuil - l’une d’elle est prévue aujourd’hui -, qui permettent de relancer la contestation. (Liberation-Monde 24/06/2009 à 06h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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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 수비대'

Le corps d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compte environ 125 000 hommes, selon les chiffres du Military balance de l'institut britannique Jane's.

이슬람 혁명 수비대 (GRI - سپاه پاسداران انقلاب اسلامى, Sepah-e Pasdaran-e Enghelāb-e Islami)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는 듯이, 드디어 이란의 12만 <혁명 수비대>가 들고 나섰다. 뭐 내용이야 예상대로 불법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이고, 서방의 공격적인 세력들이 이란의 내정에 끼어들거나(s'immiscer ) 시위대를 지지하는 등의 행동을 자제할 것을 권유했다는 정도. [특이하게도] '이란 학생 연합'은 내일 16시에 테헤란 영국대사관 앞에서 '영국의 이란 내정간섭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기로 했다고 함. 

한편, <헌정 수호 심의회>(CGC; 우리 신문 식으로는 '헌법수호위원회')는 반대파 지도자들이 제기한 '부정 선거구 170개 구역'에 대하여, 50개 선거구(총 366개 중)에서는 약간의 투표상에 문제가 있었지만(이민자나 여행객등이 투표하는 등) 그것이 선거의 결과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라는 의견을 냈으며, 최종 심의 결과 발표는 수요일날 한다고 함. 

 

[전문] Iran :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menacent les manifestants
LEMONDE.FR avec AFP et Reuters | 22.06.09 | 09h53  •  Mis à jour le 22.06.09 | 14h44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bras armé du régime iranien, ont prévenu, lundi 22 juin, qu'ils affronteraient les "émeutiers" qui manifestent dans Téhéran avec des "méthodes révolutionnaires". "Dans l'actuelle situation sensible, les Gardiens affronteront avec fermeté les émeutiers et ceux qui violent la loi", peut-on lire dans un communiqué mis en ligne sur le site internet des pasdaran. "Dans l'actuelle situation sensible, les Gardiens affronteront avec fermeté les émeutiers et ceux qui violent la loi", lit-on dans le communiqué. "Nous n'attendrons pas pour affronter les émeutiers dans les rassemblements illégaux auxquels ont appelé certains candidats (...) Les Gardiens déconseillent aux puissances agressives [occidentales] de s'immiscer dans les affaires de l'Iran et de soutenir les émeutiers", lit-on sur le site d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En outre, des associations d'étudiants iraniens ont annoncé lundi une manifestation mardi à 16 heures (13 h 30 en France) devant l'ambassade de Grande-Bretagne à Téhéran pour protester contre l'"ingérence" de Londres dans les affaires intérieures iraniennes.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les bassidjis [milice islamique dépendant des Gardiens] et les autres forces de l'ordre et de sécurité sont prêts à mener une action décisive et révolutionnaire pour (...) mettre un terme au complot et aux émeutes", poursuit le texte. C'est la première fois que les Gardiens (Pasdarans), l'armée idéologique du régime, lancent un tel avertissement depuis le début des troubles qui ont suivi la réélection contestée du président Mahmoud Ahmadinejad le 12 juin. Le corps d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compte environ 125 000 hommes, selon les chiffres du Military balance de l'institut britannique Jane's. Il disposerait d'une unité d'intervention à l'extérieur, la force Quds, dont il n'a jamais confirmé l'existence.

 

PLUS DE VOTES QUE D'ÉLECTEURS

Les jeunes partisans du candidat battu Mir Hossein Moussavi ont appelé à un rassemblement ce lundi en hommage aux victimes des troubles. Ils proposent sur leur site internet que les Iraniens manifestent avec des bougies noires et des rubans verts, la couleur qu'avait choisie l'ancien Premier ministre pour symboliser sa candidature. Les autorités iraniennes ont de nouveau accusé, lundi, l'Occident d'être impliqué dans les troubles des derniers jours. La parquet de Téhéran a en outre accusé des "vandales inconnus" d'avoir ouvert le feu et tué des gens samedi dans la capitale. Selon le site de la chaîne publique Press TV, en langue anglaise, le parquet affirme que des saboteurs ont tiré sur des civils et fait des morts.

 

La télévision d'Etat a par ailleurs rapporté que le porte-parole du Conseil des Gardiens de la Constitution, chargé de superviser la présidentielle iranienne, avait affirmé qu'il y avait eu lors du scrutin du 12 juin plus de votes que d'électeurs potentiels dans cinquante districts. Mais il a estimé aussi que cela n'aurait pas d'"influence importante" sur le résultat final, qui a vu le président Mahmoud Ahmadinejad réélu pour un mandat de quatre ans. "Une plainte commune des candidats est qu'il y a eu plus de bulletins de vote exprimés que d'électeurs potentiels dans certains districts. Mais notre enquête préliminaire montre que le chiffre annoncé (170 districts) n'est pas correct et que cela concerne 50 districts", a déclaré Abbas Ali Kadkhodaie. L'Iran compte 366 districts, qui sont une subdivision administrative des 30 provinces que compte le pays. Le candidat conservateur Mohsen Rezaï, arrivé troisième lors de la présidentielle, avait dénoncé jeudi 18 juin des irrégularités dans le scrutin en affirmant que dans "170 circonscriptions, la participation a atteint entre 95 % et 140 %".

Deux autres candidats, Mir Hossein Moussavi et Mehdi Karoubi, contestent avec lui la régularité du scrutin. Leur plainte est examinée par le Conseil des Gardiens, qui s'est engagé à rendre son verdict d'ici à mercredi. M. Kadkhodaie a estimé que le cas des 50 districts "peut s'expliquer par le fait que certaines villes accueillent des migrants, sont touristiques, etc.". Théoriquement, chaque électeur peut voter où il veut. "De toute façon, il a été convenu que des inspecteurs soient envoyés sur place pour examiner les statistiques", a ajouté M. Kadkhodaie.

 

 

Steve Rhodes sur Flickr http://www.flickr.com/photos/ari/

 

지난 토요일(6/20) 시위에서 총알을 맞고 쓰러진 네다(Neda)라는 16세의 소녀의 마지막 모습과 추모 촛불 사진이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지금(6/22) 유튜브에 올라 급속히 퍼지고 있다는데, 네다의 죽음이 앞으로의 시위 방향에 얼마나 중요한 동기로 역할 할지가 주목된다. 오늘 시위속보로는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가 몇 시간만에 해산 당했다고 함. 나는 시위대에 전적인 동조를 보내지는 않지만, 네다의 명복을 빈다.

 

"하메네이는 생애에서 가장 큰 실수를 했다"
"L'ayatollah Ali Khamenei a commis la plus grave erreur de sa vie"
LE MONDE | 22.06.09 | 10h15  •  Mis à jour le 22.06.09 | 10h15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3.06.09)
New York, correspondance, Propos recueillis par Philippe Bolopion

Mohsen Sazegara, chercheur et président du Research Institute for Contemporary Iran, basé à Washington, a été un des fondateurs d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et a occupé des fonctions ministérielles dans les années 1980, avant de prendre ses distances avec le gouvernement révolutionnaire en 1989.
1. Assistons-nous à un tournant dans la révolution iranienne ?
2. L'opinion se retourne-t-elle contre l'ayatollah Khamenei ?
3. Est-il soutenu par les religieux ?
4. Les manifestants s'en prennent-ils à la révolution islamique ?
5.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ne répriment pas les manifestations.
6. L'ayatollah Khamenei contrôle-t-il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
7. Et les bassidji ?
8. Va-t-on vers une dérive militaire ?
http://www.lemonde.fr/proche-orient/article/2009/06/22/l-ayatollah-ali-khamenei-a-commis-la-plus-grave-erreur-de-sa-vie_1209676_3218.html#ens_id=1190750

 

(*) 전문가는 '혁명 수비대'의 창설자 중의 한 명이었고, 80년대에 장관직을 역임도 했으나 89년에(그러니까 호메이니가 죽고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 직을 승계한 해) 혁명정부와 거리를 두고는 -아마도 미국으로 이주하여- 현재 워싱턴에 있는 한 '이란 연구소'의 연구원 겸 소장으로 있다 함(a). 나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으므로 인터뷰의 본문은 훑어만 보고 읽지도 않는다(인터뷰의 질문만 퍼오는데, 답변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필요한 경우는 링크로). 그런데도 르몽드 같은 경우는(!) 반나절 동안이나(즉 '혁명수비대가 나섰다'는 위의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 이 기사를 인터넷신문의 최상단에 걸어두더니, 내일자 종이신문에도 발행한단다. 그들(!) 에게는 아마도 아주 중요한 기사라는 말이겠다.

 

(a) 이런 경우를 나는 대체로 적들의 안방에서 조국을 팔아 구질한 학식으로 구차한 삶을 연명하는 대표적 사례로 본다. 꼭 이런 전문가집단이 아니더라도, 197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로 따지자면- '친일 부역'을 하면서 돈을 모았던 자들이나, 혁명 때까지 이어진 왕권에 어떻게든 끈 대고 있던 자들의 많은 경우가 아마도 혁명과 동시에 그들의 조국을 등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돈이나 금은보화를 --마치 우리의 해방과 1/4후퇴 때 북쪽에 있던 '전 친일 지주 (자식)'들이 숨겨뒀던 금덩이를 싸안고 월남하던 경우처럼-- 싸들고 떠나는 것은 당연하겠다. 내가 주위에서 보기에도, 이란 망명객들은 남아도는 돈으로 하는 일 없이 유유자적으로 소일하는 사람들도 많더라는... 같은 망명이고 같은 이민이더라도 그들은 아프리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좀 다르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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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에바디(S.Ebadi,1947~): 인권,여성,민주주의

모든 서방언론이 작금의 이란사태에 대하여 '이슬람 신정체제'가 '보편적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다는 판단으로 이란정부에는 비판적이고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하는 것이 사실이겠다. 이러한 거의 만장일치적 입장에 반대하는 예외적인 경우는 거의 찾기가 힘든데, 아무리 이란이 제국주의 세력들의 분열과 착취의 험한 역사를 갖든, 비슷한 종교와 문화를 갖는 형제 간의 전쟁을 미국 스파이 세력이 조장했다는 분명한 기억을 아직도 생생히 갖든 말든, 민주주의라는 대의 앞에서는 잊어버려도 좋은 과거사일 뿐이라는 것이 우리가 갖는 서구화된(서구적/진보적) 시각이겠다. 아마도 마찬가지 입장에서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격인 <뤼마니떼>도 시린 에바디(Shirin Ebadi, 1947~) 라는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란 여성)와의 최근 이란사태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기에 퍼다가 잠시 경청을 해본다.

여기서 에바디는 보편적 인권문제와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남녀평등 등의 문제, 그리고 보수정권하에서 악화일로를 걷는 여성 권리의 복원 등을 강조한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기에 오히려 내게는 공명이 덜한지, 아니면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대의 뒤에 숨어있는 서구제국주의자들의 껍데기 정의가 더 심각하게 느껴져서인지, 혹은 덜 진화된 나의 진보적 의식이 갖는 한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란의 보수주의자들이 에바디의 노벨평화상에 대하여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에 더 공감이 간다 : "파렴치한 노벨평화상. 시린 에바디는 서구의 압제와 식민주의에 봉사한 댓가로 보상을 받았다."(위키 하단 밑줄). 어쨌거나 그녀는 74년 이란 최초의 법관이 됐다가 79년 혁명으로 인해(여성이라는 이유로) 법관직에서 물러났고, 여성과 인권을 대변하는 오랜 변호사 생활 끝에 2004년에는 이란 국립 법관학교의 수장으로 승진도 했으며, 지금은 테헤란 대학 법대에서 강의를 하며 이란여성들의 공식 대변인적 위치를 갖는다고 함. 이하 인터뷰 기사와 위키 불어판 전문: 

 

 

Human rights activist Shirin Ebadi, Nobel Peace Prize laureate (2003)

Iran Awakening: A Memoir of Revolution and Hope (New York, 2006)

 

Entretien avec Shirin Ebadi (l'Humanite, le 19/06/2009)
« Le respect des droits est la voie pour changer l’Iran ». La juriste iranienne, prix nobel de la paix, demande l’annulation de l’élection présidentielle et évoque les risques de graves violences. Dans l’Humanité de ce lundi notre décryptage sur la situation en Iran. La prix Nobel de la paix iranienne, Shirin Ebadi, qui souligne combien la population demande le respect de la loi et de ses droits et devient de plus en plus consciente de l’importance de la défense des droits de l’homme pour la démocratie, répond aux questions de l’Humanité.

 

Madame Ebadi, que se passe-t-il aujourd’hui réellement en Iran ?

Shirine Ebadi. Le pays vient d’avoir une élection présidentielle. Or, les résultats et la victoire du président sortant sont contestés par le peuple. L’annonce précipitée de ces résultats et de la victoire d’Ahmadinejad, immédiatement félicité par le guide suprême, l’ayatollah Khamenei - avant même une confirmation officielle du verdict du scrutin -, a fortement mécontenté les électeurs et la population iranienne. Ceux-ci montrent clairement leur désapprobation en manifestant dans le calme et la dignité.

 

Ne croyez-vous pas que des manifestations de cette ampleur vont plus loin qu’une simple demande de révision de l’élection présidentielle ? L’intervention directe du peuple iranien dans la politique du pays change-t-elle la donne en Iran ? Est-ce que cela modifie les paramètres de ce qui semble bien être aussi une grande fracture au sein du pouvoir ?

Shirine Ebadi. Pour le moment, le peuple iranien déclare ne demander que l’annulation de l’élection présidentielle contestée et l’organisation de nouvelles élections. Beaucoup dépendra de la manière dont le pouvoir répondra aux demandes légitimes des gens. On verra ce qui sortira de la réunion du Conseil des gardiens qui doit entendre les candidats réformateurs, Mir Hossein Moussavi et Karoubi, et leurs doléances ce week-end (notre entretien a eu lieu vendredi ; samedi, le Conseil, boycotté par les deux candidats contestataires, a opté pour un recomptage très partiel et aléatoire de 10 % des voix. Ce qui visiblement ne peut satisfaire l’opposition - NDLR). Les gens ne s’intéressent pas à d’éventuels différends au sein du pouvoir. Ce n’est pas leur problème. À mon sens, il faudra annuler la dernière élection et en organiser une nouvelle. Quant à l’impact à plus long terme de ces événements, particulièrement sur les terrains du respect des lois et des droits de l’homme, l’avenir nous le dira. C’est encore un peu tôt pour en juger.

 

Craignez-vous particulièrement désormais la montée de la violence de la part du pouvoir à l’encontre des manifestants ? Et plus encore après le prêche, prononcé vendredi, par le guide suprême qui a une nouvelle fois endossé les résultats de l’élection, et qui a « mis en garde les opposants », demandant instamment « l’arrêt de la contestation » ?

Shirine Ebadi. Malheureusement, la violence sanglante a déjà été employée contre des manifestants dignes et pacifiques. À Téhéran et dans d’autres grandes villes iraniennes. À Téhéran, à la fin de la grande marche de l’opposition lundi dernier (plus d’un million de personnes dans les rues de Téhéran), sept personnes ont été tuées et près de trente blessées, d’après les informations dont nous disposons, par des tirs en provenance d’un immeuble public de la milice des Bassij, une milice qui agit sous la direction et la supervision d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la garde prétorienne du régime - NDLR).

 

Au-delà des manifestants dans la rue, des étudiants et des opposants ont été arrêtés ces jours derniers en Iran. Quel est votre sentiment ? Le cas échéant, allez-vous les défendre ?

Shirine Ebadi. Ces arrestations sont totalement illégales. Elles contreviennent aux lois et aux droits de la République islamique elle-même. Le cas échéant, je serai fière de pouvoir défendre les personnes arrêtées et emprisonnées durant ces événements.

 

Croyez-vous que les droits de l’homme peuvent changer la situation politique en Iran ? Comment améliorer le respect de ces droits dans le pays ?

Shirine Ebadi. Je crois que le respect des droits de l’homme est la voie pour fondamentalement changer l’Iran et sauver le pays. Mais il faut d’abord que les gens ressentent et comprennent l’importance de ces droits de l’homme et qu’ils réagissent s’ils ne sont pas respectés. Cela fait huit ans que nous luttons contre la censure, pour l’égalité des droits pour les femmes et pour défendre les prisonniers politiques et d’opinion. Désormais, il me semble que cette conscience est bien présente dans la population iranienne. Et même si l’année dernière le Centre pour les défenseurs des droits de l’homme a été illégalement fermé par le gouvernement sortant, les gens, et particulièrement les femmes, font aujourd’hui preuve d’une combativité certaine dans l’engagement pour la défense de leurs droits fondamentaux.

Entretien réalisé par Ramine Abadie

 

Shirin Ebadi (en persan : شیرین عبادی, Shirin 'Ebādi) (née le 21 juin 1947 à Hamadan en Iran), est une avocate iranienne, défenseur active des droits de l'homme. Elle a reçu le Prix Nobel de la paix en 2003 pour son action en faveur des droits de l'homme et de la démocratie. C'est la première iranienne à recevoir ce prix.Elle fut aussi la première femme en 1974 à devenir juge en Iran. Elle a dû abandonner son poste en 1979 à cause de la révolution iranienne lorsque des religieux conservateurs ont pris en main le pays et fortement limité le rôle des femmes.Elle enseigne actuellement le droit à l'Université de Téhéran et œuvre pour la défense des droits des enfants et des femmes.

 

Elle est la porte-parole officieuse des femmes iraniennes qui ont joué un rôle clé dans la campagne présidentielle de Mohammad Khatami et depuis elle se bat pour que les femmes aient un plus grand rôle dans la vie publique.Elle est aussi connue pour prendre la défense des dissidents de premier plan comme celle de la famille de Dariush Farouhar et de son épouse qui ont été retrouvés battus à mort. Il s'agit d'intellectuels menacés par des extrémistes opposés à la politique de Khatami qui a libéré le droit d'expression[réf. nécessaire].

 

En 2000, Ebadi a été accusée d'avoir distribué une cassette vidéo sur laquelle un de ces extrémistes religieux avoue que les dirigeants iraniens sont à l'origine de ces violences. Elle a été condamnée pour cela à une peine d'emprisonnement et à une interdiction d'exercer. Ceci a attiré l'attention du monde sur les violations des droits de l'homme en Iran.Elle fait partie de la direction de l’Organisation iranienne de protection des droits de l'enfant et de l’Association des défenseurs des droits de l'Homme en Iran. Pour ses actions politique, elle a obtenu le prix Rafto en 2001 avant d'obtenir en 2003 le Prix Nobel de la paix. Assadollah Badamchian, un politicien conservateur iranien, a qualifié le prix Nobel d"infamie" ajoutant que Chirine Ebadi avait été récompensée pour les services rendus à l'oppression et au colonialisme occidentaux.

 

En juillet 2004, elle est devenue la marraine de la promotion 2004 de l'école nationale de la magistrature. En novembre 2006, elle a reçu de Jacques Chirac les insignes de commandeur de la Légion d'honneur.En octobre 2007, elle intervient au Forum mondial de l’économie responsable qui se tient à Lille sur le thème de la divers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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