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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가시길, 대통령 노무현

  • 등록일
    2009/05/24 13:00
  • 수정일
    2009/05/24 13:00

용산 철야 농성을 끝내고, 새벽 버스를 탔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중이었다. 잠결에 들었다. 가슴 한 쪽이 쿵, 내려 앉더라.

처음에는 믿기지 않다가, 두 번째는 '결국 이렇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다음에는 '이명박이 이 개새끼 이번에는 못 빠져 나간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노무현 - 이 이름 석자, 참  애증 어린 이름이다.  우린 정말 정성들여 뽑았다. 최소한 전적인 지지는 아니더라도 비판적 지지나마 보내면서 말이다. 탄핵 때는 '노무현을 구한다기 보다, 저 오만한 기득권을 쥔 새끼들 물먹이기 위해서다'라며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촛불을 들었고, 결국 그를 구해냈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냈더니만, 농민 한 사람과 노동자 둘을 죽였다. 평택을 통곡의 들판으로 만들었다. 정말 나쁜 새끼, 좆같은 놈현이 그랬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미운 놈, 미운 정이 더 무서운 가보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후에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형식적 민주주의'가 그나마 제 틀을 서서히 갖춰 가고 있었고, 그 한 가운데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촛불 들어서 살리고, 미워도 보듬어 가며, 잘못해도 애써 넘겨 주면서 노무현을 마음 한 구석에서 믿어 주었던 인민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정치인'이겠지만, 인민들의 가슴 속에서는 그냥, '인간 노무현, 미운 구석이 박힌 놈, 그저 그런 대통령이지만 정은 가는 놈'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저렇게 광화문에 모였고, 또 부산과 봉하마을과 대구에 모였다. 공분이 하늘을 찌른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꿈같은 드라마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청와대에, 검찰에, 또 여의도 당사와 종로 프레스 센타 근처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대통령 같지 않았던 대통령, 그러기에 더 대통령다웠던 대통령 - 노무현 대통령, 편히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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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와 폭력

  • 등록일
    2009/05/10 08:57
  • 수정일
    2009/05/10 08:57

자유는 개인의 존엄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주 폭력으로 변한다. 가학적이든 피학적이든 존엄이 실종된 상태에서는 혁명조차 줄곧 파괴하고자 한 그것을 닮아 버리곤 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 좋다. 존엄이 지켜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거두절미, 그건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다.

 

이 관점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을 돞아 보자. 이 집단은 무엇보다 '정서적'(pathetic)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가족적 정서라고 불리워지는 걸 열거하자면, '화목', '사랑' , '이해' 등이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집단을 떠올릴 때 소위 '가슴 훈훈한', '한 둥우리 같은' 감정을 체감한다는 건 정말이다. 이상하게도 '정서'라고 하는 건 개별적이고, 개개의 인격마다 그 체감의 강도가 상당히 다르거나 아예 극단적으로 대립할 수도 있을텐데 '가족적 정서'라는 건 이 정도로 동질적이다. 희한한 일이다.

 

더우기 봉건주의에 대한 자생적 면역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 필수적 코스라 할 수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정서가 상당부분 강화되어 있다. 심지어 유력 정치인들이나 그를 지지하는 다수의 국민들이 '가족'과 '국가'를, 나아가 대통령과 가부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 있기도 하다. 심각한 것은 이런 유아적 발상이 이데올로기로까지 치장되어 '우익'이라는 집단을 형성할 때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이 사회의 오른쪽 집단은 '민족주의'라든지 '합리적 보수'라고 불리워질 수 없게 된다. 이들은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지 못한 그저그런 수구세력이거나 뭐라 개념지을 수도 없는 '꼰대집단' 정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프레임과 뒷골목 건달들이 '형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프레임이 별 차이가 없다(건달들은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기라도 한다).

 

이렇게 '가족'과 '국가' 또는 '봉건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착시현상이 대개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게 본질적인 문제다. 하긴 논리나 펙트에 대한 존중보다는 '니편 내편'이 더 중요하고, 솔직한 의사개진보다는 '윗선'이나 아버지, 어머니, 언니, 누나, 형 등등 온갖 것들을 살펴 보는 비굴한 더듬이만 발달한 인격들끼리 모여서 무슨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겠는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그려지는 '가족잔혹사'들을 살펴 보면 몇몇 유형이 있다. 우선 가족들 간의 구질구질한 원한 관계가 있고, 거기에 희생당하는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플롯이 전개되는 보다 고전적인 형태가 그 중 하나고,  또 다르게는 가족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가족들이 모두 몰락하거나 만고의 웃음거리나 패악질의 원형이 되거나 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가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파괴적 본질'을 드러낸다. 사실 가족이라는 집단 자체가 정서적이고 보수적인데 이것이 더 '애틋해'지고 '흘러 넘치게' 된다면 문제가 이만저만 심각해 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런 예들이 참으로 알기 쉽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이 자유롭게 살려면 필요한 것이 '거리의 파토스'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이 '정감어린 가족주의' 안에 이것이 있는가? 피상적으로는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든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so cool'해 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 재우쳐 묻는다. 정말? 스스로도 물어 보라. 내가 가족문제에 관해 그토록 '거리'라는 걸 취할 수 있는지 말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거리'가 내면화되어 있어야 합당하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도대체 어떤 '후레자식놈'이 '우리' 어머니를 모욕했는데 흥분하지 않겠는가? 설혹 어머니'께서'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모든 사단이 여기서부터다. '우리' 가족을 중심에 놓고 '다른' 가족이나 인격을 보다 보니 '거리의 파토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한'에 기반한 배제와 우월의 욕구가 앞선다. 그리고 가족내에서의 자기입지가 어떤가에 따라 '권력'이 형성되는데, 이게 또, 다른 가족 구성원 중 서열이 밀리는 인격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게다. 게다가 이 서열이라는 것이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과 결합할 때는 (당사자들이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제삼자가 볼때는 분명한데) 구역질나는 금전관계나, 경제적 독립의 정도에 따라 매겨지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긴 아무리 '가족'이라도 금전적으로 얽매여 있으면 제대로 발언하기가 힘든 게 현실이다. 사실 이렇게 놓고 보면 '비둘기 처럼 다정한 가족'이라는 것도 말짱 허구라는 걸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가공할만 한 것은 이 모든 게 '사랑'이라는 명분 하에 저질러진다는 것이다. 가히 '잔혹사'라 할만 하다. 하긴 이런 일로 서로를 죽이고 괴롭다 못해 스스로를 죽이거나 다 같이 연탄가스 마시고 죽자는 경우도 생기는 게 요즘 세상이다.

 

가족주의라는 건, 따라서 아주 지독한 허구다.  그리고 많은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다른 가족을 억압하기 위해("저 쌍놈의 집안", "돈 없는 것들" 등등 다양한 버전), 그리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기 위해("동생이 어디서!", "아버지 말이 말 같지 않니?",  "이 결혼은 반대다." -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반대' 따위를 한다는 건지 알 수 없다 - 등등 또 다양한 버전) 말이다. 하나의 허구가 물리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참으로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그게 어떤 실체를 가지고 우리 앞에 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힘이라는 건 대개가 우리조차 감염된 경우가 많다. '권력의 발에 짓밟혔던 자는 그 권력의 세균에 감염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난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이 참으로 덧없어진다는 거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거나 "우리가 남이냐?"는 생각을 무시로 한다면 스스로를 의심해볼 일이다. 쓰레기더미 속에 있다 보니 자기 몸에 그 냄새가 베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되면 매우 심각하다. 그 냄새가 바로 스스로의 존엄을 더럽히고, 다른 집단이나 조직에 해악이 되며, 나아가  부지불식 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에 먹칠을 하고 그(녀)의 일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걸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녀/들)에게 거리를 부여하자. 서로 평등하게, 그렇게 바라 보는 것, 그게 자유의 시작이고, 공동체 내에서 자신과 타인 모두를 고귀하게 만드는 길이다. 가족? 가족주의? 그런 건 개나 주기 바란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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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재보선, 메이데이, 촛불 투쟁

  • 등록일
    2009/05/03 16:24
  • 수정일
    2009/05/03 16:24

5월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은 남다르다. 적어도 BBC 다큐로나마 518의 잔학상을 접했던 90년대 초중반 학번들까지는 그렇다.  올해 5월 또한 첫 주에 펼쳐지는 정세가 어김없이 예사롭지 않다.

 

요약하자면, 4.29 재보선 은 '반MB'  공동전선을 구축했던 야당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뒤를 이어 메이데이 투쟁, 그리고 촛불 1주년 투쟁이 있었다. 이 일련의 정세 추이 안에서 몇가지 시사점을 발견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재보선을 살펴 보자.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재보선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 야당과 재야에서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각각의 세력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향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이념적 지향점이나 이해득실에 대한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이번 선거가 가지고 있는 제 정당 내부 세력 다툼이라는 복합적인 특징이 고려되면 분석은 훨씬 복잡해진다.

 

이번 선거가 '반MB전선의 승리'라는 데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당연한 반응이지만 한나라당 쪽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사안을 축소하려고 하고 있다.  이를 조중동이 적극적으로 거들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수구세력을 기만하는 데는 상당부분 성공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과 시민들은 그러한 축소해석과 기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번 선거가 반MB전선 형성에 얼마나 기여했으며 이것이 MB에 대한 심판론으로 얼마만한  힘을 발휘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선거 전선 형성 과정과 그 사전 조건을 살펴 봐야한다. 사실 이러저러한 정황들을 짚어 보면  소위 '선거승리'라는 것이 100% 인민의 활력(potentia)으로 전화되라라는 기대를 가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국민은 심판했지만 MB는 심판받지 않는다?).

 

우선 민주당은 정동영 출마로부터 비롯된 내부 잡음을 봉합하지 못하고 선거를 치름으로써 전체 선거판을 '지역주의'와 '연고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방치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반MB전선이라는 대의를 충족시키고자 한 그들의 시도는 일정부분 흠결을 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정동영-신건 무소속 연대 후보가 모두 당선됨으로써 민주당은 자신의 텃밭에서조차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당 내외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주당은 정세균 대표를 필두로 한 당내 386세력의 입지가 상당 부분 위축될 수밖에 없는 내부 조건이 형성됨과 동시에 '정동영 분파'라는 새로운 골치거리를 안게 된 것이다.  선거 전에 터지고 선거 기간 내내 암울한 그늘을 드리웠던 노무현-박연차 커넥션은 사안이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민주당 주류 의 정치적 추락에 가속력을 부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겠다. 다행히도 반MB 전선의 형성이라는 선재적인 목표가 재보선을 통해서 전면에 배치된 상황에서 이러한 당내 투쟁이 격화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이 갈등은 항상 잠재적인 진행형으로 남을 것이다.

 

민주당 사정에 비해 민노당과 진보신당 쪽은 선거 이후 상황이 매우 양호한 편이다. 그런데 사실상 민노당은 후보경선에서 패배함으로써 견원지간이었던 진보신당에 울며 겨자먹기로 '몸빵'을 해야할 처지에 놓였었다는 걸 먼저 인정해야 하겠다.  대부분의 당원들이나 지도부는 이런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겠지만, 자기 정서에 솔직한 몇몇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박승흡 "조승수 단일화, 억장 무너져"). 사실 오월동주를 거부하는 것이 민노당의 당이념에는 더 맞아 들어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튼 진보정당 단일 후보 조승수의 승리는 두 정당, 특히 진보신당의 의회 내 입지를 강화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원내에 교두보를 두는 투쟁과 그렇지 않은 투쟁은 부르주아 정치판에서 상당한 차이를 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민노당이 선거에서 '몸빵'을 한 것에 대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는 처지에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를 당내에서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당선 축하 연설에서도 드러난다(진보신당 원내 시대 개막 조승수 당선자 언급 참조).

 

분명한 것은 의회 내 투쟁에서 두 정당은 사안 별로 전술적인 동맹을 추구해야 할 것인데 이럴 경우에는 먼저 사안의 경중을 재는 기준이 상이하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오월동주한 이상 선거정당이 안고 가야할 당이념의 전술적 후퇴와 명분의 작은 흠결 정도는 앞으로 감내해야할 사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대라는 것은 선언문에 서명하는 것 이상"(홀거 하이데)이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톺아 봐야 하는 사항은 이러한 선거 승리가 결코 인민 투쟁의 동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필연적인 모멘텀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선거'라는 부르주아 대의정치 기제는 본격적인 의회 정치를 위한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의 성격을 띈 경우가 많았으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가 많다. 실상은 오히려 반대다. 인민투쟁의 성과가 선거에 반영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가 그러하다. 야당이 내걸었던 반MB전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도,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촛불투쟁과 용산투쟁의 성과에 정치권이 무임승차하기 위한 티켓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선거가 인민투쟁의 활력을 갉아 먹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게다. 선거 연합 과정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의외의 변수(정동영 출마, 무소속 연대)나 연합 조건에 대한 복잡한 계산 등이 돌출됨으로써 투쟁의 활력과 대의가 손상되는 사태들을 방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또한, 인민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소부르주아 시민계급이 부르주아 대의 장치에 매몰되어 직접적인 행동 투쟁에 결합하지 않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사실  '선거'라는 장치가 그런 효력을 달성한다는 건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현장 투쟁에 결합하지 않거나 또는 결합할 수 없는 스스로의 객관적 조건에 대해 냉소하면서, '선거 때 보자'는 식은 권력(potestas)에 어떠한 결정적인 타격도 줄 수 없으며, 자칫 그 권력의 포획망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각에서 제기된 선거 비판론도 새겨 들을만 하다 하겠다(후보 차지 위한 단일화논의를 집어치워라).

 

마지막으로 이 주에서 가장 중요한 정세 사안이 남았다. 4.30에서 5.1 메이데이 그리고 촛불 1주년에 이르는 인민투쟁의 정세 조건이다. 이는 아직 진행중이다.

 

먼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번 투쟁을 통해 인민들 다수가 촛불에 대해 정권이 얼마만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학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1만이 넘는 중무장 병력을 촛불 하나 달랑 든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배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두려움을 간파한 인민들이 본능적으로 대담해진다는 사실이다. 5월 2일 현재까지 현장에서 두 가지  주목할만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투석전이 벌어졌다는 것이고, 하이서울페스티발(저들이 의도적으로 시청광장을 선점하기 위해 벌인) 을 무대 점거를 통해 무력화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지금까지 촛불 다중이 가지고 있었던 대항폭력에 대한 과도한 거부반응이 일정정도 해소되었다는 표식이며, 후자는그러한 위축감의 극복이 권력의 두려움을 간파한 이후 대담함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투석전이라고 해봐야 명동거리에서 잠시동안 이어졌고(이틀 간 2번), 무대 점거라고 해봐야 10분 정도였지만, 투쟁 현장의 급박한 좌표계 안에서는 이 작은 사건들이 피아 적대 함수의 중대한 변곡점을 형성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현장의 판도가 인민들의 의식 안에서 승산 있는 싸움으로 표상되려면, 이러한 급작스런 폭발들이 자꾸 이어져야 하며, 수동적 정념이 적극적인 정념으로 진화하는 체험을 누적해 감으로써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잠재적 활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 투쟁일정의 두 번째 긍정적인 모멘텀은 노학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혹자는 대학생들을 '불쌍하고 멍청한 집단'이라고 했지만(멍청한 대학생들, 빨대 꼽히다), 그렇지 않은 축들도 많다는 것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조직적으로 봤을때 이들은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으로 대표될 수 있지만 이에 결합하지 않은 다수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이번 메이데이를 기점으로 출범을 선언한 '대학생 반독재 투쟁 위원회' 가 있을 것이다. 이 외에 여기에다 한총련, 대학생 다함께, 민노당 학생위 등이 결합하고 있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축들, 그리고 '10대 연합'을 비롯한 고등학생 조직까지 아우르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앞으로의 가능성은 결코 작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 실업 100만이라는 객관적 정세로 봐서도 이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이들이 80년대, 90년대 식의 노학연대 틀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념적으로 이들이 실용주의에 매몰되지만 않는다면, 다시 말해 등투만 가지고 투쟁의 외연을 좁히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면 매우 훌륭한 투쟁의 자산이라 하겠다. 사실 이들은 투쟁 당일 노동자들과 함께 움직이기 보다는 대오에서 빠져 잠실로 향했으며, 전술적으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냈다.('2009 하이서울페스티벌' 중단... 경찰은 연행작전 5월 2일 2신 참조) 상집에 기고, 현장 머리수를 채우거나, 문화 공연에서 아양 떠는 방식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이들이 과연 68세대로 대표되는  유럽의 새로운 좌파와 같이 새로운  운동의 단초가 될지 어떨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정세를 살펴 보았을 때, 2009년  5월 첫 주 주말이 그 여느 때와는 다르게 뜨겁게 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싸움의 성과에 들뜨기 보다는,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활력을 재점검하고 저들의 헛점을 분명하게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단순한 정세판단을 넘어 적의 약한 고리를 타격할 수 있는 실천의 무기가 더 날카롭게 벼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의 변증법을 유지하며 긍정의 실천을 하는 건 그래서 힘들지만, 고귀하다 하겠다.

- written by REDBRIGADE

 

아래는 5월 2일 촛불 투쟁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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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마음을 놓다

  • 등록일
    2009/04/17 15:17
  • 수정일
    2009/04/17 15:17

저번 주에 전화 통화로 이번엔 나들이나 가자고  했었다. 예전에 광주에서 한 6개월 정도 야인생활(아무 것도 없이 무작정 그녀가 거기서 산다는 사실 하나만 붙잡고 전남대 앞 고시원에 터를 잡았었다)을 할 때 주말에는 광주 근교 사찰들을 쏘다녔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백양사다. 그때는 눈 덮힌 겨울이었고 지금은 꽃들 지천에 흐드러진 봄날이다.

 

광천터미널에서 오후 한 시 경에 시외버스를  타고 백양사로 향했다. 장성을 거쳐 가는 길, 남도의 너른 들이 창 밖으로 펼쳐진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난 고향인 경상도 쪽 보다, 전라도 쪽 풍경이 더 마음에 들고 친숙하다. 경상도는 온통 빌딩 숲이고, 산과 들이 있어도 내겐 늘 걍팍해 보였다. 거긴 사찰들도 소박하지 않고, 으시댄다. 경상도 쪽 사찰도 많이 돌아 다녀 봤지만, 맘에 오롯이 들어 왔던 곳은 단 하나, 부산 범어사 뿐이다.

 

백양사로 들어 가는 길. 이 길은 오른 쪽으로는 내장산 자락이 치마를 펼치면서, 행인들을 받아 주고, 왼쪽은 계곡이 흐른다. 거기다 애기 단풍 나무들이 길 가로 죽 늘어 서 있다. 간간히 갈참나무도 보인다. 겨울에 왔을 때는 이 나무들에 온통 흰 눈꽃들이 피더니, 이번에는 파란 새순들이 까르르 웃는다.  가을에 온다면 이 길 어귀가 온통 붉게 넘실거릴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서 사천왕상 앞에 선다. 여러 사찰을 돌아 다니면서 느낀 것이지만 남도 사찰들을 지키는 사천왕들은 어떻게 된 게 무섭지가 않고, 친근하다. 표정들이 전혀 위압적이지 않은 게다. 이쪽 사람들 민심을 닮은 모양새라 생각한다. 산세 보다 들녘에 친근한 사람들은 다른 곳보다는 넉넉하고 낙관적인 심성이리라.

 

약수를 한 잔씩 떠 먹고, 대웅전으로 가 참배부터 한다. 석가모니불이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다. 양 옆으로는 연꽃을  든 문수보살이 있다. 대웅전안으로 들어 설때 부터 천정 쪽에 좀 부산스런 움직임이 느껴진다 했는데, 놀랍게도 알록달록한 산새 한 마리가 단청 사이로 포르륵 거리며 날아 다닌다.  내가 신기한 듯 작게 소리를 내자 금새 옆 문을 통해 날아 가 버린다.

 

참선 30분.  그리고서 그녀와 나는 대웅전 안 쪽 왼편으로 앉아 있는 나한상들을 하나 하나 살펴 본다. 부처의 등위에도 보살의 수행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공이 수승한 승려들, 어찌보면 이들이 부처나 보살보다 더 인간 세상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표정들이 각양각색이고, 어떤 나한 스님은 장난스럽게 웃는 낯모양이 승려 같지 않고, 옆집 할아버지 같다. 그녀와 둘,  엄숙한 경내에서 잠깐 낄낄거린다. 저기 옆에서는 아주머니 한 분이 무슨 경을 외우시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금강경]이다. 육조 혜능이 한 번 듣고 단번에 깨쳤다는  그 경전, 원효가 애지중지하고, 중생들에게 널리 읽히려고 했던 경전, 그 도저한 경전의 깊이에 난 언제 가 닿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길이 내게 열린다고 해서 쉬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나야 한낱 중생이고, 속세를 도량 삼아 한 세상 오순도순, 알콩달콩 살다 평범한 세수를 누리다 가는 것이 더 복될 것이다. 그것에 고마워할 뿐인 게다.

 

대웅전을 나와 칠성각을 잠시 보고, 명부전을 들른다. 나한상 다음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곳. 이곳 저승 사자들도 익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머리가 몸보다 더 커"라며 그녀가 또 웃는다. 나도 따라 낄낄댄다. 내가 그런다. "얼굴이 커야지 위협적이지 않겠어요?" 그냥 해 본 소린데 그럴 듯 하다. 

 

명부전을 돌아 나오는 길 그녀는 새로 향을 한 통 샀고, 난 아이들 가르칠 때 쓸 '사랑의 매'(?)를 튼실한 놈으로 하나 산다.  

 

절을 뒤로 하고 오는 길, 마음에 산 하나, 절 한 채, 그리고 특별히 (아까 대웅전에서 본) 새 한마리가 정갈하게 들어 찬다.  씻고 가라, 놓고 가라, 버리고 가라, 그런다. 산이, 절이, 새가 말이다. 그런데 어쩌랴, 그들이 벌써 마음에 있고, 난 그로 인해 또 얼마간 스스로를 참, 아끼며 생을 참, 소중히 여기며 살것이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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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기자회 업무 복귀? 아니 벌써?

  • 등록일
    2009/04/16 13:24
  • 수정일
    2009/04/16 13:24

 

엄기영 사장이 자신의 용퇴를 거론하면서, 막장으로 함께 가자는 식으로 나와서 그런 것일까? 기자회가 업무 복귀를 한단다. 기껏 전영배 보도국장이 사퇴 의사를 비공개 채널로 밝혔다는 것이 파업철회의 배경이다. 공식적인 사퇴를 한 것도 아니고 비공개 채널이라니, 나 원. YTN에 이어 두 번째 언론사 파업에 대해 어이 없는 순간이다. 하긴 그때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완전한 백기투항이 아니라는 거라 하겠다. 경영진을 '지켜 보겠다'고 해놨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PD수첩 현안이 더 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순순히 투쟁을 접어서는 안 된다. 김보슬 피디가 오늘 체포되었다. 나머지 피디들은 방송국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앞으로 투쟁의 모멘텀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들 했으면 좋겠다. 'MB 방송 장악 저지'인지, 'MBC 민주 방송 수호'인지, 또는 'PD수첩 탄압 저지'인지 말이다. 후자로 갈수록 투쟁 방향은 급하고 그 수로는 좁다. 그러나 대의는 전자 쪽이 더 합당하다. 물론 이들 투쟁방향를 양도일단식으로 선택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고전적인 질문이 다시 제기되는 시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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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빠진 단일화, 그런데 개소식?

  • 등록일
    2009/04/15 11:48
  • 수정일
    2009/04/15 11:48

이건 뭐, 옆에서 보는 사람 물 먹이는 것도 아니고, 영 개운찮다. 북구선관위 유권해석으로  한 이틀 허비했다 치자. 그리고 집행부가 항의 갔다가 들려 들어가서 또 한 이틀 말아 먹었다 하자. 그렇다고 얼씨구나 하고 개소식부터 하는 게 협의 당사자가 할 일인가? 진보신당 쪽은 그래도  15일까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가?

 

그리고, 거기서 후보자란 사람이 하는 말도 가관이다. “반드시 김창현으로 진보정당 후보단일화를 이루어 한나라당에 승리할 것”이란다. 이런 말뽄새는 아무리 미운 놈이라도  '진보'라는 이름 달고 한 솥밥 먹는 동지들에게 할 말이 아니다.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 한나라당에 승리하겠다'고 해야 정상이지 않은가? 이래 놓고 무슨 놈의 '새로운 제안'을 하겠다는데, 그게 후보 단일화를 위해 그간의 여론 조사 방식을 수용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다 헛수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 뿐인지 모르겠다.

 

또 한가지. 김 후보가 이렇게 말하는 걸 한 번 들어 보자. “특히 지금같은 시기에 정규직 일자리 하나가 줄면 비정규직이 생기기에 정규직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단다.  당췌 이게 진보 후보가 할 말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비정규직 일자리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결단해야 한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정규직에서 짤리면 비정규직 되니까 정규직을 지켜야 한다는 이런 논리가 어디 있나. 어이 없을 뿐이다. 명박이 삽질하는 소리에 가깝다 할 수밖에.

 

지도부들의 반응들도 참, 헛웃음 난다. 강기갑 대표는 후보단일화는 이미 물건너 갔고, 진보 후보는 오직 김창현이 뿐이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벌써 의석수 계산에 열심이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이번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5곳 중 1곳 이면 20%이다. 김 후보의 당선은 다음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20%, 59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 권영길씨 반응은 더 개그다. "김 후보가 당선되면 강 대표의 손가락도 움직일 것이고, 우리 당도 벌떡 일어설 것”이란다. 강대표의 손가락이 낫고, 민노당이 운기충천하는 건 나도 바라는 바이지만, 진보신당 쪽 조승수 후보는 자기가 '당선'되리라는 일언 반구도 없는데, 민노당만 이러구 있으니, 누가 봐도 오바라 할 것이다. 물론 딴날당 쪽에서는 '쟤네들 단일화는 생각도 안 하나봐. 그럼 우리야 조오치!'라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이쯤 되니, 난 혹여 민노당 집행부가 최근 나온 여론 조사에서 김 후보의 열세가 뚜렷해지자 미필적인(북구선관위 탓만 하면서) 꼼수를 부리고 있는게 아닌가 의심이 간다. 제발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정말 이번만큼은 성격 별로 안 좋은 내 입에서 '역시 X주사' 어쩌고 하는 욕이 안 나오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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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복수는 너의 것?

  • 등록일
    2009/04/09 19:22
  • 수정일
    2009/04/09 19:22

 한 1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아이들이 속을 좀 썩이거나 하면, 요사이 하는 말이 있다. “인석아, 명박이 삽질하는 소리 할 거야?” 그러면 수굿하던 아이들 분위가가 왁자해진다. 터지는 웃음소리, 까르르! 저마다 따라한다. “명박이 삽질 소리, 삽질 소리, 크크.” 하긴 예전에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한다”였는데, 이렇게 말을 바꾸어 보니 우습기도 하다. 견공과 최고 권력자가 한 마디의 농담 안에서 동격이 되는 순간이니 말이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이런 정치농담을 2009년 한국 땅의 어린 아이들이 정말 척척 알아먹고 웃어댄다는, 바로 그 현상이다. 이 정권의 개념 없음을 한탄해야 할지, 어린 학생들의 정치의식을 칭찬해야 할지 문득 헛갈리는 순간이다.

 

그런데 삽질 소리가 저 고요한 워낭 소리처럼 사람 마음에 척척 감겨 아픈 곳을 풀어 주는 소리라면 오죽 좋겠는가마는 절대 그렇지 않다. 궁상맞은 목소리로 방송국 부스 하나를 꿰차고 자기 자랑만 줄창 해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삽을 백주 대낮에 들고 나와 휘둘러 댄다. 거기 맞아 죽은 자가 속출하고 있으니, YTN이 그들이고, KBS가 또 저 뒤에 피를 철철 흘리고, 이제는 아고라와 MBC 사옥에까지 개(檢)을 앞세우고 와서 사람을 물어뜯게 만들고 있다. 대충 최근 한 달 정도에 저지른 만행만 꼽아 봐도 손가락 열 개가 모자를 지경이다. 살천스러울 따름이다.

 

저간의 이 행태들을 뭐라고 해야 할까? 혹시 ADHD(과잉행동장애)? 하긴 하루에 몇 시간 자지도 않고, 지하벙커에서부터 대운하 예정지까지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부모들(民)을 괴롭히니 그럴 수도 있겠다. 혹자는 제발 잠 좀 자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건 여간 심하지 않다. 벌써 1년이 넘게 삽날로 사람들을 때려잡았으면 싫증날 만도 한데, 무슨 ‘13일의 금요일’에 제이슨도 아니고, 연방 후속탄이 터진다. 촛불도 아랑곳없고, 용산에서 떼죽음을 당해도 사과 한 마디 안하더니, 실업자가 사상 최대인데, 일 없으면 막노동이라도 하란다. 이게 한 나라의 선출된 대통령이 할 소리인지, 아니면 취직 못해 앓고 있는 조카에게 건네는 무식한 삼촌의 일갈인지 구분이 안 간다. 이러니 한 편으로는 분노가 치밀고, 한 편으로는 냉소가 번진다. 희한하다. 신경질 내면서, 웃어야 하다니 말이다. 사기꾼 하나가 온 국민들을 이렇게 신경질내면서 웃는 이상한 미친놈으로 만드는 세상이다. 지옥이다.

 

‘지옥에서의 한 철’이라고 했던가? 딱 맞다. 대한민국 국민이 지낸 일 년여가 딱 지옥이다. 가뭄에 단비처럼 야구에 열광하고, 김연아에 황홀해 했지만, 그건 지나가면 그뿐이다. 여전히 뉴스를 보면 삽질이 난무하고, 피가 튀고, 누구 목이 달아난다.

 

이 지옥을 연출하는 자들, 또 거기서 연기하는 자들이 참 많이도 있다. 어슬렁거리는 충성스러운 개도 두 마리 있다(수수께끼 하나. 개 두 마리의 이름은 뭘까? 한 마리는 주로 입으로 짓고, 다른 한 마리는 주로 밖에서 사람들을 문다. 개 이름 둘 다, ㄱ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지옥에는 단 하나의 명령만이 있다. 그건 ‘복수하라!’라는 것이다.

 

“삽질에 반기를 든 촛불, 너희에게 복수하겠다. 사법부와 재판관의 독립성이라는 이념을 허물고서라도, 너희에게 복수하겠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권력을 가졌던 너희들, 복수하겠다. 줄줄이 뇌물죄에, 횡령죄다. 나? 나는 조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왜 나를 조사하는가? 나를 털면 너희보다 더한 사실이 줄줄이 나올 건데? 나를 조사하라고? 말 안 되는 소리! 삽질을 비판하는 너희 기자놈들, PD놈들, 다 복수다. 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결백하고, 죄 없다. 너희 놈들이 내 죄를 만든 거다. 복수다.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성상납? 남자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그게 뭐가 죄야? 재수 없이 걸린 것 뿐이다. 그 보다, 뒷구멍에서 나 욕한 아고리언들, 너희는 악마들이다. 구속이다. 복수다. 고통을 주고, 겁을 주고, 공포에 떨게 하면서, 난 너희를 통치할 것이다. 알아서 기어!”

 

제대로 복수하고 있다. 신문을 펼치면 한 면 가득 무협소설 같다. 내용이 뻔히 보이는 그 무림 복수극 말이다. 형편없다. 요사이 아이들에게 하는 농담이 또 하나 있는데, 이렇다. “명박이 동생과 상득이 형이 예전에 매일 싸웠데. 근데 어머님께서 매번 상득이만 혼내는 거야. 왜 그런지 아니?” ... ... “그건, 그건, ‘형편없기’ 때문이다! 으하하” 아이들이 어이없어 한다. 정말 딱 그 짝이다. 이 살벌한 지옥 한 철에 황당하고, 어이없는 농담이나 아이들에게 하면서 견뎌야 하다니 말이다. 어이없다. 그리고 정말 형편없을 따름이다.

 

조금 있으면 518이고, 좀 더 있으면, 610이다. 한 소식, 그 한 소식이 참으로 그리운 봄날이다. 다른 이들의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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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투쟁, 배신과 패배, 탄압의 시작.

  • 등록일
    2009/04/02 18:24
  • 수정일
    2009/04/02 18:24

 

YTN이 투쟁을 접었단다. 놀라 묻는다. 벌써? 그리고 찬찬히 내용을 살펴 본다. 경악이다. 한숨 밖에 안 나온다.  결국 이건 패배 선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도대체 비대위 인자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어디서, 그 잘난 주둥이로, 갇힌 동지 핑계를 대면서 투쟁을 접는가? 과연 노종면 위원장이 얼씨구나 좋다 할 것인가? 참으로 협상력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다. 결국 이럴 것이었으면, '낙하산 사장 저지 투쟁'이라는 간판을 내리고서, 그 짓거리들을 해야 옳지 않은가? 협상 테이블에 구본홍이를 앉힌 그 순간 투쟁의 명분이 사라진다는 것을 비대위 인자들은 몰랐단 말인가?

 

"위원장이 구속된 엄중한 상황에서 ... " 어쩌구 한 그 세치 혓바닥이 변명 외에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 복직 되지 못한 6명의 동지들은 어쩔 셈인가? 법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정말 답답한 사람들이다. 입때껏 법에 그토록 유린당했으면서, 이제와서 법을 믿겠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비대위가 그 '엄중한 상황'을 애써 고려하지 않았어도,, 구속적부심에서 노종면 위원장은 풀려날 가능성이 컸다. 내외적인 연대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두려워해야 할 쪽은 오히려 사측이고 정권측이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투쟁을 접으면서 뭘 얻었는가? 임금 동결하고, 사측에 걸어 놓은 고소, 고발 취하해 주고,  그것도 모자라 '공정방송점검단'도 해체한다고 했다.

 

이제 어떻게 되냐고? 탄압이 시작될 거다. 당연하지 않나? 해직기자 복직?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있던 기자들도 좌천되거나 알게 모르게 징계될 것이다(예상컨데, 비대위에 속했던 기자들은 예외일 것이다).

 

YTN 비대위? 난 이제껏 비대위가 꾸려지고, 권력과의 협상이나 투쟁에서 이렇게 무력한 경우을 본 적이 없다. 이건 배신행위고, 바보짓이며, 결국 그동안의 투쟁을 원점으로 돌린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퇴보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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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그러나

  • 등록일
    2009/03/23 22:59
  • 수정일
    2009/03/23 22:59

[지옥의 묵시록]을 안 봤으면, 이 책이 이만큼의 리얼리티라도 주었을라나 모르겠다. 하여간 고전이다. 게다가 난 기껏 번역서를 훓었을 뿐이니 ... 함구.

 

 

 

 

 


 


조셉 콘래드 지음,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민음사, 2008.

 

[7]쌍돛대 유람선 <넬리>호의 돛은 펄럭이지 않았고 배는 닻을 내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멎었다.

 

[16]이 불미로운 행위를 대속(代贖)해 주는 것은 이념밖에 없어요. 그 행위 이면에 숨은 이념이지. 감상적인 구실이 아니라 이념이라야 해. 그리고 이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지. 이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이거든 ... [말로]

 

[61]거짓말 속에는 죽음의 색깔이 감돌고 도 인간 필멸의 냄새도 풍기는 게 아닌가. 바로 거짓말의 이런 속성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증오하고 혐오하는 바이며 내가 잊어버리고 싶은 바이기도 하다네.

 

[105]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고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근육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지. 오직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은 어떤 신호에 응답하듯이 그리고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은 어떤 속삭임에 응답하듯이 몹시 상을 찌뿌리기만 했어. 그 찌뿌림은 죽음에 임하고 있는 그의 검은 얼굴에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위압적이며 위협적인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지. 그 캐묻는 듯하던 눈초리 속의 빛은 순식간에 멍한 유리빛으로 퇴색하고 말았어.

 

[109]그네들, 여인들 말이네, 그들은 내 이야기와 관련이 없고 또 마땅히 관련이 없어야 하네. 우리는 여인들이 작기네 자신의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머물러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그래야만 우리의 세계가 좀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129]숲은 하나의 가면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닫혀 있는 감옥의 문처럼 무겁기만 했으며, 무언가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거나 무언가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거나 또 [130]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침묵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어.

 

[146]그건 어떤 뚜렷한 육체적 위험과도 관련 없는 순수히 추상적인 공포였어. 그 공포의 감정을 그토록 압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글쎄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받은 도덕적 충격 때문이었어. 마치 전적으로 괴물 같은 무엇이 생각을 괴롭히고 영혼을 짓누르며 별안간 내게 들이닥치고 있는 듯했어.

 

[176]내가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앞바다는 강둑 같은 시커먼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곳까지 나 있는 그 고요한 물길은 찌뿌린 하늘 아래서 음침하게 흐르면서 어떤 엄청난 암흑의 핵심 속으로 통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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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안의 문성근, 영화 [실종]

  • 등록일
    2009/03/23 20:25
  • 수정일
    2009/03/23 20:25

 

 

 

영화평을 제대로 써 보려고 한 20분 궁싯댔는데, 글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 젠장.

 

하여간 문성근이 오랜 일탈 이후, 스크린에 복귀한 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감각 있는 감독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던 것 같다.

 

역시 이 영화의 압권은 현아(전세홍 분)의 생니를 무시무시한 뻰치로 몽창몽창 뽑는 장면인데, 사실 난 이 장면부터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정말, 스릴러의 문법을 철저히 지킨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분쇄기 장면이다. 현아를 산 채로 갈아 버린다. 히유 ~ 정말 지금도 끔찍해서 소름이 돋는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분쇄기 앞에서 판곤(문성근 분)이 하는 말이다.  "이거 통 채로 갈기는 처음인데 ,,, 기계가 괜찮을라나 ..."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영, 아니올시다, 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이 보길도 대학생 살해 사건이란 건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굳이 실화에 기반했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는가? 멀뚱멀뚱 여대생 둘을 보던 그 어부 아저씨 연기도 영 꽝, 이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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