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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리고 Salsa!

  • 등록일
    2009/12/14 12:11
  • 수정일
    2009/12/14 12:11

 

끝 그리고 Salsa!

- 《시간의 춤》, 송일곤, 2009
 
“시간만이 불멸하는 삶은 아름답다”(중국인 이민자 남편의 말) 하나의 거대한 비극. 그게 쿠바 한인들의 강제 이주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런 긍정이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멸하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찬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멸하는 것이고, 매우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이로운 것이라고 확인한다. 이와 같다. 조선인 쿠바 이민자 세대들은 죽음을 반추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들은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산다!
 
감독이 발견한 것도 그런 것이다. 애국주의적 향수를 카메라에 담는 일 따위는 너무 지겹기 때문에 아예 그러한 감상을 농담처럼 웃어넘기는 이 사람들이 작가에겐 더 친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쿠바와 한국이 야구경기를 한다면 그들은 쿠바를 응원할 것이라고 정말 진지하게 말한다. 그들에게 조국은 쿠바며, ‘꼬레’는 아득한 세대의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기 때문에 혁명도 그들의 삶에 대한 긍정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아름다웠던 것은 혁명의 시간에 그(녀)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은 혁명이 아니다. 하긴 혁명이 대수겠는가? 더 극적인 것은 ‘혁명의 시간’이 아니라 ‘살사(salsa)의 시간’이다. 세상을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춤을 추지 못한다면 옳지 않다. 그래서 쿠바 한인들, 아니 한국계 쿠바인들은 즐거운 소수자들이다.
 
우리는 이념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너무 자주 슬프고, 너무 자주 분노하고, 너무 자주 좌절하기 때문에 냉소에 익숙하다. 냉소에 익숙하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처연한가? 처연함은 슬픔의 독을 삶의 여린 살에 꽂아 넣는 주사바늘과 같다. 과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또는 민족주의든, 하나의 이념이 앞서 이들을 규정했다면 이 쾌활함이 가능했을 것인가? 물론 혁명은 위대하다. 하지만 춤이 더 즐거운 것도 명백하다. 그러니 사실 더 위대한 것은 죽음과 혁명의 기억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냉소에 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도, 혁명도, 죽음도 끝나지 않는다. 춤을 춰야 하니까! “Fin y Salsa!"(영화 마지막 자막)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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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해체], 자크 데리다 외

  • 등록일
    2009/12/03 00:29
  • 수정일
    2009/12/03 00:29

어떻게 보면 환영할만한 시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도대체 데리다의 언어가 맑스주의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할 듯 싶다. 마르크스가 '아'라고 하는 곳에서 데리다는 '어'라고 하고 있으니 두 진영 모두에서 답답할 노릇이다.

 

일단 데리다가 맑스 옆에 서자마자 참으로 왜소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맑스와 대면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장인 앞에 선 도제처럼 횡설수설을 멈추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해체'는 '해석' 앞에서 저렇듯 영원히 초라할지도 모른다. 다만 해석으로부터 멀찌감치 있으면서 아카데미의 풍족한 만찬을 즐길 때만 의기양양할 것이다. 데리다는 말년의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그도 대가임에는 틀림없고 또 고독할 뿐이지만,  맑스는 이미 역사이며, 하나의 연대기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불가능한 만남?』, 자크 데리다 외 지음, 진태원, 한형석 옮김, 도서출판 길, 2009
 
해제 :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의 불가능한 만남? 5
 
제1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비판
제1장 유령의 미소 ― 안토니오 네그리 27
제2장 탈물질화된 마르크스 또는 데리다의 정신 ― 피에르 마슈레 51
제3장 데리다를 화해시키기.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해체적인 정치 ― 아이자즈 아마드 71
 
제2부 마르크스와 아들들
서론 ― 티리 브리오 119
마르크스와 아들들 ― 자크 데리다 123
 
찾아보기 249
 
[아이자즈 아마드]
(78)(죽은 아버지의 유령은 명백히 데리다의 책의 제목-“마르크스의 유령들”-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죽음의 종말성이라는 주제를 가리키고 있으며, 또 마르크스, 죽은 아버지의 진정한 상속인들은 공산주의자들 및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이들이 아니라 바로 와 그의 해체라는 그의 주장을 가리키고 있다.)
 
[81]하지만 데리다 텍스트의 딜레마는 그가 애도하는 있는 것이 무엇이며, 왜 지금 그것을 애도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 텍스트가 전혀 불분명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왜 소련의 몰락이 그로 하여금 애도하게 만들었는가? 왜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마르크스주의의 사망 사이의 이러한 동일시, 데리다가 이 텍스트의 다른 부분에서 대립하고 있는 자유시장론자들이 그처럼 애호하는 이러한 동일시가 이루어지는가? 과거 어느 순간에 그가 소련과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를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중 하나의 종말이 다른 것의 사망을 애도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 것인가? 적어도 이 한 가지 측면에서 본다면, 이 텍스트의 의미를 구조 짓고 있는 애도의 모티프는 애도의 순간에 대한 어떤 오인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83]나는 이러한 애도의 은유는 매우 명확하고 한정된 적용대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데리다 자신의 철학적인 상상으로, 그는 햄릿을 연기하기를 원하고, 마르크스주의(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유령과 마찬가지로 죽은 것이다)를 상속하기를 원하며, 이음내가 어긋난 시간을 바로 세울 수 있을 만큼 공정한 왕자-덴마크의 왕자, 해체의 왕자-가 되기를 원한다. 요컨대 그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신자유주의적인 우익의 승리가 아니라, 적어도 해체의 철학적, 학문적 승리와 합치하게 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애도 중에 있는 이유는 아버지의 죽음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죽음의 성격 때문이며, 왕국이 해체의 왕자가 아니라 우익 찬탈자들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 [84]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애도의 실제 대상인 셈이다. 곧 죽음이 아니라 찬탈이 애도되고 있는 것이다.
 
[92]내가 “자기도 모르게 기여했다”고 말한 것은 진심으로 한 말이다. 내가 “자기도 모르게”라고 말한 이유는, 데리다의 작업과 영향력에 대해 유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긴 하지만(사실은 데리다 자신보다는 데리다주의자들에 대해 더 그렇다), 나는 결코 그가 우파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는 우익 인사들의 무리를 찾아다니거나 그들의 ‘교리’의 승리를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았다. 또 그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담을 선언한 [93]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텍스트-이 ‘화해’의 방식-에서조차 데리다는 특히 미국에서 해체론자들이 제기했던 정치적 마르크스주의에 댛한 수많은 공격이 어떻게 노골적인 자유주의적 화용론과 철학적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치적 수사법에서는, 어떻게 그가 여기에서 개탄하고 있는 우익의 ‘교리’만큼이나 신랄할 수 있었는지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97]일정한 유형의 편협한 종교적 배타주의는 단지 몇몇 이슬람 국가들에 국한된 특징이 아니라 가장 커다란 승리를 거둔 시기의 서방 그 자체, 자본주의적인 유럽 그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데리다의 빛나는 통찰력이야말로 이 대목의 매우 신선한 측면이다.
 
[99]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데리다가 “해체는[마르크스주의와의 절연에 대해-아마드] 결코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흥미를 지닌 적도 없다”고 주장할 때, 또는 해체는 항상 마르크스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단지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심화된 것/급진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할 때, 그는 해체의 역사를 [100]다소 감추거나 재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및 다른 곳에)서 데리다가 해체-해체는 본질적으로 지난 25년여 동안 다소 제한된 학문 집단 내에서 텍스트 해석학으로 존재해왔다-와 마르크스주의-이것은 19세기의 기원은 차치한다 해도 20세기의 세계사에서, 옳았든 틀렸든 간에(대부분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매우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사이에 일종의 동등성 관계를 확립하려고 하는 데 대해서는 논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차치한다면 데리다 자신이 훨씬 더 어처구니없는 반마르크스주의적 급진주의와 전반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왔다는 점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북미, 특히 예일 대학에 있는 아주 많은 수의 그와 가까운 동료들, 데리다가 국제적인 지위를 얻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고 데리다 자신이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 중 어던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오류 및 잘못은 마르크스주의의 아주 많은 정신들 쪽에서 기인한 반면, 해체의 역사는 아무런 흠결이 없다는 것이 데리다 자신의 설명의 놀라운 특징이다. 정확히 모든 종류의 순수함의 수사법에 대한 해체로 그처럼 유명한 철학자가 최근의 지성사에서 해체의 위치를 설[101]명할 때에는 이렇게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적어도 아주 놀랍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103]우리는 이미 모종의 역설을 간파해냈다. 곧 보통 마르크스의 이름과 결부되었던 어떠한 정치 전통, 철학 전통도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시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전통들의 패배가 마르크스의 죽음의 순간과 동일시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이 애도의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이제 훨씬 더 복잡하게 뒤얽힌다. 자기 자신을 이러한 “어떤 마르크스의 정신”과 [104]동일시하기 위해 데리다는 단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모든 정치적 실천 및 철학전통을 벗겨내야 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약속”의 비규정성 속에서, “메시아적, 종말론적” 양식에 따라 회복하려고 해야 한다.
 
[107]“교리/독단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미 사회 계급, 이데올로기, 상부구조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개념 장치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해체와 화해시키는 과정 도중에 우리 자신을 극단적인 형태의 반(反)정치 속에 정면으로 위치시키도록 초대받는다. “공[개]적인 것이라고 하기도 어려우며, […] 결집 없이, 당과 조국, […] 공동 시민권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 소속 없이 […] 반푸닥거리의 형태를 띤 […] 제도 없는 동맹” 등등. 데리다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과제는 “비판들/비평들”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이는 아주 작가적인 “인터네셔널”인 것 같다) “비판/비평”의 대상도 명시하는데(민족, 국가, 국제법), 단 아주 명시적인 부정성(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을 넘어서, 그리고 여기 명백히 함축되어 있는 과도한 주의주의를 넘어서, 몇몇 비평작가들과 다른, 정확히 어떤 사람이 이 인터네셔널에 들어가는지는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적어도 몇몇 문장들(“공[개]적인 것이라고 하기도 어려우며”, “일종의 반푸닥거리”)은 이것이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조직 같다는 인상을 준다.
 
[109]데리다의 “새로운 인터네셔널”-이는 “익명성”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것이 아무런 “공동체”도 구성하지 못하는 유목적인 개인들을 절대화하고 있을뿐더러 하이데거에 대한 반향은 차치한다고 해도 거의 종교적인 어조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도래하고 있는 것의 절대적 미래” 같은 문장들이 재림에 대한 수많은 잠재적 이미지들을 환기한다면, “사막과 같은 경험”이나 “타자와 사건에 대한 기다림” 같은 다른 문장들 및 비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이미 “법칙화”되어 있는 어떤 “경험”에 대한 환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주요한 유일신 종교 모두에 포함되어 있는 신비적 전통에 공통적인 종교적 체념이나 포기의 강력한 언어 표현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고된 “새로운 인터네셔널”이 다소간 프리메이슨 식의 성격을 띤다고 해서 놀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
 
[112]데리다가 불가능하지만 열정적인 화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어떤 마르크스의 유령’을 남겨두기 위해 다른 모든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정확히 말하면 시신이 아니라 유령성을 회수하자고 역사 전체를 쓰레기처럼 내버려야 하는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도래를 예고하기 전에 데리다는 자신은 과거의 인터네셔널들의 경우에는 결코 활용한 적이 없었다고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데리다의 텍스트에는 어떤 오인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적어도 그가 옹호하는 반(反)정치는 우리를 ‘새로운 인터네셔널’이 아니라 한낱 포틴브라스로, 곧 낡은 질서 그 자체의 한 변형인 ‘새로운’ 질서로 인도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는 아버지의 유령도 햄릿도 예견하거나 견뎌내지 못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체계적인 복고다.
 
[113]정치적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친숙한 범주들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하며, (비록 데리다 자신은 자신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종교적이지 않다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메시아적이라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강력한 종교적 상상계로 가득 차 있는 논거들로 인해 화해 자체가 영향을 받는, 해체와 마르크스주의를 화해시키려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이 텍스트에는 어떤 고결한 태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곧 신자유주의적인 승자들과 동일화하지 않으려는 거부의 몸짓, 자신의 저항적인 자세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거부의 몸짓, 우파의 승리감을 꿋꿋이 견뎌내려는 의지에 대한 긍정, 심지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운 유럽사의 한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려는 용기가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자연히 데리다와 [114]어떤 친화성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제안한 자기비판을 해체에 대하여 떠맡는 것을 여전히 너무 꺼리고 있는 것 같다. ... 자신과 마르크스주의-또는 그가 표현하는 대로 한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정신”-의 결합을 긍정하면서도 데리다가 이러한 해체론의 근거들 중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며, 사실은 아주 확고하게 그것들을 재진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제는 해체론이 과거에 보여주던 거의 자기도취적인 긍정의 태도와 갈등을 빚을 만한 종교적 고통의 어조를 도입하고 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티리 브리오]
[124]『마르크스의 유령들』은-이 점을 다시 환기해두자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미 일종의 ‘응답’, 단지 하나의 응답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초대 및 긴급한 명령에 대한 응답이자, 매우 오래된 요구에 대한 응답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책임(responsabilité)에 함축되어 있는 ‘예’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원초적일 수 있든 간에, 하나의 응답(réponse)으로 남아 있다. ‘예’라는 것은 항상 유령의 명령에 대한 응답처럼 울려 퍼진다. 명령은 우리가 생생한/살아 있는 현재로도, 죽은 이의 순수하고 단순한 부재로도 식별할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도래한다.
이는 곧 이러한 응답의 책임은 이미 존재론으로서의 철학 또는 현존으로서의 존재의 현실성에 대한 담론인 존재론-이 점에 관해 우리는 많은 것을 또다시 말해야 할 것이다-의 지반에서 떠나왔다는 말과 [125]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제기된 많은 논쟁은-우리는 이 점에 관해 이미 검증했던 게 되겠지만-겉보기에는 추상저이고 사변적이지만, 수십 년 전에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말하곤 했듯이, “우회할 수 없는” 또는 “사령탑의 자리에 있는” 이러한 형식의 질문 주위에서 이런저런 순간에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산에서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마르크스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했고 또 여전히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정치철학인가? 더욱이 존재론으로서의 정치철학인가? 그리고 겉보기에는 추상적인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정당한가?
 
[132]이 질문은 정확히 말하면 삼중의 질문이다. 1) “정치적인 것”의 질문(특히 “마르크스”에서 “정치[133]적인 것”의 본질과 전통 및 한정에 관한 질문). 2) 또한 “철학적인 것”의 질문(특히 “마르크스”에서 존재론으로서 철학에 관한 질문). 3) 따라서 사람들이 이러한 이름들/명사들 아래, 특히 “마르크스”라는 이름/명사 아래 공통적으로 식별/동일시할 수 있다고 - 이는 이 이름들 간의 불일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 믿고 있는 그러한 장소들의 질문. 이 세 개의 질문(“정치적인 것”, “철학적인 것”, “마르크스”)은 분리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한 가지 “테제” 또는 한 가지 가설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오늘날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을 가정할 것이다. 이러한 테제(또는 가설)의 세 가지 주제는 사실은 하나를 이룰 뿐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공통의 장소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우리가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해도 그것들의 장소이며, 그것들의 역사적 접합의 장소다.
 
[마르크스와 아들들-데리다]
[139]내가 최근 10여 년간 출판했던 모든 텍스트들(적어도 『정신에 대해서. 하이데거와 질문』)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역시 질문 형식이 지닌 의존성, 심지어 모종의 부차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처음 보기에는 양립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 일을 함께 실행하려고 시도하는 어떤 담론이 지닌 분할 가능성, 주름(pli), 또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140]렇게 말할텐데-이중성에서 비롯한다. 두 가지 일이란 한편으로 응답 자체에 의해 최면화되거나 억압되는 질문들을 다시 일깨우려고 시도하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질문을 감시하고(veille), 질문의 전야(前夜, veille) 자체로서 질문에 선행하는 긍정(필연적으로 혁명적인), 명령, 약속, 요컨대 어떤 (oui)의 유사수행성을 떠맡는 것이다.
 
[141]내가 문제로 [142]삼은 것은 이론적, 실천적 차원에서 역사적인 파국적 실패들을 해명하기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어떤 유산을 다른 식으로 재정치화하는 것이다. 첫째로 정치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것과(무엇보다도 국가/상태État의 관점에서 파악된 현실성이나 현존성, 보편자의 개념, 그리고 당의 관점에서 파악된 세계시민적 시민권 및 인터네셔널의 개념과) 용접했던 것-우리의 근대성에서 이는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특히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정치적인 것의 차원을 향해 이러한 유산을 돌려놓는 일이 중요하다.
 
[149]도착적 수행문(perverformatif). 내가 방금 지적한 “유사 수행성”은 적어도 두 가지, 한 단어로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이러한 재정치화의 필연성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는 바로 여기서, 일정한 조건들 아래 재정치화를 작동시켜야 할 것 같다.
A. 적어도 지난 25년 동안 씌어진 나의 모든 텍스트에서처럼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도 수행적 차원(단지 좁은 의미의 언어만이 아니라 내가 흔적 및 기록écriture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고려가 나의 모든 논변을 규정하고 과잉규정했던 게 될 것이다.
B. 과잉규정했던이라고 말한 이유는, 존 오스틴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동시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나는 나 자신이 “오스틴”에[150]게 그의 유산에게,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시대의 주요한 사상 중 하나 또는 주요한 이론적 사건 중 하나, 가장 풍요로운 이론적 사건 중 하나에게 충실하면서 불충실했기에, 충실함을 통해 불충실했기를 바란다). 나는 오랫동안 내부로부터 수행문 이론을 전환시키기 위해, 해체하기 위해, 곧 이 이론을 과잉규정하고, 다른 식으로, 다른 “논리로” 작동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163]나는 또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나의 작업 일반을 포스트모더니즘 내지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유’(類)의 단순한 한 가지 종(種)이나 경우 또는 사례로 간주하려는 모종의 성급한 시도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이 통념들은 바로 가장 미흡한 정보를 지닌 공중(대개의 경우 거대 언론)이, “해체”를 필두로 자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쓸어 담는 잡동사니 부대자루들이다. 나는 내가 포스트구조주의자도 포스트모던스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 나는 결코, 더군다나 내 나름대로 활용하기 위해 “모든 메타서사의 종말의 예고”에 관해 말한 적이 없다.
 
[213]『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중심에 존재하는 메시아성 및 유령성보다 유토피아나 유토피아주의에 더 낯선 것은 없으며, “은밀한” 형태를 띤 유토피아나 유토피아주의라 할지라도 그렇다. ...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의도적으로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피하”(shun)려[214]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메시아성(내가 경험의 보편적인 구조로 간주하는, 그리고 어떤 종교적 메시아주의로 환원되지도 않는)은 결코 유토피아적이지 않다. 메시아성은 모든 지금-여기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사건의 도래, 곧 가장 환원 불가능하게 이질적인 타자성을 지시한다. 도래하는 (것의) 사건을 향해 쏠려 있는(tendue) 메시아적인 근심(appréhension)보다 더 “현실주의적”이고 더 “직접적인” 것은 없다. 나는 “근심”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건을 향해 쏠려 있는 이러한 경험은 동시에 기대 없는 기대이기 때문이다(곧 이러한 경험은 능동적인 대비, 어떤 지평에 의거한 예상이지만, 또한 지평 없는 맡김exposition이기도 하며, 따라서 욕망과 불안, 긍정과 두려움, 약속과 위협이 뒤섞인 환원불가능한 합성체다). ... 내가 여기서 메시아성에 대해 제시한 정식화가 추상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정확히 말하면 이는 사건, 도래하는 [것의] 현실적 타자성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보편적 구조, 모든 존재론에 ‘앞서는’ 또는 그것과 독립적인 사건에 대한 사상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가장 구체적인고 가장 [215]혁명적인 긴급성이다. 결코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메시아성은 지금 여기서 사태, 시간, 역사의 통상적인 경로를 중단시킨다. 그것은 타자성 및 정의에 대한 긍정과 분리될 수 없다. 그 다음 어떻게 이러한 무조건적 메시아성이 이러저러한 독특한 실천적 상황에서 자신의 조건들과 협상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분석과 가치평가, 따라서 책임의 장소가 놓여 있다. 분석과 가치평가, 책임은 매순간, 각 사건의 전야에, 각 사건의 진행 도중에 재고찰되어야 한다.
 
[223]문제는 계급적인 소속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시민권이나 당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계급이나 당 또는 시민권을 본질적인 토대나 지주로 삼고 있지 않은 어떤 인터네셔널에 대한 호소다. 이는 계급이나 시민권 또는 당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규정된 맥락에 따라 가능한 한 엄밀하게 이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226]내가 보기에 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이고 유사 초월론적인 구조는 역사(정치적 역사이든 일반적인 역사이든 간에)의 어떤 특수한 순간과도, 어떤 특수한 문화(아브라함적인 문화이든 아니든 간에)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성은 어떤 메시아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로도 사용되지 않으며 어떤 메시아주의도 모방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주의도 확증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227]한편으로, (메시아적이라는) 이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임의적이거나 외재적인 것 같다. 이 단어는 수사법이나 교육학적인 거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내가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은 것(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거나 동일시되지는 않고서라고 곧바로 덧붙여두겠다)을 친숙한 문화적 환경을 참조함으로써 좀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내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언젠가 이해가 될 맥락에서는-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전통적인 메시아주의나 “메시아”에 대한 암시 없이도, 심지어 “없는”이라는 말이 없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낡은 단어들 아래서 모든 이름이 변화했던 게 될 것이다.
 
[228]첫째,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사건(및 그것이 지닌 모든 구성소와 전체, 결과)이 유럽적이고 유대,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전체는 “메시아”가 무언가를 의미하는 문화에서 출현했으며, 이 문하는 “국지적인” 문화 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손쉽게 구획될 수 있는 그런 문화로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침전 작용을 다시 드러내는 일은 결코 무익하지 않으며, 이것이 그 침전 작용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정치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246]마지막으로 단지 스피노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 해방된 존재론자 마르크스도 마라노였다는 생각을 던져보면 어떻게 될까? 유대계 독일인으로 변장했던 스페인, 포르투갈 출신의 일종의 불법이민자로서,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고 심지어 약간은 반유대주의자인 것처럼 처신했던 사람이라고. ... 마라노들은 너무나 잘 은폐하고 너무나 잘 변장해서 그들 스스로 자신이 변장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또는 그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억압하고 부인하고 부정해버렸다. 우리는 ‘진짜’ 마라노들, 현실적으로, 현재적으로, 현행적으로, 실제로, 존재론적으로 마라노인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이 또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얼마 전부터 마라노주의라는 물음은 죽었다고 주장해 [247]왔다.
나는 전혀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 여전히 아들들과 딸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선조들의 복화술사 환영들을 육화하거나 윤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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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 등록일
    2009/11/28 18:15
  • 수정일
    2009/11/28 18:15

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멜리에스가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필름에 담아 대중 앞에 내 놓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마술쇼에 가까웠다(《달나라 여행》, 1902).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놀이의 경이로운 결합이었다. 따라서 “예술은 애초부터 기술이었다”라는 로버트 저매키스(Robert Zemeckis)의 말은 영화라는 매체예술에 이르러 완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결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일정정도의 네러티브가 부재한다면 그 필름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거장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단지 조잡한 테크놀로지의 전시가 아니라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완성된 ‘시네마’(‘무비’가 아니라)로 평가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영화가 기술이고 또 예술이라면, 거기에는 그 기술-예술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창조적 네러티브, 즉 사건구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사건구조는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카메라와 편집을 통한 시공간의 분할을 모두 포괄한다. 작가(감독)의 특유성은 이 사건구조의 창조를 위해 이미지를 얼마만큼 극단적으로 또는 근원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 영화예술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초기작인 《강원도의 힘》(1998)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고집스럽고 때로는 시니컬한 작업방식은 이제 ‘딱 홍상수식’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홍상수식 시네마에 물릴 때도 되었건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정말) 작정하고(!) 본다.

 

희한한 것은 여기에 있다. 내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홍상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필자를 포함하여) 먹물께나 든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홍상수가 영화 안에서 능청스럽게 놀려대고 키득거리게 만드는 대상이 또 이 지식인들이 아닌가? 언젠가 나는 홍상수의 이 끝없는 지식인에 대한 조롱과 희화는 역설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홍상수 자신의 애정, 결국 자기 자신(작가 자신도 프랑스 유학씩이나 다녀온 지식인이 아닌가?)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파악도 부족할 듯싶다. 왜냐하면 이 ‘나르시시즘’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봉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그 나르시시즘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나는 그래도 창피한 줄 안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만, 어쩌랴, 지식인이란 그런 족속들이다. 간단한 사실을 복잡한 진리(aletheia)로 떠드는 자들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단한 사실을 사람들이 매우 자주 망각(letheia)하고 살기 때문에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경매가’가 한없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가 주장한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다. ‘창피한 것을 아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 무슨, 루비콘 강 쯤 되는 심연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는 지식인들을 놀려대면서도 그 지식인들이 창피한 줄도 알고 그래서 ‘괴물이 되지는’(《생활의 발견》 중 김상경의 대사) 않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홍상수의 적정수준의 페시미즘도 한 몫하고 있다. 사실 창피스러운 줄 아는 것과 괴물이 되지 않는 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굉장한 덕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테지만 생활과 욕망이란 것이 그 덕목의 실천을 참으로 힘겹게 만든다는 인생관이 그것이다.《첩첩산중》에 등장하는 지식인들도 그렇게 산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위무하고 때로는 위악을 떨면서 말이다.

 

거두절미. 홍상수는 이번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오랜만에 글쟁이들을 등장시킨다. 주요 등장인물은 4명이다. 전주 어느 대학의 교수 겸 소설가인 전 선생(문성근), 그의 한때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미숙(정유미), 그리고 미숙의 예전 애인이자 데뷔한 소설가인 명우(이선균), 마지막으로 미숙의 절친이며 현재 전 선생의 애인이자 또 제자인 진영(김진경). 그리고 까메오로 잠깐 실제 소설가인 은희경씨가 등장한다. 이들 배우들의 역할 면면만 봐도 벌써 실소가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가 애인이고 친구가 또 그 애인의 애인인 이 요지경 상황이란 게 그리 별스럽지도 않다. 그러니까 홍상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가 이들 지식인들의 그 별스럽지 않은 삶을 ‘요지경’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이러한 삶 자체의 비루함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나지만 이 영화에서도 지식인들(또는 그 지식인 중 한 명)은 마침내 그 삶의 비루함과 창피스러움을 깨닫게 되는데, 영화의 종반부에 가서 그러하다.

 

이 영화도 그래서 당연히 마지막 장면이 핵심이다. 여기서 극중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두 모인다. 그 전날 과음(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음주란 무엇일까?)을 한 네 명은 각자의 연인(섹스파트너?)과 모텔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모텔 앞 식당에서 딱, 마주친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따로 상을 봐서 먹다가 가려던 찰나, 식당 문 앞에서 마침내 전 선생이 화를 버럭 내며 다른 커플(미숙-동우)을 불러 세운다. “야! 이 새끼들. 일루와! 너네 왜 인사도 안하냐? 어제 진영이만 버려두고 너네 둘이 갔다며? 그래서 진영이가 나한테 전화했다. 그래서 술 마셨고, 늦어서 잠깐 들어가서 쉰 거야.” 전선생과 진영의 사이를 아는 미숙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훽 던지며 말한다. “그만해요! 창피한 줄 아셔야지! (동우를 보며) 야, 나 간다. 넌 뒤에 따라와!” 그리고 화면전환, 모텔촌의 건물들을 비추는 카메라. 첩첩산중, 아니 첩첩모텔중.

 

미숙은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로 갔을까? 평론가 정성일도 지적했다시피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와 클로징 시퀀스가 매우 정교한 장면의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씨네21』730호 참조). 나는 정성일의 이 평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즉 이러한 구조적 대칭성은 곧장 이념적 대칭성, 다시 말해 이 등장인물들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서로의 욕망을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미숙의 존재는 네러티브 상에서나 구조상에서나 매우 특유하다. 그녀가 보이스오버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장면의 대칭구조에 파열구를 내는 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숙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래의 대상이나 가벼운 섹스스캔들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매우 절실하게 거기 매달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 그녀가 차를 몰며 전주로 가면서 혼잣말로 뇌까리는 “죽어도 돼, 죽어도 돼”라는 말은 이 절실함이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미숙의 이 절실함의 정체는 분명 문학 창작에 대한 욕망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전선생과 사귀고, 그와 헤어지자 바로 동우와 잠자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런 혐의가 짙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은희경의 집을 찾아가서 “선생님이 제일 잘 쓰세요. 이제부터 글만 쓸거에요.”라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는 것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전이’(transference)를 바라는 이런 행동은 매우 유아적이며, 그래서 실현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 욕망에 끝없이 집착하는 미숙이야말로 나름 대로들 쿨한 이들 지식인-작가들과는 달리 지식인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선생에게 쏘아부친 그 말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미숙이 어떤 모범적인(?) 지식인상을 드러낸다고 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것보다 더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건 그저 좀 아는(본질적으로는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또는 창피한 줄 아는) 그런 존재이지, 어떤 휘황찬란한 아방가르드가 아니다.

 

흔히들 홍상수 영화를 지식인들의 희화로 읽곤 한다.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몇 가지 첨언을 해야 완전히 옳을 것이다. 그 희화라는 것을 통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의 본질이 유전(流轉)된다고 말이다. 예술(pathos)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로고스(logos))에 대한 상당한 부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로고스가 반겨야할 일이기도 하다. 그 로고스가 당대를 지나 살아남는 것은 그러한 부정성의 전염을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언제나 로고스는 파토스를 질투하거나(플라톤), 경외하거나(니체), 경제적 하부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맑스)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존경스런 칸트조차 ‘숭고함’에 대면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말이다.

 

혹시 홍상수는 ‘구름’이나 ‘개구리’를 선사하려고 작정한 당대 한국 사회의 아리스토파네스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피스러운 줄 모르는 지식인들을 위해 창피스러운 영화를 계속 만드는 그런 예술가 말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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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러닝타임, 121분-<내 사랑, 내 곁에>, 박진표,, 2009

  • 등록일
    2009/10/17 01:48
  • 수정일
    2009/10/17 01:48

* 마찬가지로 속 쓰린 글이지만 조금은 위안이 되는 ...

 

신체는 소멸한다. 인간은 죽는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이 명제는 가히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 할만하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실재적이라는 것이고, 실재적이라는 것은 흉내(imitation)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겪을(suffer)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에는 흉내 내는 것이 있고, 겪는 것이 있다. 연기론 교과서를 펼치면 이 두 분류를 유명한 두 극작가의 이름을 들어 명명하고 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브레히트. 겪는 연기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것이다. 그러나 메소드(method) 연기라 칭하는 이 연기법은 ‘육체의 변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어떤 연기든 ‘~되기’(becoming)을 실행한다. 이것은 의식적인 장을 연기 대상과 겹쳐 놓는 ‘속임수’가 아니라, 육체와 의식의 지각장(perceptual field)을 연기대상의 근방역에 이르기까지 육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도는 필연적으로 마조히스틱한 자기부정의 상태를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의 육체는 카메라 앞에서 단순히 피사체일 뿐이다. 그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인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부여한 인격을 오로지 ‘연기’해야 한다. 그런데 연기는 피사체로서의 자기위치를 끊임없이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 부정을 통해 배우는 이미지의 평면만을 생산하는 카메라에 심도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 즉 ‘~되기’는 카메라와 배우 간의 끊임없는 교전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배우 김명민은 이 교전의 장을 손쉬운 의식의 지각장으로 하지 않고, 육체의 지각장으로 선택했다. 사유만이 아니라 느낌과 감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제 것’으로 만드는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는 극중 백종우의 증세가 어떻게 고스란히 김명민의 것이 되는지 시시각각 재현하고 있다. 집요하게도 카메라는 그러한 과정 전체에 대사나 사건으로 다가가기보다, 김명민-육체, 혹은 백종우-육체 그것 자체의 전시만으로 그러한 재현에 이르려고 한다. 하지만 김명민의 것이 된 백종우의 육체는 그러한 재현의 시도를 번번이 물리고 스스로가 ‘배우’이며 이것은 ‘연기’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다. 연출과 연기의 간격이 두드러지는 지점 말이다. 감독은 김명민이 “연기에 미친 배우”(『씨네21』722호)라고 평가하지만, 광기라는 것은 이해불능의 타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지 감독이 배우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권능 너머로 탈주했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도대체 김명민의 육체가 겪고 있는 고난을 제대로 필터링한 스텝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김명민은 그토록 멀리까지 달아나 버린 것인가?

 

이 모든 것을 간과하자. 그렇다면 영화는 충분히 진실에 가 닿았는가? 위에서 말한 소통부재의 디렉팅(directing)과 소통부재의 액팅(acting)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것인가?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앵글은 시종일관 김명민의 신체를 부감으로 잡거나 밝은 조명 아래 드러냄으로써 신성화한다. 그것은 마치 종교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예수의 육체와 같다. 고난의 흔적이라고는 깡마른 거죽밖에 없는, 그나마 인공의 광선 아래 순백으로 빛나는 그 육체 말이다. 과연 루게릭 병이 그와 같이 성스러운 신체 상태를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까? 여기서는 이제 카메라 앵글마저 김명민의 신체를 배반한다. 그가 메소드 연기를 위해 수 십 kg을 감량한 그 기간 동안 그의 육체는 온전히 감량의 흔적만을 피사체로서 감당할 뿐, ‘연기’로 드러나야 할, 고통은 오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신체는 멜로드라마, 최루성 가족영화, 추석 개봉작이라는 낭창낭창한 레떼르를 가장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마치 루게릭 병으로 인해 안면근육 마비로 우는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생기는 것과 같이 김명민은 이 영화 안에서, 전시되고 성화된 자신의 육체와, 메소드 연기를 통해 고통스럽고, 루게릭 병으로 또 더 고통스러운 자신의 지각체계라는 무간지옥에 빠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김명민의 편이 되고 싶지만 저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백종우는 이지수(하지원 분)에게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결혼하자고 한 것이며, 도대체 이지수는 어떤 4차원 소녀이기에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고, 그도 모자라 임종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키는 것일까?

 

한가위에 사람들의 희생정신을 북돋우고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시쳇말에 의식적으로 거스르기로 작정한 영화라 하기에는 김명민의 육체가 너무나 부질없다. 저 신체가 121분짜리일 뿐이라니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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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의 멧돼지들-<차우>, 신정원, 2009

  • 등록일
    2009/10/17 01:35
  • 수정일
    2009/10/17 01:35

*이 글은 개인적으로 매우 속이 쓰린 글이다. 묵혀 두었다가 이제야 올린다.

 

영화는 착란과 전도(顚倒) 또는 사시(斜視)의 스펙타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고 굳이 영화관에 갈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화는 태생적으로 서사구조의 안정성, 즉 시점과 시제, 주체와 시공간의 평형성(stability)을 거스르는 경향을 띈다. 놀라운 것은 시간과 공간을 분절하고, 편집하는 와중에 기억을 일신하거나 뒤섞음으로써 영화가 오히려 실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1) 말 그대로 이것은 원인(cause; 작가-주체의 의도)이라기보다, 준원인(quasi-cause; 광경과 편집)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며, 편집증적으로 심층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효과를 통해 이미지의 분열증을 극화(dramatization)한다. 그래서 장르가 더 극단적일수록 그 영화는 점점 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공리계를 따라 재코드화 되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2) 각각의 시퀀스는 야바위 상자에 담긴 주사위들의 각 면 위에 놓인 점들과 같아서 ‘흔들고, 여는’ 그 과정 모두가 작가의 지향성과 시선을 빗나간다. 숏과 시퀀스는 이렇게 자기구성(self-constitution)되며, 작품 전체는 거대한 우연의 긍정을 통해서만, 그것을 전제하고서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3) 이러한 영화 예술의 특성은 마땅히 소수성(minority)이라 명명될 수 있겠다.(4)

 

[차우]는 이 소수성을 이미지의 표면 위에 전시하는 매우 특유한 영화다. 그러니까, [차우]는 괴수영화, 아니 코메디 영화, 아니 이 모든 장르-부정성(‘아니’) 바로 곁에, 영화에 ‘대한’ 담론을 배치함으로써 스스로 ‘극곁극’(play-beside-play)을 구현한다.(5) 실재로 이 영화는 ‘사시’(관객과 직접적으로 시선을 맞교환할 수 없는 영화의 운명에 대한 은유. 그것은 항상 ‘해석’을 경유한다)인 마을 이장과 마을의 치안담당 경찰의 술자리 대화에서 시작한다. 술자리 자체가 횡설수설로 시작해서 황당하게 끝나지만, 이 장면의 진실성은 거기 있다기 보다 작가가 이제부터 이런 횡설수설로 장르를 충돌시키겠다고 미리 선언한 것이라 하겠다. 장르는 하나의 주사위 면, 또는 당구공과 같아서 작가는 흔들고 열거나, 큐대를 들어 불분명한 강도 조절을 하는 정도에서 임무를 다할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거나, 운명이며, 이도저도 아니라면 불가해한 신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전체의 경첩은 빠져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번에 알겠지만 이 헐렁거리는 숏과 시퀀스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웃음’인데, 희한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페이소스’라는 것이다. [시실리 2km](2004)에서부터 시작된 ‘뜬금없고 썰렁한’ 신정원의 문체론(stylistics)은 여기서 부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웃음과 페이소스의 결합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또한 가히 변태적이라고 할 만한데, 그것이 불쾌감의 잔영을 동반한 쾌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두고 감독이 가진 ‘B급 감수성’의 발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것을 초과하는 ‘간질거리는’ 뭔가가 있다. 이를테면 오컬트적 요소, 또는 이미지의 페티시즘 말이다. 물론 이 영화 텍스트를 의미론의 측면에서 읽는다면 이 초과분은 처음에 말했듯이 극곁극의 구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을 이렇게 손쉽게 내리면 해석의 여지가 없어진다. 곤란한 것은 극곁극의 형식을 취하는 영화텍스트가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텍스트보다 더한 텍스트적 가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은 곧 그 드라마의 ‘효과’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6)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 느리지만 확고한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질문을 다시 하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작가는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관객 입장에서 이런 류의 유사 오컬트 무비는 불편한 코미디에 가깝다는 것을 작가가 알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웃지 않을 수 없었어, 라는 건 매우 당황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사실 이러한 시도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멧돼지가 뒤뚱거리면서도 놀라운 속도로 돌진하다가 옆으로 미끄러지고 앞으로 뒹구는 장면은 한강대교 하부 난간을 건너다니며 어이없게도 귀여운 재주를 부리던 봉준호의 [괴물](2006)의 샘플링이라 할 만하다. 또한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이 영화의 독특한 사건구조는 바로 장르 간 충돌을 기획하는 것인데 이것도 낯설지 않다. 특히나 호러 계보 안에서 샘 레이미([이블 데드], 1982)나 토비 후퍼([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 1974)는 누구나 인정하는 하이브리드 거장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고전적 B급 호러 씨네아스트들과 신정원, 봉준호가 다른 점은 하이브리드 효과가 저예산이라는 제작조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의식적 포획을 따라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최근의 샘 레이미([드레그 미 투 헬])에게 그 시절은 추억일 뿐이겠다.

 

여기서 문제는 이제 애초에 제기되었던 괴수영화와 코메디 사이의 장르충돌 뿐 아니라 B급 호러와의 관계다. 그리고 이 복합성을 고려하자마자 우리는 최초의 그 문제, 즉 ‘불쾌의 쾌’, ‘페이소스와 웃음의 결합’이 가리키는 그 준원인을 감지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정원 감독이 고전적 하이브리드의 형식을 가져오되 그 내용과 표현을 자기 식으로 구축했다는 것이다. 샘 레이미와 토비 후퍼의 장르실험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나는데 반해 신정원의 장르충돌은 호러를 중추적 요소에서 물리고 그 자리에 괴수를 놓음으로써 그와는 다른 효과를 달성한다. 그 웃음의 근방에서 떠도는 변태적 페이소스라는 효과 말이다. 이 페이소스가 웃음의 진정한 준원인인 이유는 그것이 웃음과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페이소스로부터 웃음에 이르기까지, 정서의 스펙트럼 전체를 주파하는 계열 전체를 작가의 실험이 드러내고 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관객은 작가가 제시하는 그 정서의 속도에 편승하여 플롯이 삐걱거리는 순간순간에 다양한 강도에서 그 스펙트럼의 톤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경험 전체, 작가와 관객이 함께 잠겨 있는 이 웃음과 페이소스의 스펙트럼과 강도 전체를 그로테스크 싸카즘(grotesque sarcasm)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7)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주제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작가가 이 미학적인 정서 가공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이 말은 역으로 ‘가장 최초에’라고 바꾸어 쓸 수 있다) 드러내는 것은 뭘까? 결국 괴수는 죽고 인간들은 행복해진다. 이건 그렇게 담대한 결론은 아니다. 오컬트에 육박하는 플롯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 상투적인 결론을 두고 어이없어 하는 것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보너스 장면을 잘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 마지막 보너스 씬은 싱거운 결론을 상쇄하는 것과 동시에 관객이 내내 느꼈던 그 정서적 이물감의 정체가 바로 고전적 드라마의 근간을 이루는 선입견에 대한 도발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것은 콜러리지가 “불신의 자발적 중단”이라고 했고, 고다르가 관객이 영화관 안과 밖을 구분한다고 했을 때 그 고다르의 관객이 상정하는 하나의 ‘신념’을 말한다.(8) 신정원은 이 신념과 선입견을 극곁극 형식을 통해 역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차우]에는 인접한 두 극 A와 B가 있다. 관객은 이 두 극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두 극은 1형식 문장의 주어와 보어처럼 서로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두 극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수 있는데, 두 극을 이어주는 동사가 부정법 동사기 때문이다. 이 부정법 동사는 딱 부러지는 ‘~이다’(be)가 아니라 언제든 변형이 가능한 ‘~임’(to be)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극)의 경첩(시간성)은 덜렁거린다.

 

A극은 관객이 줄곧 쫓아다니는 주요 플롯이다. 이를 통해 작가와 관객은 모두 콜러리지와 고다르의 지평에 얌전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극 B가 있다. 즉 중반부에 인물들 각자가 ‘포수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만화적 장면(B1)이나, 뜬금없는 극중 캠 촬영 장면(B2),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친 여인의 집 장면(B3). 이 장면들은 극 A가 가지는 서사적 완결성을 번번이 위반하고, 주술구조를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상태로 몰고 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극 B는 극 A에 무언가를 더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극 A 가운데서 빼버림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극 B는 A에서 스스로를 ‘빈자리’로 제시한다. 즉 주어 A는 술어 B 없이도 견뎌낸다. 여기서 극의 시퀀스들을 이어주는 시간성은 순전히 맥락 없다. 당연히 이게 작가의 장르충돌의 효과인 것이고 말이다.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극 A는 B와 완전히 대체 가능한가?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B 극들 각각도 그러하다. 만약 그러한 대체를 가능하게 하려면, 영화가 시간성과 그것을 짊어진 주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이는 홍상수식 시간 구성과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이 영화는 그런 구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대체(alternative)가 아니라, 전치(transference)와 응축(condens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는 대상 간의 교환을 통해 둘 중 하나를 표면상 무화시키는 은유적 과정이지만, 전치와 응축은 어느 대상도 무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서 그것들을 표면상으로든(전치), 이념 상으로든(응축) 인접시키는 환유적(전치), 상징적(응축)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극 A와 B는 이런 환유적, 상징적 관계로 [차우]라는 이미지 계열 안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극A와 극B(그리고 B들) 사이에는 교환과 자리바꿈이 가능하고,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구조의 일방향성(bon-sense)을 수시로 역방향성(para-sense)으로 구현할 수 있는 틀거리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전체 줄거리에서 극B는 그것 자체로 확장될 때 하나의 단일한 플롯으로 구성될 수 있다. 즉 이 극 B들은 하나의 응축된(condensed)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극 B의 상징들 중 전체 이야기들(즉 A와 다른 B들)의 맥락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극B3이다. 어째서 이런 구성을 기획한 것일까?

 

여기에 등장하는 ‘미친 여인’은 영화 전반부에서 미미한 역할만을 담당하면서 관객들에게 단순한 폭소나 불안을 선사하는데,(9) 후반부로 갈수록 이물감이 심해져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극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 이 ‘미친 여인’ 에피소드가 가진 전치와 응축의 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전치와 응축이 통속적인 정신분석에서 오로지 오이디푸스 방향만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에피소드는 그러한 일방향성을 비웃고 어떤 형태화할 수 없는 이념들로 향한다는데 있다.

사실 ‘미친 여인’이 그녀의 희생대상(처음에는 거지-아이 그 다음에는 포수-어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인데, “나를 엄마라고 불러!”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 여인은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통속적 정신분석이 “너는 아빠(엄마)를 사랑한거야! 그(녀)와 관계하고자 한거야!”라고 윽박지르며 환자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석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말이다.(10)

 

하지만 작가는 이 여인의 이러한 협박과 폭력을 통해 그러한 시도 자체를 희화시키고, 우리가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감당하는 그러한 권력의 폭력이 사실은 맥락을 벗어난 ‘억지’일 뿐이라는 실재 자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에피소드가 단순히 이념적 차원에서 작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전통극이 가지는 일방향성을 역행한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또 다시 미친 여인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역행의 누승적 역량에 종지부를 찍는 이 에피소드가 이념 층위에서가 아니라 영화적 층위에서 획득한 효과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감독 자신이 영화에 대해 가지는 의견(doxa)이며, 이를 통해 희한하게도 역설(para-doxa)을 산출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감독은 이 에피소드를 통해 ‘영화라는 거, 그거 별거 아니야, 이미지의 아상블라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영화는 아상블라쥬다. 하지만 이제 술어 규정이었던 것이 주어로 간다. ‘아상블라쥬는 영화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아상블라쥬는 현실이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건 이리저리 뜯어 붙인 이미지의 조합들, 이접(disjunction)들인 것이다. 영화에서 시작하여 현실로 가는 이 방향은 영화가 현실을 과잉결정하는 그 순간이며, [차우]에서는 미친여인이 마지막 보너스 씬에 등장하여 관객들을 웃겨 줄 때 등장한다. 이 방향은 사실 애초에 이와는 다른 방향, 즉 관객이 극장이라는 현실 공간에 자리를 잡고, 영화라는 허구를 감상하는 선을 따라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 역방향의 출현, 고다르의 신념이 거부당하는 사건, 이미지에 감염되는 순간,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제대로 박살나는 장면은 마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에서 어린 엘리스가 꾸는 꿈이 실재의 소녀들에게 전이된 것과 같은 것이다. 가히 ‘엘리스 효과’(Alice effect)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여기 있다.(11) 하긴 미친 여인의 집들과 거기 등장하는 어린 거지와 어른 사냥꾼은 ‘이상한 나라’의 등장인물들처럼 현실과 관념이 구분되지 않는 동화적인 맥락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우도 마찬가지다. 이 멧돼지, 또는 그 어린 새끼 멧돼지들까지, 처음부터 이들은 엘리스의 세계에 속한 것이지 않겠는가? 장면 B는 서사적 이야기 A의 구멍이 아니라, 오히려 A가 구멍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지는 것은 온전히 이 효과를 극단까지 밀어붙일 때 가능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화를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사건’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 영화 [차우]의 괴수가 엘리스의 것이든, 험프티덤프티의 것이든 그건 새롭지 않다. 다만 그들을 만나고, 또는 나와 동시대의 관객들이 함께 이미지를 ‘흡수’하면서 공히 그것에 감염되는 그 시간이 더 새로울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영화가 있으면 다시, 하나의 새로운 코뮌이 탄생하는 것이고, 1시간에서 2시간, 또는 그 이상의 러닝타임 동안 나-우리는 타오르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새로운 시간성을 경외하면서 해방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오로지 이미지-가상의 한갓 놀이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이 전쟁과 폭력으로 인간성과 문명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과는 반대로, 영화는 이미지를 가지고 고통스럽고 또 우습고, 어이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재를 우리 눈앞에 들이 민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차우]는 결국, ‘극곁극’의 형식을 빌어 장르충돌 실험에 괴수영화를 도입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시퀀스와 플롯을 이념 층위에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 층위에까지 밀어 붙임으로써 영화와 더불어 현실을 탈신화화, 탈이념화시킨다. 그 시도가 결과적으로 가장 첨예한 실재, 즉 영화와 현실, 그리고 권력, 그 모두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로서 [차우]의 특유성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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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홍상수의 [오, 수정](2000)은 영화가 기억을 어떻게 가공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실재를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사실 홍상수의 작품 전체가 기억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석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상당한 나르시시즘에 육박한다. 그의 영화는 내내 지식인에 대한 냉소적 포지션을 유지하지만, 기억에 대해 해석하고 그를 통해 지식인들의 심리를 전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바로 그 자신과 지식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 만약 재코드화의 길을 따른다면 그 영화는 장르에 충실한 ‘재밌는’ 영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좋은’ 영화는 아닐 것이다.

 

3) 영화가 언어적 해석(비평)에 대해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보다 폭넓은 수용성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제작 과정 자체를 생각해 봐도 이러한 경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스텝들 간의, 감독과 제작자 간의 조우와 교전(encounter)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홀로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채우면서 생산되지 않는다. 영화는 주체적(subjective) 작업이라기보다 간주체적(intersubjective)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4) ‘소수성’은 들뢰즈의 의미를 따른다. 그것은 ‘이디쉬어와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 카프카’라는 말로 특화될 수 있겠다. 『카프카』, 질 들뢰즈 지음, 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 참조.

 

5) 극중극(drama-within-drama)이 표면과 심층을 나누고 심층의 잠재성을 무한히 퇴행시키면서 끊임없이 표면으로의 강제적 도발을 기획함으로써 극 자체의 ‘본질’을 캐묻는 반면, ‘극곁극’은 잠재성 차원을 그대로 보존하고 단지 표면효과를 통해 ‘의미’를 환기함으로써 극의 분열증들, 좌절들, 더 나아가 극의 ‘무의미’ 차원을 드러낸다. ‘극곁극’은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임을 밝혀둔다.

 

6) 물론 일반적인 드라마나 극중극도 해석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해석 없이도 인상들의 조합이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구성함으로써 독자를 쉽게 이해시키지만, 극곁극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곳곳에 서사구조의 일관성과 독자의 시선을 방해하고 정서적 반응을 비껴가는 사건들이 출몰한다. 문학 작품으로 치자면 카프카의 텍스트, 특히 『성』에서의 느닷없는 유머(이는 니체의 텍스트에서도 보인다-들뢰즈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니체의 텍스트를 웃음 없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다), 이현화의 『불가불가』에서의 반복구(“불가불가”)와 이접된 역사적 사건들의 계열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방면에서 가장 위대한 텍스트는 루이스 캐럴의 것들이다.

 

7) ‘그로테스크’란 개념은 기형도 작품에 대한 김현의 유명한 정의에서 나와서 현재 비평계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유된 개념이다. ‘싸카즘’은 ‘싸티르’(satyr)와 ‘겪음’(suffer)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용어로서 이 글 전반부에 해석한 사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이는 앞서의 극곁극 개념과 더불어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8) “영화는 꿈이다. 그러나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극장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9) 이런 역할효과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 여인은 맥락 없이 등장하여 폭소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호러의 문법 안에 정위되면서 불안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드라마의 희극적 등장인물,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광대들은 비극이 슬픔과 불안 때문에 내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해서 장광설 따위를 펼치기도 한다.

 

10) 분석 차원에서 폭력이 정신분석에 의해 자행된다면, 물리적 차원에서 이는 파쇼적 정치권력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이 권력은 자신이 호명하는 주체성 외에 다른 주체성을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자율적 주체성을 불러낼 경우, 또는 반대와 저항의 논리를 광장에 갖고 나올 경우 어김없이 폭력이 행사되는 것이다.

 

11) 물론 이 개념은 루이스 캐럴에게 헌정된 것이다. 엘리스가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들에서 현실은 꿈과 뒤섞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축하고, 독자를 논리적으로 현혹하여 그 현실 자체를 무화하여 그 결과물로 웃음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 효과가 발생하려면 이미지나 텍스트의 강도가 현실이나 기억의 단면을 침범해서 트라우마를 형성하거나 사고패턴에 일시적인 또는 장기적인 충격을 가해야 한다. 통상적인 드라마의 반전은 극 안에서만 그치기 때문에 그런 효과를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역설과 다른 것은 역설이 논리적인 기반을 가짐에 반해 엘리스 효과는 정서적 기반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웃음은 결코 박장대소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grotesque sarcasm과 흡사하게 고통마저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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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아모스 오즈, 1968)

  • 등록일
    2009/10/06 00:20
  • 수정일
    2009/10/06 00:20

또 하나 독서의 흔적을 남긴다.

 

 

『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최창모 옮김, 민음사, 1998

 

[7]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9]고양이는 자기를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사귀지 않지요. 고양이는 결코 사람을 잘못 보는 법이 없거든요.

 

[20]잠시 동안 그는 커다랗고 슬픈 꼬마처럼, 머리카락이 거의 다 잘려나간 꼬마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모자를 사주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23]겨울밤에 예루살렘의 건물들은 검정색 배경 앞에 얼어버린 회색의 형상처럼 보인다. 억눌린 폭력을 잉태하고 있는 풍경. 예루살렘은 때로 추상적인 도시가 된다. 돌과 소나무, 그리고 녹슨 쇳덩이들.

 

[25]잔인한 시련에서 자긍심이 솟아나왔으므로 나는 그 시련을 소중히 여겼다. 권력의 수복. 나는 병이 낫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로젠설 선생님의 말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병이 자유로움을 주기 때문에 아픈 것을 더 좋아하고 낫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늦겨울에 병이 다 나았을 때 나는 유배감을 경험했다. 나는 연금술을 일으키는 힘을, 꿈과 현실을 구분짓는 선을 넘어서 나에게 꿈을가져다 주던 힘을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깨어난다는 것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다. 나는 심각한 병에 걸리고자 하는 막연한 나의 열망을 비웃고 있다.

 

[31]{미카엘}비가 오면 예루살렘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어요. 사실은 예루살렘이 언제나 사람을 슬프게 하는데 그것이 매일 매순간, 매년 매시에 종류가 다른 거죠.

 

[32]{미카엘}한나 고양이들은 겨울에, 그것도 가장 추운 날 가장 발정을 많이 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결혼하면 나는 고양이를 기를 거예요. ... 난 외동아들이에요. 고양이들은 어떤 제약이나 관습에도 묶여 있지 않으니까 교미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발정한 고양이는 낯선 사람에게 붙잡혀서 죽도록 짓눌린다고 느끼나봐요. 그 고통은 육체적인 거죠. 타는 듯하고.

 

[36]물론 나는 그가 고양이를 기르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나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째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아주 강해야 한다는 걸까?

 

내 곁에서 침묵하며 걷고 있었다. 그와 나, 우리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기묘한 한 순간, 나는 내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아니면 시간이 현재가 아니라는 격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일은 전에 겪은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 여러 해 전에 어떤 사악한 남자 곁에서 이 칠흑 같은 좁은 길을 다라 걷고 있을 것이라고 내게 경고했을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평탄하지도, 흐르고 있지도 않았다. 시간은 일련의 갑작스러운 격발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꿈 속이든지, 무서운 이야기 속이든지. 갑자기 나는 말없이 내 곁에서 걷고 있는 그 희미한 형체에 두려움을 느꼈다.

 

[40]그가 외투 단추를 끌러 나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실재였다. 나는 억눌려 있던 그의 공포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것을 즐겼다. 당신은 내 것이에요, 내가 속삭였다. 절대로 다시는 멀어지지 말아요, 하고.

 

[47]보통 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빠져 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91]잠을 자지 않을 때에 아이는 눈을 뜨고는 새파란 섬을 보여 주곤 했다. 나는 이것이 이 아이의 내면의 색이라고, 눈이라는 틈을 통해서 아기 피부 아래에서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밝은 파란색의 작은 방울이 보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106]날은 여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나는 매일, 매시의 경과를 이 글에 기록해야 하는 엄숙한 의무를 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나의 날들은 나의 것이며 나는 평온하고 날은 예루살렘 가는 길에 기차에서 내다본 낮은 산들처럼 쏜살같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109]나는 그의 자제력을 사랑했다. 그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199]나는 기쁨과 기대로 몸을 떨면서 창가에 서 있었다. 덧창 사이로 붉은 구름에 뒤덮여 밝은 안개의 미세한 틈을 뚫고 지나가려는 해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해는 갑자기 나타나서 나무 꼭대기를 밝은 빛에 휩싸고 뒤쪽 발코니에 걸려 있는 양철을 번쩍이는 광채로 뒤덮었다. 나는 거기에 사로잡혔다. 맨발에 잠옷차림으로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섰다. 창틀에는 서리꽃이 피어 있었다. 실내복 차림의 한 여자가 쓰레기통을 비우러 나왔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도 나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209]땅은 억제된 화산 위에 놓인 초록색 껍질에 불과하다.

 

[212]이 남자는 언제 자제력을 잃을 것인가? 아, 한 번만이라도 저 사람이 겁에 질린 것을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미친 듯이 달리고.

 

[231]죽음과 나는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가깝고도 먼 사이. 인사나 겨우 하는 정도인 아는 사람.

 

[233]꿈이 산산조각나면 민감한 사람들은 구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깨진다.

 

[233]<너의 파괴자들과 너를 소멸시킨 자들이 네 앞에 나아가리라.>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가지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라고 교수가 말했다. 우선 히브리 계몽운동은 그 자체 내에 궁극적적으로는 파멸에 이르는 사랑을 키웠다. 그 다음에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 낯선 땅을 보게 되었다. ... 소수의 꿈구는 사람들과 투사들, 현실에 반기를 든 현실주의자들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부흥은 없었을 것이고 말 그대로 파멸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언제나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교수는 결론지었다.

 

[265]<말해 봐요, 미카엘> 나는 혐오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죠?> 미카엘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해서 잠시 동안 생각했다. 그 동안에 그는 테이블에서 부스러기를 모아 자기 앞에 한 무더기로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무의미해.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야. 그냥 살고 있지. 그걸로 끝이야>

<미카엘 갠츠, 당신은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죽을 거예요. 그걸로 끝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지. 그걸 진부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말이 맞을 거야. 하지만 진부하다는 건 진실의 반대는 아니야. ‘2 더하기 2는 4이다’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래도 …>

<그래도 미카엘, 진부하다는 것을 확실히 진실의 반대고, 나{266}도 언젠가는 두바 글릭처럼 미쳐버릴 거고 그건 다 당신 책임일 거예요, 얼간이 갠츠 박사님>

<진정해 한나>

 

[292]평화로운 미풍이 소나무를 건드려 흔들어 놓는다. 먼 하늘이 서서히 창백해진다. 그리고 저 광대한 공간에 조용하고 차가운 정적이 내려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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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무료관람-[써로게이트](조나단 모스토우, 2009)

  • 등록일
    2009/10/05 14:53
  • 수정일
    2009/10/05 14:53

테크놀로지와 윤리의 갈등이란 주제는 너무 오래되어 우러나지 않는 사골 같다. 이 갈등의 당사자들 중 어느 쪽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디스토피아냐, 유토피아냐가 결정되는데, 최근에는 비관적인 축이 훨씬 돈이 되는 편인가보다. 하긴 미래의 ‘빅브라더’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테러리즘과 파시즘조차 아름다워지는 시절이니([브이 포 벤데터]) 그동안 모범적인 테크놀로지 영웅들(터미네이터, 핸콕)을 꾸준히 양산해온 모스토우 감독 입장에서도 더 이상은 우길 힘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화 초반부, 브루스 윌리스의 범상치 않은 가발과 짙은 메이크업은 시선에 상당한 압박감을 선사한다. 로봇 대리인과 실재 FBI 요원 그리어를 함께 연기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이지만 멋진 금발을 찰랑거리는 써로게이트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저게 언제 적 브루스 윌리스였나 싶기도 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머리 벗겨지기 전에 유명해졌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니 말이다. 오히려 써로게이트 센서를 뒤집어쓰고 자기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애틋하고 ‘이제는’ 머리와 수엽이 허연 그 할아버지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제 그도 슬슬 로맨스 그레이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을 무연히 쳐다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언제부턴가 명절 개봉관을 독점하던 성룡이 사라진 자리에 몇몇 할리우드 배우들이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는데, 대체로 아놀드 주지사 류의 근육맨이었다. 그 중에 브루스 윌리스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지 않았는가? 머리 벗겨진 영웅이라니. 이를테면 추석이나 설날만 되면 새날이 온다는 게 마냥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닌 분들에게 브루스 윌리스는 아주 훌륭한 영화 속의 아바타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추석 개봉 영화로는 꽤나 부담 없는 라인업이기도 하다.

 

사실 톺아보면 이 영화에 어떤 철학적 메시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건 상당히 최신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바로 ‘소통’이라는 것 말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전쟁을 항구화하며, 종내는 인류멸망의 대재앙을 초래한다는 스토리텔링은 부지기수이지만 그것이 ‘소통’에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멀쩡한 써로게이트와는 별개로 인간들이 서서히 ‘폐인’이 되어 간다는 설정은 매우 신선하다 하겠다. 여기에 매우 복고적인 마스크를 가진 브루스 윌리스가 분했으니 이야기에 자연미가 스며드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설정 다음이다. 그래서 윌리스 아저씨는 악당들을 처치하고 세상을 밝고 환하게 만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제는 너무 희망적이어서는 곤란하다. 테크놀로지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우리 문명인들을 적당히 곯려 먹고, 적절한 선에서 ‘선택’의 패를 던져 놓는 것이 훨씬 가망 있는 내기지 않겠는가? 모스토우와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이를 모를 리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이야기의 전모도 그러하다. 즉 그리어는 자기 아들이 써로게이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눈이 뒤집혀 버린 써로게이트 제작자 캔트 박사의 음모를 캐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광석화 같은 판단력을 발휘하여 인간들은 살리고 로봇들은 전멸시키는 놀라운 창발성을 발휘하는데 이로써 공멸의 디스토피아나 (비싼 로봇들을 살리는 동시에) 영웅의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하던 두 부류의 관객 모두를 거의 아노미 상태로 몰고 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통을 하려면 뚫린 입으로 하고, 노동을 하려면 육체를 가지고("in the flesh"-캔트의 대사 중) 하라는 것이다. 대신 로봇은 금지다. 폐인은 컴퓨터를 물리치고 세상으로 나오라!

 

그러면 그리어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바람에 고철이 되어 버린 저 전 세계의 수많은 써로게이트들은 어쩌란 것인가? 라스트 씬에 이르러 건전지 떨어진 장난감처럼 쓰러진 써로게이트들 사이로 인간들이 느릿느릿 나설 때 과연 우리는 퇴행의 감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 ‘인간다운 세상’이 도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감독과 제작자들 안중에는 이런 골치 아픈 철학적 선택지가 아무 소용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맑스도 그랬다시피 전(前) 시대의 기술적 발전을 깡그리 무시하고서야 어디 좋은 세상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보는 입장에서는 다만 써로게이트 없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할 저 인간들이 불쌍할 뿐이다. 이제는 전쟁도 직접 할 것이고, 섹스도, 노동도 힘들여 스스로 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소통의 문제가 단지 언어와 지성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겠다. 그것은 몸과 몸이 부딪혀서 만들어 내는 여러 화음들(불협화음까지 포함해서)을 의미하지 않는가? 따라서 귀차니즘은 온 인류의 적이다. 소통을 거부하는 모든 폐인들은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교훈은 마땅히 다음과 같다 하겠다. 닥치고 폐인무료관람.  그러고보니 효자동 푸른기와집에도 폐인이 있었구나. 그 집 세입자도 무조건 무료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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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그 노스텔지어

  • 등록일
    2009/09/17 17:06
  • 수정일
    2009/09/17 17:06

다시 김광석을 듣는다. 버스를 타고 연구실 오는 길, 어제밤에 mp3로 저장해 놓은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젖어들듯이. 그런 거다.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해마다 찾아 온다. 특히 가을이 조금씩 깊어 가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벌서 13년이나 지났다. 그가 죽은지 말이다. 정말 펑펑 울었다. 명색이 운동권이라 대놓고 후배들 앞에서 울지는 않았는데, 아는 지인 몇몇(주로 시, 소설 쓰는 친구들)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운 것이다. 앞에 놓인 소주잔이 점점 투명한 내 눈물로 성기면서 얼룩지던 게 기억난다. 뭐가 그리 슬펐을까? 여튼 그의 죽음을 애도하던 그 날 밤, 억병으로 취했고, 많이 비틀댔었다. 노상 투쟁가만 듣던 그 시절에 그의 음악은 그랬을 것이다. 허투로 부르던 그 이름처럼, 그러니까 그냥 김광석이 아니라 '광석형' 처럼, 그렇게 형과 같이 친한.  

 

"바람이 불어 오는 곳 ... 그곳으로 가네~" 여전히 그는 살아 흥얼댄다. 출근길에 일탈을 종용하듯이 그가 어서 떠나자고 한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갑자기 얼마전에 본 최윤정의 [노스텔지어] 연작의 그 그림이 생각났다. 흰 테이블보가 덮힌 탁자가 방의 왼편에 놓여 있고, 한 자 쯤 뒤에 바다로 향하는 문이 뚫여 있었다. 문을 넘어 서면 바로 바다인 그곳, 노스텔지어, 광석은 그렇게 거기 있는 것일 게다. 혹시 내가 가고자 하는 곳도, 아니 모든 사람들이 결국, 그 모든 전쟁과 투쟁과 악행들을 뒤로하고 가고자 하는 곳도 거기일 것이다. 푸른 바다. 가을 바람이 선듯선듯 목 언저리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그 바다, 말이다. 

 

그곳의 정적은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원색의 죽음과 더불어 포근하게 물결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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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되는 loser들-[열외인종 잔혹사], 2009

  • 등록일
    2009/09/14 02:14
  • 수정일
    2009/09/14 02:14

loserfiction이 너무 범람하는 건 아닌가? 어디서든 그렇다. 처음에는 참신했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은 부잣집 꽃미남들이 브라운관을 휘젖고 다니고, 신상걸이 나와서 대놓고 PPL을 해대는 걸 보다가, 프롤레타리아들의 땀냄새와 그들의 빌어먹을 운명, 심지어 도덕적 타락에 이르기까지 접하다 보면 신선함을 느낄 법도 했을 게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도들이란 게, 이들의 삶을 우리가 끌어 안고 가기 보다, 전시하고 참관하고, 객관화해서 결국에는 우리 삶으로부터 멀리 배제시키는 것으로 비친다.

 

주원규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은 더 이상 우리 삶의 끔찍한 한 부분을 폭로하는 힘도 없고, 단지 자신의 삶을 관음적 독자들의 시선에 고스란히 전시함으로써 소설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 시킨다. 그래서 이들은 말 그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loser일 뿐이다. 그러니까 loser는 운명이고, 빼도 박도 못하니, 맘에 안 드는 새끼들은 꿈에서나마 쏴 갈기는 체험을 하라는 것, 그게 이 소설의 교훈인지도 모른다.

 

여러 평자들이 이 신인 작가에게 '재담꾼'이니 '거침없는 문체와 발랄한 상상력'이니 하는데, 나로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번 [무중력 증후군]에서도 그랬듯이 한겨레 문학상은 아예 이런 방면의 글들을 잔뜩 뽑아 놓고 젊은 독자층이 다녀갈만한 인터넷 매체 등속에 광고를 뿌리면서 본전을 뽑을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한겨레에서 그렇게까지 하는데 뭐, '비난'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문학상'이라는 그 본연의 면모를 통해 보자면, 한참 함량미달이라는 건 어쨌든 사실인 듯 하다. 차라리 문학상 이름에 '한겨레'를 빼고  그저, '젊은 작가상' 정도면 어떻겠는가?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한겨레 출판, 2009
 
[21]아예 경찰까지 데리고 온 시청 단속반의 기세로 봐선 오늘은 몇 명이 본보기로 붙잡혀 막장 중의 막장 -노숙자들은 그곳을 그렇게 부른다- 인 쉼터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 소주도 담배도 자유도 없는, 대신 땀만 흘리는 노동과 긍정적 사고에 대한 강박과 억지 희망만이 창궐하는 그곳에 감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김중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50]20대의 자리를 죄다 차지하고 앉은 건 4, 50대 강남 아줌마들이나 [51]시장 바닥의 생활력 강한 억순이들이 아니다. 문제는 30대다. 90학번 이후 생산된 이들이 그런대로 가능성 있는 자리란 자리는 죄다 꿰차고 앉아 20대의 장밋빛 진로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 아닌가.
 
[76]{무료급식 자원봉사를 두고}물론 초인적인 박애주의로 무장한 이들이 극소수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조차 인간이다. 매일같이 이렇게 냄새나는 무리들이 죽치고 앉아 구걸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게 뭐 그리 신명나는 일이겠는가. 김중혁은 종교 재단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들이 하나같이 똥 십은 표정을 하고 있는 궁극의 원인을 그렇게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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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 갈무리, 2009

  • 등록일
    2009/09/10 00:57
  • 수정일
    2009/09/10 00:57

책을 읽은지는 꽤 되었다. 늘 하던 버릇대로 발췌 했는데, 이래저래 다른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이번에는 꽤나 시간이 걸린 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도 서평을 쓰기에는 너무 아득해져 버렸다.  

 

조정환 선생의 노고에 진심어린 존경을 보낼 뿐이다. 정치적 입장이야 어떻든 선생 같은 분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후학들에게 보기 드문 축복임에 틀림없다. 이 분 자체가 '다른 삶'이며, 그래서 이분의 책 자체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조정환 지음, 『미네르바의 촛불』, 갈무리, 2009

 

책머리에

 

1부 촛불의 논리, 윤리, 그리고 생리

촛불: 유령인가 중간계급인가 다중인가?

보수에서의 촛불유령론 19

진보에서의 촛불유령론 20

촛불 중간계급실체론 28

촛불 과잉아나키즘론 31

다중으로부터의 도피 35

제헌권력: 대중들, 민중, 천민, 그리고 다중 39

투쟁의 새로운 순환 속에서 운동과 정치 54

승리라는 문제 혹은 감각의 혁신을 위하여 65

 

파시즘에 대항하는 촛불

근대적 전체주의와 수용소 파시즘 71

탈근대적 전체주의와 삶권력의 파시즘 76

삶권력의 정치적 계급적 토대와 그 전략 78

탈근대 파시즘 속에서 삶정치의 가능성 80

한국에서의 파시즘의 운명: 이명박 대 촛불 81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머리글 87

촛불봉기의 발생조건 89

촛불봉기의 전개과정 93

권력의 대응 변화 106

촛불봉기의 특징과 새로움 107

집단지성과 봉기의 새로운 기술 123

촛불권력의 현재적 장애와 한계 128

촛불봉기의 쟁점과 새로운 과학 131

촛불봉기는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138

맺음말: 미래 운동의 새로운 로두스 141

 

금융위기와 촛불의 시간

미국발 금융위기와 국유화 145

자본주의 위기의 역사 속에서 서브프라임 위기 147

서브프라이머의 입장에서 본 금융위기 151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촛불 155

 

2부 촛불 현장에서: 기록과 성찰

뉴라이트 한국과 촛불

현대의 자본순환과 뉴라이트 161

뉴라이트 우파 정부의 성격: 순수자본독재 167

이명박 정부의 반혁명 170

뉴라이트 한국 20년 결산 173

무력 174

법 176

공안탄압 179

언론과 문화 182

화폐정치 185

테러 188

지배의 피라미드와 촛불 192

 

사회운동의 새로운 순환과 촛불

촛불의 발생계기: 삶정치적 복합문제로서의 광우병 197

노동의 재구성과 촛불 200

촛불과 욕구노동 204

촛불과 코뮤니즘 208

민민연과 애국촛불 212

 

촛불봉기의 주체성

다중의 형상들 221

문명, 시민, 시장과 촛불 244

 

촛불봉기의 특이성

중앙지성, 집단지성, 다중지성 247

다중지성의 미네르바 257

질서화와 (자기)조직화 262

삶정치와 그 무기들 279

계획으로서의 촛불과 욕망으로서의 촛불 292

 

촛불의 헤게모니와 민주주의의 전망

국가권력 293

촛불운동 297

민주주의 311

 

촛불의 쟁점들

촛불은 오합지졸인가? 329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331

다시 무기의 문제 345

민족주의라는 쟁점 347

금융자유화도 금융국유화도 아닌 다중의 공통되기와 자치 352

촛불은 일시적인 것인가 영원한 것인가? 356

 

3부 촛불테제

촛불테제 1: 금융위기와 촛불테제

촛불테제 2: 이명박과 강인한 테제

 

촛불봉기 일지

참고문헌

 

[5]촛불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하나는 사회정치적 차원이다. 2008년에 우리는 촛불이 낡은 사회의 닫힌 문을 밀면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모습을 뚜렷이 목도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결정에, 일제고사에, 대운하에, 비정규직에, 뉴라이트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항의하며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들려졌던 촛불들, 이것이 사회정치적 차원의 촛불이다. 또 하나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켜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조차 존재론적 촛불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켜져 있다. 언제나 삶을 인도하는 것은 촛불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은 이 존재론적 촛불, 영혼의 촛불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는 행동이다.

 

[6]그러나 우리는 안다. 광기란 말은 다중의 활력에 공포를 느끼는 낡은 질서가 그것을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형틀(푸꼬의 『광기의 역사』)이라는 것을. 유령이란 말은 낡은 질서를 위[7]협하는 혁명의 능력 앞에서 공포에 질린 질서가 내 쉬는 탄식이라는 것(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을. / 이 신성동맹의 총력전이 확인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촛불이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으로부터 분명히 실재하는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촛불의 존재론적 차원은 망각되거나 부인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촛불은 광기다’라는 말 속에는 현존하는 권력질서가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괴물적 힘에 대한 강렬한 인정이 들어 있다. ‘촛불은 유령이다’라는 말 속에는 지각할 수도 접근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힘에 대한 인정이 들어 있다. 사건을 볼 없고 오직 사물만을 볼 수 있을 뿐인 경직된 눈으로 볼 때, 촛불의 힘은 ‘광기적’이며 촛불의 운동은 ‘유령적’이다. 반촛불 신성동맹은 ‘광기’, ‘유령’과 같은 공포의 언어형식 속에서 촛불의 존재론적 차원에 대한 더 없이 분명한 인정을 표현하고 있다. / 그러므로 지금 촛불은 이 공포의 언어형식을 긍정의 언어형식으로 뒤집고 지금까지의 직접행동들이 드러낸 새로운 경향에 좀 더 분명한 이름을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특이한 다양성들이 좀 더 강도 높은 공통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을 통해 지금의 부정적 인정을 긍정적 인정으로 전환시키고 촛불이 발명한 새로운 경향이야말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이정표임을 몸과 두뇌, 활동과 언어 모두의 힘으로 입증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바, 권력에서 활력으로, 민중에서 다중으로, 당에서 네트워크로, 국가에서 코뮌으[8]로, 민족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언어학적 전환과 혁신에 대한 강조는 지금까지 촛불이 연 새로운 정치평면을 분명히 밝히고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한 담론적 진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다.

 

[9]우리의 촛불은 저녁에 타올라 시간을 수놓았다. 그래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아니라 새벽녘에야 울 수 있었다. ... 존재론적 차원에서 ‘촛불이 승리한다’는 것, 즉 촛불이 삶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힘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정치적 차원의 승리와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이 꺼졌다고, 촛불이 패배했다고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리라. 역사는 우리에게 혁명들이 패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실제로는 그것이 거대한 도약을 하고 있음을 여러 차례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혁명은 영원하다고, 촛불은 영원하다고, 촛불이 승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존재론적 차원의 승리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까지 폭발시키고 확산시키는 임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 혁명은 실제로는 존재론적 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실현하려는 부단한 과정 그 자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 미네르바는 지혜의 신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신이다. 지성의 신이면서 동시에 행동의 신이다. 직접행동이 지성을 우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2]대중은 이미 알지만 넘어서기를 꺼려하는 한계를 갖는다. 대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횡적인 연대와 보편성의 정치로의 주체적 전화를 달성할 수 없다. ... 이렇게 이론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자기생산 능력의 필연적 한계가 가정되고 전제되어야 한다. ... 그런데 다중들이 자신들에게 강제 부과되어온 그 ‘필연적’ 한계들을 거리낌 없이 넘어서고 다중지성이라는 새로운 지성형태를 창출한 것은 바로 자신들에게 강제 부과되어온 그 ‘필연적’ 한계들이라는 임의의 가정들과 전제들이 부당하고 허구적인 것들이라 것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 [23]이론의 특별한 지위란 지식이 권력과의 공모 속으로, 즉 지식-권력 체제의 동력으로 편입되어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다중의 특이성들의 공통화를 가능케 할 이론은 다중의 삶과 투쟁의 경험들 외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다중과 어떤 경계도 없이 뒤섞인 가운데에서만 고유하게 생산될 수 있는 사건으로서의 이론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지위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래서 권력으로서의 이론이기를 거부하는 이론이며 특정하게 경계지워진 이론가 집단이 아니라 삶과 투쟁의 경험 속에 있는 다중들의 지성적 소통과 연결 속에서 생성되는 내재적 이론이다. 아고라와 그것에 합류되었던 다양한 커뮤니티들, 웹사이트들, 블로그들에서 이루어진,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지성적 활동들은 결코 ‘대중의 조력자, 지원자’라는 비루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보고, 분석, 비판, 상상이라는 사유의 행동들은 집회와 시위의 몸 행동들과 결코 분리되지 않았으며 그 연결을 통해 다중은 자신의 경험들이 매순간 직면하는 경계들을 한걸음씩 혹은 도약적으로 넘어서곤 했다.

 

[24]그렇지만 촛불은 그 어떤 성과도 낳지 못한 채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촛불은 꺼졌고 이후에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고 있지 않은가? ... [25]촛불환상론은 지속, 반복, 실체, 성과에 대한 애착에 굳게 터를 잡고 있다. 이 이론이 말하는 진보는 반복을 통한 실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의 지속적 축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진보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은 환상이며 유령이다. ... 여기서 우리는 촛불환상론의 진보 [26]관념이 촛불로 인한 사회적 (사실은, 권력과 자본의) 손실액을 들이밀며 피해보상청구를 탄압의 무기로 사용했던 보수들과 맺고 있는 철학적 동맹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냉정한 실리주의와 근대적 계산주의이다. 그것은 지속의 무덤 아래에 단절을 묻고, 반복의 그물로 차이를 포획하며, 잠재적 활력을 실체의 관에 봉하고 성과의 주판놀이로 과정의 기쁨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사건의 시간을 지속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 살아 있는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바꾸는 것, 아니 차라리 시간을 공간 속에 닫아보리는 것. 이 관념적 변환을 통해서 주체는 대상으로 내몰리고 표현은 재현의 거울상으로 전도되며 활력은 권력 앞에 피고로 무릎 굻려진다.

 

[27]운동은 결코 실리적 성과들과 그것의 축적을 보장하지 않는다. 진보를 성과의 축적과 지속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삶과 운동이 적대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몰각에 기초한다. 지속되는 것은 권력이지 삶과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권력에 대한 단절로서, 권력을 위기에 빠뜨리는 잠재력으로서, 전체를 열어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시키는 차이로서 존재하는 힘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과 자본의 지속이 단절과 위기와 열림인 이 삶의 활력에 대한 의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노동의 물신화를 통해서만 살아가듯 권력은 활력의 실체화를 통해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 [28]이런 의미에서 이명박 권력은 촛불에 대한 의존성에서, 촛불과 함께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진보를 지속과 반복의 철학 위에 정립할 때, 그 진보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는 권력 정치 이상일 수 없다.

 

[35]촛불에 대한 냉소가 생산하는 것은 촛불이 직면한 한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정치를 권력의 정치로 대체하는 것이다. / 촛불의 정치를 권력의 정치로 대체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재들, 기법들은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이러한 대체가 다중으로부터의 도피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촛불을 유령화하려는 보수와 진보의 노력은 다중을 ‘정보전염병’에 걸린 환자로 분류하거나(이명박) 이념방송이나 인터넷이나 유사과학에 의해, 요컨대 괴담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36]형들로 격하시키거나(『조선일보』와 백승욱) 스펙타클에 매혹당한 구경꾼 혹은 산책자로 조롱하거나(이택광), 약자들을 배제하는 통일된 계층 즉 중간계급으로 환원시키는(은수미, 김보경, 정용택(123)) 것들이었다. 이 사변적 요술들은, ... 촛불이 곧 민주주의라는 “암묵적인 주장”과는 거리를 두는 것 ... 촛불은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기획 하에서 ... 촛불에게 유령, 구경꾼, 스파이(이택광), 약자에게 무관심한 배제자들, 중간계급, 절망에 빠진 대중(백승욱 50) 등의 잔혹한 낙인을 찍는다.

 

[37]“[1]촛불집회가 대중 역량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계기였던 것은 사실이다. [2]그러나 그것이 ‘대중지성’, ‘다중의 자율성’에 대한 찬미의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3]네그리의 다중론과 1968 혁명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이런 논리의 비약을 뒷받침한 주된 근거이기는 했다”(백승욱 44, 강조는 인용자). 서동진이 ‘운동의 정치로서 촛불 시위에 관하여 준열한 반성을 시도’한 글이라고 소개한 이 글에서 백승욱은 세 개의 문장을 전개하면서 두 번의 무조건적 단언을 행하고 있다. 다중이 [38]무엇인지, 자율성이 무엇인지, 대중지성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네그리의 다중론과 그것에 대한 단순한 해석은 어떻게 다른지, 1968년 혁명에 대한 단순한 해석은 단순하지 않은 해석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논리가 비약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촛불집횡에서 드라난 바의 저 ‘대중역량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계기’를 누군가가 다중의 자율성이라고 명명한다면 왜 그것이 ‘논리의 비약’인가? 그것을 ‘찬미의 주장’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의도의 과잉으로부터 백승욱 자신이 다중 개념에 대한 실제적으로 ‘단순한 해석’을, 아니 차라리 비난을 쏟아내는 ‘논리적 비약’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내가 옳게 읽고 있는 것이라면 논술의 기초조차 파괴할 정도로 파탄난 이 사고전개 위에 기초한 ‘무조건적 단언들’의 나열을 ‘준열한 반성’이라고 읽어 주면서 권위를 부여해 주는 이 지식 공동체의 ‘사유의 정세’가 실로 심각한 위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촛불이 민주주의적 주체가 아니라는 주장이 촛불의 내적 구성, 그 동태를 분석하고 차이를 식별하는 일보다 분석에 앞서 세워진 가정들과 척도들로 촛불을 재단하기를 좋아한다는 것 ...

 

[42]만약 하나의 이념에 의해 단단히 결속된 사람들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masses이라는 “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 흐름”(140)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일한 이념을 갖는 주권을 정립하는 주체형상으로서의 역사적 국민nation이나 인민people에 상응할 것이다. 그러한 집단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함께 갖지만 능동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위마저도 주권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 즉 수동성의 표현형태라는 점에서 수동성에 의해 지배된다. 다중도 수동성과 능동성을 함께 갖지만 수동성마저도 능동성의 표현양식이라는 점에서 능동성에 의해 지배된다. “배우면서 가르친다”, “복종하면서 명령한다”, “물으면서 걷는다”는 사빠디스따의 경구들이 다중의 존재론적 특질을 표현한다. 다중은 그 환원할 수 없는 특이성 속에서는 다중multitudes이며 그것의 공통되기 속에서는 다중multitude이다. ... [43]투쟁의 새로운 순환 속에서 탄생하는 다중들은 자신들의 특이성을 잃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능동적이기 위해서만 수동적일 뿐이며 환원불가능한 복수성과 이질성 속에서만 공통될 뿐이다. 특이성의 공통화는 이념적 공통화와는 다른 공통화의 능력, 방법을 요구한다. 즉 코뮤니즘의 다른 길을 요구한다. 복수적인 다중들이 그 환원할 수 없는 복수성 속에서 하나의 다중으로 행위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이제 이념적 당이 아니라 횡단적 네트워크의 형태에서 찾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무리 불만족스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작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대, 단일한 이념의 부재를 한계로 보는 시각은 낡았다. 그것은 새로운 투쟁순환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 그리고 이 새로운 공통화의 노선과 경향을 발견할 수 없는 무감각, 전진하기를 주저하면서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모델을 빌려오고자 하는 퇴행성에서 발생하는 감수력과 시력의 한계를 오히려 운동의 한계로 역투사함으로서 발생한다.

 

[44]“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과 달리, 대한국민은 대한민국과 이중적 관계를 맺게 된다. 대한국민은 대한민국 헌법 내부에도 있고, 동시에 (그 법을 만들 자들로서) 외부(다른 차원)에도 있을 수 있다. (......) 촛불시위대가 헌법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의 주어일 뿐인 ‘국민’-언표의 주체-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함으로써 ‘국민’을 언표행위의 주체로 집단적으로 현전시켰을 때, 거기에는 분명 중대한 변화가 존재한다. 나는, ‘우리, 국민은 … ’이라고 주권선언을 하면서 발언하는 이들이 분명 제헌적 권력(‘대한국민’)이 있던 것과 동일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명목상 주어로 헌법 안에 갇혀 있던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상징질서)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국가 바깥에서 그것을 대상으로, 대자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당연히 헌정질서를 그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간다. (......) 촛불 대중(대한국민)들의 ‘헌법-안으로의-월경’과 법전에만 존재하던 ‘국민’(주권자)의 ‘법전-밖으로의-월경’을 목도한 특권층들, 사실상 ‘법에 우선해’ 국가를 제 것인 양 다룰 수 있었던 자들이 느꼈을 경악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저것들이 우리 손에서 국가를 빼앗으려는 구나!’”(한보희, 262-3)

 

[45]권력이 느끼는 그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제정된 틀 안에 있는 듯 하면서도 그 틀을 벗어나면서 그 틀으 비틀고 변형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저 ‘괴물’ 앞에서의 막막함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청와대, 의회, 법원에 그들이 출석해 있지 않을 때에조차도 정책, 입법, 판결의 행위들 속에서 늘 (내키든 내키지 않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재적 유령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어쩌면 그 감정은 분명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려움이라기보다 일종의 불안, 정치적 불안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48]훈육권력의 생명권력으로의 전화는 권력의 자기진화가 아니라 그 밑 삶의 생산과 재생산의 지형에서 전개되고 있는 다중의 생성에 권력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반작용의 형식일 뿐이다. 생명권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코드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육권력과는 달리 매순간마다, 매계기마다 지배의 형식[49]을 발명해야 하는 위기로 내몰린다.

 

[54]촛불에 대한 무수한 오해들은 이 거대하고 또 장구적일 수밖에 없는 흐름에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정의하려는 환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촛불은 실재하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기존 질서의 어떤 자리에 할당하기에는 특이하고 괴물스럽다는 점에서 유령이기도 하다. 촛불은 결코 중간계급의 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촛불비판가들이 ‘중간계급’, ‘중산층’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행위자들이 촛불봉기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 [55]이들 지대임금노동자각 촛불의 전부였던 것은 결코 아니고 이들이 촛불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촛불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좌초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56]‘촛불은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촛불비판가들이 널리 공유하는 생각은 편협한 환각이다. 초기의 촛불이 광우병 위험소 수입에 대한 항의에서 촉발되었고 이미 전개되고 있던 비정규직 투쟁들과 일정한 거리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촛불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다수 참가했다. 비정규직인 사라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자/녀를 둔 어머니/아버지이고, 국민이고 민중이며, 쇠고기 소비자이고, 신문구독자이고, 방송청취자이며, 선거권자이고 ...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이미 전개되고 있던 비정규직 투쟁현장들(KTX, 이랜드, 기륭, 코스콤 들)과 즉각적으로 결합되지 않았던 것을 촛불의 중간계급적 성격 때문으로 투사하는 것은, 비정규직 투쟁이 어떻게 하면 더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는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를 투쟁방향, 투쟁과제, 투쟁방식, 동원과 조직화 방법 등의 모든 측면에 걸쳐 검토하고 혁신해야할 내적 문제를 회피하도록 만든다. ... 촛불 비판가들의 중간계급론[57]은 촛불이 광우병 의제를 넘어 발전하면서 점점 더 깊이 (거리투쟁과 현장투쟁 모두에서) 비정규직과 결합되어 갔고 용산 철거민 투쟁들과도 즉각적으로 결합되었던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사실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57]촛불에는 비폭력을 옹호하는 주장만큼 폭력을 옹호하는 주장이 공존했다. 제도화를 경계하는 생각만큼 제도화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국가를 부정하는 생각만큼 국가를 옹호하는 생각이 공존했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강하게 분출하고 어느 것이 약화되는가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이 합류된 다양한 경향들 속에서 어느 하나를 옳은 것으로 선택하고 나머지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조건들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각하는 방법, 느끼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연결하는 방법, 결정을 내리는 방법, 행동하는 방법 등 다양한 차원에 걸쳐 이 시공간에 합류한 모두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 요컨대 촛불이라는 사건 자체가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의 관념, 제도, 기술, 구성 등의 근본적 혁신을 [58]요구하는 상황 속으로 우리 모두를 끌고 들어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촛불이라는 사건을, (자본의 새로운 순환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깊은 심층에서는 실제로 그것을 이끄는) 투쟁이 새로운 순환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징후로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투쟁의 새로운 순환은 삶과 운동과 정치의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투쟁의 순환이 어떻게 갱신되고 있단 말인가? 20세기 중후반 전세계적 대중노동자들의 투쟁은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사회구성의 변화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주권의 변화를, 훈육권력에서 통제권력(삶권력)으로의 권력성격의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대중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주체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촛불은 지구상황 속에 편입된 한국에서 산업노동과 대중노동자가 주도했던 투쟁의 한 순환이 종결되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기존의 산업적 공간적 지역적 세대적 경계를 넘어 구성되는 다중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62]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제 앞에서 애국과 민족을 중간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할당하는 편리하나 무익한 태도를 반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애국은 이 국가 아닌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애족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과는 다른 공통적 주체성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고 변형될 때에만 투쟁의 새로운 순환의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촛불 속에서 제기되는 애국, 애족의 요구 속에는 2002년 월드컵 응원이나 사빠띠스따의 대문자 민족 속에서 나타났던 바[63]의 국가 없는 나라사랑에로의 열림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63]이를 위해서는 비제도적 영역에서의 저항력과 구성력의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축적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운동 정치를 기반으로 선거 정치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삶권력의 상황은 소수의 전위적 힘으로 세계를 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고전적 표상을 끝낸다.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단결된 힘으로 나머지 더 큰 대중의 세계를 변[64]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끝났다. 삶정치적 활력은 삶권력을 균열시키면서 그것이 항상 위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힘이다. 이것은 운동과 정치 사이에 경계를 긋고 그 중 어느 것의 힘만으로 변형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전염적이다. 삶정치적 활력은 생산, 사회, 운동, 정치, 문화 등의 모든 차원에서 다중의 가능한 능력 전체가 표현되도록 함으로써 주어진 세계를 새롭게 열어나가는 영구적 과정이기를 요구한다. ... 사람들의 이 자율적 행진을, 지금 우리가,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경계를 넘는 절대민주주의의 개시라고 부른다면 그것이 왜 문제이겠는가? 절대적 민주주의의 행진 속에서의 촛불들은, 승리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나 유토피아의 손쉬운 도래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의미에서가 결코 아니고, “죽음의 공포에 이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선을 욕구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일 중에서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고 그의 지혜가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에 있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낙관을 갖는 자유인들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 자유인들이 죽음의 과잉과 죽음에 대한 과잉 성찰에 오염된 세계를 밝히는 촛불들이다.

 

[66]촛불이 ‘승리한다’는 것은 촛불이 죽음의 세계를 비추어 밝히면서 삶을 개방하고 또 변형하고 있다는 현재 사태를 단언하는 것이지 성과물을 획득하여 분배할 시간잉 올 것이라는 미래 사태를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이 승리한다’는 사람들=삶들이 낡은/죽은 세계의 변형을 위해 힘을 모으는 (즉 협력하는) 운동 속에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자유인이 죽음을 모르듯이 촛불은 패배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승리하다는 촛불의 속성이지만 패배는 촛불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67]패배란 (업적의 시각에서 보면 성과물을 놓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업의 시각에서 보면 협력의 붕괴敗로 인하여 힘들이 서로 등져 있는 상태北를 지칭하는데 촛불은 정확히 이 등짐의 부정, 즉 껴안음(연결, 연대, 공명, 공통화, 네트워킹)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촛불비판가들이 말하는 ‘촛불이 패배했다’란 말은 마치 ‘원이 네모나다’란 말처럼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승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촛불에 대해서는 ‘촛불은 승리한다’ 이외의 어떤 다른 시간 표현도 적절치 않으며 그 표현이야말로 촛불의 힘과 성격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77]탈근대적 전체주의 기계는 삶의 수준에서 진행되는 대중의 활발한 분자화와 혼종화 즉 다중화를, 그 역시 분자화된 자본의 네트워크화와 그에 입각한 전지구적 통제를 통해 통합하려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부르주아지는 대중의 분자화 운동의 대두에 직면하여 나타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그 어떤 통치형태보다 더 대중의 분자화를 자극했던 파시즘에 다시 호소하는 길을 선택한다. 탈근대의 자본지배[78]는 대중의 분자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일면적 억압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대의적 사회계약으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 자신의 분자화와 미시화를 통해 이에 대응하려 한다. 자본은 삶으로부터 노동을 분리시키고 그것을 집중시켜 착취하는 방법으로부터 삶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것의 분자적 미시적 운동 자체를 활성화하면서 그것을 수탈하는 방법으로 전술을 전환한다. 이것이 탈근대 파시즘으로서의 삶권력의 대두이다.

 

[78]탈근대 파시즘은 근대 파시즘의 단순한 복구가 아니다. 근대 파시즘은 분자화하는 흐름들을 장려하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수평적으로 연결접속되도록 하기보다 노동, 인종, 국가, 전쟁의 끈으로 묶었고 주권 아래에 종속시켰다. 근대 파시즘은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격렬한 분자화,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잔혹한 전체주의화의 이중과정으로 나타났다. 파시즘 권력은 ...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탈근대적 파시즘의 삶권력은 더욱 격렬하게 분자화하는 삶과 삶시간에 직접 대면하여 그 내부에서 기능한다. ... 삶시간은 ... 권력pouvoir의 척도 너머로 움직이는 창조적 능력puissance으로서의 활력의 시간이다. ...[79]근대의 자본과 권력은 이처럼 삶에서 노동을 분절하는 것에 의존했다. / 파시즘의 탈근대적 부흥과 삶권력화는 이제 삶시간 전체의 자본에로의 포섭을 시도한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자본의 권력의 증대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이 자신의 척도권력(가치법칙)을 잃고 늪으로 빠져듦을 의미한다. 그래서 탈근대적 삶권력은 직접적으로 삶활력을 자신의 축적기반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사활을 걸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금융화, 사유화, 정보화, 요컨대 자본 자체의 분자화와 미시화는 삶을 직접적인 축적기반으로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유연화 전술들이다.

 

[79]척도너머의 삶능력을 지배하기 위해 권력이 선택하는 길은 두 가지 벡터로 구성된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벡터는 노동하는 대중의 일부에게 잉여가치의 일부를 분배하여 이들이 자본주의의 생존에 이해가 걸린 그것의 적극적 구성부분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임금의 지대화). 또 하나의 벡터는 노동하는 일부에게 임금 이하의 몫을 지불하고 이들을 부단히 외부화하고 배제하여 인위적인 제4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지비정규직화 및 불안정화). 이것은 삶권력이 시도하는 대중의 분할이라는 단일화 과정의 양면이다.

 

[80]삶능력은 무엇보다 창조력이며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구성력이다. 이 힘은 권력과 삶이 아니라 특이한 다중들이 서로 반려종(해러웨이)으로서 협력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상보적 면역체계의 패러다임(에스또지또)도 삶과 권력의 타협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보다는 특이한 다중들의 협력적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면역 패러다임은 민주주의적 구성의 과학(매디슨)을 혁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81]충분하지 않다. 삶능력의 이 민주주의적 구성과정은 살게 하기 위해서 죽이기를 반복하는 삶권력의 폭력기관들을 무력화하거나 해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레닌). 그러나 이것을 위해 삶능력이 민중의 권력을 위해 행사되었던 대항폭력과 같은 것으로 될 필요는 없다. 대항폭력은 주권이 행사하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예속시킬 다른 주권을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중의 삶능력이 행사하는 폭력은 삶권력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다중의 탈주를 용이하게 하며 특이한 존재들 사이의 소통을 확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협력을 생산하는 힘’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권력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협력을 생산하는 삶능력의 이 두 측면을 함축하는 것이 ‘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이다.

 

[82]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과연 대중의 분자화를 자극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은 강한 분자운동을 보여준 대중에게 족쇄를 씌우고 컨테이너 장벽, 전경 장벽, 장보 장막, 거짓말 장막을 설치한다. ... 그 결과 대중은 그램분자화되어 다시 무거운 유형의 계급집단으로 집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대중의 분자화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전에, 특히 노무현 정부에서 더 강하게 자극되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하게 추진되는 것은 분자화가 아니라 전체주의화다. ... [83]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의 이행은 파시즘 발전의 이 두 역사적 단계를 압축적 방식으로 재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분자화 중심에서 전체주의화 중심으로 초점의 이동! 파시즘의 활성국면에서 쇠퇴국면으로의 이동!

 

[85]이명박 정부는 탈근대 파시즘이 급속히 쇠퇴의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신자유주의의 종말이 예견되고 또 경험되는 시대의 말기 파시즘적 징후들을 보인다. 그것은 점점 더 사법, 감옥, 폭력, 전쟁, 인종주의, 여론조작, 거짓말 등에 더 많이 의존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침식하고 붕괴를 향해 질주한다. 정규직 노동자에게 주어졌던 혜택들의 침식, 요컨대 주식시장의 붕괴로 인한 배당금의 실종, 부동산 가격의 폭락으로 인한 지대 수입의 소멸, 연금들의 부후(腐朽)로 인한 임금지대의 위기 등은 결국에는 파시즘 그 자체의 기반을 송두리째 허무는 것으로 작용할 것이다. ... 2008년에 불붙은 촛불은 쇠퇴하는 탈근대 파시즘 체제로부터 대중의 이탈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것은 전체주의화를 거부하는 분자화에 대한 열망의 분출이다. ... [86]탈근대 파시즘은 근대 파시즘과는 달리 단일하게 결속시키기 어려운 복잡하고 혼종적인 다중을 창출했다. ... 우리는 촛불 속에 ‘분자화를 활성화하는 전체주의화’라는 파시즘적인 모순적 욕망이 잠재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 문제는 탈근대 파시즘의 이 전체주의적 쇠퇴 국면에서 인종주의적 전체주의, 노동주의적 전체주의, 자유주의적 전체주의로 귀결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절대적 분자화로 귀결되지도 않을 정치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구축하는 일이다. 그것은 분자적 특이화들의 연결접속, 즉 공통화의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102]이 경향적 저하는 촛불로는 안 된다는 절망감, 촛불을 들기 두렵다는 공포심 등이 결합된 결과이다. 결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만족감이나 현재의 권력에 대한 지지로의 전향의 결과가 아니다. ... [103]하지만 이것은 촛불이 꺼지는 과정이 아니라 촛불이 내면 깊숙이 잠재화되는 것일 뿐이다. 절망감과 공포심은 해방의 감정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이며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표면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104]거리에서는 군사적 해법이 가장 큰 관심을 끈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는 촛불의 실패를 의미할 것이다. 군사적 수준에서의 최대의 것은 방어를 넘는 것일 수 없다. 정치적 해법은 제도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승리 역시 촛불의 붕괴를 의미할 것이다. 부르주아적 제도화 자체가 촛불의 매장자이기 때문이다. ... 대안적 삶의 가능성과 그것의 입증이야말로 촛불의 승리를 향한 가장 확실한 일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 생활밀착형 촛불로의 전환과 혼동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생활에서 정치로의 상향과 그것의 군사적 보완의 [105]방향은 군사나 정치에서 분리된 생활이라는 방향과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15]촛불은 단일쟁점 운동인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시대의 어둠을 고발하고 규탄하고 해결하려는 존엄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고 사전에 규정되어 있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개개의 사안 속에서 목적과 방향을 생산하고 발명해 나가는 역동적 성격을 갖는다.

 

[119]절대적 폭력의 비폭력 형태나 저항적 비폭력 형태 혹은 방어폭력의 형태는 권력이 항시적으로 사용하는 선제폭력(현존하는 부르주아적 권력체제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실존하는 선제폭력의 형태이다)과 결코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대칭적이고 대항적인 폭력의 구사가 현존하는 폭력에 대한 부분적 부정일 뿐이라면 비폭력이나 저항적 비[120]폭력, 그리고 그것의 높은 수준인 방어폭력은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면서 다중의 공통된 힘이 상황에 따라 표출되는 현상형태이다. ... 절대적 폭력은 모든 시민상태들을 근본에서 규정하는 자연상태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저항하고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선제폭력으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비폭력, 저항적 비폭력, 방어폭력 등으로 현현하면서 자신을 생명의 존엄과 삶의 (비록 잠재적일지라도) 절대적 공동체로, 생명들 사이의 혁명적 협력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 폭력으로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촛불은 총과 다르다. 그것은 국가정치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삶정치의 무기이자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여 발생한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협력, 공통되기이며 인류 공동체의 실재성을 알리는 상징이 아닌가?

 

[121]대의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촛불운동의 목표가 아니라 절대적 제헌권력의 실재성을 입증하고 그것을 확장적으로 구축하며 그에 걸맞는 정치적 제헌양식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로의 수렴론은 반혁명적이다. 반면 대의민주[122]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로의 복귀 주장은 낮동안의 노동에 이은 밤시간의 야간집회를 항구화해야 하는 EJ안기 어려운 부담을 준다. 직접인가 대의인가가 쟁점이 아니라 다중의 절대적 구성역능과 제헌권력의 압도적 우위를 승인하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에 걸맞는 제헌의 기술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이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운영자로 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지금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에서 발명되어 나와야 할 절대민주주의적 과제이다.

 

[122]‘승리’는 군사적 실력적 승리를 의미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주인됨, 궁극적 주체성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자 그것의 언표이다. ... 그것은 측정이나 계산을 통해서 도달한 과학적 진리의 선언이 아니라 삶과 시간에 대한 총체적 직관을 통해 도달한 신화적 진[123]실의 표명이다. 승리는 그러므로 권력의 순간성과 촛불의 영원성에 대한 단언이다.

 

[123]아고라는 그러나 선전과 선동의 매체가 아니라 정보의 취합과 토론, 그리고 결정의 생산공간으로 기능한다. ... 아고라는 우리 시대의 다중지성, 집단지성의 코뮌으로 기능한다. 물론 아고라에서의 결정은 결코 최종적이지 않으며 권위를 갖지도 않는다.

 

[128]자발성은 자율성의 의지를 갖추고 그것을 물질적 제도로서 구축할 때에, 그리하여 그것으로 낡은 것을 해체하고 또 대체할 때에 확실한 전진을 이룰 수 있다. 촛불권력은 어떠한가? 분명히 촛불은 상당히 확실한 권력적 실재성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실재적 권력으로 느끼고 그것을 행사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대리주의/대의주의적 정서와 의식이 촛불봉기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 [129]촛불은 투쟁의 기관, 봉기의 기관일 수는 있어도 권력의 기관일 수 없다는 오랜 대의주의의 유산이 촛불을 짓누르고 있다. ... 그러나 대리주의/대의주의는 강렬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갖는 촛불의 생리와 융합될 수 없다. 대의주의 경향은 촛불의 침식과 소거를 가져올 위험성으로 봉기 내부에 상존하고 있다. ... [130]촛불이 제기했던 국민소환제 요구는 대표자에 대한 소환과 해임을 통해 권력이 대표자에게 귀속되지 않고 선출자에게 귀속되는 권력에 대한 상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것은 촛불 정부가 갖추어야 할 제도들에 대한 예상들의 일부이다.

 

[132]네티즌이 전 지구적 온라인 연결망인 인터넷에 접속되어 있는 한에서 네티즌은 국민의 경계를 넘어선다. 설령 한국어 사이트만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은 국민이라는 용어로 환원될 수 없는 잉여를 갖는다. ... 촛불 봉기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 주권들의 회복을 주장하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진성국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국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보장받아야 할 여러 권리들(생명권, 건강권 등)을 정면으로 거부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망명자들이며 스스로 제헌의 주체로 나서지 않고는 생명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국가 없는 국민이다. 국가 없는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창출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인 다중이다. ... 거리와 광장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에[133]서 이들은 분명 대중이다. ... 하지만 이들은 전위를 거부하며, 지도를 거부하며, 배후를 거부하고 자신이 곧 배후이고 각자가 스스로의 지도자이고 모두가 서로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대중이 아니다. ... 이들은 피켓에 고유한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자하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의 개성과 특이성을 담고자 하고 또 봉기에의 참가, 참가후의 활동, 귀가의 시점, 여론에 대한 분석과 해석등을 스스로 하고 또 이후의 활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 등등에서 특이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다중이다. ... 이들은 결코 경제적으로 규정된 객관적 통일성을 갖는 계급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계급들이 하나의 공통의 의제 앞에서 정치적으로 결집된 무리라는 점에서 이들은 다중이다. 국가에 저항하는 국민, 이것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자연상태로의 복귀(존재론적 다중) 위에서 새로운 공통되기를 모색하고 있는 다중(정치적 다중)이다. 요컨대 지금의 봉기에서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명확하게 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37][지도부를 만들려는 시도는] 촛불봉기의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지도력을 구축하려는 봉기 대오와 접속하지 못한 채 그 자체로는 중요한 의미를 담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공허한 외침으로 되고 말았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촛불의 힘이 무수하게 특이적인 힘들의 접속과 소통, 신뢰와 사랑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지도력 역시 그 내부로부터, 때로는 누적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돌발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어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봉기의 과정 속에서 참가한 다중들과 단단하게 마디로 결합되지 않는 한에서는 아무리 좋은 생각들도 실효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141]이러한 공동체적 주체성이 지금 갑자기 출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성은 탈근대적 생산활동 속에서 이러한 출현을 가능케 할 오랜 예행연습을 거쳤음도 분명하다. 이들의 소통능력은 투쟁의 현장에서 처음 실험해 보는 낯설고 초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은 공장, 학교, [142]사무실, 가정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생산적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정보적 소통을 연습해 왔고 오늘 그것을 투쟁의 능력으로 전환시키고 있을 뿐이다. 탈근대적 생산은, 근대의 생산에서와는 달리, 구상과 실행의 분리 위에서 위계적 방식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상황파악, 분석, 계획, 그리고 결정의 주체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요컨대 탈근대적 생산의 과정은 개인들에게 수동적 대중이 아니라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전인이 되도록 요구한다. ... 이런 의미에서 촛불봉기는 탈근대적 생산의 탈근대적 항쟁으로의 역전이다. 이 탈근대적 항쟁이 폭력과 파괴를 최소화하려는 윤리정치적 감각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오늘날 생산 속에서 생명과 소통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고 혁명은 폭력적 권력과 강탈적 자본에의 예속상태에 놓여 있는 이 생명과 소통의 공동체를 자립적으로 분리시켜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자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 촛불봉기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질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적인 것들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직 많은 약점들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삶, 새로운 운동, 새로운 혁명이 자라나와야 할 필연적이고 비가[143]역적인 터전이다. 정동과 지성의 결합체인 다중지성과 그것의 운동은 운동의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탈근대적 운동의 토대이고 조건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모든 진지한 운동들이 발딛고 있는 로두스다. 여기에서 뛰는 길 이외에 어떤 길도 지금은 주어져 있지 않다.

 

[152]우선 신자유주의가 중산층을 공격하여 저소득층화하면서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실업자가 증가했다. 여기에서 인종차별이 더해졌다. 위계적 인종구조를 창출하는 삶권력 하에서 하층으로 가면 갈수록 신용을 잃어버린 서브프라이머들이 늘어난다. 안정적인 주거를 갖지 못하고 불안과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는 이들의 삶의 안전에 대한 욕망이 모기지에 대한 잠재적 에너지로 축적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신용의 정보화와 위험평가기술의 발전이 증권화(가공자본화)를 촉진한다. 컴퓨터 공학의 발전과 정보화는 신용평가의 기술을 증대시킨다. 정보독점은 점차 (무디스, 스탠다드 앤 푸어스, 피치 등의) 신용평가기관을 권력화한다. ... 이들은 위험에 대한 계측을 가능케 하여 저소득층을 대부 시장으로 흡수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 증권화와 복잡화, 그리고 보험화가 결합하면서 위험은 인지하기 어려운 저층으로 깊이 은폐되었고 신용평가기관의 권력화를 매개로 이것은 세계시장 전체에 유통되었다. ... [153]이는 자신의 주택지분을 은퇴하기 이전에 현재의 소비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 정보산업의 버블 붕괴라는 조건 하에서 주택과 토지가 투기의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증권화를 재촉한다. 이것이 미국내 주택수요를 증대시키고 프라임 외에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상품화를 가져온다. / 이렇게 해서 가능해진 증권화가 위험을 세계화한다. 돌아보면 위험의 세계화는 태환능력을 상실한 달러가 국제화폐로 등장한 것에서 본격화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발권특권은 세계경제의 핵심문제로 등장했다. ... 미국의 소비가 각 지역들(특히 중국)의 생산을 지탱하고 다시 그 지역들에서 창출된 잉여가 미국의 채권과 증권을 구입함으로써 달러를 미국으로 실어보내는 순환고리 ... 이제 미국의 주택금융시장이 세계자본시장과 연결됨으로써 위험세계화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 세계시장에서 유통되는 주식, 채권 등 거의 대부분의 복잡한 금융증서들은 가공자본의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실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 수익에 돈이 지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자본, 가공자본이 금융자본에 의해 매개되는 한, 부실과 파산의 위험은 피할 수 없다. ... [154]이 부채관계망에서 서브프라이머의 대극에 있는 금융자본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이 위기의 부담을 국민들(서브프라이머들, 프라이머들 등)에게 전가할 것이다.

 

[이어서, 154]신용은 한 사람을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며 공동의 사회적 노동관계의 마디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신용은 창조될 수 있고 또 창조된다. 이것은 인간들의 공동체, 사회적 노동이 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의 증폭을 반영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 신용은 사회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국영이라 할지라도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돌보는 사적 기관인 한에서는 사적이다) 금용기관들에 의해 매개된다. 이 때문에 신용은 사회 공동체를 순환시키는 피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신용의 순환이 부단히 사회적 적대를 확대재생산한다. 서브프라이머들의 양산, 억압, 퇴출의 주기적 반복은 그것의 결과이다. ... [155]인플레이션은 생산되지 않은 부를 분배하는 것이다. 그 분배는 극히 불균형적이다. 이번의 위기 대처 과정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소수의 은행가들, 기업가들이 대부분을 분배받고 국민들이 그 나머지를 분배받는다. 인플레이션은 물가를 상승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 고통은 노동계급과 빈민, 즉 다중이 전적으로 짊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금융기관이 매개하는 신용기능을 공동체가 담당하는 길이다. 현재의 은행국유화는 다중들의 희생 위에서 자본의 이윤만을 보장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162]전지구적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이다. 이것은 공장을 축적기반으로 하기보다(공장을 그 일부로 삼는) 사회를 축적기반으로 하는 초국적 금융자본 주도의 자본주의이다. 화폐(달러, 유로, 엔, 위안 등), 금리, 환율, 주가 등은 뉴라이트 정치의 핵심적 무기이다. 화폐정치가 뉴라이트 정치의 본령이다. 올드라이트 중에서 케인즈주의 정치는 조세와 재정을 핵심적 무기로 삼았고 자유주의 정치는 공장착취를 핵심적 무기로 삼았다. 뉴라이트 정치에서 올드라이트 정치의 두 무기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재배치되어 금융축적의 밑바닥에 놓이게 된다. 뉴라이트는 노골적으로 부자들과 자본가들을 위하는 정치이다. 삶의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면서 그 매매행위에 축적의 논리를 부과한다. 모든 교환 행위, 매매 행위, 소통행위에는 이자가 발생해야 한다. 소통으로서의 삶이 이자 체제에 포획된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은 삶의 위기를 먹고 산다.

미국은 뉴라이트 정치에서 태풍의 눈이다. 달러기축을 유지함으로써 세계자본의 순환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달러기축을 유지하는 방법은 전쟁을 하는 것이다. ... [163]전쟁은 달러에 대한 믿음,, 달러에 대한 전 지구적 복종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 천문학적 적자가 누적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버틸 수 있는 동력이 바로 달러에 대한 믿음, 달러에 대한 세계 화폐들의 복종에서 나온다. 미국은 국채의 판매를 통해 적자를 메운다. 국채는 그 국가의 존재에 대한 신용(믿음)을 근거로 한다. 권력에서 기인하는 검은 돈들, 노동자들의 소득에서 기인하는 보험금들(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이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고 이를 토대로 달러가치가 유지되며 이로써 미국의 적자를 그때그때 보전할 달러가 확보되어 왔다. ... 이것[국가보증금융회사의 부도사태]은 미국의 신용을 크게 떨어뜨릴 것이며 미국 국채의 판매는 급감될 것이다. 유로화를 비롯한 다른 화폐로의 전환이 불을 보듯 뻔하다. 군사적 군주국으로 제국체제, 즉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163] FTA는 위기에 빠진 미국이 동맹국이나 주변국의 자산과 노동을 미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원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모든 장벽의 철거를 통해 노동, 상품, 원료,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함으로써 FTA는 위기경제의 영역을 확대하고 위기의 폭발을 유예하며 위기를 [164]더 큰 규모에서 생산한다. 한미 FTA는 그 작업의 일환이다. 한국 정부는 더 많은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러나 금융자본의 유입은 항상 불안정하며 단기계약 이후에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더 폭넓은 이자 행위를 하기 위해 FTA를 원한다. ... 생명, 사회정의, 윤리, 평등, 자유 등등의 모든 가치는 관심 밖이다. ...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명령은 매 시기에 모든 자본에게 부과된다. 그래서 한국의 대자본도 FTA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적 규모에 확대된다.

이런 점에서 일국적 뉴라이트는 전 지구적 뉴라이트의 기능마디이다.

 

[166]비정규직 운동은 정리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직복직,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당사자 운동으로 되어 있다. 이 운동은 정규직이라는 전통적 고용형태에 대한 애착을 보[167]여 준다. 과거에 정규직 고용은 생명안전의 일차적 조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명안전은 피고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소득이 고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노동과 소득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은 지난 세기에 케인즈주의 사회들에서 입증되었다. 만약 실업이나 비정규 고용상태에 있다고 해도(사실 이것이 비정규직 노동자수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많아진 우리 시대의 정상적 고용양식이다)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생명안전을 구태여 정규직으로 고용되기를 통해 해결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 소득보장 요구는 비정규직의 생명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해고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일 것이며 정규지/비정규직의 분할을 통해 지배하는 자본의 통치를 파괴하는 방식일 것이다. 촛불이 민족주의를 넘어서고, 비정규직 노동이 과거에서 투쟁의 꿈을 빌려 오는 당사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넘어설 때 촛불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 두 개의 운동은 투쟁의 선순환 흐름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175]공포를 조성하는 대응은 일시적으로 시민들을 위축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것현재 불복종의 형태로 진행되는 문화적 윤리적 성격의 시위를 삶정치적인 총파업으로 발전시키는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삶정치적 파업들을 결행하고 있다. 이 삶정치적 파업들의 연쇄와 집결이 장기화되어 삶정치적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될 수 없고 불만이 해소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 총파업은 지금까지 운동에 극도의 절제를 요구해온 비폭력이라는 마개를 뽑아버릴지도 모른다. ... 비폭력의 마개가 뽑혔을 때 다중이 절대적이고 순수한 폭력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낼 길이 있을까? 다중의 절대적 폭력은 경찰력으로도, 군사력으로도 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력이며 모든 것을 절멸시키는 거대한 죽음충동이기 때문이다.

 

[184]전광판의 거대한 영상들은 다른 생각을 가질 겨를을 주지 않으면서, 아니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억제하면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민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자본의 영상은 네거리의 상공을 점거하고 있다. [185]자본의 거리정치는 이렇게 영상을 통해 밤낮으로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촛불의 거리투쟁이 살수, 체포, 연행, 구금, 구속, 구타, 협박의 소나기를 맞으면서 피난의 행진을 하는 것과는 달리.

 

[186]민족주의는 화폐나 자본과 공존가능하며 심지어는 그것들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민족주의는 중소자본의 육성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사고해 왔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철저히 해체되고 기반을 잃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중소자본이다. 촛불에서 민족주의의 득세는 촛불의 운신기반을 좁히는 것으로 작용했고 특히 다양한 유형의 노동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참가를 가로막는 것으로 기능해 왔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다중의 삶의 문제는 민족주의를 통[187]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촛불 속에 민족주의적 뉘앙스를 갖는 ‘국민’ 관념이 부상하면서 집회나 시위 참가에 어려움을 느껴왔다. ... 촛불의 다양성을 좀 더 실효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같은 배제적인 관념보다 훨씬 개방적인 관념을 발명해야 한다.

 

[194]한국의 경우 그것은 노무현과 민주당 등에 의해 그 정치적 표현을 얻는다. ... 촛불봉기에서 반이명박, 반뉴라이트 쟁점을 이끄는 흐름 중의 일부는 이 신자유주의 좌파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해방적 민족주의 흐름의 일부도 그러하다. 그래서 촛불봉기의 초기에 신자유주의 좌파 정파는 무시되었지만 촛불이 약화될수록 신자유주의 좌파에 대한 지지와 의존의 경향은 증대했다. 그래서 촛불 전체가 신자유주의 좌파 흐름과 은연중 동화되어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항해온 사회(민주)주의는 촛불봉기에서 한 발을 빼고 있었고 촛불을, 노동자투쟁으로 이어질 전주곡으로만 볼 뿐 자신들이 뛰어야 할 로두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흐름이 있다. 이 흐름도 세밀하게 나누면 우파와 좌파로 구분할 수 있다. 민주노총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의 일부에 의해 표현되는 사회민주주의 우파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에 민족주의 우파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규직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등을 정치적 대의기반으로 삼는다. 이 정치경향은 촛불봉기에 참가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있다. 사노련, 노동자의 힘, 노동해방실천연대 등이 이에 속한다. 진보정당은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좌파가 혼재된 정파로 존재한다. 정규직/비정규직 선을 따라 노동계급 구성이 변화함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좌파는 점점 비정규직 운동에 깊이 [195]개입하는 것으로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차별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촛불의 초기에 금속노조, 화물연대 등의 노동자운동이 촛불과 연결되었고 촛불봉기가 장기화되면서 기륭, KTX, 이랜드, 코스콤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촛불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아직 확고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흐름은 촛불을 중간계급 운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의 대의주의 정파들에 의해 대의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러한 대의를 거부하는 사회적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학적 차원에서 노동의 공통되기에 기초한다. ... 직접행동주의적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은 이러한 경향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201]비정규직이 위기의 삶을 의미하는 한에서 정규직화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하나는 현재의 자본관계가 기술, 정보, 지식, 정동(affect)에 광범위하게 의존함으로써 직접적 노동(직접적 고용자)에 덜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한에서 더 많은 직접적 노동의 안정적 사용에 대한 요구는 탈근대자본주의를 근대의 자본주의로 복귀시키라는 요구를 의미하게 되어 비현실적 복고경향을 드러낸다. 둘째 설령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요구의 지향은 안정된 자본주의의 구축에 있게 되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닫게 만든다. 즉 이 요구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요구이다.

현대의 비정규직문제는 고용불안정의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실제적 본질은 삶의 불안정, 삶의 안보(안전보장)의 취약화의 문제이다. ... 그러므로 고용요구는 실제로는 삶의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닥쳐온 고용위기는 자본(관계)이 다중의 삶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자본관계와는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을 보장받고 삶의 행복을 추구할 방법을 찾는 것이 다중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어나갈 바탕은 삶의 생산과 재생산 능력으로서의 노동이다.

 

[202]오늘날 착취는 사회화된 노동, 일반노동에 대한 착취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본관계에 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고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취업노동자)은 직접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자본이 이용하도록 만드는 역할, 즉 지주소작관계 한에서의 마름과 비슷한 역할을 떠맡아 가고 있다. 개별 자본에 직접 고용되지 않거나 불안정하게 고[203]용된 사람들이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정도가 높은 만큼 취업과 정규고용은 삶의 안전보장(보험)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 이로부터 ‘일정하게 보장받는 직접고용 노동자’와 자본 사이에 비보장노동자에 대항하는 안보동맹이 맺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그 동맹은 주권적 안보동맹일 것이다.

 

[204]비정규직 법안은 다중의 연합을 파괴하고 다중 내부에 위계제를 도입하면서 소수의 안정된 고용노동자를 매개로 하여 다수의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를 파견근로, 기간제 근로 등의 형태로 착취하려는 제도 구축 시도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제도를 더욱 확장하고 또 확고하게 안착시키려는 이 법적 시도의 나쁜 효과를 폭로하고 그것에 맞서면서 노동기본권에 기초한 고용안전이라는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 디딤돌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요구이다. 그것은 현행의 일반적 공통노동과는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 현재의 사적 자본관계를 척결하고 자본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보장을 이룰 관계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이것은 촛불의 취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206]자본주의는 두 가지 공리에 기초한다. 첫째, 소득(임금)을 얻으려면 [207]노동을 해야 한다. 둘째, 노동하려면 고용되어야 한다. 첫째가 가치법칙이요 둘째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본원적 축적이다. 첫째가 노동의 계량화, 시간화이며 둘째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출이다.

그런데 이 공리들은 자본가 예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공리들은 케인즈주의에 의해 자기부정되었다. 케인즈주의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것을 국가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개별화된 노동과 개별화된 소득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국가적으로 승인했다. 이후 개별노동과 개별소득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만 가동될 수 있었다.

 

[208]이것[무조건적 소득보장]은 부르주아 정치체 속에서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과업은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체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할, 지배자와 피치자의 분할,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분할, 이윤과 임금의 분할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체는 더 이상 현 단계의 인류사회를 광범한 동의하에 꾸려나갈 수 없다. 대다수 사람들을 생존선 이하의 비정규직으로 몰아넣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자와 이윤을, 그리고 일종의 마름 수당인 정치적 임금을 특혜적으로 받는 정규직으로 분할하고 있는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만큼 그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비정규직은 폐지되어야 한다. 정규직도 폐지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일하면서 그 생산물이 자유롭게 분배될 수 있는 관계는 새로운 정치체에 의해서만, 다중지성의 코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209]민족주의 비판, 즉 반민족주의가 뉴라이트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이다. 이것은 자본의 초국적화의 경향을 내면화한 민족주의 비판이다. 거대 독점자본, 초[210]국적화한 재벌들, 초국적 금융자본들이 힘을 얻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걸러내야 했다. 뉴라이트는 민족이라는 단위가 오늘날 자본주의의 발전에 조응하지도 자본의 축적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뉴라이트의 반민족주의는 전적으로 자본축적의 논리학이다. 뉴라이트는 근대에 한 몸으로 결착되어 있던 민족과 국가를 분리시키고 민족주의 대신 애국주의를 옹호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은 국가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축적을 위한 마디로 삼는다. 즉 국가는 세계자본주의에 필요하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 필요에 맞추어 애국을 주장한다. 뉴라이트에게 애국이란 국가를 자본축적의 지렛대로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215]역사적으로도 국가는 내부적으로 억압(치안)의 기관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기관이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만 그 보호는 주어진 영토 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고 그들을 국민으로 조직하여 착취의 영토를 확장하는 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호와 억압은 국가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민민연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학을 정부에 대한 기대가 붕괴된 것 위에 정립할 때, 그리고 촛불연대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학을 대한민국의 국가적 존엄성의 위기 위에 정립할 때 이 두 선언문은 스스로 국가가 되려는 권력의지에 함몰하였거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제하려는 십자군 전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국가, 애국, 국민은 ... 반동적이며 수구적인 가치이다. 이것은 나치즘, 파시즘, 일본군국주의, 네오콘 등에서 그 극단적 완성을 보게 되는 가치이며 근대의 이른바 ‘정상’ 국가들이 매일매일의 정치에서 착취와 수탈을 위해 끊임없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들이다.

 

[216]국가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바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에 따라 정립된 정치체계를 지칭하지 않고 접속하여 협력하는 삶의 네트워크를 지칭할 때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국가형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가형태를 파괴하고 다중들 자신에 의한 다중들 자신을 위한 다중의 자치형태를 발견하는 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을 위한 자기지배가 민주주의의 실제적 잠재력이다.

 

[218]연대기구가 설정하고 있는 ... 목적은 존엄의 촛불에 외부적인 것이며 국가와는 다른 유형의, 즉 코[219]뮌 유형의 자율적 공동체 구축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대 기구 조직화의 움직임은 촛불을 살림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연대기구들이 정식화하고 있는 정신들은 퇴행적이지만 다중들은 촛불을 살린다는 첫 번째 이유 때문에 연대기구가 여는 시공간을 촛불의 자기목적, 즉 촛불의 자치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시공간을 창조의 시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촛불에서 국가주의적 권력정신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흩어져 있던 촛불들이 서로 배우기 위해서라도, 또 촛불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저 지도자들과 전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리라.

 

[229]많은 사람들이 다중 개념에 제기해온 문제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이민, 이주를 전형적 사례로 삼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에 대한 긍정이 만약 그것이 즐거운 것이라거나 행복한 것이라는 등의 감성적 진단에 기초한 것이라면 랑시에르(그리고 여타 사람들)의 ... 비판의 적확한 표적이 된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헤매는 이주, 이민은 글자 그대로 비참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긍정은 이 유목적 운동이 갖는 역사적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진단에 기초한 것으로서 비참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갖는 변형의 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의 비판은 과녁을 빗나간다.

...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비참의 산물이지만 그것의 역사적 의미는 그들이 추방된 자로서 느끼는 감각이[230]나 감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주하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은 그것이 비참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류인들의 국경을 넘는 혼종과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기이며 코뮤니즘을 새로운 수준에서 구축할 잠재력의 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랑시에르가 ‘인민’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그 아무개n'importe qui가 오히려 다중으로부터 특이성을 지워버리고 난 후에 남는 찌꺼기의 이름이 아닌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촛불들은 이런 ‘인민’이기에는 너무나 다채색이고 특이하다.

 

[234]보호의 사랑은 연대의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니다. 보호자와 위안자는 그것이 뜨거운 사랑에 불탈 때조차 위계의 상층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보호의 구조는 권력의 구조이며 그래서 억압은 보호의 이면이다. 그래서 다중이 보호에 만족하고 그 보호의 틀 속에 안주하게 되면 그들의 행동의 자유는 협소해 지고 상상력의 폭도 좁아진다. 그래서일 것이다. 청소년들이 어느날 태평로 아스팔트 바닥에 대자보를 붙여두었던 것은.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를 대[235]상화하려 하지 말라. 우리는 이 투재의 주체이다.” .... 보호와 위안을 일시적 방패막으로 삼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힘을 재정비하고 다시 ‘투쟁의 독자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보호의 사랑에 길들여질 것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단련되는 공동체의 사랑을 쟁취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자칭의 보호자들과 대립하는 방법으로? 아니다. 주체의 입장에 확실하게 설 수 있을 때, 자칭하는 보호자는 원군일 수 있다. 이 원군의 권력망을 살짝 벗어나면서 그 원군의 힘을 싸움의 동력으로 배치할 수 있다면.

 

[236]선거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선거가 다중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한 고유하고 적절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다중의 정치적 형태로서 극히 취약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란 거리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고 설령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 승리를 변질 없이 지켜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의는 본질적으로 굴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37]촛불이 중산층의 의제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널리 확산되는 생각이 있다(박노자, 김종엽). 이 생각은 비정규직의 투쟁이 촛불에서 주변화되는 것을 고려한 판단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투쟁의 주변화가 촛불의 [238]중산층성을 뒷받침하는 증거일까? 의제를 신원주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이 서로 접근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제의 계급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며 안이한 해석으로 보인다. 촛불은 단일의제를 갖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의제들을 포함하는 용광로이다. 삶의 다양한 요구들이 촛불을 통해 제안되었다. ... 하지만 현재의 비정규직 투쟁은 이 잠재력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 왜 비정규직 투쟁이 무조건적 보장소득과 같은 공통적 요구를 제기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때 사회적 연대의 잠재력이 더 커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 비정규직 투쟁의 당사자 운동적인 이 제한성이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의 결합을 방해해온 요소가 아닌지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240]일본은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다. 한국이 이미 두 개의 민족(부르주아지와 다중)을 포함한 복합체이듯이, 일본도 두 개의 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체이다. 누가 이 복합체를 단일한 통일체로 보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각국의 지배계급, 즉 민족부르주아지이다. 민족부르주아지는 복합체인 한국이나 일본을 단일한 통일체로 환원함으로써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고 저항, 혁명을 억제한다. ... 민족국가는 다중의 정치형태일 수 없고 오직 자본의 정치형태일 뿐이다.

 

[242]혁명은 영구적인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의 주요한 정치적 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와 연결된 모든 계급계층이 동시에 동원되어야 한다. 문제와 연루된 세력들 모두가 동원되지 않고서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누가 주도하는가 혹은 할 것인가가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공동행동을 할 것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동행동의 가능성을 침식하며 결국 투쟁의 역량을 해체한다. ... 다양한 전선들이 공동의 목표로 집중[243]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결집하되 이후의 방향들(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율주의 등)은 각 참가자의 의향과 욕망과 생각에 맞게 열어두는 것.

 

[243]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관념을 갖고 있느냐보다 적대성, 즉 정치적인 것의 실재성을 단언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것에 어떤 방향을 새길 것인가는 참가자들 자신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로두스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촛불 외부의 딴 곳에 있지 않다. 새로운 과학은 그 속에서 나와야 한다. 파시즘 경험을 떠올리며 ‘대중의 성격구[244]조의 비합리성과 조작가능성’을 우려하면서 봉기행동으로부터 멀리 자리잡고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그 외부에서 망루적 비평을 하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중운동에 대한 원천적 부정으로 귀착되지 않겠는가?

 

[245]촛불이 승리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과정이 아니라 국가에 위임된 자신의 권력을 되찾고, 시장에 내맡겨 놓은 삶을 되찾아 의식적으로 자기통제하며 타인과의 비시민적, 비시장적 관계방식을 창출하고, 주로 자본가들만이 이용권을 갖고 있는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기나긴 투쟁, 파괴와 해체를 수반하는 투쟁의 과정,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활력을 키우는 항구적 운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248]모든 지성은 중앙 명령권자에게 주어져 있고 조직과 체계는 그것을 관철시키는 구조이다. 규모가 크고 검정색 일색이며 표정조차 없는 그 지성이 집중지성, 중앙지성이다.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은 이러한 중앙지성에 의지해 왔다.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약칭인 미국의 CIA나 한국의 구 ‘중앙정보’부 등이 그 사례이다. 근대에 중앙지성은 거대한 힘을 발휘했지만 지금 그것은 급격히 능력과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 개개의 특이한 지성들과 그 네트워킹에 기초를 둔 다중의 집단지성이 있다. 겉으로 보면 다중지성은 오합지졸로 보인다. 통일된 사전행동계획이 없다. 언제 어디서 모인다는 식의 커다란 지적 연결선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 개개인들은 매순간 정보들이 수집되고 처리되고 전송되는 지성망의 마디로서 기능한다. 명령과 통일이 아니라 연결과 협력이 다중의 집단지성의 관건이다. ... 명령권자들만이 사유하고 나머지는 그에 복종하는 중앙지성과는 달리 집단지성에서 다중들은 직접사유하며 언제 결합되고 언제 물러날지를 전체에 대한 고려 위에서 스스로 결정한다.

 

‘집단지성인가 중앙지성인가?’라는 물음은 그것이 양자택일적 의미를 지니는 한 잘못 제기된 물음잉다. 우리 시대의 모든 것이 집단지성에 의존하고 있고 그것이 노동양식이자 삶의 양식으로 되어가는 한에서 집단지성은 어떤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은 다중의 지성형태일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을 다중으로 편성하는 힘이다. 중앙지성은 집단지성을 이용하고 착취함으로써 생존한다. ... 중앙지성은 집단지성의 외부에서 집단지성의 착취자로 기능하는 한에서 집단지성 발전의 장애물이다. ... 그래서 집단지성의 발전과 진화는 중앙지성의 해체와 재전유, 그것의 집단지성화를 통해서, 중앙지성의 기관들을 집단지성의 네트워크 마디로 재편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집단지성은 지금까지의 사회변화의 [251]결과이자 동시에 미래 사회변혁의 조건이고 동력이다. 그것은 일과적인 것도 방법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집단지성 위에섯, 그것에 근거하야 도약해야 한다 집단지성은 우리가 도약해야할 로두스 섬이다.

 

[251]집단지성과 다중지성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다중지성은 특이성들의 접속과 혼종, 그ㅡ리고 새로운 것의 생산을 통해 작동함에 반해 집단지성은 다양한 것들 사이의 비판과 배제를 통해 특정한 경향의 헤게모니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집단지성에서는 다중이 집단으로 환원되고 수축되는 것이 아닌가? [252]집단지성은 토론을 통해 지배적인 것을 구축한다. 하지만 다중지성은 다양한 생각들과 감정들, 능력들의 모자이크를 구축한다. 집단지성은 새로운 유형의 당이다. 우리 시대에 적응된, 재구축된 당이다. 다중지성은 이러한 당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 당들이 대상으로 삼았던 대중들의 특이화이자 특이화된 대중들의 지각적 정동적 지성적 움직임이다.

 

[254]촛불봉기는 배후나 지도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 생각과 감정을 전염시키면서 집단적 지성체로 성장해 가고 있다. 전염은 촛불봉기가 살아나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탈근대적 소통방식이다. 그것은 질병이 아니라 탈근대민주주의의 동력이다. 이것은 포퓰리즘과 혼동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60]미네르바의 예측이 거듭해서 맞아떨어지는 것은 미네르바 자신도 알고 있듯이 현재 전 세계의 지배자들이 새로운 것을 창안하지 못하고 낡은 것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예측불가능하지만 낡은 것은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경제예측의 날카로움은 금리, 환율, 주가, 부동산, 물가, 인수합병, 투기 등에 관한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며 그 운동 경향에 대한 통찰력 있는 파악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예측에 대한 권력의 공포는 오늘날 금융세계의 특징에서 기인다.

 

[262]미네르바의 예측활동은 권력으로부터 서민들을 분리 시켜내지만 그들을 온전히 다중의 시간 속으로 가져가지는 못한다. 이제 미네르바의 지혜가 촛불의 정열을 품고 촛불의 정열이 미네르바의 지혜를 장착할 때이다. 지성과 몸의 합체 속에서 자본에 묶였던 예속의 끈이 끊어진다. 드디어, 미네르바의 촛불, 촛불의 미네르바.

 

[267]촛불의 깊은 저층에서는 이 다양성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류, 전염, 공명이 발견된다. ... 온갖 사람들의 분노, 사랑, 결의, 지혜, 용기, 헌신 등이 촛불을 지속시키고 있다. 이와 달리 촛불의 상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정파적 이해관계와 패권의식이 행위자들의 판단과 행동을 제약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자신의 판단과 취향과 욕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촛불이 단일한 투쟁형태, 투쟁방향, 투쟁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만큼 촛불에 위험한 것은 없다.

 

[269]조직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집화와 시위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수단이다. 조직화를 창조로 이해했을 때 집회와 시위는 참여자들의 적극적 자기표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새로운 삶의 형상이 출현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되는 것은, 아니 정확하게 말해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은 약동하는 생명력이지 개물화된 인격체들이 아니다. [270]조직화를 질서로서 생각할 때에만 이미 현존하는 개물화된 인격체들을 명령-복종관계 아래에, 혹은 동원체계에 묶어내는 것을 조직화로 이해하게 된다. ... 그러나 조직화는 그 이상일 뿐 아니라 반드시 그 이상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조직화는 생명의 새로운 진화를 가능케 하는 기술이자 예술이다. 생명이 막혀 있는 지점을 뚫고 이루어질 때 그 시간에 그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생명이 특이화된다. 생명의 특이화가 나타나지 않는 조직화, 기존의 것들이 단순히 반복되고 있을 뿐인 조직화, 이것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형태만을 바꿀 뿐이다.

 

[274]지금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현 시기에 필요한 네트워크 형태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설득력이 있고 또 필요하며 실제로 지금도 촛불을 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에 부응하는 하지만 이것이 비조직화에서 조직화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직화에 대한 협소한, 그래서 결국은 유효하지 못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며 향후에 이러한 이미지가 고정될 때 촛불 운동 전체를 질곡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지 때문에 촛불봉기가 밟아온 조직화의 진화과정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단적으로 말해 지금 조직화에 대한 긴급한 요구는2008년 5월~6월간에 이루어졌던 리좀적 조직화가 탄압으로 파괴되거나, 역량의 고갈로 취약해지거나, 다른 부분과의 네트워크에 실패하여 이탈하거나, 봉기의 진화가 직면한 장애에 대한 해결전망을 찾지 못하고 잠복함으로써 이완되고 기능마비된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다른 조직화의 모색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미조직화에서 조직화로의 발전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조직화의 움직임이 이 점을 유념하지 않는다면 다중의 봉기가 다시 치솟을 때, 지금 구상되는 조직적 형태를 조직화의 유일한 형태로 보고 이것을 그 거대한 운동에 부과하려는 시대착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6]촛불들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오히려 촛불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될까? 조직화(organization)가 질서화(ordering)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서화란 명령-전달-실행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이 체계에 결합된 개개인들은 기계부품으로 전화된다. 이것은 오늘날 공장, 당, 국가, 군대 등이 취하고 있는 형태이다. 근대적 조직화는 질서화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촛불은 처음부터 질서화에 대한 항의였고 그것에 대한 거부를 독특한 특징으로 내보였다. ... 독립된 중앙지도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촛불들은 지도부를 요청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 지도부를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성으로서보다는 지도력의 독특한 형태, 독특한 존[277]재방식에 대한 요구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궁극적 전쟁지도는 특이한 개개인들의 네트워크, 집단지성과 집단의지, 요컨대 다중지력에 의해 이루어지되 개별의 전투지도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도란 다중의 위가 아니라 옆에, 아니 실제로는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다중은 자임하는 지도부들을 봉기에 이용하면서 그들의 권력화를 차례차례 붕괴시켜 왔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277]조직되어야 하는 것은 특이한 힘들이지 인격체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회적 생산력들, 사회적 투쟁력들이 조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력들’=‘힘들’은 산재하며 이동적이고 가변적이다. 그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관계망 속에서 때로는 격류처럼 때로는 호수처럼 움직인다. 법률적 인격체들이 질서정연하게 조직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힘들이 공명, 전염, 촉발, 가책, 호기심, 놀이, 결의 등 각각이 다른 이유들, 조건들, 맥락들, 목적들에서 합류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결코 어떠한 조직화도 없이 자연과정을 방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각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내적 계획을 수립하며 그 욕동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욕망과 전망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신적 신체적인 더 많은 직접행동들(직접행동을 가투로 환원지 말 것, 몸으로 하는 행동만으로 환원하지 말거)이 필요하며 이것들이 서로 공명하고 전염되고 서로 감싸고 융합되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나가는 것이 창조로서의 조직화, 자기조직화의 과정일 것이다. ... [278]조직화 이후에 오는 행동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행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직화!

 

[279]이날 시위는 지도력의 자생적 형성과정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독립된 부분이 전체를 이끌기보다 서로가 보완하면서 대오를 살려내려는 집단의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전대협이 대오를 이끌 때는 구호 선창권이 리딩에게 독점되었다. 이날 구호선창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시점, 다양한 지점에서 이루어졌고 길잡이가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강력하고 자신감 있는 지도는 시위대의 사기를 높이는 반면 시위대 개개인의 표현욕구를 억제하는 측면도 있었음이 반증되었다. 지도력은 지속적으로 분산되어야 하고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지도력을 갖도록 연습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저항과 창조의 영속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 맹아적으로 인지된 날이다. 강력한 그러나 독립적인 지도부는 시위대를 대중으로 만들며 내부로부터의 지도력의 형성과정을 억제하는 효과를 갖는다.

 

[282]그러므로 촛불은 군사적 대응을 방어의 무기로 잘 활용하되 그것에 함몰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군사적 대응을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히면서 그 새로운 차원에 군사적 대응력을 종속시켜야 한다. ... [283]자본은 다중의 이 네트워크에 의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을 공격할 수 있는 실제적 무기는 군사적인 것에 있지 않고 이 생산의 지점에 있다. ... 삶정치적 총파업은 두 가지 의미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총파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첫째 1980년대의 전투적인 노동자 파업과는 달리 1990년대 이후 노동자 파업은 중앙에 의해 조절되면서 제도적 성과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둘째, 삶정치적 총파업은 공장에서의 파업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들, 가정, 교회, 언론, 학교, 군대, 회사, 백화점, 마켓 등에서 파업이 조직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정치적 총파업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파국을 도입하는 경로이다.

 

[291]우리는 살수차 대 유모차의 대립이라는 사태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살수차의 도덕에 유모차의 윤리가 대립했으며 살수차의 법에 유모차의 삶이 대립했었다고.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것은 도덕과 법이 아니라 윤리와 삶이라고. 도덕은 시민사회 속으로 이입된 법이라고. 윤리는 삶의 자기표현이라고.

 

[295]여기서 국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주체성의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권력이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촛불이 권력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위임된 권력, 대의 권력이 항상 다중의 언론과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이것은 국가가 다중을 감시하고 처벌할 것이 아니라 다중이 권력의 소음, 권력의 얼굴, 권력의 돈을 감시하고 행동으로 제약하며 권력을 처벌할 삶정치적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이를 위해서 촛불 자신이 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서는 것,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것, 스스로를 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으로 정립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

 

[297]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은가라고 묻는 습관은 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노예적 문제틀에 속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의 지배자가 되지 않게 하는 것,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권력자로서 자신의 존엄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숙고하는 것이 촛불에게 주어진 정치적 과제이다.

 

[298]맑스는 루이 보나빠르트의 집권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철저성의 사례로 파악했다. 두더지는 가장 파괴하기 쉬운 적이 등장할 때까지 부르주아 사회로 하여금 생산력을 가동하도록 자극하는 방식으로 혁명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실현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수 있는 물적 전재들과 비물질적 전제들이 형성될 때까지 사회의 순환을 밀어붙인다. 이것이 혁명의 철저성이다. 철저성은 혁명의 영원성이 발현되는 방식이다. 촛불은 영원하고도 철저한 혁명의 지속성이 출현하는 현 국면이다.

 

[312]대통령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일 수 없다. 윤리적 선은 자기역능의 확장이다. 그 확장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윤리적 의미에서의 악이다. 그것은 나의 역능의 확장이 아니라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은 좋은 대통령을 뽐는 데 열중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외부적 명령도 거부하면서 오직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주권자로서의 개개인들이 무제한적으로 자유로운 연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추구과정에서 때로 덜 나쁜 대통령을 필요로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315]촛불이 제기한 문제는 결코 의회에서는 풀릴 수 없는 문제이다. 다중들의 직접행동, 그 직접행동의 전지구적 전염, 촛불코뮌의 구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문제는 풀릴 수 없다. 촛불봉기를 압력수단, 봉기수단으로만 이용하고 그것을 제헌적 권력기관으로 보지 않는 모든 정치적 경향들을 경계하고 그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다중의 직접행동이 아닌 다른 수단은 문제를 덮고 지연시키고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문제는 이명박이 아니라 촛불이다’라고 책임전가하며 촛불을 폭력으로 짓밟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333]비폭력의 이상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방어폭력을 통해서이다. 권력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지키는 방어행위를 통해서 비폭력의 이상에 한걸음이라도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어폭력은 대항폭력인가? 정당한 저항적 대의가 있다면 선제적으로 폭력을 행사해도 좋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폭력을 선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어떠한 저항적 대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의 축소는 인류가 추구해온 시민적 이상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폭력적 삶, 비폭력적 관게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선제폭력은 폭력상황을 가속시킬 것이고 결국 시민들의 패배를 가져올 것이다. 방어폭력은 폭력을 해체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폭력이며 폭[334]력의 최소화, 폭력의 해체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방어폭력은 정당방위로서 현존하는 법에 의해서도 보장되어 있다. ... 방어폭력의 일차적 형태는 도주이다. 납치하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들의 물리력의 행사범위를 신속하게 벗어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설마 나를 때리겠는가 하는 생각은 권력과 경찰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환상적 신뢰에 기초한다. 도주에도 불구하고 폭력범과 납치범들이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위협할 때는 자신을 방어할 가능한 최선의 방책을 찾아야 한다.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방어폭력이 비폭력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실제적 의미의 비폭력은 싸움의 전술이 될 수 없다. 비폭력은 폭력의 해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그것은 절대적 폭력상태인 자연상태로부터 시민사회를 건축하는 혁명적 협력의 이념이어야 한다. 혁명적 협력으로서의 비폭력은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방어하는 방어폭력을 통해 현재의 사회적 협력을 방어하며 그것을 독점폭력의 강제로부터 분리시켜 내기 위한 것이며 강제적 협력이 아닌 자발적 협력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시민들의 실제적 전술이어서는 안 되고 이념이어야 한다.

 

[337]2008년 8월 16일 비폭력의 얼골로 살아왔던 시민들이 자연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연상태에서의 시민들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며 자연인일 뿐이다. 자연인으로서의 개인들은 절대적 폭력의 체현자들이다. 법은 이들에게 장애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의 무력은 자연인들의 적이다. 자연인들은 무력에 의한 폭력의 재현 혹은 대표를 거부하면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무력을 해체시키려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민상태의 구성으로, 사회적 협력존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무력에 대항하는 자연인들의 폭력은 새로운 권력을 구성하는 힘, 제헌권력이다.

 

[341]“법은 불법에 양보할 필요가 없다.” 불법이라도 양보해야 한다는 종교적 무저항주의가 봉기 속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형법이 우리에게 각성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촛불봉기에서 국민들은 지금 자신들이 법이고 정권이 불법이라는 인식을 널리 공유하고 있다. 정권은 [342]그 반대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법이고 봉기에 참가한 국민들을 폭도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합법성을 둘러싼 두 개의 인식이 대립하고 있는 순간이 지금이다. 이 대립은 인식론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인식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실천을 통해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촛불봉기에서 승리한다면 다중이 행사한 방어적 폭력은 법에 의해 정당화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행하고 있는 지금의 연행들, 경찰폭력들 등은 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다. 만약 패배한다면 민중의 행위는 물리적 폭력행사는 물론이고 도로점거 등 일체의 시위동작이 폭도의 행위로 몰려 처벌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폭력은 정당화될 것이다. 우리는 폭도인가 법인가? 광주민중항쟁에 참가했던 시민들에게 던져졌던 이 질문이 다시 촛불봉기에 나선 시민들에게 던져지고 있다. 여기에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둘러싼 거대한 인식론적 내기가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실천적 내기가 동시에 걸려 있다.

 

[357]그러므로 촛불은 5년의 수명을 갖는 문제가 아니다. 촛불은 전 지구적 평화를 갈망하는 삶정치적 성찰의 무기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혁명적 불빛이다. 거대함을 욕망하지 않으면서 작은 그러나 무수한 것들의 의지를 모아 그려내는 근원적 혁명에 대한 갈망이다. 촛불은 몇 개월의 수명을 갖는 것도 아니며 몇 년의 수명을 갖는 것도 아니다. 촛불은 영원하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꺼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꺼질 수는 없다. 일시적 꺼짐은 촛불의 잠재화일 뿐이지 소멸이 아니다. 비가시화일 뿐이지 비실재화가 아니다. 생명이 영원한 만큼 촛불도 영원하다.

 

[364]13. ... 현대자본주의는 점점 더 많은 인구를 임금, 소득에서만이 아니라 신용에서도 배제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가치의 부로서의 실현은 더욱 어려워진다. / 14. 사회적 협력은 다중 서로의 신뢰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실제적 사랑에 의지한다. 배제와 차별과 위계는 이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한다. 신용사회, 금융자본지배의 사회,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다중의 협력에 의지하면서 이 협력을 끊임없이 깨뜨리는 살아 있는 모순이다.

 

[366]21. 신용의 실추, 신용의 경색, 자산의 파괴, 화폐보유의 증대, 이것들은 다중의 생산적 공동체를 파괴한다. 믿음의 부재, 사랑의 실종은 그 자체가 전쟁상태이다. 대규모의 전쟁들이 이를 조건으로 유발된다. 신용자본주의에서 전쟁자본주의로의 이행. 전쟁자본주의는 신용자본주의의 이면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 22. 자본주의가 신용과 전쟁 사이를 오가는 체제임을 직시할 때에 다중이 먼저 수행해야할 일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구석구석 밝히는 일이다. 촛불은 이 일을 시작했다. 신용, 신뢰, 사랑, 협력을 사유화, 시장, 권력, 국가의 수중에서 해방시키고 그것을 자율적인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 [367] 23. 삶의 공동체가 가치공동체로 역전되는 메커니즘을 절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삶의 공동체가 가치공동체, 화폐공동체로 나타나지 않도록 고용/비고용, 노동/비노동, 임금/비임금, 정규/비정규의 분할기계들을 해체하여 공통화기계가 작동되게 하는 것, 중앙지성 대신 다중지성, 민족주의 대신 인류인주의, 국가 대신 다중의 코뮌. 24. 촛불은 삶이며 삶은 촛불이다. 자본의 전체주의를 깰 때 삶, 생명, 산-노동의 시간이 열린다. 자본의 신용이 깨지는 시간이 바로 삶의 신용이 열리는 시간이다. 자본의 신용이 깨지는 시간이 바로 삶의 신용이 열리는 시간이다. 이 틈새에서, 위기와 공황의 구멍 속에서 해방의 시간이 열린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살(flesh)이 열리는 시간. 촛불의 시간, 촛불의 전명화, 촛불의 세계화, 모든 사람들의 촛불되기, 그래서 절대적일 뿐인 민주주의.

 

[370]6. 신자유주의에서 화폐는 다른 모든 종교의 상위에 있는 종교로 된다.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들, 빈민들도 자본의 신도로 된다. 착취, 강탈, 협박, 사기 그리고 이것들을 통한 권력관계 생산은 화폐종교의 근본주의적 교리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근본토대이다. / 7. 자본은 자본가들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만과 소외에 빠진 피착취자들의 종교이기도 하다. 자본은 자본의 심부름꾼이나 원천동력들, 즉 자본의 노예들 모두에 대한 구원자이다. 자본은 노예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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