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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괴물의 탄생

  • 등록일
    2009/03/21 14:49
  • 수정일
    2009/03/21 14:49

*[대자보]에 실린 redbrigade의 글이다.

 

공무원, 괴물의 탄생

 

필자가 아주 흥미롭게 본 영화가 있는데, [언더월드](렌 와이즈만, 2003)가 그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지하세계에 사는 두 종족이 나온다. 각각 뱀파이어와 라이칸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종족은 적대관계에 있긴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만큼 일치한다. 그건 인간들을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감독의 눈에는 짐승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상, 그게 '언더월드'인 셈이다. 짐승이니 영혼이 있을리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정권이 국민들에게 보여준 그 모든 주옥같은 쇼들 중 하나가 떠 오른다.

 

인수위 시절 이명박 정권은 국정홍보처를 정리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듯 했다. 이에 맞서 전 국정홍보처장은 처절한 발언을 했는데, 그게 바로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거다. ‘천민 자본주의’와 더불어 막스 베버 선생의 유명한 개념 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기 위해 영혼 또는 정신, 즉 누우스(nous)를 기준으로 삼았다.

 

하여간 전 처장은 홍보처의 존폐를 막기 위해 애를 쓴 게다. 그 와중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으니, 진짜 영혼을 판 셈이다. ‘불행한 의식’(Hegel), 철학자였던 그 분은 이 개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정말 코메디는 그 이후다. 국정홍보처는 문체부 산하로 개편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 토론 사이트인 ‘아고라’를 감독(?)하려고 시도한다. 홍보를 하겠다는 건지 차력을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건이 줄줄이 터진다. 촛불이 청와대 앞마당까지 일렁이더니, 용산에서는 ‘잘 한다, 잘 한다’ 했던 모범생 하나가 전교학생회장 취임을 앞두고 사고를 쳤다. 그러더니 질질 짠다.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웬 불이 화왕산까지 번졌다. 휴전 중인 앞 마을 녀석들도 방해다. 미사일을 쏜다, 그런다. 양키들도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알아서 하란다. 진퇴양난이다. 결정적으로 온 나라에 돈이 씨가 말랐다. 대신 있는 놈들은 더 많이 번다. 없는 사람들한테 베풀라고 세금 털어 주었더니, 제 불알 밑에 우겨 넣고는 꺼낼 생각을 안 한다. 왜 돈을 노동하는 이들에게 안 쓰냐고 으르면 오히려 줘 놓고 웬 생색이냐, 이미 우리 돈이다, 란다. 무능의 극치다.

 

이래서 공무원들이 더 영혼을 빼 놓을 수밖에 없다. 정신줄을 놓은 게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것은 아닌 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연봉에 걸맞는 짓을 해야 하는데, 서슬 퍼런 마왕은 회의에서조차 자기 말하기만 바쁘다고 한다. 그러니 비위 맞추다 시간 다 간다. 직언은 엄두도 못 낸다.

 

언제는 미국산 소를 국민들에게 먹이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말했던 물질이, 이제는 “먹어 봤어, 안 먹어 봤으면 말을 말어!”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런 웃기는 행실을 고발한 티비 프로그램을 고소했다. 서커스가 아닐 수 없다. 경찰이 어디 천한 용역 따위와 어울려 공권력을 함께 집행하느냐고 했다가, 이후에 증거가 나오자 망신을 당하고, ‘메일’이라고 말했다가, 그건 ‘편지’의 영어 표현이라고 하고, 포복절도하게도 그게 ‘영어실력’ 나부랭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이건 패닉 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현재진형형이다. 나는 이들의 지겨운 코메디를 더 이상 웃으면서 볼만한 느긋함도 없고,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너무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러니 이들이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얄궂은 말을 했든 멀뚱멀뚱할 뿐이다. 믿을 만 하지도 않고, 또 믿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저들이 그렇게 약속했던) 돈도 안 되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저 말 듣고 돈이라도 나왔다면, 아, 그랬다면. 최근 대박을 치고 있는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가사를 인용하자면, 선지자가 가리키는 대로 "물을 찾아 죽을둥 살둥 왔지만, 아무 것도 없잖아"다. 선지자인지 사기꾼인지 그래도 주식 투자하란다. 멀뚱멀뚱할 뿐이다.

 

이렇게 4년을 견뎌야 하는가? 멀뚱멀뚱한 채로? 그래서 되겠는가?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일곱 명이나 죽었는데도 그것을 '자폭 테러'라고 규정하는 이 공무원들. 물론 이들이 전체 공무원들 중의 소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소수가 다수의 '영혼 있는 공무원'들을 억압하고 지도하려고 한다면 사태가 심각한 것이다. 소위 고위 공무원들이 더 이상 누우스를 자기 규정체로 삼지 않는다는 건 곧 짐승들이 인간을 상대로 명령을 내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2009년 봄, 언더월드 코리아에서는 인면수심의 짐승들이 활개친다. 이건, 뭐, 동물원인지 나라인지 구분이 안 된다.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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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도래

  • 등록일
    2009/03/21 14:43
  • 수정일
    2009/03/21 14:43

 

*[프레시안]에 실린 redbrigade의 글이다.

 

유령의 도래

-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 2008.

 

맑스의 유령

1848년이다. 맑스의 ‘유령’이 전유럽을 배회하던 때가 말이다. 그 유령은 장대한 문체로 『공산당 선언』의 맨 앞 구절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는데, 바로 ‘공산주의’라고 불려졌다. 당시에는 “교향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들이 이 유령을 퇴치하고자 ‘신성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2009년이다. 맑스의 유령은 어디 있을까? 그 당시, 유령은 저들의 총칼에 대항하는 무기가 비록 맨주먹과 창과 낫이었을지라도 대륙을 뒤흔드는 소요와 혁명의 함성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런 대륙을 흔드는 함성이 없다. 그렇다고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숨어 있는 위력이야말로 더 섬뜩한 법이다. 잠재적인 혁명이 더 불안한 법이다. 왜냐하면 지배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잠재성은 마치 영원한 형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케인즈(J. M. Keynes)가 그의 저서에서 ‘노동’을 무시무시한 변수로 취급한 이래로 지배자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영원한 형벌의 다른 이름이다. 하기야 노동의 입장에서 형벌이란 오히려 지속되는 축제, 항상 도래하는 축제일뿐이지만 말이다. 여기서 가장 살벌한 테제 하나가 제출될 수 있다. 유령의 도래는 곧 자본의 종말이라는 것, 도래와 종말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끔찍하거나, 즐겁거나, 소란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속으로 들끓으며 비등점을 향해 가기 때문이라는 것, 잠재성이 곧 현실적이라는 것 말이다.

 

어리석은 지배계급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사실 지배계급이 자본에 대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본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을 때조차, 이 무식한 지배계급은 상황판단이 전혀 서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할 뿐이고, 대책이 없고, 땅만 판다. 거기 겁에 질린 타조처럼 머리를 묻으려고? 대중들의 봉기에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채로, 한 쪽으로는 눈치를 살피고, 다른 쪽으로는 경찰들을 집결시킨다. 하던 짓이 그 짓이기 때문에 ‘몽둥이와 삽질’ 외에 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야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야비함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유령의 도래, 그 외적 조건

그래서 ‘자본주의의 종말’은 ‘유령의 도래’다. 엘마 알트파터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야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야만은 미래의 주축이 될 것인데, 이 야만이란 ‘분명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야만’이라는 것은 오래된 진실이다. 자본의 초기 축적은 온간 탈취와 토지에 대한 강제 귀속, 유랑민들에 대한 학살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초기조건은 항상 반복된다. 지금도 그렇다. 멕시코 싸빠띠스따 원주민 부대에서부터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선 곳, 이곳 용산에 이르기까지 종말을 유예하기 위한 강박적인 반복이 있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지옥도가 펼쳐져 왔다는 것을 한번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종말’이란 얼마나 당위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정글의 법칙이며, 따라서 짐승의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종말 너머의 유령은 어떤 조건 하에서 도래할 것인가? 알트파터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을 인용함으로써 유령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브로델이 말하는 바는 매우 명백하다. 순진한 낙관론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자체모순’에 의해 붕괴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뒤에 또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인(外因)’이 단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의식화인 것만은 아니다. 대안이라는 것이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가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서글프게도 이 방면에서 만큼은 레닌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대안들과 외부 원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알트파터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내부모순 외에 외적 요인들로 에너지 고갈과 그로 인한 환경파괴를 든다. 자본주의란 유럽합리주의와 함께 화석연료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그 본래의 철학적 의미를 폐절하고 효율과 이윤획득 가능성이라는 논리로 정제되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낳은 결과는 명백하다. 합리주의, 다시 말해 이성중심주의란 인간 내부의 모순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해야 하며 그를 통해 질서 잡힌 사유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타락한 합리주의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통해 모순을 피지배자의 자율적-내면적 훈육체계로, 생체적 메커니즘으로 바꾸어놓는다. 그것은 질서 속에 안주하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강요한다. 질서를 넘어서는 모든 혁명과 소요는 이제 단죄되어야 하는 ‘괴물’이 되었다. 이제 이성은 경제적 효율성에 봉사하고, ‘성장’이라는 최고 목표를 향해 가는 것만을 허용할 뿐이다. 마침내 차가운 이성이 탄생한다. 사실 이 차가운 이성이야말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화석연료란 이 괴물의 거의 유일한 먹잇감이다. 맹렬한 식욕 때문에 생태계와 환경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이는 결국 괴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건 비단 자본만이 아니다. 알트파터는, 만약 여기에 대안이 있다면 ‘재생가능에너지’가 되리라고 말한다. 즉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란 ‘재생가능한 에너지 체제’, 이 에너지 체제에 적합한 ‘사회형태’ 그리고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의 삼위일체가 갖춰질 때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화석에너지’, ‘합리주의’라는 타락한 삼위일체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유령의 도래, 그 내적 조건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들이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 내적 요인은 무엇인가? 알트파터는 이를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라고 정리한다. 사회적 가치가 더 이상 시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가 차가운 이성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이 ‘성장’이라는 목표에 정향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은 괴물의 먹잇감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식의 경제를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알트파터는 이 이념이 이미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긴 2008년에 이르러 월가가 나자빠지고,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이 낡은 이념이 임종을 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소위 ‘순수한 시장논리’라는 것은 개나 줘야할 처지가 되었다. 알트파터는 그러한 논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속 빈 논리를 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유포한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말하는 ‘학자들’ 속에는 분명 밀턴 프리드만을 비롯한 시카고학파 이데올로그들이 속해 있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시장, 또는 자본은 반드시 ‘자폐증적’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는 글로벌화된 자폐증이다. 사회적 가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 자본은 금융자본이 되면서 그 자폐적 특성이 극대화된다. 눈에 보이는 게 돈밖에 없는 노름꾼처럼 매 순간순간의 배팅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배팅의 순간순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노름꾼 자신의 욕망에서 기인한다. 도대체가 그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욕망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배팅의 액수를 높여야 하는데, 깔린 판돈이 이 욕망에 따라 가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제 합리적인 이성이 계산을 포기한 지점에 폭력과 탈취, 다시 말해 초기축적의 반복이 다시 생겨나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종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네그리라면 이를 ‘가치론의 붕괴’라고 말했을 것인데, 알트파터는 이를 친절하게 풀이해 준다. 즉 실물자본이 추동하는 잉여가치 창출이 금융자본의 수익률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지점, 실물자본의 불행한 회계사가 손익분기점 위로 치솟는 이자율을 공포에 질린 채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 지점에서 합리적 경제 정책은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에 국가폭력과 탈취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강대국, 특히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군사력은 정치나 지역 방위 체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경제논리(최대 이윤 달성)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시의 같잖은 종교적 신념이나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추잡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물어 볼 수 있다. 거기에 오바마는 다를 것인가? 사실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짐승의 논리인 신자유주의가 인간 오바마의 의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정이 이런데, 7%씩이나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사기를 쳐 대고 대통령이 된 자와 이 경제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애초에 그 사기라는 것이 현실이 되기엔 요원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 대통령은 아예 신자유주의 짐승과 하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을 말하자면, 인간은 동족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수 있는 입과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양심이 있고 짐승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와 유리된 자본, 윤리적 양심과 유리된 권력은 이래서 일란성 쌍둥이다.

 

지속가능한 혁명을 위해

타락한 삼위일체가 자본주의의 내외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위력은 이제 노동과 재생가능에너지 그리고 코뮤니즘적 경제체제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유령의 도래가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혁명이란 비둘기걸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성난 맹수처럼 덤벼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혁명, 그리고 폭력적 변화라는 테제는 대립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알트파터가 홀러웨이를 비판하면서 말하듯이 ‘권력’을 잡지 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권력에 집착하는 혁명도 끝내 파산할 뿐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권력을 위한 정치혁명이 한 쪽에 있다면, 그 다른 쪽에 화석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 재생가능에너지 사회체제의 도래가 있다. 오히려 후자가 더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는 초기의 산업자본주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석에너지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를 하루 이틀 만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심지어 민중혁명의 당사자들조차 그럴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 공멸의 욕망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지 않는다면, 그 뇌관이 터지는 날에 또 다른 지배계급이 똑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똑같은 에너지체제를 유지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규율이 내면화된 다중(multitude)들은 또 다시 죽음의 사이클을 반복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실패’의 원인을 단지 금융자본의 투기욕망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금융자본이 애초에 폐기해버렸던 그 가치, 즉 ‘사회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에는 ‘자연’이라는 매우 중요한 존재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명심하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존재조건이라는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 존재조건에 대한 침해이므로, 결국은 인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폭력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알트파터의 말대로, 먼저 경제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만 보지 말고, ‘원료과 에너지 변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 어떤 체제도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는 반드시 회귀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재촉한 이 복수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연대적 경제(코뮤니즘)와 함께 자연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혁명의 필수적인 조건인 동시에 그 혁명을 또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 된다. 영구혁명이란 정치에 있지 않고 생태에 있는 것이다. 정치 혁명의 성과는 나날이 이어지는 생태 혁명의 엔진이 없으면 채 한 세기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추론할 수 있다.

 

지성의 비관주의

1848년의 유령은 스스로에게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붙였고, 맨 마지막에 이렇게 외쳤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러니까 그때 유령을 부르는 주술사는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는 막 성장하는 계급이었으며, 실체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유령을 부르는 맑스의 언어와 더불어 그 언어가 지칭하는 공산주의와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알트파터는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성장하는 이들 프롤레타리아를 ‘목소리’로 지칭한다. 홀러웨이가 ‘절규’라는 다소 비관적인 톤으로 지칭한 것을 말이다. 확실한 것은 알트파터나 홀러웨이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더 이상 맑스가 그렸던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맑스의 ‘지금/여기’와 알트파터의 ‘지금/여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맑스의 계급과 마찬가지로 알트파터의 계급도 막 성장하고 있으며,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뭐라고 했던가? 가장 강력한 위력은 잠재적인 것이다. 레닌이 다시 산다면 이 잠재성의 동력을 뭐라고 했을까? 분명 러시아 혁명 때와는 달리 말했을 것이다.

 

알트파터의 지성은 매우 비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자본주의 내부에 살면서 지성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비관주의라면 그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타락한 정권 내부에 사는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 대중의 역량에 기생하면서도, 그 대중을 탄압하는 권력은 결국 제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유령을 부를 것이다.

 

야만의 자본주의에 비열한 권력, 2009년 봄 현재 한국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지옥도의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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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전세자금대출? 개뿔!

  • 등록일
    2008/10/31 15:51
  • 수정일
    2008/10/31 15:51

참 장가 가기 힘들다. 근 6개월 여 '원천징수영수증' 때문에 학원 원장과 실랑이에, 은행 왔다 갔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했다. 천신만고라는 말은 이럴 때 쓴다. 그 종이 쪼가리 한 장을 받아 들고 보니 참, 어이가 없더라. 이건 뭐, 그저 세무사 도장 하나 꽝, 찍힌 A4용지일 뿐이잖아. 이게 사람 하나를 지옥으로도 천국으로도 보낸다. 젠장.

 

그런데 이건 또 뭐냐.  은행 대출 담당 차장이란 자가 주택공사에 접속해서 알아 보더니, 스윽 웃는다. 왜 웃지? 라고 할 찰나, 옆구리에 시퍼런 칼이 들어 온다. "대출액이 안 나오네요." 신용등급이 9등급 이하인 것이다. 또 여기 저기 전화한다. 아뿔사, 학자금 대출 연체 몇 번 한 게 있구나. 더런 놈들. 그걸 꼬투리 잡은 거다. 

 

그런데 더 희안한 것은 내 신용 등급이 이 지경이 된 이유를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언제 회복되는 지도 지들이 알 수 없다는 거다. 이건 뭔 해괴한 짓인지. 어째서 신용등급 당사자가 등급 조정의 이유와 원인을 파악할 수 없다는 건가? 순간 휙 지나가는 생각, 이것들이 알아서 기라는 거군, 언제 신용등급 내려가서 피해볼 지 알 수 없으니,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국가기관과 통신사, 금융기관 눈치 보면서 연체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며 살아라, 이 말이지 않은가. 살 떨리는 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내 나이 아래로 학자금 대출 연체 한 번 안한 인간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또 얼마전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새파란 사회 초년생의 얼굴도 떠오른다. 대출 받을 생각에 매우 들떠 있었는데 ... . 은행 가서 신용등급 뜨면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리겠군, 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생각에 이것들이 결국 이런 식으로 진을 빼고서, 포기하게 만들거나, 대출 불가 판정을 내리거나, 그도 안되면, 대출한도를 턱도 없이 낮추는 식이겠다, 싶은 거다.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은행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대출계 차장 뒤로 근로자 전세 자금 대출 한도가 6천만원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보인다. 6000만원? 그거 누구 입에 들어 가는 돈인가? 뻔하지 않겠는가? 은행에 썩혀 놓았다가 있는 놈들 빚잔치에나 처들어 갈 것인저. 좆같은 자본주의 세상이다.  (너무 자주 하고, 자주 들어서 식상한 욕이지만 지금, 참, 적기다)

 

뱀발: 그나저나 더런 놈들한테 이자 줄 날을 꼬박꼬박 지켜야 하다니 ... 속이 벌써부터 울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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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외마디같이 차갑고 무감각한&quot; 시

  • 등록일
    2008/10/30 15:41
  • 수정일
    2008/10/30 15:41

그런 한 편의 시. 나도 그런 시를 원했고, 지금도 그렇다. 섬뜩하고, 너무나 냉엄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한 그런 시, 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승의 '할!' 소리와 도 같고, 노동현장의 쇳조각 저미는 소리와도 같고, 또 그러므로 세상의 가장 낮은 것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 시.

 

독서 이력을 훑어 보다 보면 그런 류, 생면부지지만 글을 보면 연애라고나 할만한 그런 감정이 솟구치는 비슷한 유전자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내 기억에 그 두근거림은 열 여섯이 되던 해 겨울에 보았던 로트레아몽이 처음이었고, 랭보와 블레이크가 다음이다. 지겹기만 했던 수업시간에 교과서을 가리고 보았던 프로이트도 그 중 하나였지 싶다. 대학을 와서는 두근거림을 넘어 본격적으로 연애모드로 들어 가서는 폐인이 되었는데, 여기 가장 기여를 한 시인은 단연 기형도다. 희안하게도 김수영보다는 기형도가 좋았고, 당시에 선배들이 즐겨 권하던 박노해와 김남주는 가슴 벅차게 열정을 충동질하기는 했지만 남는 서정이 부족했다(여기서부터 먹물이었던 거다. 나는).

 

언젠가 아는 선생님이 술자리에서 그러시더라. "자네는 실존적 인간형인가? 사회적 인간형인가?" 옆에 앉아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다른 선배는 선뜻 "실존적입니다"라고 답하고는 머쓱해 했지만 난 대답을 찾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건 아마 외로 남은 내 '혁명적 낭만주의' 쯤 되는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끝내 먹물이 먹물이길 거부하는 건 이런 자존심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게다. 참, 불행한 의식이다.

 

하여간 이번에 새로 시집을 낸 허연 시인도 내겐 가슴 두근거리는, 아니 폐인모드에 한 후원한 글쟁이에 속한다. 제목에 쓴 말은 이 시인이 최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첫번째 시집([불온한 검은 피])를 읽었을 때, 단박에 알아 챈 건 이 시인이 가지는 그런 실존적인 엄정함이었다.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스스로를 해부하는 그것. 후설(Husserl)이 현상을 기술하는 데 철학적 엄밀함이란 무기를 들었다면, 허연은 자신의 페시미즘과 허무주의를 낱낱이 해부하기 위해 문학적 엄밀함이라는 매스를 휘두른다. 그거 참, 맞는 말이다. '휘두른다'는 거. 어찌나 휘둘러 대는지 한 세상 전체가 호러무비 세트장이다.

 

그런 그가 두 번째 시집을 냈다. 한 8년 만인 것 같다. 생겨 먹은 뽄새는 아래와 같다.

 

 

풍기는 가오(?)가 ... 글과 마찬가지로 좋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말하는 뽄새도 나긋나긋하지 않다. 첫번째 시집을 '세상의 옆구리에 칼을 질러 넣는 기분'으로 썼고, 이번 시집은 '내 옆구리에 칼을 질러 넣는 기분'으로 썼다고 한다. 새로 나온 시집은 위와 같다. 여러 말 할 필요 있나. 저 무시무시한 얼골에 퍼진 언어들을 직접 대면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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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 랜드바이, 드뤼포

  • 등록일
    2008/10/28 20:26
  • 수정일
    2008/10/28 20:26

[400번의 구타](1959, 장 프랑수와 드뤼포)를 이동하는 중에 틈틈이 본다. 드뤼포라는 이름은 고다르라는 이름과 더불어 영화, 누벨바그라는 매우 현대적인 그 개념들에 항상 따라 다닌다(나만 그런가). 이 영화, 예전, 2000년엔가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접했는데 다시 본다. 그 첫 장면, 에펠탑을 중심에 놓고 파리를 빙- 도는 카메라 트래킹. 아득하다. 그녀가 말한다. "이거 오다기리 조 나오는 [도쿄타워] 첫 장면과 같아요" 그렇군, 오마쥬였구나.

 

 

그리고 장기하, 이거 참 물건이다. 사람한테 '물건'이라느니, 하면 안될 것 같지만, 척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건가. 싱글 앨범이 나왔는데, 노래들이 ... 정말 .... 화려하다. 한 번 들어 보시압.

 

 

 

그제는 랜드바이 공연을 보고 왔다. 공짜 티켓이 생겼기 때문이다. cd를 두 번이나 사서 두번 다 잃어버린, 그 랜드바이. 

 

 

 

이 일련의 취향의 동선들을 물끄러미 생각한다. 장기하도, 랜드바이도, 드뤼포도 내 취미고, 그건 일종의 ... 뭐랄까 ... minority와 old-fashion의 언저리 쯤에서 헤메는 취향,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랬다. 절대 major는 아니고, 그렇다고, avanguard도 아닌데, 꽤나 전복적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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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영혼의 적린-[비몽], 2008

  • 등록일
    2008/10/16 03:27
  • 수정일
    2008/10/16 03:27

 

더러운 영혼의 적린(赤燐)

- 김기덕, [非夢], 2008

 

어김없다. 김기덕은 말이다. 아마 열에 반 이상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온 마음이 쑤시는 영화를 또 만들었구나, 하고. 예전부터 그렇지만 김기덕의 영상은 절대 나붓대지 않는다. 오히려 정수리를 후벼 파거나, 살가죽을 벗기거나, 결국에는 내공을 완전 소진시킨 후 주화인마에 들게 한다. 한 마디로 온 몸에, 온 삶에, 그리고 온 시간에 맹독을 퍼트리고서야 만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다. 김기덕 영상 미학의 정언 명법들. 한 번 되새겨 보자.

 

# 1. 우선 사랑을 조롱하라

# 2. 그리고선 언어를 교란하고,

# 3.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하여 가벼운 경의를.

 

이러니 김기덕 영상을 보고 불편해 하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그러길 바란다고 해야 옳다. 삶이 온통 쓰레기장이고, 인간이 고깃덩이에 불과한데다가, 소통은 홍어좆만한 가치도 없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고통의 다른 말이고, 잘 해 봐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 살갗에 조각칼이나 후벼대는 짓인 게다. 세상에, 감독이 나서서 관객과 불화를 조성하는 짓도 김기덕이 독보적이다. 김기덕의 영화들을 잘 살펴보면, 위의 미학적 정언명법들을 실현하기 위해 관객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런 전략은 잘 들어 맞으며, 나아가 기괴하게도 많은 오타쿠들을 양산한다. 사실 영상이든 문자든 예술적 의미라는 거창한 것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매끈하거나, 감성적으로 나긋나긋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1920년대 ‘다다’ 이래 현대예술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건 영화다. 영화는 관객의 정서를 잡아 당기기도 하고, 놓기도 하면서, 적당한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의 거리감을 부여하고, 그를 통해 절정으로 몰아 가는 게 오히려 상식인데, 김기덕은 그런 영화계의 ‘앙시앙 레짐’ 정도는 혁명적으로(?) 파괴하고 시작한다. 관용이란 불필요하다, 는 거고, 정서라는 것이 어디 나긋나긋하기만 하냐는 게, 김기덕의 주장인 게다. 그건 일견 옳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가장 원초적인 것이, 친밀감이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그 욕망(사도-메저키즘)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몽]에서는 섬뜩한 장면이 그나마 적은 편이다. 하지만 영상이 던져주는 폭력의 밀도에 있어서는 그의 다른 영화에 못지않다. 다 보고 나면, 눈물이 주루룩 나는 데, 그건 결코 슬퍼서가 아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출구가 없다는 느낌 때문에 눈물이 난다. 한 마디로 빌어먹을 훌쩍, 인 것이다.

 

한 남자가 있는데 매일 밤 꿈을 꾸고, 한 여자가 있는데, 매일 밤 몽유 상태로 돌아다니면서 앞서의 그 남자가 꾼 꿈대로 움직인다. 급기야 뺑소니 사고를 내고, 그래서, 알고 보니 둘은 각각, 사랑했던 옛 애인을 꿈 속에서, 또 몽유 상태에서 찾아 돌아 다닌 것이었다. 사실 이건, 뭐, 말도 안 된다. 도입부를 지나 갈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거 좀, 웃기는데, 라고 말이다. 하지만 감독이 이름값을 하는 것은 관객이 방심하는 그 찰나에 카메라 앵글에 마술을 걸고, 편집 가위를 관능적으로 다룬다는 뜻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잠깐 동안,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비웃고 싶을 때, 한 몇 분간 관객을 롤러코스터 위에 올려놓는 명장면이 나온다. 배우 네 명이 연기하는 그 장면. 넷이자 둘이고, 하나이면서 넷인 그들. 이 장면을 뭐라고 이름붙여야 옳을까? 질투? 배신? 광기? 어떤 것이든 좋다. 이 장면 이후로 영화의 모든 스틸이 발화점을 향해 치닫는다. 심상찮고, 또 미친 것 같은 설정임에도 전혀 우습지 않게 된다.

 

란(이나영 분)이 정신병원으로 가고, 진(오다기리 조 분)이 투신하는 것도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면,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있을 법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작가다. 느닷없이 초현실적인 나비가 나타나서 피 흘리는 진의 손가락을 간질이는 것도 무람히 넘어가는 거다. 도대체 이런 식의 전개가 기상천외한 ‘눈물’을 선사하게 되는 영화적 장치는 뭘까? 사실 가장 궁금한 건 이런 방면이다. 나는 대단히 흥미로운 것 몇 가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첫째, 장면과 프레임의 강박이다.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다른 건 몰라도, 몇 가지 프레임을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하나, 그건 문자다. 둘, 그건 가옥(한옥)이다. 셋, 그건 불상(佛像)이다. 마지막으로 그건 색채다. 반복적인 프레임은 그 자체로 영상의 상징적 심도를 높인다. 그리고 이 영화가 유독 잠과 꿈에 관한 영화기 때문에 이런 프레임의 강박적 반복은 상당히 몽환적인 효과를 달성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다시 말해 이 영화 전체가 한바탕 꿈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문득 라캉의 유명한 말(“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이 떠 오른 건 상당히 그럴듯한 연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작가주의의 강박이다. 가만히 보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도대체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이 영화가 철저하게 작가의 목적의식에 종속된 네러티브와 카메라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김기덕식 캐스팅에 대한 내 감상에 따르면, 그는 남자 주인공에 대해 유난히 까다롭고 섬세한 반면, 다른 배우들, 특히 여배우의 경우에는 매우 무심하고, 때로 상당히 험악하는 점을 짚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그나마 진(오다기리 조)이 특색을 띄며 등장하고, 다른 배우들은 거의 작가주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불행한 피조물처럼 보인다. 또 한 가지. 배우들에게 무심한 건 그렇다 쳐도, 영화에서 언어장벽이 사라지고 없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다. 이건 일종의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영화에서는 한 쪽이 일본어든 또, 다른 쪽이 한국어든 별 상관도 없고, 그건 언어나, 소통 따위는 아무런 형식적 중요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 하더라도 영화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 부분에서 또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건 김기덕의 영화가 나레이션의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폭력’들이 어떻게 ‘로고스’와 합리적 ‘플롯’의 작동을 중심으로 발현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의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것, 그건 언어나 구조라기 보다는 정서의 촉발과 신체의 부딪힘, 자기 학대 등등이다. 그러니 ‘말’이란 게 중요하겠는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면 이번 영화도 김기덕 ‘풍’이라는 그 경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희안하게도 그런 ‘틀’ 자체가 관객에겐 신선하다. 처음엔 웃다가, 찡그리다가, 마지막엔 욕을 하며 우는 것, 그게 김기덕 영화고, 어쩌면 삶과 세상에 대해 감독이 내리는 정의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더러운 영혼들이고, 그 적린에 발화점을 부여하는 것이 곧 예술이라고? 김기덕의 ‘자연주의’ 안에서 삶과 세상은 온통 영화적 수사법을 역전시키기 여사고, 그래서 ‘환상’이 곧 ‘악몽’인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총천연색 삶 도처에 ‘제이슨’이 도끼를 들고 쫓아 다닌다고 상상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의 영화를 보고, 한 숨 돌린 후 생각해 보면 이렇다. 즉, 아, 그래서 김기덕이 '거장'이라기 보다는 '연구대상'일 수 있는 거야, 라며, 무릎을 치는 이유가 그런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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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철학] 2008년 여름호

  • 등록일
    2008/10/05 12:14
  • 수정일
    2008/10/05 12:14

 

[시대와 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실리는 논문들은 대개가 (이런 표현이 맞을 건데) 맛있다. 이번 호(통권 19-2호)에도 논문들이 튼실한 맛을 풍긴다.

 

특히 첫번째 논문인 김재희 선생의 글은 '표현적 유물론'이라는 매력적인 개념을 통해 베르그송의 시간론과 물질론을 해부하고 있다. 앞으로 이 개념을 도구 삼아 들뢰즈와 일련의 철학자들을 살펴볼 예정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로 눈에 띄는 건 김동기, 김갑수 선생이 쓴 논문이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서양철학의 수용을 문헌적 엄밀함을 가지고 분석했다.

 

이외에 이재유 선생의 '여성되기와 계급투쟁'도 사유의 확장에 일조한다.

 

다 정리해 놓고 보니, 발췌해 놓은 여기 저기서 [시대와 철학] 특유의 젊고 반골적인 냄새가 그득하다. 아카데미즘에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시대와 더불어 철학하기를 그치지 않는 젊은 학자들이 많다는 건 분명 희망일 것이다. 

 


 


김재희,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물질의 관계]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은 3차원에서 논의된다. (1) 인간 지성의 도식에 따라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적 경험 세계를 이루는 물체들의 집합 (2) 생명과 대립하는, 반복과 해체 경향을 지닌, 불가분한 흐름으로서의 물질 (3) 살아 있는 자연의 현실적 표면에 해당하는, 생명과 연속적인 물질.

첫 번째가 상식적 믿음의 차원이라면, 두 번째는 과학적 지식의 차원이고 세 번째는 형이상학적 직관의 차원이다. 베르그손은 과학적 물질 개념이 상식을 넘어서 실재의 본질에 도달하는 측면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형이상학ㅈ거 통찰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본다. 전체는 부분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이 물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듯이, 살아 있는 자연은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되(33)지 않는다. ... ‘비가역적인 방향을 가진 불가분한 흐름’ ...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물질은 ‘거의’ 지속하지 않는다. 지속하는 것은 의식, 생명체, 우주(자연)이다. 물질은 우주의 현실적 표면으로서 우주의 잠재적 이면인 생명과 연속적이기 때문에, 지속하는 우주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비-지속으로서의 공간과 일치할 수 없을 뿐이다. 지속한다는 것은 과거를 붙들어 현재 속으로 연장하는 기억의 수축력이 있다는 것인데, 물질은 이러한 수축력이 없다. 그래서 물질은 흩어짐이고 등질화하는 공간의 방향으로 퍼져가는 흐름인 것이다.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은 (1) 가역적인 운동과 기하학적 공간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성’을 물질에 부여하고 (2) 생명과 연속적이면서도 본성상 다른 물질의 고유한 경향성을 해명하면서 (3) 기계론적 환원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살아있는 자연의 창조적인 생성을 설명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이 갖는 한계 역시 분명하다. 베르그손은 물질을 ‘흐름’으로 정의하면서, 생성에 관한 물질의 자기 조직화 역량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 (34)(1) 베르그손은 행위의 필연성에 몰두하고 있는 지성은 “물질의 생성”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고 물질이 부동적인 외관만을 취하는 데 그친다고 지적한다. ... 이때 ‘생성’이란 물질이 원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인 흐름이고 불가분한 연속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어떤 형태를 (35)창조햔다는 것이 아니다. 물질은 자발적으로 형태를 창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수축력에 의해 어떤 형태로 창조될 뿐이다. ... 따라서 베르그손은 생명체의 창조만을 개체생성의 예로 간주한다. ... 그렇다면 물질의 ‘결정화(cristallisation)’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질의 원리가 ‘이완’에 있다면, 생명체가 아닌 결정체를 조직하는(또는 수축하는) 역량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 (36)생성된 형태를 생명체에만 국한시킨다면, 생명체라고 할 수 없는 이 ‘세계들’과 ‘성운들’의 생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질이 흐름이기 때문에 형태 창조의 역량을 생명의 수축으로부터 가져와야 한다면, 이 체계들의 생성 또한 생명의 힘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물활론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물질을 가로지르면서 생명체들을 절단해내는 생명”의 역량과 구분되는, “:세계를 형성하는 물질”의 역량은 무엇인가?

미시적인 차원에서 결정체의 형성, 거시적인 차원에서 성운의 응축과 계의 형성은, 분명 생명체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형태 창조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우주 안에서의 생성을 생명체의 차원에서만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생성 원리를 존재론적 차원 전체로 보편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은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베르그손은 기계적인 자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을 주장한다. 물질은 이 자(37)연의 표면적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의 살아있음은 ‘물질의 이면에 생명의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계론적 환원주의에 반대하는 복잡계 이론(complex systems theory)이나 창발주의(emergentism)는 유기적이든 무기적이든 모든 물질은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물질에 내재하는 자기 조직화 역량’으로부터 생명체의 창발적인 생성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복잡계 이론은 전체와 부분 사이의 관계를 비환원적으로 이해하며, 복잡한 체계들의 창발적인 자기 조직화 역량을 인정한다. 체계(system)란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서 창발적인 특성이 발생하는 통합된 전체를 의미한다. 생명체 역시 다층구조를 지닌 하나의 체계이다. ... 각 단계에서 전체는 그 부분들로 환원되지 않는 창발적 속성과 복잡성(complexity)의 증가를 얻는다. 이 복잡계 이론은 물리적 우주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힘이나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생명체의 비환원적인 독특성을 밝힐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베르그손이 우주에서 물질의 엔트로피 흐름에 저항하는 역-엔트로피 흐름을 생명의 수축력에서 찾았다면, 프리고진은 물질의 엔트로피 자체가 질서와 조직화로 변환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요컨대 베르그손은 수축력을 물질의 과정과는 반대로 작동하는 “비물질적인 것(immatériel)”으로 보기 때문에, 비유기적인 물질 자체의 조직화 역량으로 해석하는 데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프리고진의 물질계를 베르그손의 지속하는 우주 자체와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양자 모두 예측불가능한 열린 계로서 자기 조직화 역량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미시계의 결정체와 거시계의 성운 모두가 우주의 자기 조직화 역량에 따른 수축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개체 생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베르그손은 존재론적 개체화에서는 유기체의 수준에 대해서만 논의했을 뿐이고, 무기체는 인식론적 개체화의 차원에서만 논의하고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거시계의 태양계에서부터 일상세계의 사물들과 미시계의 미립자들에 (40)이르기까지 닫힌 체계로서의 물체들은 공간화하는 물질에 대한 인간지성의 인식작용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연발생적인 존재론적 생성물로 고찰되진 않았다. ... 다시 말해서 자기 조직화 역량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수축력은 어디까지나 물질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의 것이다. 베르그손에게 지속은 기억이고 생명이지 물질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야말로 베르그손 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물질 자체의 지속을 얘기하며 미시적인 차원으로 존재론적 층위를 다양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본다면,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으로 창(41)발적인 생성을 오늘날 시도되고 있는 표현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베르그손의 물질은 거대한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생성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생명의 잠재성이 현실화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물질 자체의 자기 조직화 역량에 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기 땜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의 지속하는 우주, 즉 살아 있는 자연의 형이상학은 현대 과학의 물질론을 흡수하여 정교화 한다면, 정신주의나 생기론 보다는 표현적 유물론에 훨씬 더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이재유, [여성되기와 계급투쟁]

 

계급투쟁은 소수자 되기로서의 여성되기와 궤를 같이 한다. 계급투쟁이 소수자 되기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는 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동일성, 보편성이라는 철가면을 벗지 못하고 음침한 고(65)통의 감옥 속에 평생 갇혀 지내야만 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은 끊임없이 자신을 소수자, 여성으로서 새롭게 생산해 내야만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역사적 운동 계급 주체가 될 수 있다. ... 왜냐하면 이 여성 되기는 노동해방의 물질적 토대인 노동자 계급의 자기 생산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 (66)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 되기는 진지 없이 치고 빠지는 단순한 게릴라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단순한 진지전도 아니다. 싸움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계급투쟁 진지를 구(67)축, 확보함으로써 진지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옮길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개별(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과 보편(등가형태의 자리)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기동전을 펼치는 게릴라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성 되기라는 게릴라전이말로 노동해방의 핵심 열쇠이다.

 

김범춘,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비판적 접근]

 

오늘날의 이러한 냉소주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증명하는 것인가? 냉소적인 이성은 이데올로기와 실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이 사회현실을 그 자체에 맞게 구조화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냉소주의는 우리 시대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보증할 수 없고, 따라서 오히려 냉소주의 자체가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 있다. ... 결국 냉소주의가 냉소주의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데올로기의 지평 내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냉소적인 부르주아적 주체가 화폐의 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화폐는 단지 사회적 관계를 표현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생활에서 화폐가 마술이라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듯이, 이런 냉소주의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82).

 

따라서 개인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망상들이 배치되는가가 이데올로기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한다(85).

 

떠도는 기표들을 어떤 주인기표로써 꿰매고 누비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가 창출된다. 우리가 현실적인 자유를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와 대립되는 것처럼 보거나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누빔 작용이 성공적이어야 하고, 누빔은 누빔 작용으로 의미를 고정시킨 자신의 흔적을 깨끗이 지울수록 성공적인 것으로 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속성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문제의 핵심은 어떤 누빔점이 부유하는 요소들을 총체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다(87).

 

지젝이 보기에 이데올로기적 열정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탈정치화된 객관적인 경제논리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형식이다. 탈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은 ‘탈정치화된 경제’라는 환상으로 자신의 공백을 감추는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지젝은 이런 상황에서야말로 정치적인 행위를 통해서 환상을 횡단하여 경제의 재정치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98).

 

이데올로기는 역사 자체가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절멸시킬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 이론 또는 이데올로기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과정의 총체화시킬 수 없는 복잡성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표상체계가 다른 표상체계를 억압적인 방법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결과로서 다른 표상체계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점이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이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이데올로기론이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고정점에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벗겨낼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누빔점을 무엇으로 삼을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정치적 실천의 문제이자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101).

 

심혜련, [이미지로 사유하기 또는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

 

이미지로 사유하기와 더불어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가 바로 이미지 리터러시의 출발점이다. 이를 통해 이미지 리터러시를 벗어나 종국에는 이미지에 대한 온전한 지각하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로 사유하기에서 채택하고 있는 ‘읽기’의 방식은 아직도 문자시대와 이미지 시대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이미지를 언어적, 또는 텍스트적 방식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이미지 고유의 논리를 가진 것으로 봐야 하며, 또 이미지의 논리 또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지 본질에 대한 규정, 그리고 이미지(136)를 수용하는 방식으로서의 지각하기와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레 대한 연구는 이미지 이론을 성립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이러한 출발점을 기본으로 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미지 리터러시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문성원, [반복의 시간과 용서의 시간]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에서는 종합과 결부된 능동성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이런 들뢰즈에서 늙음은 아마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서는 주체의 겪음보다는 전개체적인 생성과 그 생성의 역량을 이어받은 잠재성이 가득한 주체(애버레-주체)의 ‘되기’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 레비나스의 시간성은 주체성과 뗄 수 없는 것이지만, 그의 주체란 워낙 타자를 받아들임과 더불어 성립하는 수동적 주체이고 게다가 타자는 무한하므로, 그 시간성은 이미 주체가 재현할 수 없는 통시의 깊이를, 고갈될 수 없는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역설적인 사태가 생겨난다. ... (163)이렇듯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 유한함의 극복이란 ... 역시 주체 자체에서 오지 않고 타자로부터 온다. 이것은 물론 인과적 질서에 따르는 사태의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과적인 시간에서라면 우리가 비가역성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없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새로움은 존재 너머에서 오는 것이며, 타자의 용서로부터 오는 것이다. ... (164)이렇게 생각하면 레비나스가 용서를 다산성(fécondité)과 연결 짓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식은 나의 범위를 넘어선 타인이지만, 그래서 역시 타자로서 다가오지만, 그 비롯함이 나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래서 나의 연장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나의 자식이라는 타자를 통해 새로워지는 셈이다.

 

이병수, [문화적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본 안호상과 박종홍의 철학]

 

(189)이들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국가가 민족의 집단적 생존과 번영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그 실현을 주도하는 민족이익의 보편적 담지자, 나아가 진리의 담지자라고 생각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 안호상은 민족의 얼을 단군사상으로, 박종홍은 천명사상 혹은 성실의 사상으로 해석했다. 이들에 따르면 민족의 얼은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까지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으며, 불변하는 특성을 지닌다. 역사학자 홉스봄(E. Hobsbawm)은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dition)의 특징을 과거와의 연속성을 인위적으로 내세운다는 점, 그리고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관습(custom)과는 달리 불변성을 주장하는 점에서 찾는다. 민족의 얼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바로 홉스봄이 지적한 ‘만들어진 전통’에 해당한다. 민족의 얼은 국가 권력에 의해 선택적으로 구성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다. 민족의 얼에 대한 이들의 해석이 오로지 국가 권력의 정치적 필요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특히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전통문화를 강조하더라도 체제 유지에 적합한 요소만 인위적으로 선택되었고, ‘조국 근대화’나 ‘반공’과 연관되지 않으면 그 어떤 실질적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김동기, 김갑수, [동아시아의 서양 철학사상 및 윤리관 수용 양상 비교 -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목차에 따른 정리위주로 하고 발췌는 따옴표를 써서 처리함.

 

1. 들어가는 말

- 한국의 서구 문명과의 최초 접촉: 1631년 정두원의 책 수입. [천학초함]([직방외기], [천주실의], [영언려작]이 수록됨)

 

2. 일본에서의 서양철학의 수용양상과 그 특징

- 명치정부 수립 - 정한론(征韓論) - 구화주의(歐化主義): 1894년 경~민족주의와 파시즘: 1945

- 제1기: 1894-1910: 국가주의와 제국주의가 발흥한 시기 - 제2기: 1911-1930: 민주주의 사상의 유행과 좌절의 시기 - 제3기: 1931-1945: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준동한 시기

 

1) 제1기(1894-1910): 근대국가와 정체성 수립기

진화론과 독일관념론의 도입 - 민중봉기와 사회변혁 사상 - 계몽사상가들: 봉건이데올로기 비판 - 철학: 실학과 실증론적 경향 - 윤리학: 독립자존설(후쿠자와), 쾌락설(츠다), 공리주의(니시) - 정치: 자유주의와 입헌주의, 천부인권론 - 자유주의의 번벌관료와의 타협 - 유물론과 사회주의 - 교육칙어와 천황절대주의: 유교주의에 바탕한 입헌주의, 군국주의 - 청일전쟁과 위기의식, 국가주의의 강화 - 자본주의의 발달과 계급갈등 - 1877년 동경대학 설립(법, 리, 문, 의): 관학 아카데미즘 - 1898년 ‘사회주의 연구회’ 창설 - 러일전쟁 - ‘평민사’(코토쿠와 사카이): 사회주의 보급 - 1890년대 수입 단계에서 본격 저술 단계로 - [사회주의의 연구] 창간(사카이 토시히코, 1905, 3):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

 

2) 제2기(1911-1930): 일본 민주주의 형성기

다이쇼 데모크라시(요시노 사쿠조오)과 전간기의 자유주의(대정 리버럴리즘) - 맑시즘([빈곤이야기], 카와카미 하지메) - 러일전쟁 이후의 산업화 - 지식관료의 타협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변질: 천황중심의 법치주의적 민본주의 - 1910년 전후: 니체, 파울젠, 오이켄,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소개, 제임스 등의 프라크머티즘 소개 - 신칸트주의 인식론과 아카데미즘 - 한일합방: 벌족(군벌, 관료, 원로)과 부르주아 정당의 대립 - 제1차 호헌운동(‘벌족타파’, ‘헌정옹호 정당주의 발휘’) - [사회주의 연구](카와카미 하지메, 1919) 창간: 본격 사회주의, 맑시즘 연구 - 크로포트킨 연구, 번역(오오스키 사카에) - [노동](야마카와, 사카이, 1927. 7) 창간: ‘노동파’ -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강좌](1932, 5) 출간: ‘강좌파’ - 미키 키요시와 맑시즘의 철학화 - ‘유물론 연구회’와 토사카 준

 

3) 제3기(1931-1945): 파시즘과 전쟁의 시기

만주사변을 전후로 한 파시즘의 대두 - 맑시즘의 지하화 - 니시다 키타로와 경도학파: 칸트와 헤겔의 전통철학과의 접목, 맑시즘 수용 - 타나베 하지메의 절대 변증법 - 미키 기요시 ‘불안의 사상과 그 초극’ - 하타노 세이치의 종교철학 - 쿄토학파의 등장(니시다와 타나베의 제자들): 국가주의 변호와 대동아 전쟁의 변론

 

3. 중국에서 서양 윤리관의 수용과 근대성

- 제1기: 1898-1915: 무술변법과 신해혁명을 전후한 시기 - 제2기: 1916-1927: 정치적으로 북벌 전쟁, 문화적으로 신문화 운동 시기 - 제3기: 1928-1948: 국내 혁명전쟁 시기부터 신중국 성립 직전 시기

 

1) 제1기(1898-1915): 구망과 계몽기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 유신변법 주장 - 일본을 통한 서학 수입 - 여러 번역기관 특히 상무인서관(1897,상해) - 수많은 정기 간행물들 - 진화론, 민주 자유와 근대 인식론, 의지주의, 아나키즘과 맑시즘의 특히 성행 - 엄복, 양계초, 손문, 왕국유, 장태염 등의 활약 - 프랑스 유학생과 일본 유학생들에 의한 아나키즘 소개: 사회진화론의 제국주의화에 대한 반발 - 손문과 주집신에 의한 맑시즘 소개 - “(224)서양 윤리관의 중국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시기의 특징은 첫째, 구망, 즉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동기와 계몽 즉 무지한 인민에 대한 교육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두 번째는 대부분 비록 서양에 뿌리를 둔 사상이지만 일본을 통해, 때로는 일본에 (225)의해 한 번 걸러진 사상을 들여왔다는 것이다.”

 

2) 제2기(1916-19270: 신문화운동기

신해혁명(1911): 공화제 실험과 혁명의 실패 -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 이대조, 호적 논쟁(문제와 주 논쟁, 1919), 진독수, 장동손 논쟁(사회주의 논쟁, 1920), 진독수, 구성백 논쟁(무정부주의 논쟁, 1920-21), 장군매, 정문간 논쟁(과학과 민주 논쟁, 1923-4) - 진독수의 활약과 공자 비판([청년], 후에 [신청년]-편집위원으로 진독수, 전현동, 이대조, 심윤묵, 고일함, 호적 참여) - 1919년 듀이의 중국방문과 강연, 실용주의의 전파 - 1920년 럿셀 방중 - 러시아 10월혁명과 맑스주의 본격 수용 - 1919년 이대조, [나의 맑스주의관] 발표 - 모택동, [상강평론] 창간

 

3) 제3기(1928-1948): 맑스주의의 중국화 시기

사회성질 논쟁, 중국사회 역사 분기 논쟁, 현대화 논쟁, 유물변증법 논쟁, 본위문화논쟁 - 5.4 운동의 반성과 모택동 - 대표적 맑스주의 저작들: 애사기, [대중철학], 이달, [사회학 대강], 모택동, [모순론], [실천론] - 이대조와 민수주의(Narodnikism); 진독수와의 변별 - 모택동의 이대조 수용

 

“(225)중국의 경우 일본에 비해 여러 가지 사상을 자유롭게 실험하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는 하였지만, 서양 철학 사상은 물(235)론 전통사상에 대해서도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아카데미 철학’의 형성이 일본에 비해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이 동서양의 사상을 일본식으로 결합하고 재창조했다면, 중국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전통사상과 서양 철학 사상에 대한 결합을 시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맑스주의의 중국화이다.”

 

“(235)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또 다른 사회적 상황과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비해 중국 쪽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는데, 194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화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일본을 많이 닮아 있다.”

 

진은영, [탈민족시대의 국가,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고찰-민족국가(Nationalstaat)에 대한 니체의 견해를 중심으로]

 

(269)니체는 유대주의를 혐오했지만 반유대주의는 더욱 혐오했다. 그가 실제로 문제 삼았던 것은 유대/반유대라는 대립 속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의 이분법이다. 그는 이 관념적 이분법이 독일의 현실 정치와 문화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폭로하며 비판했다. 그는 민족주의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 유럽요새의 주인인 ‘훌륭한 유럽인’을 목격한다면 이들의 탈민족주의 역시 공격할 것이다. 민족주의와 (270)탈민족주의 모두에서 여전히 또는 새롭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자본의 논리와 그로 인한 삶의 마비이다.

 

세부목차

김재희(대진대),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물질의 관계

1. 서론 - 2. 본론: 1)물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전체로서의 물질 - 2)물질의 발생과 창조 - 3)엔트로피와 역-역트로피 - 4)생명체의 발생 - 5)살아있는 자연으로서의 우주 - 3. 결론

 

이재유, 여성되기와 계급투쟁

1. 오늘날 맑스주의에서 왜 ‘여성되기’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 - 2. 유적존재로서의 계급주체아 소수자 되기로서의 ‘여성 되기’ - 3. 계급투쟁으로서의 여성 되기 또는 여성 되기로서의 계급투쟁 -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되기-노동해방의 기본핵심 전술

 

김범춘,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1. 맑스주의의 구멍 메우기 - 2.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 - 3. 누빔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 4. 삭제의 정치경제학 - 5.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

 

심혜련, [이미지로 사유하기 또는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

1. 이미지에 대한 재평가 - 2. 이미지로 사유하기 : 1)변증법적 이미지와 이미지 문서 - 2)이미지의 텍스트화 - 3.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 : 1)이미지의 존재방식 - 2)이미지를 지각하기 - 3)이미지와 매체 - 4. 이미지의 힘

 

문성원, [반복의 시간과 용서의 시간]

I - II - III - IV

 

이병수, [문화적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본 안호상과 박종홍의 철학]

1. 안호상과 박종홍 철학의 문화 민족주의적 성격- 2. 안호상의 일민주의와 단군사상: 1)일민주의 - 2)고대사 연구와 단군사상 - 3. 박종홍의 동도서기적 민족주의와 천명사상 - 1)동도서기적 민족주의 - 2)천명사상 - 4. 비판적 고찰, ‘민족의 얼’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1) 민족의 얼에 대한 국가주의적 해석 - 2)보편성에 대한 편협한 이해 -

 

김동기, 김갑수, [동아시아의 서양 철학사상 및 윤리관 수용 양상 비교-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목차 발췌에]

진은영, [탈민족시대의 국가,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고찰]

1. 들어가는 말 - 2. 국가에 대한 계보학적 이해 - 3. 민족국가와 근대적 개인의 탄생 - 4. ‘만들어진 것’으로서의 민족 - 5. 민족주의와 원한 감정 - 6. 탈민족주의와 ‘위대한 정치’ - 7. 탈민족주의의 한계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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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과 연대-[자본주의의 종말] , 엘마 알트파터

  • 등록일
    2008/10/04 11:47
  • 수정일
    2008/10/04 11:47

 

마지막 장을 덮으면 읽기를 끝내기가상당히 아쉬운 책들이 있다. 문학류일 경우에는 저자의 쾌청한 문체의 여운이 자꾸만 오감을 간지럽히기 때문이고, 인문-사회 과학 서적의 경우는 문제의식과 대안이 함께 명쾌하기 때문에 그렇다.

 

알트파터의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잘 쓰여진 책이다. 문제의식은 '지속가능성과 연대'이고, 그 대안도 이 문제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안이 문제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편협하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를 맴도는 것은 심화된 문제의식과 그로부터 나오는 명쾌한 결론을 방증하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불가능성'과 그 데카당티즘적 구조에 대한 분석은 더욱 더 훌륭하다. 하나의 학술 서적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부분부분 빛나는 구절들이 보이고 ... 그런데 뭘까? 이 맹숭맹숭함은 ... 마치 well-made한 가족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심심하고 감동적인(?) 기분은?

 

이를테면, 알트파터가 비판하는 홀러웨이나, 네그리, 심지어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은 그에게 '국가' 또는 '권력'의 '유용함'마저 폐기하는 무모한 시도처럼 보이는 지도 모른다.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다는 말을 알트파터가 이 경우들에 적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모호한 말이 또한, 심심하게 만든다. 자신의 대안이 반자본주의는 맞지만 '혁명'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단다.

 

결국 이 책은 잘 쓰여진 책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뭐, 좀 심심하다. 고전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레닌식 질문이 이 책에 통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대안도 명쾌하다. 그래도 혁명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신뢰도 보인다. 그러나 '국가'와 '권력'에 대한 미련 같은 걸 버리진 않는다. 알트파터가 너무 온건한가? 그것도 아니다. 제멋에 사는 사이비 생태주의자인가? 그도 아니다. 하여간 난 아직 좀, 심심하고, 다들 읽어 보면 알게다.

 

애고, 뭔 서평이 이런지 ... 원. 잘 읽었지만, 큰 쇼크 없었다면, 항상 글이 이 모양이다.

 

*여기 누르면 [프레시안]에 쓴 redbrigade의 서평이 나온다.


 


『자본주의의 종말』,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동녘, 2007.

 

나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한 간략한 발언의 논지를 논증적으로 따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본주의 붕괴 이론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따라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 요소들과 사회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신빙성 있는 대안들을 지적으로 그리고 또한 아주 현실적으로 찾아 나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 대안들을 실현시키는 데도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서문에서 언급된 ‘집단적 연구’라는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 프로젝트는 실천적 경험과 이론적 성찰이 계속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14).

 

미래는 실제로 야만의 특성들을 대단히 많이 보여줄 것이며, 이 야만은 분명 자본주인 것이 될 것이다(25).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지역적인 생존의 틈바구니가 아니다. 연대의식은 사실 이웃과 소규모의 협동 조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적인 연관 관계, 즉 시공간적으로 미치는 범위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회 내부로부터의 대안적인 사회조직과 정치적 참여의 반대 운동들이 형성된다. 어쩌면 여기서 머리로 구상한 모델이 아니라 아래서부터 성장하는 새로운 세계주의가 생겨날지도 모른다(26).

 

신빙성 있는 대안들은 주어져 있는 셈이다. 현행 자본주의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은 파국으로 끝난다. ‘야만의 제국’은 아직 생겨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곧 생겨날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에다 거기에 적합한 사회 형태와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가 갖춰지면, 이것이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 된다. 새로운 사회 형태는 만들어질 수 있다. 역사는 종말에 와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열려 있으며 계속 나아간다(27).

 

‘역사의 종말’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36).

 

대안을 만드는 일은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 확실하며, 또한 글로벌 공간에서 ‘다중’의 다양한 함성(이 말에서는 홀러웨이가 쓴 ‘절규’라는 비유가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과 더불어 진행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홀러웨이의 말이 옳은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에서는 … 실제로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체제를 위한 토대들이 놓이지만, 이 토대들은 우리가 생산하는 기계와 물건들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자본주의적 형태와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서서히 생겨나는 협력 속에 있다 …”(44)

 

경제가 사회에서 이탈되었다는 점, 사회 이론적인 토대도 확립하지 않은, 수량화되고 형식화되고 생명력 없는 경제가 사회를 이론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이 실제의 자본주의 경제를 더 이상 하나의 사회적 체제로 파악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학은 그 개념적 빈곤함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던 이론가들에게조차 그 유용성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 따라서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를 도외시하고 그 대신 순수한 시장 논리가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면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가 생겨난다. 순수한 시장논리는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세상에서 가르치고 대중들에게 유포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실재하고 있고 아무런 대안 없이 글로벌 자본주의로서 존재하고 있지만, ‘현대’ 인간의 개념 세계에서 이미 폐기되어 버렸다(70).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1. 가치화]데이비드 하비는 가치화의 방법들을 마르크스의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설명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열거한다. 이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①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그리고 농민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임금 노동자로 만들기, ②공동소유지, 공적 재산, 공유지를 개인 독점 재산으로 바꾸기, ③노동력을 상품으로 바꾸고 자연을 전유하는 데 대안이 되는 (자급 자족 경제의) 형태들을 억압하기, ④식민지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약탈, ⑤교역을 화폐 위주로 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⑥노예 매매 ⑦고리대금업. ... (76)자본화란 (대부분 공적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재산을 사적인 상품으로 바꾸는 과정이며, 탈취하고 (사적으로) 전유하는 이중의 과정이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공적 재산이거나 공동재산이었던 (건강을 관리하거나 교육을 하는) 공유지 공간들을 사유화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제국주의는 외향적인 동시에 내향적이다. ... (78)아직 가치화되지 않은 것을 최초로 가치화하는 것을 탈취와 사적 전유의 첫 번째 형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상품으로 바꾸는 것’, 즉 기능적 공간들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2.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79)자본의 가치 증식은 가치화라는 ‘제1막’이 끝난 이후로는 노동력이 자본가들이 전유할 수 있는 초과 이윤을 창출할 대에만 지속적으로 가능하다. ... 마르크스가 말한 이른바 절대적 잉여 가치 형태의 초과 이윤을 창출하는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은 오히려 자본에 형식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 (80)그렇지만 첫 번째 형태와는 달리 이 절대적 잉여 노동의 전유는 이미 가치 증식 과정의 요인이며 가치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3.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81)생산자들에게서 탈취할 수 있는(이 때문에 그들이 물질적으로 더 나빠지지 않으면서도) 노동 효율이 더 높아지면, 또한 그것은 자연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자원의 남획과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과도한 유해물질이 침전되기 때문이다.

 

... (83)노동과 자연이 실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되는 것 ... 우선 근대 자본주의는 산업을 기반으로 하나의 체제로 발전하고, 자본의 축적에 영향을 미치는 이윤율에 의해 방향이 조종되며, 화석 에너지원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는다. 이 화석 에너지원은 다른 에너지들(생체 에너지, 목재, 수력, 바람)을 점차 밀어내고 자본주의에 세계사적으로 비길 데 없는 뛰어난 동력을 부여한다. 생산 과정 전반에 재편되고 노동력과 자연은 ‘실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된다.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 생산 조건은 자본주의적-합리적 조건으로 변환된다.

 

(86)생명체의 한계는 나노기술과 생명공학을 통해 ‘생명 과학적으로’ 극복된다. 따라서 글로벌화는 전 세계에 걸친 가치화를 목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의 이면에 감추어진 원리다. 경제는 자연과 사회의 시공간적인 조절로부터 유리되며 또한 그와 더불어 정치적 원칙과 그 원칙이 명시하는 구속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경제적 합리성이 일단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 문화적 그리고 영토적 굴레에서 유리되고 나면, 반자연적, 반사회적이고 따라서 철저하게 자폐증적인 체제라는 것이 이해된다. 결국 이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의 대변자들이 신자유주의를 어떤 식으로 소개하든 신자유주의의 결정적으로 중요(87)한 특성이기도 하다.

 

[4.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98)이 시대의 제국주의에서는 노동력의 ‘통상적인’ 착취는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투자가들의 수익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포드식의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이하는 포지티브섬 게임은 금융계의 높은 수익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수익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취라는 새로운 형태 내지 방법을 통한 전유가 추가된다. 이것은 금융위기의 결과 터무니없는 높은 채무를 떠안는 형태가 된다. ... (100)강대국들의 정치에서는 과거 지정학의 입장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다시 나타난다. 경제의 논리(최대의 이윤 달성)는 영토의 논리(권력과 전유)에 의해 보완된다. 미국이 세계의 핵심 지역에 군사 거점들을 두고 영토상으로 주둔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지리전략적인 편성이다. 그러므로 탈취와 전유는 군사적 수단을 이용해서도 강탈과 불평등한 교환으로 행해진다. 자원, 특히 석유는 자본주의적 가치 증식 공간에 상품으로 나와 있기는 하다. 1배럴의 석유는 걸프 만에서 로테르담의 기착지로 가는 도중에 소유주를 몇 번이나 갈아 치운다. 석유는 현물 시장과 선물 시장에서 거래된다. 따라서 가격 동향은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의 투기의 대상이자 그 결과다. 이 때문에 자원시장과 금융시장의 상호 의존도는 매우 높다.

(101)하지만 이것은 일차적으로 석유라는 자원의 ‘교환 가치 측면’에 관한 것이다. 석유의 사용 가치 측면, 즉 원료의 형태는 자연이며, 오랜 기간(수백만 년)에 걸쳐 생겨났으며, 오늘날 특혜를 받은 영토 공간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자원은 자본주의적 교환 가치 논리와 가치 증식 논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영토적인 논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곧 개별 국가 주권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네 번째 형태의 전유와 탈취에서 경제적 기능의 메커니즘들뿐 아니라 정치력과 군사력이 중요성을 얻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정치, 경제, 문화, 지경학과 지정학의 이러한 앙상블이 ‘새로운 제국주의’를 형성한다.

 

(107)자본주의, 화석 에너지원, 산업의 목적과 수단 관계에서의 합리성이라는 삼위일치는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모든 경제,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또한 그렇게 해서 ‘국가의 부’를 크게 증대시킨다. 그러나 가속화의 결과로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발전 노선들이 선택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과 정책적으로 적절한 대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원인을 밝혀 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원칙상 새로운 자본주의의 동학이 불러온 또 다른 결과, 즉 세계의 불평등이 엄청나게 심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09)글로벌화의 논리는,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탈규제와 자유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로 생겨난 역사적 글로벌화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산업혁명가과 더불어 세계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수단들이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산업 자본주의의 생산 과정은 세계 모든 지역에 뿌리 내리고, 지역적인 저항에도 굴하지 않는다. 결국 경제 상황의 ‘무언의 강제’가 승리한다. 이 강제는 종종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형태를 띤 정치적 실력행사와 결합해서 이루어진다.

 

(111)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의 결합이 없었다면 가속화를 통한 생산성의 증가는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생산성과 부의 증대를 이루는 토대라고 확인했던 분업의 가속화는 새로운 기계류와 동력 전달 장치, 에너지 변환 시스템(특히 증기 기관)이 없었다면, 따라서 화석 에너지원이 없었다면 거의 진척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산업 혁명은 화석 혁명이기도 하다.

 

(119)에너지 방화벽은 베를린 장벽처럼 영구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적합한 화석 에너지 체제는 태양 에너지 사회에 맞서 지속될 수 없다. ... 화석 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에는 재생 가능 에너지 체계만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가 재생 가능 에너지 체계에 적응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보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혁명이다. 이 혁명은 또한 18세기 말의 산업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자본주의는 현실사회주의처럼 ‘벨벳’ 혁명을 통해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지배계층들은 자신의 지배권을 움켜쥐고 있으며, 이 지배권은 본질적으로 석유, 천연가스, 핵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 엘리트층의 기획은 에너지 방화벽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의 종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민중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120)끔찍한 혼돈, 지배 계층이 세계를 ‘글로벌 무정부 상태’로 빠뜨리는 것임이 밝혀질 것이다(120).

 

(129)자본주의, 화석 에너지, 합리주의의 일체화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 재생 가능에너지라는 대안적인 발전도상으로 접어들면 되면, 사회적 변화가 (130)얼마나 철저하게 일어날 것인지를 예감하게 해 준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을 채굴하고 수송하고 사용하기 위해 이전에 만들어진 오일 시대의 인프라 구조, 즉 ‘공간적 고정화’(spatial fix)는 이런 자원들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산업-화석 에너지 체제의 생활 양색이 생겨났지만, 이것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에너지 체제, 유럽 합리주의, 자본주의라는 세 분야의 일체화에 균열이 일어난다.

 

(144)성장이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성장이 질적인 축적을 나타내는 하나의 양적인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사회적인 연관 관계들과 정치적 구상들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키는 만능열쇠라는 것이 입증된다. 모든 문제들은 너무나 낮은 성장률에 그 원인이 있다는 식이다. 따라서 해결책도 간단하고 (145)명확하고 확실하다. 더 높은 성장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 노동 생산성과 요소 생산성의 증가율 역시 모두 20세기 후반에는 마이너스였지만, 그럼에도 국민총생산 성장률보다는 높았다. 따라서 축적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노동력은 해고되는 것이다. 성장은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인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금융상의 한계, 높은 성장률에서 오는 생태적 결과, 그리고 특히 이미 달성된 높은 수준의 GNP에서의 절대적 증가의 조절에 대한 경제적 장벽도 성장과 함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49)이러한 ‘시장 실패’는 고전파 이론과 신고전파 이론애서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 중의 하나다. ... 경제가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을 벗어난 체제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이론은 경제적 변환, 즉 에너지와 원료의 소비가 자연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 외부효과들이 내부화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 (150)경제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 뿐만 아니라 원료와 에너지의 변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근본적이고 중대한 오류다. 하나의 오류는 자연과 사회에 동시에 해를 끼치는 생산의 문제가 시장 경제의 수단들과 능률을 높이도록 자극하는 것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은, ‘외부효과들’은 이미 외부화되었기 때문에 경제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효과들은 ‘일반 생산 조건’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160)‘금융주도’의 축적 체제는 금융 시장 활동가들의 지금까지 ‘억압 되어 있던’ 수익률 기대치를 너무 높게 끌어올릴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되면 실질 자본의 이윤율이 금융의 요구를 지속저으로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하게 된다. ... 하지만 실질적 이행 능력을 과중하게 요구하는 높은 실질 이자를 불러온 사태는 오늘날 경기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동시에 전 세계적인 문제다.

 

(164)금융 거래 관계와 동떨어진 세계에서도 실물 경제의 성장은 무조건적으로 숭상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실물경제의 성장 없이는 금융 분야의 수익률 요구는 실질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따라서 금융 자본의 가치 잠식이 불가피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좋은 거버넌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무원이나 교부금 수입자에게가 아니라, 공공 투자 발주의 혜택을 받는 대부분 초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공공 투자 발주의 혜택을 받는 대부분 초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국적 기업들은 또한 한편으로는 공공 수주의 폭넓은 자유화에, 다른 한편으로 ‘좋은 거버넌스’를 통한 수주의 합리화와 신뢰성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173)금융문제와 관련된 어떤 격언에 의하면 한 나라는 외국 자본을 그 나라가 슬기롭게, 즉 투자를 할 수 있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만큼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만약 그 나라가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채무를 상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용능력을 감시하는 신용 평가 기관들은 처음에는 신주하게 그러나 나중에는 위협적으로 경보를 발동할 것이다.

언젠가 자본이 마치 도피하듯이 그리고 대규모로 그 나라에서 다시 빠져나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투자된 자본이 멀리 떨어진 해외에 거주하는 ‘투자자들’에게 - 다른 ‘현지들’과 글로벌하게 비교해 볼 때 - 충분한 수익률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수익률은 영원히 불가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금융 수익률 조건은 너무나 높아서 실질 자본으로 투자해서는 그 수익률을 전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높은 이자를 대가로 도입한 자본은 투자의 형태로 생산 시설에 흡수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경쟁력을 뒤처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본 도입과 함께 통화가 평가 절상되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적어도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려다가 국가재정과 경상수지에 적자가 발생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 (174)따라서 실질 수익률보다 금융투자의 수익률이 훨씬 높을 때는 무엇보다 금융 분야가 번성하고 글로벌 금융 시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며, 이와 동시에 실물 경제가 과도하게 넘쳐 나는 금융 분야에 의해 압박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76)오로지 높은 실질이자와 불가피한 금융위기의 고난이 지나고 나면 투자 의욕이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고용과 소득도 늘어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희망만이 안정화 정책의 입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을 뒷받침하는 단 하나의 사례도 찾아볼 수 없다. ... 노동가치는 금융시장의 활동가들이 전유하며, 이 가치의 창출에 대해 이들은 전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그것에 관여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이자를 수단으로 하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전혀 관심이 없다. 수익률 요구(금융상의 청구권)라는 형태로 전유하는 것이 이 청구권이 충족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인 초과 이윤의 창출보다 더 중요해진다. 전유방식과 생산방식은 모순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모순은 채무자가 자신의 의무를 더 이상 이행할 수 없을 때 갑자기 드러난다. ... (177)금융자산의 실질 이자나 수익률이 높아지면 - 특히 다른 투자와 비교해서, 여전히 위험요인들을 고려하더라도 - 그에 대한 투자는 특별히 매력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금융시장을 자유화하고, 혁신적인 금융상품과 새로운 경영전략들을 개발하거나, 탈규제로 얻어진 활동의 여지를 크고 작은 거래에, 불법적이거나 탈법적인 혹은 심지어 범죄적인 거래에 이용하려는 아주 결정적인 동인이 생겨난 것이 확실하다. 금융 투자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자금은 실로 엄청나다.

 

(201)그러므로 테러리즘은 결코 근본주의에 눈먼 자살 테러범들이 외부에서 가하는 충격이 아니다. 테러리즘은 서방 세력들이 방대한 산유 지역에서 독재 정권을 비호하고 국민들을 억압함으로써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수십 년에 걸친 시도에 대한 대응이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국가적으로 자행되는 테러에 대한 응징이기도 하다. 이 테러와의 전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끝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상대가 어떤 조건에서 패배할지 전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205)석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년 채굴되는 양이 새로 발견되는 매장량보다 더 많아지는 시점이 중요하다.

 

정치력과 군사력 뿐만 아니라 경제적 잠재력도 보유하고 있는 석유 소비국들은 자국의 에너지 안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에너지 안정 정책은 결코 가난하고 약소한 나라들의 일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들하게 배분될 수 없는 자원을 장악하는 강대국들의 석유 제국(233)주의다.

 

(235)미국은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외부세력’이 되어 유럽 연합, 러시아, 중국, 인도에 맞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는 군사 거점들이 이용되는데 이 거점들은 전 지역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고 특히 2001년 9월 11일 사태 이후에 구축되었다.

정권교체 전략도 이 목적을 위해 추구되는데, 이라크에서는 잔혹하게, 그러나 키르기스, 그루지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본성을 숨기고 유화적으로 수행된다.

 

(251)그러므로 사회혁명은 사정에 밝은 당 지도부나 운동 엘리트층의 지시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석에서 뿐 아니라 (252) 자신의 희망과 이상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정치적 목표 설정에 있어서도(마르크스에 의해) ‘일반적 지성’으로, 즉 사회 운동과 정치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라고 불렸던 수준에 도달해야만 한다. 집단 행동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논쟁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회 혁명은 쿠데타가 아니라 많은 사회적 실험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되는 과정이다. ... 여기서 혁명의 구 얼굴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전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체의 변화이다. 이 두 가지는 각 특수한 사정에 따라 병행해서, 시간적으로 연이어서, 동시적으로 여러 나라들에서 (영국과 프랑스에서처럼) 진척될 수 있다. 진(253)척되는 속도는 서로 다르지만.

 

(254)우리는 존 홀러웨이가 멕시코 반정부 농민 저항 운동 사파티스타를 설명하면서 넌지시 제안했듯이 “권력을 넘겨 받지 않고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멋진 일이겠지만,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55)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경제를 연대적으로 만들고, 자연을 지속 가능하도록 다루어야 한다. ... (256)글로벌 시대에는 사회 운동의 많은 활동들이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상수도의 민영화는 철회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물은 식품이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의 공적 공간들을 점령하고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공장들은 폐쇄를 저지하고 점거한 직원들에 의해 채워진다. 이것들은 몇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투쟁들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한 것이기는 하다.

 

(267)연대의식은 공동체에서부터 생겨나며, 이 공동체는 공동의 가치 체계와 공동의 경험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연대의식은 공동의 집단적 기억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논쟁에서 공동의 선-이해를 매개하며, 이러한 선-이해는 예를 들어 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 습득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등가성 관계와 상호성 관계는 배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것들은 시장과 더불어 사회(268)에서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귀소된 채’ 남아 있다.

 

(269)여기서 일자리가 비정규화되고 불안정화되는 것은 ‘불안의 글로벌화’를 점차적으로 등급화해서 보여주는 형식으로 풀이될 수 있다. 처음에는 노동조합 측으로부터, 그러나 또한 자발적인 사회 운동 단체들과 정당들로부터도 이러한 현상에 항의하는 아주 요란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항의, 데모, 기업점거로 나타났다.

 

(273)비정규직 분야는 글로벌화의 일종의 충격 흡수장치며, 이 기능은 위로부터의 지배라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편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 비정규화는 글로벌화의 결과에 당황한 사람들의 대응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들은 확실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라는 전략을 따른다. 이들은 ‘저절로 얻어지는 수법’, 외부에서부터 주어진 여건에 적응하는 수법, (274)다시 말해 자주성이 결여된 정신 상태를 만들어 낸다. 이 정신 상태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의 의미에서, 통치하는 것을 쉽게 한다. ...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무리 보잘것 없는 시장 기회라도 붙들어서 자신의 생활과 생존을 안정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초국적 대기업 경영자들과 정치 지배자들이 호화롭게 지내는 것과 동일한 행동 논리를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행동 패턴의 일체화는 사회적으로 분열된 집단을 통합하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인이다.

 

(276)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안은 여러 이유에서 단점이라기 보다는 장점이 된다. 불안은 해방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끊임없이 경쟁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연대 의식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불안은 신자유주의의 견해에 의하면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 (279)불안한 여건에서는 연대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 패턴이 길러질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많은 사람들은 독재적인 정부에 의한 안전을 기대한다.

 

(279)하트와 네그리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유랑 생활을 가령 생존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 아니라 거부의 표현이며, 기존의 생활을 벗어나 새롭고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추구하는 것의 표현이라고 여긴다. 홀로웨이 (280)역시 이주를 자본을 멀리 하려는 희망에 가득 찬 ‘도피의 한 형태’로 ‘자율성을 얻으려는 투쟁’으로, “이런 저런 형태로 일자리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거부의 목소리”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개별적인 경우에만 그렇다. 일반적으로 이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도피는 자본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인신 매매꾼들과 사악한 착취자들의 품 속으로 데려 간다. 이주는 ‘이탈’(exit)의 한 형태이며, 오히려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왜 이주자들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 홀로웨이가 자신의 실존주의적 역사해석에서 계속해서 표현하는 인간의 ‘절규’(Schrei)는 ‘목소리’(voice)가 아니라 깊은 좌절감의 불명료한 표현이다.

 

(310)유토피아는 막연히 열악한 현실을 황금시대와 대비해서는 안 되며,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운동 법칙’을 이끌어 내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316)화석 에너지 체제를 전제로 하는 많은 유토피아들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심하게 말하면 관념적이기 때문에 여러 가능한 세계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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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도한 신자유주의, 나자빠진 월가

  • 등록일
    2008/10/01 11:07
  • 수정일
    2008/10/01 11:07

맑스가 화폐를 물신주의의 극치로 묘사하고, 막스 베버가 또한 금융자본을 천민 자본주의와 연관시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이른바 '돈 놓고 돈 먹는다'는 꼼수가 대명천지에 오래 갈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그런 세상이라면, 인류의 경제생활은 시작부터 온통 사기꾼들만 넘쳐 나고, 결국에 석기시대로 돌아 갔을 것이다.

 

미국 상하원이 7000억불 지원을 부결시킨 것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자본주의의 정도를 걸어간 것이다. 부실 기업은 경쟁에서 밀려 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의 성스런(?) 축복이 아니겠는가. 레임덕에 걸린 부시도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앞으로 부시가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 들여야 할 자금줄이 서너개 없어지니 그게 좀 속 쓰릴 것이다. 하기야 레이건 시절부터 시작된 미국식 자본주의,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금융자본+군사력'이라는 패러다임이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투표가 진행되는 와중에 월가 앞에 뿌려진 'Bail out People, Not Banks'(은행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제하라)라고 쓰인 전단지가 의미하는 바도 한 번 되새겨 볼 만 하다. '멍청한 미국인'이라고 했던가?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다. 사람들은 구제안이 그들 세금으로 월가 졸부들 명줄을 늘이는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안 것이다.

 

이런 와중에 명박이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우리는 안전하다'고 했단다. 언제는 '우리도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라고 해 놓고선 말이다. 꼴 같잖은 박사 학위에 상기된 건지도 모르겠다. 강만수가 계속 환율을 이렇게 유지하고, 부유층들에게 온갖 특혜를 준다면, 분명히 소비는 더 위축될 것이고, 개인파산이 잇따를 것이다. 벌써 중소기업 파산율이 위험 수준이지 않은가? 만수와 명박이가 정신 차릴 것이라고 쉽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제대로 한 방 먹여야 하는데, 아직 때가 아닌 것일까? 촛불은 이제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뱀발: 상트 페테르부르크, 레닌그라드, 도스토예스키의 제부시킨과 라스콜리니코프 ... 등등이 떠 오르는데, 거기다 이명박 ...... 이러니까 영 재수 없다. 젠장 할 일 없는 대학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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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 'The Great Fuck You'

  • 등록일
    2008/09/30 20:26
  • 수정일
    2008/09/30 20:26

 

'너바나'의 음반을 다시 듣는다. [Nevermind], 지금 8번째 곡, "Drain You"가 흐른다.  ... 그 다음 "Lounge Act" ... "Stay Away" ... 정말이지 가사가 영, 메롱이다. 이건 뭐 앞 뒤도 잘 안 맞고 ... 야한데다가 ... 그런데도 좋다.

 

그러고보니 내 최근의 음악 취향도 '한 바퀴' 돈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가 듣던 '루시드 폴'의 새 음반이 끌려서 종종 들은 게 귀를 재작동 시킨 시작이었던 같다. 그리고서, '언니네 이발관'을 듣고 글렌굴드의 바하를 다시 듣고, 라흐마니노프를 거친 다음, 쇼팽 그리고 슈베르트 현악 4중주, 이제 ... 너바나다. 중학교부터의 음반 취향 경로와 희안하게 일치한다. 한 바퀴 도는 거다. 희안하게도.

 

너바나, 특히 이 앨범은 1994년인가에 처음 접한 것으로 기억 난다.  이 음반은 내게 스승과 같다. 큰 변화.  이 음반과의 만남이 음악에 대한 내 이상한 '고급취향'을 완전히 산화시켜 버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롹이 '우울'과 '시대'를 노래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커트의 사진은 보들레르의 모습과 겹쳐 보였으며, 지금도 이런 나만의 연상 작용은 여전하다. 요란을 떠느라 책도 사봤는데,  지금도 스테디셀러인 [얼트문화와 록 음악]이 그 책이다. 음악만 들으면 되는 건데 이렇게 책까지 산 건 분명 먹물근성을 가진 내 오버액션이었을 게다. 뭐든 책 사가지고 읽어야 직성이 풀리니... (어릴 때는 야구 하기 전에 야구 책 사서 읽었다)  

 

미쳐 가지고는, 당시에 테잎으로 첫 음반인 [Bleach]부터 주욱 다 샀었다(지금은 그 테잎들이 모두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서 ... (마지막 곡, "Something in the Way"가 끝났다 ... ) ... 롹 음반들을 일일이 기억도 못할 정도로 사다 들었다. 그러다 군대 갔고 ...

 

꽤나 시니컬한 한 평론가가 이 음반을 듣더니 그랬단다. "이건 거대한 씨발(The Great Fuck You)이야!" 이 맥락에서 '퍽 유'는 상당히 웃기게 들린다. 게다가 적절하기까지 하다. 1994년 권총자살 하기까지 27년 간, 커트는 그렇게 세상에 엿먹이면서 음악을 한 것 같다. 그러게 인디레이블에 남아 있지 뭐하러 메인스트림으로 올라 왔을까? 하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가 그를 알 수도 없었을 테고.

 

얼마전에 커트의 자살 직전 하루를 그린 영화, [Last Days]도 재미있게 봤었다. 구스 반 산트가 만들었다기에 더 끌렸던 것 같고 ... 지금은 조이 디비전의 이언 커티스를 그린 영화, [컨트롤]을 다운 받아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이 본다. 이언 커티스 모습이 자꾸만 커트와 겹치는 건, 병이지 싶다. 여튼 거대한 씨발, 이다! Kirtholic! Halleluj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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